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보건곤-25화 (26/61)

제 25 장      자 네   형 이 라 면   틀 림 없 이...

1

그들은 둘다 초로(初老)의 노인들이었다.

우측의 인물은 이목구비가 제법 수려하고 푸른 청삼을

걸친 육십 대 초반의 노인이었다. 키가 노인답지 않게

훤칠하고 몸의 자세도 아주 곧았다.

특이한 것은 허리춤에 작은 비단 꾸러미 하나를 매달고

있다는 것이었다.

좌측의 인물은 비쩍 마르고 음산하게 생긴

흑의노인이었다.

흑의노인의 얼굴에는 크고 작은 검상(劍傷)이 얽기 기

나 있었는데 그 검상사이로 번뜩이는 냉혹한 두 개의 눈과

어울려 전체적인 인상을 무척 싸늘하게 만들었다.

그들이 나타나자 네 명의 황의인은 공손한 표정으로

한쪽으로 물러났다.

흑의노인은 남포노인을 보며 음산하게 웃었다.

"크녠....이십년 만인가? 그동안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군, 상관홍(上官紅)."

남포노인의 얼굴은 그들이 나타날 때부터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용케도 살아있었군. 그때 신강(新疆)에서 죽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크크...상관노괴가 죽지 않았는데 내가 어찌 먼저 죽을

수가 있겠나?"

"기껏 살아서 동방늙은이의 개가 되었나?"

흑의노인의 두 눈에서 번갯불같은 섬광이 피어올랐다.

그는 무서운 눈으로 남포노인을 뚫어지게 노려보다가

악독한 미소를 떠올렸다.

"크흐흐...과연 그 함부로 지껄이는 입버릇은 여전하군.

하지만 앞으로 두 번 다시 그 입을 놀릴 수 없게 될

것이다."

남포노인은 히죽 웃었다.

"저일비(儲一悲). 너 혼자로는 무리일걸."

흑의노인은 이 말에는 화를 내지도 않고 오히려

올빼미같은 소리로 웃었다.

"크크크...상관노괴의 참장(斬掌)이 내 흑수(黑手)보다

한 수 위라는건 인정하지."

"잘 아는군."

"하지만 흑수에 신탄(神彈)이 합치면 아무리 참장이라도

당해낼 수 없지."

그 말에 남포노인의 안색이 홱 변했다.

그의 시선이 자신도 모르게 흑의노인의 옆에 서 있는

청삼노인에게로 향했다.

"신탄? 신탄자(神彈子) 갈홍립(葛弘立)?"

청삼노인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바로 갈홍립이오. 말로만 듣던 상관노인을 직접

만나게 되어 반갑소."

부드럽고 온화한 음성이었으나 그 음성을 듣자

남포노인의 안면근육이 실룩거렸다.

신탄자 갈홍립은 자타가 공인하는 당대 무림의 제일가는

암기(暗器)의 고수였다.

그에 필적하는 암기의 고수는 오직 강북의 묘선고

뿐이라고 알려져 있다.

십팔년전에 갈홍립은 단신으로 당시 혁혁한 명성을

날리고 있던 사천당문(四川唐門)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그는 당문의 최고고수 다섯 명을 모두 살해하여

천하무림을 경악시켰다.

그때 그가 사용한 무기가 바로 신탄이었다.

신탄이란 사실 이름과는 달리 작은 쇠구슬에 불과했다.

하지만 일단 그의 손가락에서 쇠구슬이 튕겨져 나가면

아무도 그것을 막아내지 못했다. 그야말로 단순한

쇠구슬이 가공할 살인병기가 되는 것이다.

십 오년전에는 역시 쇠구슬과 비슷한 암기인

금환(金丸)의 달인인 홍지금환(紅指金丸)

황구룡(黃九龍)이 누가 진정한 철환암기의 제일인자인가를

가리기 위해 그에게 도전한 적이 있었다.

황구룡이 열 개의 금환을 날릴 동안 갈홍립은 이리저리

피해다니기만 했다.

그러다가 딱 한 번 그의 손가락이 튕겨지며 쇠구슬이

발출되었다.

그것으로 황구룡은 영원히 금환을 날릴 수 없게 되었다.

그 이후에 감히 갈홍립의 신탄의 위력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갈홍립이 나타나자 남포노인도 더 이상 냉정할 수 만은

없었다.

남포노인은 사실 오래전부터 무림에서 전설적인 명성을

날리고 있던 수라노인(修羅老人) 상관홍(上官紅)이었다.

그는 한 쌍의 육장(肉掌)만으로 수십 년간 무림을

종횡하면서도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그의 양손의

위력이 어찌나 가공스러웠던지 무림인들은 그 손을

참장(斬掌)이라고 부르며 두려워했다.

십 여년전에 그는 무림을 떠나 북만주 일대에

은거했는데 이번에 모용추수의 부탁을 받고 다시 무림에

나온 것이다.

모용추수는 그의 외손녀였다.

흑의노인은 한때 살성으로 유명했던 흑수일겁(黑手一劫)

저일비였다.

저일비는 특이한 흑수공(黑手功)으로 자자하게

마명(魔名)을 떨쳤던 인물로 그의 얼굴에 나 있는 검상은

천산신검(天山神劍) 좌심(左心)에게 당한 것이었다.

좌심은 천산파(天山派)사상 최고의 검객이라고 알려진

인물인데 그 검술은 당시 강북에서 제일로 꼽히고 있었다.

저일비는 좌심의 검에 얼굴을 거의 난도질당했으나

쓰러지기 직전 딱 한 번의 공격으로 좌심의 가슴을 완전히

박살내 놓았다.

그때부터 그의 흑수공은 천하에 그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상관홍은 오래전에 저일비와 싸워 이백여초 만에 간신히

이긴 적이 있었다.

하지만 저일비에 갈홍립의 신탄까지 가세한다면

제아무리 상관홍이라 할지라도 당해내지 못할게 자명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서문정의 도움을 바랄 수도 없었다.

서문정은 아마 권포사룡을 상대하는 것조차도 힘겨워 할

것이다.

상관홍은 새삼 산장의 거대한 힘을 절실하게 느꼈다.

저일비와 갈홍립은 모두 불가일세(不可一世)의

고수들이었는데도 산장에서의 지위는 칠대빈객중 하나에

불과했다.

대체 산장에는 저일비와 갈홍립같은 고수들이 얼마나 더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 많은 고수들을 이끌고 있는 산장의 주인인

동방늙은이의 실력은 어느 정도나 되는 것일까?

산장의 주인을 떠올리자 상관홍의 가슴속에는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자신이 얼마나 무모한 일을 벌이고 있는지를 새삼

깨달았다.

하지만 후회는 하지 않았다.

모용추수는 그의 유일한 혈육(血肉)이 낳은 아이였다.

모용추수의 어머니는 그녀를 낳다가 산고(産苦)를

이기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에 그녀에 대한 상관홍의

애정은 남다를 수 밖에 없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도망쳐 왔을 때 그는 놀랐으나

한편으로는 가슴속으로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가 어려울 때 자신을 찾아와 준것에 어떤 만족감을

느꼈던 것이다.

'인생은 칠십까지 살기도 어렵다는데 나는 벌써 팔십

년이나 살았다. 이제 남은 인생을 그 아이를 위해서

바친다 한들 아쉬울게 무엇이 있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자 상관홍은 긴장되었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저일비와 갈홍립은 이미 나란히 선 채 호시탐탐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서문정 또한 어느 사이엔가 권포사룡 네 사람에게

포위된 채 옴짝달짝 못하고 있었다.

상관홍은 잠시 창연(蒼然)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그 푸른 하늘위에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딸의

모습이  떠올랐다.

상관홍은 그 얼굴을 보며 웃었다.

'걱정하지 마라, 얘야. 수아(秀兒)만큼은 내가 반드시

지켜주겠다.'

그 순간 그의 몸은 저일비를 향해 폭발치듯 달려들고

있었다.

서문정은 심한 압박감을 느꼈다.

권포사룡의 무공은 자신의 예상보다 훨씬 뛰어난

것이었다.

개개인으로 따지자면 그들은 서문정보다 약간

뒤떨어졌으나 사인(四人)이 합공을 하자 상황은 전혀

달랐다.

도저히 숨쉴 틈조차 없었다.

네 개의 검(劍)이 풍차바퀴처럼 세차게 몰아쳐서 반격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막는데만 열중했다.

카카캉!

다시 그의 금도(金刀)가 권포금룡중 두 사람이 내뻗은

장검과 허공에서 격돌하며 사방으로 불똥을 튕겨냈다.

'윽!'

서문정은 팔이 떨어져 나가는 듯한 통증을 느끼고

휘청거리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 순간 다시 두 개의 장검이 그의 좌우측 옆구리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서문정은 한 모금 진기를 급히 끌어올려 몸을

회전시키며 질풍같은 십삼도(十三刀)를 쳐냈다.

파파팍!

눈부신 금광(金光)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따땅!

그의 양쪽을 짓쳐들었던 두 개의 장검은 그 위세에 늘려

힘없이 격퇴되고 말았다.

하나 그것으로 끝난게 아니었다.

어느 사이에 다시 두 개의 장검이 가슴팍과 등뒤

영대혈(靈臺穴)로 다가왔다. 서문정은 끌어올렸던 진기를

환원(還元)시킬 사이도 없이 거푸 열 두번이나 칼질을

해댔다.

그 덕분에 앞뒤로 다가오던 두 개의 장검을 물리칠 수

있었으나 그 바람에 진기가 미처 되돌아가지 못해 가슴이

심하게 격탕되었다.

'안되겠다. 이러다가는 이 자들의 검에 쓰러지는 것보다

진기가 역류해 죽는게 먼저겠다.'

서문정은 계속 이런 식으로 권포사룡의 공격에 일일이

대응했다가는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 것을 알고 진기를

고르게 하기 위해 당분간 맞받아치지 않고 피하기만 했다.

하나 권포사룡의 합격진(合擊陣)은 무서운 위력이

있어서 손을 쓰지 않고는 도저히 피할 수가 없었다.

파팟!

순식간에 서문정의 몸에는 세 개의 핏자국이 생겨났다.

맞받아치자니 진기가 달리고, 피하자니 그들의 검을

도저히 막을 수가 없는 것이다.

서문정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이렇게 되면 이판사판이다!'

서문정은 단전(丹田) 깊숙한 곳에 숨기고 있던

원양진력(元陽眞力)을 끌어올렸다.

이것은 동정(童貞)을 지닌 자만이 익힐 수 있는 것으로

가장 순수하고 강력한 것이었다.

우우웅!

그의 금도가 마구 요동을 치며 짙은 금광이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권포사룡도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전력을 끌어올렸다.

츠으으...

삽시간에 주위가 온통 폭발치는 듯한 금광과 시퍼런

검풍에 휩싸여 버렸다.

그 살기가 어찌나 자욱하던지 주위에 있던 몇몇

구경꾼들이 질겁을 하고 뒤로 물러났다. 게중에는

허겁지겁 물러나다가 발을 헛디뎌 배 아래로 떨어지는

자들도 있었다.

서문정의 금도과 휘황한 금광에 휩싸인 채 무려 스물

여덟 번의 변화를 뿌려냈다.

그의 독문무공인 대라칠식(大羅七式)중의 최절초인

대라선전(大羅旋展)이 펼쳐진 것이다.

파파파팍!

사방이 금광에 휩싸여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그 순간 권포사룡의 네 자루 검이 풍차처럼

회전하며 정면으로 금광의 정면을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콰뫙!

도광과 검풍이 부딪쳤는데 어이없게도 폭음이

터져나왔다.

동시에 하나의 인영이 훌훌 날아 오 장밖으로 나가

떨어졌다.

쿵!

바닥에 떨어진 인영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갑판을

시뻘겋게 물들였다.

"크으으..."

전신이 피투성이가 된 채로 필사적으로 꿈틀거리며

일어나려고 하는 인영.

그는 바로 서문정이었다.

2

서문정은 오른 팔이 싹둑 잘리고 가슴이 쩌억 갈라져서

도저히 재생불능(再生不能)의 상태였다.

그는 바닥에서 바둥거린 채로 고개를 쳐들었다.

멀리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머리위에 있던 방립은 어디로 갔는지 벗겨져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이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그녀는 그 슬픈 눈망울로 멍하니 서문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문정은 그녀를 향해 웃어주려고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입으로 계속 피가 흘러나와 아무리 웃으려고 해도

이상한 몰골이 되고 말았다.

마침내 그녀의 눈가에 진주같은 눈물방울이 고이자

서문정은 가슴이 메어지는 것 같았다.

'울지 마시오, 추수. 당신은 울어서는 안돼...더 이상

당신의 눈에 눈물이 흐르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했는데...'

서문정은 눈앞이 흐려졌다.

너무나 많은 피를 흘려서 그녀의 모습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아났는지 서문정은 하나뿐인 팔로

상반신을 버팅기며 바닥에서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는 두 다리를 질질 끌며 앞으로 기어갔다.

두 다리를 어그적거리며 외팔로 바닥을 움켜쥔 채

기어가는 그의 모습은 우스꽝스럽기조차 했다. 하나

아무도 웃는 사람은 없었다.

서문정은 갑판을 가로질러갔다. 그가 지나가는 자국은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주위는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스르륵..스르륵...

그의 옷자락이 나무갑판에 부딪치는 음향만이 고적하게

울려퍼지고 있을 뿐이었다.

마침내 서문정은 원하던 장소에 도착했다.

그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쳐들고 위를 올려보았다.

하나의 차갑고 냉정한 얼굴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번뜩이는 외눈이 묵묵히 그의 얼굴을 응시하고 있었다.

서문정은 그 외눈을 바라보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그녀를 도와주게...그녀는 불쌍한 여자야..."

노독행은 입가로 검붉은 피를 게워내며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서문정을 바라보았다.

왜 이 자는 나에게 이런 말을 하는가?

그의 시선은 그렇게 묻고 있었다.

서문정의 꺼져가는 눈은 필사적인 염원을 담고 있었다.

"부탁하네...자..,자네의 형이라면 틀림없이 그렇게

했을꺼야...."

노독행은 처음으로 나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나를 알고 있나?"

언뜻 서문정의 피로 물든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나...나중에야 자네가 누구인지 생각이 났네....자네는

노독행이지. 내 하나뿐인 친구였던 노군행의 동생이란

말이야...그렇지?"

노독행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자네 형은 참 좋은 사람이었어...그...그라면

부..불행한 여자를 위해 손을 내미는걸 주저하지

않았을거야...자네도.. 자네도 반드시..."

서문정의 몸에 경련이 일어났다.

그는 노독행을 향해 떨리는 왼팔을 내뻗었다.

"반..드시...그녀를....그녀를...."

손은 다 내뻗어지지 않았다.

미처 말을 맺지도 못하고 서문정의 몸은 축 늘어지고

말았다.

무엇이 그렇게도 억울한 지 노독행을 향해 두 눈을

부릅뜬 채로 싸늘히 식어가고 있었다.

노독행은 한동안 물끄러미 그 부릅떠진 눈을 내려다

보았다.

그러다가 천천히 손을 내밀어 그 눈을 감겨 주었다.

과거의 그를 알고 있던 몇 안되는 사람중의 하나가 또

다시 사라졌다. 자신과 자신의 형을 기억하고 있던 유일한

사람이...

이제는 누가 있어 노가살수문을 기억할 것인가?

이제는 누가 그 비참하게 죽어버린 형을 기억해줄

것인가?

형과의 고리는 이것으로 영원히 끊어져 버린 것인가?

노독행은 서문정의 몸을 바닥에 뉘였다. 그의 피로 물든

얼굴을 내려보며 노독행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당신의 부탁때문이 아니야. 단지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지하에 있는 형에게 미안할 것 같아서야."

노독행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한쪽에서는 상관홍과 저일비, 갈홍립이 서로 뒤엉킨 채

치열한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신없이 그 격전을 구경하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격전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가련한

모습으로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녀의 시선은 격전장이 아닌 서문정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싸늘하게 식어가는 서문정의 시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은 그렇게 슬퍼 보일 수가 없었다.

그때 그녀의 주위로 네 개의 그림자가 다가왔다.

"작은 마님. 이제는 돌아가셔야 겠습니다."

어느 사이엔가 권포사룡이 그녀를 에워싼 채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그들은 쳐다보지도 않고 고개를 저었다.

"나는 돌아가지 않을 거에요."

"작은 마님."

그들은 물러설 기색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조금씩

다가들었다.

그녀는 뒤로 한 발 물러났다.

"나는 결코 그곳으로는 가지 않을거에요."

이상하게도 차분한 음성이었다.

그 음성을 듣자 권포사룡의 안색은 가볍게 변했다.

그들은 그녀가 무언가 중대한 결심을 했을 때 이런

식으로 말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권포사룡중의 우두머리인 대룡(大龍) 황일평(黃日平)이

무언가를 느낀 듯 황급히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나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그녀는 어느 새 허공을 박차고 배 아래 강물위로 몸을

날리고 있었다.

찌익!

황일평이 사력을 다해 손을 내뻗었으나 그녀의

옷자락끝만 찢겨져 나갔을 뿐 그녀의 몸은 푸른 강물위로

떨어져 내렸다.

천하제일의 미녀가 강물과 함께 사그러지는 순간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휘익!

무언가 시커먼 인영 하나가 갑판을 박차고 강물위로

떨어지는 그녀를 향해 날아갔다.

중인들이 놀란 외침을 토하기도 전에 그 인영은 거의

강물에 닿아 있는 그녀의 몸을 바싹 움켜잡았다.

"아앗?"

몇몇 중인들의 입에서 짤막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그 검은 인영이 그녀의 몸과 함께 강물속으로 빠져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순간 검은 인영은 오른 발로 자신의 왼발의 발등을

찍으며 그 탄력을 이용해 허공으로 몸을 솟구쳤다.

휘리릭!

그의 몸이 허공에서 한 차례 회전한다고 느낀 순간 어느

사이에 그의 몸은 갑판위에 올라서 있었다.

설명은 길었지만, 모용추수가 강물위로 몸을 날리고

다시 흑의인영이 그녀의 몸을 낚아채서 자신의 발등을

밟고 되돌아오기 까지는 숨 한 번 내쉴 시간도 소요되지

않았다.

그야말로 어어...하는 사이에 모든 일이 끝나 버린

것이다.

황일평의 안색이 싹 변했다.

그는 검은 인영이 방금 전에 보여준 신법이 당금

무림에서도 제대로 익힌 사람이 거의 없다는

발보등공(跋步登空)임을 알아본 것이다.

'발보등공을 펼칠 만한 고수가 있었는데도 내가

몰라보다니...'

황일평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음을 느끼고 황급히

갑판위에 내려선 검은 인영을 바라보았다.

제일 먼저 그 자의 검은 안대가 화악 시선을 끌었다.

이어서 번뜩이는 눈과 냉정한 입매, 강인해 보이는

아래턱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 크지 않은 몸이었는데도 단단해서 칼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인상을 풍겼다.

그 검은 안대의 사나이는 한쪽 팔로 축 늘어진

모용추수를 안은 채 우뚝 서 있었다.

황일평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이와 비슷한 자에 대한 이야기를 얼핏 들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나 언뜻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별로 신경쓰지 않고 검은 안대의 사나이를 향해

다가가며 소리쳤다.

"그 분을 놓고 물러서라!"

검은 안대의 사나이는 그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수중에 안고 있는 모용추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모용추수는 조금 전에 강물위로 떨어질 때 혼절을

했는지 정신을 잃고 축 늘어져 있었다.

그녀는 정말 아름다웠다.

가까이서 보자 이토록 아름다운 여인이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나 완벽하게 아름다워서 건드리기만

해도 깨져버릴 것만 같았다.

그의 팔에 안긴 채 고개를 젖히고 있는 그녀의

눈자위에는 이슬같이 영롱한 눈물 한 방울이 매달려

있었다.

그 눈물을 보자 노독행의 가슴에는 문득 알 수 없는

감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무엇이 이토록 그녀를 슬프게 하는 것일까?

이토록 아름다운 여인이 자살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절박한 심정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그가 그녀를 내려다 보고 있을 때 그녀의 속눈썹이

가늘게 떨리더니 눈까풀이 올라갔다.

그리고 슬프도록 아름다운 한 쌍의 눈이 나타났다.

그 눈은 촛점을 맞추려는 듯 몇 번을 깜박거렸다.

그러다가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당신이었군요."

그녀는 나직하게 소근거렸다.

너무나 나직해서 마치 쉰 것같이 들렸다.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입을 열면 무언가 쓸데없는 말이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 보았다.

그의 검은 안대와 무정한 외눈과 코, 뺨, 입술, 턱을

차례로 훑고 내려왔다. 마지막으로 그의 목을 보았을 때

그녀는 처음으로 짤막한 신음을 토해냈다.

"음..."

그의 목에 나 있는 끔찍한 흉터가 눈에 띄었던 것이다.

그 신음소리에 노독행은 몸을 움찔했다.

그제서야 그는 자신이 아직도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꼬옥 끌어안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천천히 손을 풀었다.

우습게도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한 차례 몸을 휘청였으나 곧 똑바로 섰다.

그리고는 그를 향해 웃었다. 그리고 속삭이는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두 번씩이나 당신 신세를 지게 되었군요."

그녀의 미소는 보는 사람을 슬프게 했다.

아무리 냉혹하고 차갑기 그지없는 노독행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단지 노독행은 자신의 감정을 완벽하게 통제할 줄 아는

인간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녀의 미소를 보고도 조금도 표정이

변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때 황일평의 싸늘한 음성이 들려왔다.

"미친 놈. 내 말이 들리지 않느냐? 어서 그분에게서

물러나지 못하겠느냐? 그 분은 네 놈같은 놈이 감히 손댈

수 없는 분이란 말이다."

노독행은 힐끗 고개를 돌렸다.

황일평을 비롯한 권포사룡이 모두 살기등등한 얼굴로

그를 노려본 채 금시라도 덮쳐들려 하고 있었다.

그들이 함부로 덤비지 않은 것은 모용추수가 노독행의

가까이에 있었기 때문에 만에 하나 그녀의 신상에 피해가

갈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노독행은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웃기는 소리하지 말고 꺼져."

황일평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멍청해졌다.

그가 언제 이런 말을 들어보았겠는가?

어처구니가 없는지 한동안 멍청하게 서 있던 황일평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며 두 눈에서 섬뜩한 살광이

뿜어나왔다.

"이...찢어 죽일 놈!"

그는 분노에 찬 고함을 터뜨리며 노독행을 향해서

달려들었다.

쾌액!

그의 장검이 예리한 광채를 뿌리며 노독행의 목덜미를

향해 쏘아져왔다.

노독행은 슬쩍 목을 옆으로 움직였다. 동시에 황일평의

코앞으로 달려들며 팔꿈치를 수평으로 휘둘렀다.

단순한 동작이었으나 어찌나 빨랐던지 황일평이 본 것은

그저 자신의 검이 빗나가고 무언가 희끗한 것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광경 뿐이었다.

빠악!

미처 피할 사이도 없이 황일평의 얼굴은 정면으로

노독행의 팔꿈치에 강타당해 버렸다.

피비린내가 진하게 풍겨나오며 황일평의 몸이 뒤로 주춤

물러났다.

"끄으으...."

그는 콧등과 광대뼈가 송두리째 주저앉아 기괴한 몰골이

된 채 휘청거렸다.

그 순간 노독행의 반대쪽 팔꿈치가 그의 턱을 아래에서

위로 사정없이 후려치고 지나갔다.

쾅!

황일평의 몸은 거의 사람 키만큼이나 허공으로 솟아

올랐다.

다시 바닥에 떨어졌을 때 그의 몸은 이미 살아있는

사람의 그것이 아니었다.

주위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부릅떠진 채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권포사룡중의 우두머리이며 강호무림의 유명한 고수인

황일평이 제대로 손 한 번 쓰지 못하고 머리통이 박살나

버린 것이다.

질펀한 피를 뿌리며 바닥에 쓰러져 있는 황일평의

시신은 장내를 공포의 도가니로 만들기에 족했다.

휘이잉....!

한 차례 강바람이 선상위로 불어와 노독행의 흑의를

세차게 펄럭이고 지나갔다.

거친 흑의....검은 안대....그리고 한 번 손을 쓰면

상대를 살려두지 않는 냉혹한 솜씨!

중인들중 누군가의 입에서 비명과도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내...냉혈무정이다!"

그 소리를 듣자 장내는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다.

"냉혈무정...!"

"냉혈무정이다...희대의 살성 냉혈무정이 나타났다!"

여기저기서 고함소리가 터져나오고 반대쪽에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너도 나도 당금 무림을 온통 뒤흔들어 놓고 있는 공포의

살성을 보기 위해서 목을 길게 빼고 앞으로 다가왔다.

한바탕의 왁자지껄한 소란이 지나간 후 장내는 다시

조용해졌다.

그리고 노독행의 앞으로 권포사룡의 나머지 세 사람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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