독보건곤 2부(상) - 용대운 저
<작가의 말>
2부를 시작하며...
<독보건곤1부>를 발간한 지 거의 4-5개월 만에 2부를 내게
되었다. 너무 오래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하다는 말씀을 먼저
전한다.
그 동안 본 저자의 신상에 여러 가지 복잡한 일들이 발생하여
글을 쓰는데만 전념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독자분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과 재촉에 힘입어 늦게나마 글을 완성하게 되어
다행스럽고 감사한 마음이다.
사실, <태극문>에서 <강호무뢰한>을 지나 이번 <독보건곤>에
이르기까지의 일련의 작품들은 실험적인 성향이 강한 것들로, 내
자신의 앞으로의 작품활동에 대한 일종의 시험무대인 셈이다.
안목이 있는 독자분들이라면 이미 알아차렸겠지만, 위의 세
작품들은 나름대로 판이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본 저자는
앞으로도 서너 편의 다른 스타일 작품들을 쓸 생각이다.
그중에는 독자들의 취향에 맞는 것도 있겠고, 혹은 별다른
반응이 없는 것도 있을 수 있겠으나 내 자신의 앞으로의
작품세계에 어떤 지침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독보건곤>은 특히 복수(復讐)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주인공의 성격을 복수극에 어울리는 냉혹, 비정한 것으로 했다.
너무 냉혹무정한 인물상을 부각시키려다 보니 잔인한 장면도
적지 않아서 그에 따른 독자들의 비평도 있었는데, 2부에서는
복수와 병행하여 애정행로와 무인(武人) 본연의 무도(武道)의
길(路)이 펼쳐질 것이므로 끔찍할 정도로 잔인한 장면은 조금
줄어들 것 같다.
하지만 주인공인 노독행(路獨行)이 펼치는 '무쌍류' 자체가
처절한 살기의 무예이기 때문에 그 묘사에 있어서 어느 정도의
잔인함은 아주 배제할 수가 없다.
가문의 피맺힌 원한을 갚기 위해서 단신으로 천상회의
본거지에 뛰어든 냉혈무정의 사나이, 노독행!
그의 앞에 돌연히 나타난 아버지와의 팔년만의 해후(邂逅)는
어떻게 될 것인가?
천상회를 조종하는 마효 조향령의 진정한 정체는?
과거 혈겁(血劫)의 배후에 도사린 음모의 조종자는 과연
누구인가?
그리고 노독행과 모용추수의 가슴치는 사랑은 어떤 결말을
맞이할 것인가?
혼자 걷는(獨行) 복수의 길(路)!
1부에서보다 더욱 흥미진진하게 펼쳐질 한 사나이의 외로운
일대 복수극을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 주시기 바란다.
만추지절(晩秋之節) 용대운(龍大雲) 배상(拜上)
제 31 장 핏 빛 은 피 로 갚 는 다
1
잠이 오지 않았다.
몸이 솜처럼 피곤하고 졸려서 금시라도 곯아 떨어질 것 같은데
눈을 감고 있어도 좀처럼 잠을 들 수가 없었다.
모용추수는 몇 번이나 침상위에서 뒤척거리다가 마침내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렸다.
왜 그런지는 그녀 자신도 알지 못했다.
다만 가슴이 울렁거리고 불안해서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눈을 감기만 하면 피투성이로 변한 노독행의 모습이 떠오를
것만 같아 몸이 덜덜 떨려왔다.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다고 상상만 해도 견딜 수가 없었다.
이제는 그가 그녀의 모든 것이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그렇게 되어 버렸다. 그가 없는 자신은
생각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녀는 답답하고 무거운 마음에 창문이라도 열려고 침상에서
일어났다.
그때 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입이 벌어지며 자신도 모르게 기쁨에 찬 음성이
흘러나왔다.
"독행...? 당신이에요?"
아무런 대꾸도 들려 오지 않았다.
그녀는 귀를 기울였으나 바람소리만이 가끔씩 들릴 뿐 주위는
아주 조용했다.
그녀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하며 손끝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창문을 열 생각도 못하고 다시 침상위로 올라갔다.
그녀는 이불을 돌돌 만 채로 부들부들 떨었다.
밖에 누군가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결코 노독행이 아니었다.
그녀는 참으려고 했지만 그녀의 몸은 생각과는 반대로 더욱
떨리기만 했다.
'독행....빨리 와요....'
스윽....
발자국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이제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누군가가 문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이불의 한쪽 자락을 입으로 깨물었다. 그러지 않고서는
금시라도 찢어질 듯한 비명을 내지를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문을 바라보았다.
'독행....빨리...나는 더 기다릴 수 없어요...'
문밖으로 누군가의 그림자가 달빛에 희미하게 비쳤다.
그녀의 두 눈이 공포와 두려움으로 크게 뜨여졌다.
삐꺽!
마침내 문이 천천히 열렸다.
그리고 한 사람이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들어온 사람을 보자 그녀는 절망(絶望)에 가득찬 신음을 토해
냈다.
"아아...."
들어온 사람은 빙긋 웃었다.
때마침 방문밖에서 흘러들어온 한 줄기 월광(月光)이 그의
살짝 벌려진 이빨에 반사되어 하얗게 반짝거렸다.
그리고는 들려오는 음성 하나.
"사매. 너는 우리를 너무나 실망시켰어."
그녀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감겨진 그녀의 길다란 속눈썹 사이로 절망어린 눈물 한 방울이
흘러 내렸다.
* * *
"언제 돌아왔느냐?"
묵직한 음성.
이미 오래전에 들렸던 음성이었다.
노독행의 귓전을 울리는 그 음성은 언제나 그의 마음을
푸근하게 감싸주는 것이었다.
"팔은 괜찮느냐?"
그때 노독행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었다.
아버지는 언제나처럼 짤막하게 말했다.
"그럼 됐다. 이제 가서 쉬거라."
그것이 아버지와의 마지막 대화였다.
항상 과묵하고 말이 없었던 아버지.
하지만 노독행은 그것이 좋았다.
말없는 눈빛 만으로도 노독행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 바로
아버지였다.
그래서 더욱 일부러라도 기억하지 않으려고 했던
아버지였는데....
"네 아버지를 살리고 싶다면 간단하다. 너의 한쪽 눈을
내놓으면 된다."
임빙은 아버지의 바로 뒤에 서 있었다.
그의 한쪽 손은 아버지의 뒷통수에 닿아 있었다. 노독행이
조금이라도 엉뚱한 수작을 하면 당장 아버지의 머리통을 부수어
놓겠다는 무언(無言)의 시위같았다.
아버지와 한쪽 눈을 바꾼다...?
확실히 간단한 일이었다..
누가 보기에도 손해나는 장사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버지였다.
그 아버지를 살리는데 한쪽 눈이 없어진다한들 그리 대수로울
것이 없었다.
단지 문제는 그렇게 되면 노독행은 영원히 앞을 볼 수 없는
장님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장님이 되는게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
진짜로 두려운 것은 복수조차 해보지 못하고 허무하게
물러나는 것이었다.
그것만큼은 용납을 할 수가 없었다.
지하(地下)에 있는 일흔 여섯 개의 영혼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는다면 이자들은 아버지를 죽일 것이다.
아버지를 살릴 것인가?
아니면 복수를 포기할 것인가?
고통스런 순간이었으나, 노독행은 웃었다.
웃으면서 생각했다.
나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다.
내게 있어 아버지는 이미 팔 년 전의 어느 날에 죽은 것이다.
지금의 나는 복수에 미친 단지 한 마리의 야수(野獸)일
뿐이다.
복수외의 다른 어떤 것도 나에게는 무의미한 것이다.
아버지는.....
아버지라면 나를 이해해 주실 것이다.
설사 이해해 주지 않으시더라도 상관없다.
'나'라는 인간은 이미 오래전에 스스로 '인간(人間)'이기를
포기해 버렸으니까.
노독행은 웃으면서 천천히 앞으로 걸어왔다.
임빙은 노독행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를 보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 희미한 미소와 아무것도 꺼리끼지 않고 앞으로 다가오는
모습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결과가 발생했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저 놈이 정말로 자신의 아버지를 희생하려고 하는가?'
아버지의 뒷머리에 닿아 있는 임빙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일시지간 어떻게 해야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던 것이다.
노독행은 두 주먹을 말아쥔 채 계속 다가왔다.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끊이지 않고 있었다.
하나....
뚝...뚝....
그의 움켜쥔 손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 들어가 선혈이 한
방울씩 떨어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노독행은 전혀 그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
그의 외눈은 아버지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노독행은 충혈된 눈으로 뚫어지게 아버지를 바라보며
걸어왔다.
그때였다.
시체처럼 의자위에 늘어진 채 미동도 않고 있던 아버지의
얼굴이 조금씩 실룩거렸다.
가죽과 가죽이 비틀어지는 괴이한 모습이었으나, 노독행은
그것이 무엇인지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그것은 웃음이었다.
아버지는 웃고 있었던 것이다.
갈라터져 두 번 다시 열릴 것 같지 않던 아버지의 입술이
힘없이 열린 것도 그때였다.
"네가....돌아왔구나..."
거의 꺼져가는 음성이었다.
도저히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라고는 할 수 없을 만큼
낮고 희미했으나 노독행은 똑똑히 알아들었다.
노독행도 웃었다.
아버지를 바라보며 웃었다.
웃으면서 말했다.
"제가 왔습니다."
그의 음성도 아버지처럼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얼굴은 웃고 있었는데 눈은 더욱 시뻘게졌다.
아버지는 보이지 않는 얼굴을 필사적으로 들어 노독행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아버지의 메마르고 초췌한 입가에 떠 있는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어찌보면 모든 것에 달관(達觀)한 것 같기도 하고, 또
어찌보면 자신의 예상대로 일이 진행되고 있다는 회심의
미소같기도 했다.
아버지는 웃으면서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핏빛은 피로...알겠지...?"
거의 들리지도 않게 입속으로 웅얼거리는 소리였는데도
노독행은 알아들었다.
그 말뿐만 아니라 말속에 숨은 뜻까지 알아차렸다.
그는 시뻘건 눈으로 아버지를 본 채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아버지가 두 눈을 뜨고 자신을 보고 있는 것 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의 창백했던 얼굴에 갑자기 붉은 반점이 나타났다.
그 반점들은 급속도로 확산되어 아버지의 얼굴뿐만 아니라 몸
전체를 붉은 색으로 물들이며 퍼져 나갔다.
임빙은 흠칫 놀라 아버지를 내려보다가 그의 몸이 시뻘건
색으로 변하자 안색이 핼쑥하게 변했다.
'이....이것은...?'
그 순간 아버지의 몸은 그대로 터져 버렸다.
콰앙!
폭음과 함께 잘려진 살점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며 진한
피비린내가 장내를 진동시켰다.
"아아악!"
"크악!"
처절한 비명이 연거푸 터져 나왔다.
임빙은 간신히 오 장이나 몸을 날려 참변을 면했으나, 근처에
있던 대 여섯 명의 장한들은 그 살점과 피의 파편에 전신이
짓이겨진 채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노독행은 그 자리에 우뚝 선 채로 아버지의 몸이 산산히
터져나가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것은 노가살수문에서 비전(秘傳)으로 전해지는 동귀어진
수법인 강룡탁비혼(畺龍濁飛魂)이었다.
전신을 움직일 수 없고, 심지어 혀를 깨물 힘조차 없어도 한
모금의 진원지기(眞元之氣)만 있으면 펼칠 수 있는 비장의
살수였다.
방금전 까지만 해도 숨을 쉬며 살아 있던 아버지의 몸이
갈라터져 나가는 광경을 지켜보는 아들의 심정이란 어떤 것일까?
노독행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피로 웅덩이를 이루고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아무도 그를 막는 사람은 없었다.
그곳은 방금전까지만 해도 아버지가 있던 자리였다. 이제
그곳에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시뻘건 한웅큼의 핏물과 잘게
갈라진 몇 덩이의 살점들 뿐이었다.
아버지의 모습은 아무데도 없었다.
아무데도...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팔 년 전에 죽은 줄 알았던 아버지가 지금 죽었을 뿐이다.
팔 년이라는 시공(時空) 차이가 있지만 어쨌든 아버지는 죽은
것이다.
애초부터 그렇게 믿고 있었으니 새삼스럽게 슬퍼하거나
고통스러워 할 필요가 없었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하지만....
노독행은 의자에서 백왕의 가죽을 벗겨냈다.
아버지의 피로 붉게 물든 백왕의 가죽은 그의 손에 쥐어진 채
한 방울 두 방울씩 붉은 선혈을 흘려내고 있었다.
노독행은 힘주어 백왕의 가죽을 움켜잡았다.
백왕의 가죽이 그의 손에서 먼지가 되어 부스러질 때 그의
몸은 그대로 임빙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임빙은 옷의 여기저기가 구멍이 뚫린 채 낭패스런 모습으로 막
바닥에서 일어나다가 노독행이 자신을 향해서 무서운 속도로
돌진해 오자 안색이 변해 소리쳤다.
"막아라!"
칠 팔명의 장한들이 노독행의 앞을 막아섰다.
하나 그들은 곧 자신들이 얼마나 무모한 행동을 했는지를
뼈저리게 절감할 수 있었다.
콰쾅!
가공할 폭풍앞을 막아선 가랑잎의 모습이 이러할까?
노독행의 앞을 가로막은 일곱 명의 장한들이 순식간에 피떡이
되어 날아갔다.
눈깜짝할 사이에 그들을 박살내며 날아드는 노독행의 속도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임빙은 황급히 옆으로 이 장쯤 몸을 날려 피했다.
하나 그때는 이미 노독행의 몸이 한 줄기 폭풍노도처럼 그를
향해 다가들고 있었다.
콱!
임빙의 양쪽 어깨가 노독행의 손아귀에 움켜잡혔다.
임빙은 다급한 마음에 노독행을 향해서 발길질을 했다.
그 순간,
우드득!
노독행의 양손에 잡힌 그의 어깨가 그대로 부서져 나갔다.
"크윽!"
임빙은 양쪽 어깨가 부서지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인상을
찡그리며 신음을 토해 냈다.
그때 노독행의 무릎이 그의 아랫배를 사정없이 강타했다.
쾅!
하늘이 노래지는 것 같았다.
임빙은 아랫배가 커다란 작살에 관통당하는 듯한 통증에 입을
딱 벌리고 몸을 마구 떨었다. 어찌나 통증이 심했던지
비명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다시 노독행의 반대쪽 무릎이 임빙의 옆구리에 틀어박혔다.
뚜뚝!
갈비뼈가 장난감처럼 부서져 나가며 임빙의 코에서 시커먼
핏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노독행은 양 손으로 임빙의 어깨를 움켜 잡은 채 양쪽
무릎으로 번갈아 가며 그의 아랫배를 가격했다.
퍼퍽!
임빙의 몸이 학질걸린 사람처럼 마구 떨렸다. 그의 얼굴은
노랗게 변했다가 푸른 색으로, 그리고 다시 회색빛으로
물들었다.
벌려진 입에서는 잘라진 내장조각이 시커먼 핏물에 섞여
꾸역꾸역 흘러나왔다.
콰쾅!
얼마나 쳤는지 모른다.
노독행은 여전히 무릎으로 임빙의 옆구리와 아랫배를 사정없이
강타하고 있었다. 이미 임빙의 몸은 허리아래가 완전히 박살난
채 축 늘어져 있었으나 그는 몸을 멈추지 않았다.
주위에는 수십 명의 장한들이 늘어서 있었으나 누구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은 공포에 질린 얼굴로 노독행이 임빙의 아랫배를
가격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임빙은 이미 숨이 끊어진지 오래였다.
그래도 노독행은 동작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마치 그 일에 심혼(心魂)을 내건 사람처럼 치고 또 쳤다.
마치 그렇게 함으로서 죽은 아버지가 살아오기라도 한다는
듯이....
마침내 무릎차는 것을 멈추었을 때 임빙의 몸은 걸레조각같이
변해 있었다.
노독행이 어깨를 잡은 손을 놓자 임빙의 몸은 거적같이 바닥에
허물어졌다. 그의 허리 아래는 완전히 흐물흐물해져 도저히
인간의 모습이라고 할 수가 없었다.
노독행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번쩍!
그의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번뜩이는 외눈이 주위를 쓸어
보았다.
그 시선을 받자 사방에 늘어서 있던 수십 명의 장한들은
일제히 몸을 떨며 자신들도 모르게 뒤로 주춤 물러났다.
노독행은 외눈을 번뜩이며 그들을 둘러보다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떠올렸다.
그 미소를 보는 순간 중인들은 소름이 쭈욱 끼쳤다. 그것은
도저히 인간의 미소가 아니었다.
"핏빛은 피로 갚는다!"
그 순간 노독행은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그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2
"상황은?"
"최악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해보게."
천상회의 십대고수중 하나인 천잔마사(天殘魔士)
조이뢰(曹二賴)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임빙과 그의 휘하에 있던 혈살대(血煞隊)가 모두 당하고
사망유자(死亡幽子) 요광(姚狂)도 쓰러졌습니다. 아무래도
환마령(喚魔令)을 발동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조향령은 천천히 허공을 올려다 보았다.
"환마령이라..."
조이뢰는 머뭇거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있는 인원으로는 도저히 그 자를 막을 수가 없습니다."
조향령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표정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는 한동안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가 조이뢰에게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현재 누가 그를 막고 있나?"
"염천궁(閻天宮)과 하후림(何候霖), 그리고
강옥장(姜玉牆)입니다. 하지만 그들도 일각 이상을 버티기가
힘들 겁니다."
조향령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천상회의 십대고수중에서 가장 강한 세 사람이 막고 있는데도
일각을 견디지 못한다....그 자가 그렇게 강한가?"
조이뢰의 얼굴에 일말의 두려움이 떠올랐다.
그는 침을 한 번 삼킨 후 입을 열었다.
"그런 자가 당금 무림에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렇게
강하고 잔인한 자가 있으리라고는..."
조향령은 고개를 저었다.
"됐네. 그 자에 대해서는 자네가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네."
조이뢰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
조향령이 중도에 말을 가로막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런 그가 조이뢰의 말문을 막았다는 것은 그의 심기가
예전처럼 평온하지 않다는 반증(反證)일 것이다.
하나 그의 마음속이야 어떻든 그의 얼굴 표정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환마령을 발동하게."
조이뢰의 얼굴에 희색이 떠올랐다.
"알겠습니다."
조이뢰가 막 몸을 돌려 나가려는 순간 조향령이 다시 그를
불렀다.
"환마령을 발동한 후에..."
조이뢰는 급히 그를 돌아보았다.
조향령은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대파멸진(大破滅陣)을 펼치게."
조이뢰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대변했다.
"그...그것은...."
"내 말대로 하게."
조용한 음성이었으나 조이뢰는 감히 더 이상 그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다.
"존명."
그는 조향령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는 황급히 밖으로
달려나갔다.
조향령은 멀어져 가는 조이뢰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나직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십 년...십 년동안 준비해 왔는데 겨우 한 사람때문에 그
꿈이 무너져야 한단 말인가? 이제 겨우 대업(大業)을 이룰
기회를 잡았는데....?"
허공을 응시하는 그의 눈빛속에는 기이한 번쩍거림이 감돌고
있었다.
* * *
파파팡!
노독행의 손이 하후림의 판관필(判官筆)과 빠르게 다섯 번이나
격돌했다.
하후림은 손아귀가 찢어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고 안색이
창백하게 굳어진 채 뒤로 두 걸음 물러났다.
하후림의 외호는 색명염라(索命閻羅).
천상회의 십대고수중에서 서열 삼위의 절정고수이며, 한 쌍의
판관필로 '죽음의 사자(使者)'라고까지 불리웠던 인물이었다.
하나 지금 정신없이 뒤로 물러나는 하후림의 모습에서는
조금도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하후림 자신이 진짜
'죽음의 사자'를 만나게 된 것이다.
하후림이 채 몸의 중심을 가다듬기도 전에 노독행의 팔꿈치가
지옥의 수레바퀴처럼 다가들었다.
때마침 백발선랑(白髮仙娘) 강옥장의 비파조(琵琶爪)가 예리한
파공음을 뿌리며 노독행의 뒷통수를 향해 쏘아져왔다.
쫘쫘쫙!
공기가 갈라 찢어지는 듯한 음향이 터져나왔다.
강옥장의 비파조는 당금 무림의 십대조력(十大爪力)중에서도
상위에 꼽히는 것으로, 그녀는 이 비파조와
백발마공(白髮魔功)으로 천상회의 십대고수중 이인자로 불리우게
되었던 것이다.
그녀의 비파조는 비파를 튕기는 듯한 가벼운 동작만으로도
능히 금석(金石)을 두부처럼 자르고 사람의 뼈를 끊는
무시무시한 위력을 지니고 있어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지금도 섬뜩한 파공음과 함께 노독행의 뒷통수를 노리고
들어오는 그녀의 다섯 손가락은 금시라도 노독행의 머리를
산산히 박살내 버릴 것만 같았다.
노독행의 몸이 팔꿈치를 휘두르는 자세 그대로 빠르게
회전했다.
그의 몸이 어찌나 빨리 돌았는지 강옥장은 노독행의 팔꿈치에
자신의 다섯 손가락이 부딪치는 그 순간까지도 자신이 노독행의
뒤통수를 가격하고 있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따딱!
노독행의 팔꿈치와 부딪치는 순간 그녀의 손가락은 그대로
부러져 나가고 말았다.
"악!"
그녀의 입에서 뾰쪽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순간 그녀의 손가락을 부러뜨렸던 노독행의 팔꿈치가 쭉
펴지며 갈쿠리처럼 변한 오른손등이 그녀의 콧등으로
날아들었다.
강옥장의 안색이 새카맣게 변했다.
노독행의 이 수법은 '탄양타(彈陽打)'라는 것으로서, 팔꿈치가
부딪치는 그 반동을 이용하여 용수철을 튕겨내듯이 재빠르게
손등으로 상대의 면상을 가격하는 수법이었다. 이 탄양타의
일격이 너무도 빠르고 갑작스러웠는지라 그녀는 피할 엄도도
내지 못하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막 그녀의 얼굴이 노독행의 손에 의해 처참하게 짓이겨지려는
순간,
쾌액!
때마침 하나의 검날이 노독행의 양 미간을 노리고 섬전처럼
쏘아져왔다.
검날이 채 다가오기도 전에 날카로운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예기(銳氣)가 느껴졌다.
그 예기만 보아도 이번에 찔러오는 일검(一劍)이 얼마나
살인적인 위력을 지니고 있는지를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이것이야말로 천상회의 십대고수중에서
제일인자인 혈우마검(血雨魔劍) 염천궁의
혈우멸절검법(血雨滅絶劍法)이었던 것이다.
노독행은 막 강옥장의 콧등을 가격하려던 손을 거두며 몸을
그대로 뒤로 제쳤다.
팟!
아슬아슬한 차이로 검기(劍氣)가 그의 얼굴위를 스치고
지나가며 몇 개의 머리카락이 잘려져 나갔다. 검날이 자신의
머리위를 스치고 지나가자마자 노독행은 벌떡 일어나며 맹렬하게
양 손을 앞으로 내뻗었다.
따땅!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염천궁의 혈우검이 위로 튕겨져
올랐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노독행의 몸은 혈우검을 쥐고
있는 염천궁의 앞으로 육박해 들어갔다.
염천궁은 노독행이 자신의 검을 손으로 튕기며 다가올 줄은
몰랐는지라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진 채 황급히 튀어올라가는
혈우검을 허공에서 크게 돌리며 자신도 검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빠르게 돌았다.
그가 보인 동작은 확실히 효과적이었다.
파앗!
단순히 뒤로 물러서거나 피하는 것보다 검이 튕겨지는
반동(反動)을 이용해 움직였기 때문에 훨씬 빨리 노독행의
공격에 대응할 수가 있었다. 노독행의 몸이 염천궁의 코앞으로
육박했을 때 염천궁의 검은 어느 새 노독행의 목덜미를 찔러오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 한 수(手)에 꼼짝없이 목을
궤뚫리고 말았을 것이다.
하나 아쉽게도 염천궁의 상대는 다름아닌 노독행이었다.
염천궁의 검이 목덜미를 찔러오는 순간에 노독행은 상체를
옆으로 비틀며 오른손을 빠르게 휘둘렀다.
탁!
그의 손은 불가사의하게도 무서운 속도로 찔러오는 혈우검의
검신(劍身)을 옆으로 후려칠 수 있었다.
동시에 어느 사이에 굽혀진 팔꿈치가 염천궁의 아래턱을 향해
날아갔다.
쾅!
염천궁이 채 자신의 검이 빗나간 것을 느끼기도 전에 그의
아래턱은 노독행의 팔꿈치에 격중당해 흐물흐물해졌다.
"큭!"
염천궁은 괴이한 신음을 토한 채 뒤로 정신없이 물러났다.
노독행의 몸이 그에게로 바짝 다가들며 그의 콧등을 향해
파자권을 날렸다.
그때 마침 하후림의 판관필이 무서운 속도로 노독행의 등을
향해 쏘아져왔다.
하나 노독행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파자권으로 염천궁의
콧등을 사정없이 가격했다.
뚝!
염천궁의 콧등이 움푹 꺼지며 입과 코로 시커먼 선혈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염천궁은 더 이상 치밀어 오르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 순간 하후림의 판관필은 한치의 착오도 없이 노독행의
등판을 그대로 관통해 버렸다.
아니, 관통한 것처럼 보였다.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노독행의 몸이 그대로 움푹 꺼져버린 것이다.
팟!
하후림의 판관필은 헛되이 허공을 가르고 지나갔다. 찰나
노독행의 몸이 다시 불쑥 튀어 오르며 하후림을 향해 번개 같은
발길질을 해댔다.
하후림은 분명히 자신의 판관필에 피투성이로 변할 줄 알았던
노독행의 몸이 허깨비처럼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 것을 보자
그야말로 어안이 벙벙했다.
그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부릅뜨고 멍청하게 서
있다가 황급히 옆으로 몸을 피했다. 하나 그때는 이미 노독행의
발이 그의 옆구리에 깊숙히 박힌 후였다.
뿌드득!
갈비뼈가 부서지는 음향과 함께 하후림의 몸이 반으로 꺾였다.
하후림은 안색이 회색으로 변한 채 옆구리를 끌어안고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는 오른쪽 갈비뼈가 모조리 부러져 나가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웠으나 그보다는 도데체 노독행이
어떻게 자신의 판관필을 피할 수 있었는지가 더 궁금했다.
대체 인간의 몸이 어떻게 마음대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날 수
있단 말인가?
그때 강옥장의 놀람에 찬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저....저것..."
하후림은 바닥을 떼구르르 구르면서 강옥장이 가리킨 곳을
돌아보았다.
다음 순간 하후림은 자신도 모르게 짤막한 신음을 토해 냈다.
"음....!"
방금전 노독행이 서 있던 곳의 바닥이 깊게 파여져 있는 것이
아닌가?
마치 진흙 바닥에 누군가가 빠진 듯 바닥이 사람의 형상으로
움푹 파여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그제서야 하후림은 어떻게 된 것인지를 알아차렸다.
조금전의 절박한 순간에 노독행은 천근추의 공력을 이용하여
바닥을 뚫고 아래로 몸을 피했다가 다시 솟구쳐 올라오며 공격을
가했던 것이다.
하나 사정을 알고 나자 하후림은 더욱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인간의 몸이 단단한 돌바닥을 마치 진흙바닥처럼 순식간에
뚫고 들어간 광경을 보고 어찌 놀라고 두렵지 않겠는가?
그가 바닥에서 채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노독행의 몸은 흡사
일진광풍처럼 가공할 위세로 그를 향해 쏘아져왔다.
그것은 마치 멈출줄 모르는 공포의 뇌전(雷電)과도 같았다.
하후림은 가슴이 덜덜 떨려왔으나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며
몸을 벌떡 일으켜 판관필을 휘둘러 맞서갔다.
"죽어라! 이 괴물 같은 놈!"
피를 토하듯 부르짖는 그의 외침은 그의 마음속 공포와
두려움을 잘 나타내주고 있었다.
강옥장 또한치렁치렁한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미친 듯이
노독행을 향해 덮쳐갔다.
그녀의 산발한 백발이 빳빳하게 곤두서 있는 광경이 왠지
섬뜩해 보였다. 바로 그녀가 천하에 자랑하는 백발마공이 펼쳐진
것이다.
노독행의 얼굴은 아주 무표정했다.
그는 강옥장이 백발이 수 백개의 창날처럼 곤두선 채 자신의
등을 찔러오는 것은 신경도 쓰지 않고 곧장 하후림의 가슴팍을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쾌액!
하후림도 이판사판의 절박한 심정이 되어 전력을 다해
판관필로 노독행의 가슴팍을 찔러갔다. 그야말로 너죽고
나죽자는 식의 수비를 전혀 도외시한 공격이었다.
팍!
노독행의 상처투성이 손이 하후림의 판관필과 교차되며 한
줄기 핏줄기가 솟구쳐 올라왔다.
노독행의 손등이 판관필에 스치며 피부가죽이 살짝 벗겨졌던
것이다.
하나 그때 노독행의 손은 이미 판관필을 지나 하후림의 미간을
향해 빠르게 다가가고 있었다.
빠빡!
하후림의 미간에 도달한 노독행의 손이 두 세번 빠르게
흔들렸다. 그 순간 하후림의 머리통은 잘 익은 수박처럼 그대로
터져버리고 말았다.
무쌍류의 필살무예중 하나인 '반충조(反衝爪)'의 가공할
위력이었다.
하후림이 채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머리가 박살난 채 피분수를
뿌리고 있을 때 강옥장의 창날처럼 변한 머리카락이 노독행의
등을 휘감았다.
촤악! !
마치 쇠로 이루어진 채찍이 휘감기는 듯 노독행의 등뒤
옷자락이 터져 나가며 맨살이 그대로 드러났다.
하나 그 순간에 노독행의 몸이 그대로 뒤로 날아갔다.
강옥장의 백발이 노독행의 등에 몇 개의 붉은 혈선(血線)을
그음과 동시에 노독행의 등은 그녀의 앞가슴에 세차게 부딪쳤다.
콰앙!
폭음이 터져 나오며 그녀의 몸이 훌훌 날아갔다.
그녀의 얼굴은 온통 피로 물들어 하얗던 백발이 시뻘겋게 변해
버렸다.
고산팔벽중에서도 강맹하기로 이름난 붕산벽(崩山壁)이 그녀의
내장을 산산히 부숴놓은 것이다.
노독행의 몸도 순간적으로 주춤거렸다.
비록 붕산벽으로 그녀의 상체를 으스러뜨렸으나 백발마공과
격돌한 순간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쾌액!
어느 사이엔가 하나의 검날이 그의 목덜미를 향해 폭죽처럼
날아올랐다.
그것은 그야말로 전혀 뜻밖의 공격이었다.
한쪽 구석에 주저앉은 채 피를 흘리고 있던 염천궁이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 살인적인 검세(劍勢)를 찔러왔던 것이다.
그때는 노독행의 몸이 잠깐 멈춰 있을 때였는지라 도저히 피할
사이가 없었다.
절대절명의 순간, 노독행은 갑자기 입을 딱 벌렸다.
그의 목덜미를 찔러오던 검날은 한치의 착오도 없이 그의
벌려진 입을 뚫고 들어갔다.
파아....
피가 분수처럼 솟구쳐 오르며 처절한 비명이 장내를
뒤흔들었다.
"크아악!"
노독행은 여전히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뚝...뚝....
그의 앞으로 내밀어진 오른팔뚝을 타고 진한 선혈이 흘러
내렸다.
그의 오른손은 팔꿈치 부근까지 염천궁의 가슴에 깊숙히 박혀
있었다.
비명은 염천궁의 입에서 나온 것이었다.
염천궁이 내뻗은 살인적인 일검(一劍)은 아직도 노독행의
입속에 박혀 있었다.
"퉤!"
노독행이 침을 뱉자 약간의 피와 함께 검날이 튕겨져 나왔다.
놀랍게도 노독행은 염천궁의 무시무시한 검을 입으로 막아냈던
것이다.
노독행은 염천궁의 가슴에 박혀 있던 오른손을 잡아뺐다.
쿵!
전신이 온통 피범벅이 된 채 바닥에 쓰러지는 염천궁의 두
눈에서는 아직도 짙은 경악과 회의의 빛이 감돌고 있었다.
조금전에 노독행이 염천궁의 일검을 입으로 막은 것은
무쌍류의 필살무예중 '금강음(金剛飮)'이라는 수법이었다.
이것은 원래 소림의 절예인 옥금강(玉金剛)에서 변화된
것으로, 옥금강이 입에서 진기를 내뿜는데 반해 금강음은 입속에
진기를 머금고 상대의 검이나 도를 받아내는 초절정의
수법이었다.
완벽하게 시전하면 설사 절세(絶世)의 신병(神兵)이라
할지라도 조금의 상처도 없이 받아낼 수가 있다.
노독행이 조금전에 혀에 약간의 상처를 입은 것은 이 수법을
실제의 상황에서 펼친 것이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수법은 거듭되는 반복수련으로 충분히 터득할 수 있지만,
무쌍류의 필살무예중 몇몇 개는 실전(實戰)에서가 아니면 도저히
사용해 볼 수 없는 것도 있었다.
금강음도 그런 수법들중 하나였다.
장내는 아주 조용했다.
하후림은 머리가 박살 난 채 쓰러져 있었고, 염천궁은 가슴에
사발만한 구멍이 뚫린 채 피바다속에 누워 있었다. 강옥장은
비록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았으나 내장이 박살나고 가슴뼈가
으스러져 도저히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가 없게 되었다.
숨 몇 번 내쉴 짧은 순간에 천상회의 십대고수중에서 가장
강한 세 사람이 모두 격파당하고 만 것이다.
노독행은 손을 등뒤로 가져갔다.
등에 축축한 것이 느껴졌다.
손으로 그 부분을 만진 다음 다시 앞으로 가져와 보니 손에
피가 묻어 있었다.
조금전 강옥장의 백발마공에 격중당한 등에서 핏줄기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노독행은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가 천천히 그 피를 일았다.
이 순간의 그는 한 마리 야수와 다를 바가 없었다.
복수에 미친 야수(野獸)....!
그 피는 비록 자신의 몸에서 흘러나온 것이었지만 노독행이
느끼기에는 꼭 아버지의 피 같았다.
아버지의 피!
형의 피!
일흔 여섯 명의 노가살수문 식솔들이 흘린 피!
이 피의 원한을 갚지 않고서는 살아있는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노독행은 천천히 고개를 쳐들었다.
언제 나타났는지 그의 주위에는 열 두명의 괴이한 인물들이
둘러서 있었다.
노독행은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외눈을 번뜩이며 그들을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