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보건곤-28화 (29/61)

제  28 장      어 떻 게    다 르 지 ?

1

"저길 봐요."

그녀는 나직하게 소곤거렸다.

노독행은 천천히 그녀가 가리킨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슴 한 마리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다가 그들을 보자

화들짝 놀라 숲속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녀의 입에서 까르르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얼마만에 웃어보는 웃음인지 모른다.

노독행은 물끄러미 웃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다

보았다.

그것은 지금까지 그녀가 짓고 있었던 그 슬픔에 가득찬

웃음이 아니었다.

정말로 즐거워서 웃고 있는 그런 웃음이었다.

웃음 하나가 사람의 얼굴을 이토록 변하게 하리라고는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노독행이었다.

활짝 웃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세상의 모든 화려함이

가득 담겨 있는 것 같았다.

그 웃음속에는 그동안 그녀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던

어떤 번민이나 슬픔, 외로움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한참동안 웃다가 노독행이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자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무얼 그렇게 보고 있죠?"

노독행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이런 순간에는 어떤 말도 하지 않는게 좋았다.

그녀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떠올랐다.

왜 자꾸 웃음이 나오는지는 그녀도 알지 못했다.

단지 노독행과 함께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는 것이다.

아무리 무섭고 아무리 두려운 일이 벌어진다 해도

노독행만 옆에 있으면 두렵지 않았다.

그만 옆에 있어준다면 세상의 어떤 것도 더 이상 필요치

않았다.

이곳은 태원과 여량산의 중간쯤에 있는 어느 이름모를

야산이었다.

하늘은 높았고, 나무들은 푸르렀다.

화창한 날에 어디선가 들려오는 새들의 지저귐소리가

그녀의 마음을 한껏 들뜨게 했다.

세상이 이렇게 아름답다는 것을 그녀는 비로소

깨달았다.

이십삼 년을 살아오면서 이토록 밝고 아름다운 세상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까지 모두 새롭게 보였다.

공기마저 산장에서 마시던 것과 다르게 느껴졌다.

"흠...!"

그녀는 가슴 가득히 숨을 들이켰다.

신선하고 차가운 공기가 폐속 가득히 밀려오자 금시라도

붕붕 하늘을 날을 것만 같았다.

그는 좀처럼 말이 없었지만 그것조차도 그녀는 좋았다.

아무런 말이 없어도 그가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 그녀는

만족을 했다.

나는 이제 비로소 그토록 원하던 자유을 얻었다.

나를 구속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믿음직한 사람이 나를 지켜주고

있다.

이 이상 무엇을 더 바랄 것인가?

그녀는 어린 소녀처럼 숲속을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그의 주변을 빙빙 돌기도 하고 돌맹이를 줏어 하늘높이

던져보기도 했다.

그녀가 무슨 일을 하든 막거나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세상은 이토록 아름다운데....

하고 싶은 일도 이토록 많은데....

왜 나는 그동안 이것을 깨닫지 못했을까?

점심때가 되자 그녀는 배가 고팠다.

어떻게 알았는지 때맞춰 노독행이 산토끼 한 마리를

잡아왔다.

그녀는 방글거리고 서서 노독행이 산토끼의 껍질을

벗기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껍질을 모두 벗기자 그녀가 소매를 걷어 붙이고

나섰다.

"이리 줘요. 내가 요리할께요."

그는 말없이 토끼를 내밀었다.

"흥...흐응..."

그녀는 나직한 콧노래를 부르며 토끼를 물로 깨끗하게

씻고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칼질을 하고...그가 피워놓은 모닥불에 그릇을 올려놓고

토막낸 토끼고기를 그곳에 쓸어 넣었다.

고기가 익어가자 구수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녀는 너무 배가 고파서 이대로 손을 집어 넣어 고기를

꺼내먹고 싶을 정도였다.

마침내 고기가 모두 익자 그녀는 급히 그것을 꺼내

반으로 나누어 그릇에 담아 노독행의 앞에 내놓았다.

그리고 나머지 반은 자신의 앞에 놓고는 노독행을 빤히

쳐다보았다.

노독행은 토끼고기를 앞에 둔 채 그녀를 힐끗

바라보았다.

그녀는 먼저 먹으라는 듯 턱으로 고기를 가리켰다.

노독행이 고기를 뜯고 있는 동안 그녀는 생글생글 웃은

채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맛이 어때요?"

그는 짤막하게 말했다.

"괜찮아."

그녀는 입안에 침이 가득 고임을 느끼고 젓가락으로

토끼고기 한 점을 집었다.

"어디..."

그녀는 토끼고기를 입안에 넣고 조심스럽게 씹었다.

다음 순간,

"툇...!"

그녀는 인상을 찡그리며 토끼고기를 급히 뱉었다.

아무런 간이 되어 있지 않은데다 질겨서 도저히 씹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의 입가에 언뜻 미소같은 것이 떠올랐다가 이내

사라졌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땅에

떨어진 토끼고기를 발로 저만큼 밀어냈다.

그리고는 노독행을 바라보며 배시시 웃었다.

"난 요리는 태어나서 처음하는 거에요. 처음하는

솜씨로는 이 정도도 굉장한 거라고요."

"괜찮다고 했잖아."

노독행은 무뚝뚝한 음성으로 중얼거리며 계속

토끼고기를 먹었다.

그가 얼마나 맛있게 먹는지 그녀의 입가에 다시 침이

고였다.

그녀는 용기를 내서 다시 한 점을 뜯어 보았으나 몇 번

씹지 못하고 뱉어내고 말았다.

하나 노독행이 아무 투정도 없이 먹는 광경을 보고는 또

다시 고기를 집어들었다. 그녀는 몇 번을 씹다가 억지로

삼켰다.

"케엑!"

고기가 도중에 목에 걸렸는지 기침이 마구 나왔다.

그녀는 목을 붙잡은 채 손을 바둥거렸다.

그때 하나의 손이 그녀의 등을 지그시 눌렀다.

"잘게 찢어서 삼켜. 그러면 목에 걸리지 않을거야."

노독행의 음성이었다.

그의 손이 등을 누르자 신기하게도 목에 걸려 있던

고기가 쑥 내려가 버렸다.

그녀는 사래가 걸려서 눈물고인 눈으로 그를 돌아보며

웃었다.

"고마워요."

그의 말대로 토끼고기를 가늘게  찢어서 삼키자

그런데로 먹을만 했다.

그녀는 몇 점을 더 먹다가 노독행을 보며 물었다.

"이런 것은 어디서 배웠죠?"

노독행의 시선이 그녀의 동공을 응시했다.

그녀는 입으로 토끼고기를 우물거리며 말했다.

"토끼고기를 잘게 찢어서 먹는거 말이에요. 당신은

이런거 말고도 밖에서 노숙(露宿)하는 방법을 많이 알고

있는거 같아요."

노독행은 잠시 그녀를 보다가 나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어렸을 때부터 사냥을 좋아했어."

그녀의 눈이 반짝거렸다.

"사냥이요? 나도 꼭 한 번 해보고 싶었는데..."

노독행은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말 해보고 싶어?"

그녀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부탁해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눈은 보통때보다 훨씬 영롱하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노독행은 먹고 있던 토끼고기를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와."

그녀는 설레는 표정으로 벌떡 일어나 그의 뒤로 쪼르르

달려왔다.

"정말 나를 데리고 사냥을 갈 거에요?"

"그래."

"아이...좋아라!"

그녀는 어린 소녀처럼 손뼉을 치며 웃었다.

그와 같이 있으면서 그녀는 점점 어린 소녀가 되어

버리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근처에서 제일 높은 언덕으로 올라갔다.

가는 도중에 그녀가 숨이 가빠해서 세 번이나 쉬어야

했다.

하나 그녀는 비오듯 땀으로 몸을 적시면서도 아무

불평없이 따라왔다.

산 정상에 올라가자 노독행은 그녀를 돌아보았다.

"사냥을 하려면 먼저 바람의 방향을 잘 살펴야돼.

되도록이면 바람을 안고 움직이는 것이 좋아."

그녀는 숨을 헐떡이면서 물었다.

"왜...그렇죠?"

"그래야 사냥감이 내 냄새를 맡지 못하니까."

그녀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노독행은 가운데 손가락끝에 침을 묻혀 허공에 세웠다.

그녀는 영문도 모른 채 따라서 했다.

"이렇게 하면 바람이 어느 쪽으로 부는지 쉽게 알 수

있지."

그녀는 배시시 웃었다.

"정말 그렇군요. 침을 묻히니까 바람이 부는게 금방

느껴져요."

"바람이 지금 어느 쪽으로 불고 있지?"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다시 한 번 손가락끝에

침을 묻혀 허공에 쳐들었다.

"북에서 남쪽으로 부는 것 같아요."

"정확하게는 북동에서 남서로 불고 있는거야."

"그렇군요."

"그러니까 우리는 북동쪽으로 움직여야돼."

"알겠어요."

"그럼 시작하지."

노독행이 걸음을 옮기려고 하자 그녀가 급히 물었다.

"무얼 사냥하지요?"

"사슴. 이 근처에는 사슴이 많으니까."

"하지만 사냥도구도 없잖아요."

그의 대답은 언제나처럼 짤막했다.

"만들면 돼."

"그렇군요."

그녀는 아무 것도 모르면서도 아는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노독행은 근처에서 멀지 않은 수림속으로 들어가더니 곧

다시 나왔다.

그의 손에는 부러진 나뭇가지와 칡넝쿨이 들려 있었다.

노독행은 나뭇가지를 거의 부러지기 직전까지 구부린

다음 칡넝쿨로 양쪽을 붙들어 맸다. 그녀는 옆에 서서

그가 활을 만드는 광경을 신기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노독행은 만들어진 활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녀는 그것을 받아들며 물었다.

"뭘로 쏘지요?"

"쏠 필요 없어."

"네?"

"쏘지 않아도 죽어."

그녀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으나 더 묻지

않았다.

아마도 사슴은 이렇게 화살이 없이 활로만 잡는 것으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나무로 만든 활을 신기한 듯 이리저리 둘러

보았다.

노독행은 잠시 그녀를 보고 있다가 불쑥 말했다.

"팔을 내밀어봐."

그녀는 순순히 팔을 내밀었다.

그가 무얼 달라고 해도 그녀는 주었을 것이다.

노독행은 내밀어진 그녀의 소매를 붙잡아 단단히

조여맸다.

반대쪽 소매도 조인 다음 주저앉았다.

그녀도 따라 앉으려 했으나 그때 그의 음성이 들렸다.

"그대로 있어."

그녀는 그의 말대로 가만히 서 있었다.

노독행은 그녀의 허리 아래쪽에 앉더니 갑자기 그녀의

치마를 잡고 길게 찢기 시작했다.

찌익-!

아마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녀의 입에서는 그 소리보다

더욱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내질러졌을 것이다. 하나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노독행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때 그녀의 두 눈에 떠오른 빛은 깊은 신뢰와

평온이었다.

노독행은 그녀의 치마를 무릅부분까지 길게 찢더니 양쪽

발목부근으로 붙들어 맸다.

그녀는 마치 부풀은 바지를 입은 것 같은 모습이

되었다.

노독행은 그녀의 치마를 양쪽 발목에 단단히 맨다음

몸을 일으켰다.

"이제 됐나요?"

"그래."

그녀는 아래를 내려다 보다가 배시시 웃었다.

"이러고 있으니까 여자 산적(山賊)이 된 것 같아요."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그의 말에 그녀는 까르르 웃었다.

"호호...그렇다면 당신은 남자 산적인가요?"

"아닐 것도 없지."

그녀는 노독행을 향해 활을 겨누었다.

"꼼짝마라, 남자산적! 나는 이 산의 여왕(女王)인

모용산적님이시다."

노독행이 그녀를 돌아보자 그녀는 자기가 말해놓고도

우스운지 낄낄거리고 있었다.

노독행은 몸을 돌려 앞으로 걸어나갔다.

입가에 막 떠오를 뻔 했던 미소를 보이기 싫었던

것이다.

이런 식의 미소는 영윈히 잊어버린 줄로만 알았었다.

정말 우스워서 웃은 적이 언제였던가 생각해 보았으나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쩌면 태어나서 처음으로 미소다운 미소를 지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역사적인 미소라 할 만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그 미소를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 뿐이지만...

2

사슴의 종적을 발견한 것은 고개 하나를 거의 다 넘고난

후였다.

그가 손을 뒤로 흔들자 그녀는 나직하게 속삭였다.

"있어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했다.

하나 그녀는 앞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어디 좀 봐요."

그가 말릴 사이도 없이 그녀는 그의 옆구리를 뚫고

고개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녀는 앞의 풀속을 두리번거리다가 노독행을 올려다

보았다.

"없잖아요?"

노독행은 턱으로 한곳을 가리켰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자세히 살펴보고서야 그곳의 풀입에

희미하게 무언가에 밟힌 듯한 흔적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게 무슨 자국이지요?"

"숫사슴의 발자국이야."

그녀는 어이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발자국만 보고도 암놈인지 숫놈인지 알 수 있어요?"

"암놈은 이것보다 발자국이 좀 더 작지. 그리고 이렇게

뒤가 눌린 것은 체중이 많이 나간다는 뜻이야. 사슴은

숫놈이 훨씬 무겁거든."

그녀는 신기한 동물을 보는 것처럼 노독행을 빤히

쳐다보았다.

"당신은 어쩜 그렇게 아는게 많아요?"

"말했잖아. 사냥을 좋아한다고."

노독행은 그녀가 더 이상 묻기도 전에 사슴의 발자국을

따라 앞으로 전진했다.

그녀도 커다란 활을 등에 질머진 채 그의 뒤를

따라왔다.

그녀 딴에는 조심스럽게 걷는다고 걷는 모양이었으나

노독행이 듣기에는 코끼리떼가 달려오는 것 같았다.

노독행은 좀더 조용히 걸으라고 말하려다가 말았다.

그녀에게 더 이상의 주문은 무리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이백 여장 쯤 전진하자 조금 더 생생한 발자국을 발견할

수 있었다.

노독행은 발자국 주변의 나뭇입을 만져보고는 나직하게

말했다.

"이곳을 떠난지가 일각(一刻)쯤 되었군."

"그건 또 어떻게 알았지요?"

노독행은 주변의 뜯긴 나뭇잎들을 가리켰다.

"그 놈은 여기에서 나뭇잎을 뜯어 먹었어."

그녀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나무들이 억울하다고 당신에게 알려준

거로군요."

그녀는 농담으로 말했으나 의외로 노독행은 부인하지

않았다.

"틀린 말은 아니야."

그녀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뭐라고요? 그럼 정말로 나무들이 알려줬단 말이에요?"

"나뭇잎에 아직도 그 놈의 침이 묻어 있어. 그 침이

마르지 않은 것을 보면 떠난지 얼마되지 않은걸 알수

있지."

노독행의 설명을 듣고서야 그녀는 겨우 사정을 알고는

방긋웃었다.

"난 또 당신이 정말 나무와 대화할 수 있는 초능력이

있는 줄 알았어요."

노독행은 더 대꾸할 말도 없어서 계속 앞으로 전진했다.

조금 더 가자 나무덩쿨이 나왔다.

노독행은 부러진 나무덩쿨의 한쪽에서 사슴의 털 몇

가닥을 찾아냈다.

그녀는 점차로 사슴에게 접근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자

숨이 가빠지고 잔뜩 흥분한 표정이었다.

"이제부턴 정말 중요해. 절대로 소리를 내서는 안돼."

그녀는 바짝 긴장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알았다는 말도 하지마."

"알았어요."

노독행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는

나무덩쿨을 돌아 옆으로 움직였다.

그녀는 여전히 코끼리가 움직이는 소리를 냈다. 단지

아까는 수십 마리였는데 지금은 한 마리로 줄어들었다는

점이 달랐다.

날이 조금씩 어두워 오고 있었다.

벌써 그들이 사냥을 시작한 지도 두 시진이 훨씬

넘었다.

나무덩쿨을 돌아 백 여장쯤 전진했을 때 그들은

처음으로 사슴이 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사그락...사그락....

나뭇가지들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같았으나 노독행은

그것이 사슴이 나뭇잎을 먹고 있는 소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가 나직히 그녀에게 그 사실을 말해주자 그녀의

숨소리가 확연하게 거칠어졌다.

그는 긴장할 것 없다는 듯 그녀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아직도 얼굴에는 바짝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노독행은 신중한 동작으로 앞에 있는 커다란 나무뒤로

접근했다. 그녀의 발걸음 소리도 처음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만치 조용해졌다.

노독행은 나뭇가지에 몸을 숨긴 채 조심스레 앞을

바라보았다.

칠 팔장 떨어진 곳에 사슴 한 마리가 한가로운 모습으로

나무줄기를 뜯고 있었다.

덩치가 작은 송아지만한 커다란 숫사슴이었다.

그가 사슴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그의 뒷덜미에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다.

그녀가 참지 못하고 그의 등뒤로 고개를 내밀었던

것이다.

그는 그녀의 숨결을 느끼자 가슴에 묘한 충동이

일어났다.

그가 참을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그녀의 표정이 너무도

진지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가슴고동이 그의 등을 통해 확연하게

전달되었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 커다란 사슴을

바라보고 있었다.

노독행은 새삼 그녀가 아름답다는 것을 깨달았다.

눈을 반짝인 채 정신없이 사슴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도저히 인간세상의 여인같지가 않았다.

그는 더 이상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가는 자신을 억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간신히 손을 내밀어 그녀의 몸을 툭 쳤다.

그녀의 시선이 그제서야 그를 향했다.

그는 손짓으로 그녀에게 등뒤의 활을 풀어 겨누라는

시늉을 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심스럽게 등뒤에 매고 있던

활을 풀어 두 손으로 쥐었다. 활을 쥔 그녀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노독행은 그녀의 손을 가만히 쥐어 주었다.

상처로 뒤덮혀 끔찍하기 조차한 노독행의 손이었으나

그녀는 뿌리치지 않았다. 오히려 손의 떨림이 멈춰지고

편안한 모습이 되었다.

그제서야 노독행은 그녀의 손을 붙잡았던 손을 놓고

그녀에게 활을 겨누라고 손짓했다.

그녀는 그가 지시하는대로 화살도 없는 활을 사슴에게

겨누었다.

아무래도 처음해보는 것이라 그녀가 어색해 하자 그는

그녀의 뒤로 돌아가서 양 손을 등뒤로 돌려 그녀의 손과

함께 활을 잡았다.

가슴으로 그녀의 따뜻한 몸의 온기가 전해졌다.

그녀는 그의 몸에 파묻힌 자세로 활을 겨누었다.

두 사람은 서로 손을 맞잡은 채 사슴을 향해 빈 활을

겨눈 채로 가만히 있었다.

주위는 아주 조용했고, 공기는 따뜻했다.

어두워 오는 하늘조차 포근하게 두 사람을 감싸고 있는

것 같았다.

노독행은 그녀의 눈을 활에 바짝 갖다대게 하고 그녀의

귀에 자신의 입을 갖다 대었다.

뽀송뽀송한 솜털이 돋은 그녀의 귀는 깨물어주고 싶도록

사랑스러웠다.

"한 쪽 눈을 감고 다른 눈을 통해 활시위를 사슴의 양

눈 사이에 고정시켜봐."

그가 속삭이자 그녀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그의 숨결이

예민한 귓볼을 스쳐 묘한 쾌감을 일게 했던 것이다.

그녀는 그의 말대로 한쪽 눈을 감았다.

그녀는 한동안 그런 자세로 가만히 있다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활시위가 안보여요."

노독행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 했다.

그녀는 활시위에 갖다댄 눈을 감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반대쪽 눈을 감아야지."

"그렇군요."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그 눈을 뜨고 반대쪽 눈을

감았다.

노독행은 그녀의 뺨에 바짝 얼굴을 갖다대며 활시위가

정확하게 고정되었는지 확인했다.

그는 그녀의 손과 맞잡은 자세로 서서히 활시위를

당겼다.

"자...이제 하나, 둘, 셋하면 활시위를 부드럽게

놓는거야."

"알았어요."

"하나...둘...."

"잠깐."

그녀가 급히 그를 불렀다.

"왜?"

그녀는 낮게 소근거렸다.

"조금 더 천천히 셀 수 없어요? 너무 빨라서 숨이

가빠요."

노독행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하나...."

그의 품에 안겨 있는 그녀의 몸이 유난히 부드럽게

느껴졌다.

"둘...."

그가 둘까지 세었을 때 그녀의 나직한 음성이 들렸다.

"독행."

그는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그녀는 두 눈을 모두 감고 있었다.

감은 채로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좀더 이 자세로 있으면 안될까요?"

노독행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동안 두 사람은 바짝 붙은 채로 가만히 서 있었다.

날은 어느 새 어두워져서 하늘에는 하나 둘 씩 별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서로 등과 가슴을 기댄채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별빛이 두 사람의 머리를 하얗게 비출 즈음에야 그녀는

눈을 떴다.

"됐어요..."

노독행은 다시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둘...."

그때 그녀가 조그맣게 놀란 외침을 토해냈다.

"어머...사슴이 없어졌어요."

과연 그들의 앞에 있던 사슴은 이미 어디론가로 사라져

버린 후였다.

노독행은 그녀의 귀에 대고 나직하게 말했다.

"상관없어. 사슴이 아직도 그곳에 있다고 생각하고 활을

당겨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눈을 감고...머리속으로 사슴을 그려봐."

그녀는 다시 두 눈을 감았다.

"그 사슴의 두 눈 사이에 활시위가 정확하게

놓여지면...하나, 둘, 셋과 함께 활시위를 부드럽게

놓는거야."

그녀는 눈을 감은 채 속삭였다.

"활시위가 사슴눈을 겨누고 있어요."

"하나...둘...셋...쉬잉!"

노독행은 입으로 말하고 활을 내렸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

"항상 이런 식으로 사슴을 잡나요?"

"열 다섯 살 때까지는 진짜로 사슴을 잡았어."

"그 후에는요?"

"맹수들을 사냥했지."

활을 내려놓았는데도 그녀는 그의 품속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그도 그녀를 떼어놓지 않았다.

문득 그녀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검은 비단을 씌운 듯한 하늘에는 달이 밝고, 별이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멍하니 달을 올려다 보며 중얼거렸다.

"참 이상해요. 똑같은 달인데도 저렇게 다를 수가

있으니..."

"어떻게 다른데?"

"전에는 달을 보면 괜히 눈물이 나왔어요."

"지금은?"

그녀의 맑은 눈가에 희미한 물기가 배어 올랐다.

"지금도...눈물이 나와요...."

노독행은 그녀의 눈가에 고여있는 진주같이 맑은 눈물을

보았다.

그 순간 그의 마음속에는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회오리치고 있었다.

그는 간신히 물었다.

"무엇이 다르지?"

그녀는 그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속눈썹 사이에 고여 있는 눈물이 떨어질듯 말듯

흔들거렸다.

그녀는 나직하게 소근거렸다.

"전에는 너무나 슬퍼서 눈물이 나왔는데...."

"......"

"지금은...너무나 행복해서..."

그녀는 말을 잊지 못하고 그의 품속에 얼굴을 묻었다.

그와 함께 그녀의 눈에서는 참았던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노독행은 자신의 가슴에서 흐느끼고 있는 그녀의

흑단같은 머리카락을 가만히 쓰다듬어 주었다.

그녀는 그의 옷소매자락이 흠뻑 젖도록 울었다.

그동안의 고통과 외로움을 모두 떨쳐 버리려는 듯

하염없이 울었다.

한참후에야 그녀는 간신히 울음을 멈추었다.

그녀는 여전히 그의 품속에 얼굴을 묻은 채로 그를

불렀다.

"독행..."

"음?"

"이런 자세로 잠을 자도 될까요? 지금 너무 졸려요...."

노독행은 한동안 묵묵히 그녀의 머리를 내려다 보았다.

그러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의 대답은 필요없는 것이었다.

그의 품속에 얼굴을 묻은 채로 그녀는 어느 새 꿈속에

빠져들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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