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보건곤-24화 (25/61)

제 24 장     쉽 게   포 기 하 지 는   않 겠 어

1

북풍취백운(北風吹白雲),

만리도하분(萬里渡河汾).

심서봉요락(心緖逢搖樂),

추성불가문(秋聲不可聞).

북풍이 흰 구름을 불어 날리고 있으니...

만리 길에서 지금 분하(汾河)를 건넌다.

초목이 지는 것을 보니 마음이 벅차

가을 소리 태연하게 들을 수 없구나.

분하(汾河)의 물살은 끝없이 푸르렀다.

분하는 산서성의 남쪽을 가로질러 황하(黃河)로

들어가는 커다란 강이었다.

산서성의 북부, 관잠산(管岑山)에서 발원하여

정락(靜樂), 태원(太原)을 지나 황하에 합류한다.

지금은 꽃피는 봄이었고, 날은 화창하기 그지 없었다.

하지만 파란 하늘을 지고 선 분하의 나룻터는 왠지

소슬한 바람이 부는 가을날의 풍경처럼 보는 사람의

마음을 울적하게 만들고 있었다.

노독행은 나룻터가 빤히 내려다 보이는 고갯마루에 우뚝

선 채 한동안 분하의 푸른 물살을 바라보고 있었다.

푸른 물결에 비치는 새파한 하늘과 하얀 솜털구름이

나그네의 마음에 이상한 정취를 불러일으키게 했다.

노독행은 문득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수염자국이 가득한 얼굴에 슬픈 눈매를 지닌 사나이의

얼굴이었다. 웃을 때는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한 미소가

떠올랐고, 울때는 소리없이 눈물만 흘렸다.

죽고 싶어 하면서도 죽을 용기가 없어 머뭇거리고, 그런

자신이 미워 한없이 우울한 사나이였다.

방립동!

그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는 과연 죽을 용기를 되찾고 자신의 소원을

이루었을까?

아니면 큰소리친데로 세상에서 제일가는 술주정뱅이가

되었을까?

그를 생각하자 노독행은 문득 술이 마시고 싶어졌다.

나룻터로 내려가자 주위가 인파로 북적거렸다.

주루는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나룻터에서 멀지 않은 골목에 이층으로된 주루가

자리잡고 있었다.

노독행의 발길은 자신도 모르게 그곳으로 향했다.

주루안으로 들어서자 시장바닥처럼 시끄러운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제법 넓은 주루안은 사람들로 꽉 차서 빈 자리가 보이지

않았다.

노독행은 다시 이층으로 올라갔다.

아래층보다는 사람들이 적었지만 이층에도 빈 탁자는

없었다.

노독행이 포기하고 아래로 내려가려 했을 때 누군가가

그를 불렀다.

"이봐요."

노독행은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가에 면한 탁자에 하나의 인영이 앉아서 그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가무잡잡한 피부에 유난히 새햐얀 이빨이 시선을

끌었다.

매부리코에 광대뼈가 불거져 나와 있었지만 그래도

상당히 매력적인 미모의 여인이었다.

그녀는 노독행과 시선이 마주치자 생긋 웃었다.

그 눈은 마치 우리는 결국 다시 만났군요 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바로 흑나찰 조교연이었다.

노독행은 외눈을 번뜩이며 그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마침 식사를 하고 있었는지 상위에는 푸짐한

요리가 올려져 있었다.

"어서 앉아요."

그녀는 다시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잘됐어요. 마침 음식을 시켜놓기는 했는데 너무 많아서

혼자 이걸 어떻게 다 먹나 고민하고 있던 참이에요. 우리

같이 먹어요."

그리고는 노독행의 대답도 듣지 않고 마침 지나가는

점소이를 불렀다.

"여기 젓가락 하나만 갖다 줘요. 그리고...술 한 병도."

그녀는 노독행을 돌아보며 눈을 찡긋거렸다.

"괜찮겠죠?"

노독행은 천천히 그녀의 앞의자에 앉았다.

점소이가 젓가락과 술을 놓고 가자 그녀는 술병을 들어

그의 앞에 놓인 술잔에 한 잔 가득 부었다.

"드세요."

노독행은 말없이 술잔을 들이켰다.

그가 술잔을 내려놓자 그녀는 다시 한 잔을 따랐다.

그런 다음 자신의 앞에 놓인 술잔을 내밀었다.

"나도 한 잔 따라주세요."

노독행이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난 원래부터 술을 곧잘 하는 편이에요. 주정같은건

부리지 않을테니 걱정말고 따르세요."

노독행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순순히 술을 따랐다.

"자. 건배!"

그녀는 술잔을 들어올리더니 단숨에 들이마셨다.

술은 산서성의 특산인 분주(汾酒)였다.

산서분주(山西汾酒)는 술맛이 감미로웠지만 상당히 독한

술이었다.

그녀는 순식간에 거의 반 병을 마셨는데도 별로 취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말마따나 술이 상당히 센게 분명했다.

노독행은 딱 석 잔만을 마셨을 뿐이다.

그는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고 석 잔째의 술을 들이킨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검은 자위가 유달리 많은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벌써 가려고요?"

노독행은 고개를 끄덕이며 서슴없이 몸을 돌렸다.

그가 막 한 걸음을 내디뎠을 때 그녀의 음성이

들려왔다.

"당신은 태원쪽으로 가려는 거죠? 나도 마침 태원으로

가야하니 이왕이면 동행하는게 어때요?"

노독행은 몸을 돌리지도 않고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싫어."

참으로 냉정하고 매몰찬 대답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리 얼굴이 두꺼운 여자라도 이런 말을 듣고서는

도저히 더 말을 붙여보지 못할 것이다.

조교연도 어이가 없는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하나 그의 몸이 주루 아래로 사라지자 그녀는 붉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과연 냉혈무정한 사람이로군요. 하지만 나도 그렇게

호락호락한 여자가 아니에요."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한동안 천정을 응시하고

있다가 은자 몇 잎을 탁자위에 올려놓고는 자신도 주루를

빠져나갔다.

와글와글....

나룻배는 배를 타려는 사람과 손님을 기다리는 사공들로

뒤 혀 있었다.

노독행은 어느 배를 탈까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마침

막 출발하려는 커다란 배를 발견하고 그곳으로 다가갔다.

그 배는 사 오십명을 승선시킬 수 있는 제법 큰 배였다.

"어서 오세요. 이제 곧 출발합니다."

뱃사공 하나가 배의 난간옆에 서서 큰 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노독행은 부두에서 배위까지 걸쳐놓은 사다리를 타고

배위로 올라갔다.

상당히 넓은 배의 갑판 위에는 벌써 수십 명의 손님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노독행은 강쪽에 면한 갑판의 한쪽 난간에 걸터앉아

물끄러미 강물을 내려다 보았다.

푸른 빛이 넘실거리는 강물위에 자신의 그림자가

투영되었다.

헝클어진 머리...검은 안대...번뜩이는 외눈....

어찌보면 외롭고 고독한 얼굴이었다.

노독행은 물끄러미 강물위에 떠 있는 자신의 얼굴을

응시했다.

대체 이 얼굴의 어디가 사람들을 그토록 두렵게 하는

것일까?

자신은 그저 자신의 감정에 충실할 뿐이었다.

결코 아무런 이유없이 사람을 죽이지도 않았고, 남에게

공연한 트집을 잡은 일도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신을

냉혈무정한 인간이라고 손가락질 하고 있는 것이다.

그 말을 하는 인간들은 자신이 과거에 어떤 꼴을

당했는지 알기나 하는 것일까?

아무런 이유도 없이, 영문도 모른 채 집안이 몰살당한

사람의 기분을 알까?

가장 사랑했던 하나 뿐인 형이 머리가 풀어헤쳐지고

사지가 잘라진 채로 죽은 시신을 보고서도 말없이

돌아서야 했던 동생의 마음을 알까?

한 쪽 눈이 뽑히고 목에는 유엽비수가 박힌 채로 갈라진

배를 끌어 안고 살기위해서 무작정 걸어야  했던 열일곱

살 소년의 심정을 누가 알 수 있겠는가?

그때 그는 오직 한 가지 생각밖에는 없었다.

나는 살아야 한다.

살아서 이 복수를 해야 한다.

결국 그는 살았고, 지금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뿐이다.

그것외에는 달리 아무 것도 없었다.

결코 남에게 손가락질 받을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노독행은 웃었다.

강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면서 웃었다.

웃으면서 생각했다.

어찌됐든 상관없다.

그 자들에게 죽음의 공포를 안겨줄 수만 있다면...

자신이 흘린 것만큼의 피눈물을 흘리게 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된 것이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건 그런건 중요한게 아니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자신은 분명히 해야할 일이 있고,

지금 그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만이 전부인 것이다.

그 일을 마친 다음에는...?

그 후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

다음 일을 누가 예측할 수 있겠는가?

그때 문득 노독행은 누군가의 따가운 시선을 느꼈다.

힐끗 고개를 돌리자 하나의 영롱한 시선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이상한 눈이었다.

그림처럼 아름답고 영롱한 눈인데 그 눈을 보고 있자니

이상하게도 가슴속에 묘한 슬픔이 떠올랐다.

노독행은 이러한 눈의 소유자는 드넓은 천하에서도 오직

한 사람뿐임을 알고 있었다.

그가 앉아 있는 갑판의 반대쪽에 세 명의 남녀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우측의 인물은 머리가 하얗게 세고 남색 장포를 걸친

노인이었고 좌측에는 방갓을 목까지 깊게 눌러쓴 두 명의

남녀였다.

노독행은 남포노인이 누구인지는 알지 못했다.

하나 방갓을 눌러쓴 두 명의 남녀는 힐끗 보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특히 방갓을 반쯤 들어올린 채 그를 보고 있는 그

여인은 절대로 잊을 수가 없었다.

- 강남의 연꽃은 피다가 말았으나 보는 사람은 모두

취하고 만다...

그녀는 바로 모용추수였던 것이다.

2

모용추수는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고개를 살짝

까닥거렸다.

노독행의 고개도 자신도 모르게 끄덕여지고 있었다.

남포노인은 모용추수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는 그녀의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머리를 돌리다가

노독행을 발견했다.

순간 그의 주름진 눈에서는 실날같은 안광이 줄기줄기

뿜어나왔다.

하나 그것은 이내 나타날 때보다 더욱 빠르게 사라져

버렸다.

남포노인은 모용추수를 향해 물었다.

"아는 사람이냐?"

남포노인의 음성은 마치 까마귀가 울부짖는 듯

카랑카랑했다.

모용추수가 무어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그녀의 옆에

있던 방갓을 쓴 남자가 노독행을 돌아보고 짤막한

경호성을 터뜨렸다.

"앗?"

남자는 급히 남포노인을 바라보며 무어라고 소근거렸다.

남포노인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이따금씩

노독행을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그때마다 그의 눈에서는

칼날같이 예리한 안광이 번뜩이고 지나갔다.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노독행에게로 걸어왔다.

"당신이었구료."

남자는 방갓을 깊숙이 눌러 쓰고 있었으나 노독행은

이미 그가 황금공자 서문정임을 알아 보았다.

항상 화려한 금의만을 입던 서문정이었으나 지금은

평범한 화의를 입고 방갓을 깊게 눌러 쓰고 있어 노독행도

그의 옆에 모용추수가 없었다면 그를 알아보지 못했을 뻔

했다.

서문정은 노독행을 향해서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그때는 촉망중이라 제대로 인사도 드리지 못하고

헤어졌소. 다시 한 번 그때 도움을 주신 것에

감사드리오."

노독행은 짤막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서문정은 무슨 말인가를 꺼내려는 듯 몇 번이나

망설였으나 노독행의 표정이 너무도 차갑고 냉랭한지라

결국 한 마디도 더 꺼내지 못했다.

"휴우..."

그는 뜻모를 한숨을 내쉬고는 씁쓸하게 웃으며 다시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왔다.

남포노인은 그때까지도 노독행을 계속 주시했으나

서문정이 돌아온 후로는 그에게서 시선을 돌려 먼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문정은 모용추수와 몇 마디를 주고받은 후 방립을

눌러쓰고 바닥에 앉았다.

배가 출발하려는지 사공이 부두에 연결했던 사다리를

거두려고 했다.

그때 멀리서 하나의 인영이 달려오며 소리쳤다.

"기다려요!"

사공이 사다리를 거두려던 손을 멈추자 검은 무복을

입은 여인이 배위로 뛰어 올라왔다.

흑나찰 조교연이었다.

조교연은 배위로 올라오자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한쪽에 앉아 있는 노독행을 발견하고는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

마치 네가 가면 어디까지 가느냐고 말하는 것 같았다.

노독행은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강물만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녀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가 그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곧 사공이 사다리를 거두고 배를 출발시켰다.

한 차례 커다란 출렁거림이 있은 후에 배는 서서히

강물위를 미끄러져 나갔다.

"어허이...어허이..."

세 명의 사공이 번갈아 부르는 뱃노래가 넘실대는

강물위로 잔잔하게 울려퍼졌다.

배가 분하위를 지나는 동안 조교연은 노독행을 힐끔힐끔

쳐다보았으나 노독행이 여전히 강물만 바라보고 있자

표정이 조금씩 어두어졌다.

하늘은 푸르렀고 강물은 맑았다.

어디선가 시원한 강바람이 불어와 선상(船上)위를

스치고 지나가자 사람들은 활기에 차서 떠들어댔다.

하나 조교연의 마음속에는 알 수 없는 슬픔같은 것이

자리잡고 있었다.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떠들고 있는데도 마음은 한없이

우울했다. 사람들의 고함소리, 웃음소리에 섞여 누군가의

노래소리가 들려오자 그녀의 눈가에는 희미하게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녀도 지금 자신의 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눈이 부시도록 푸른 날이면 의례 찾아오는 여인의

감상(感傷)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부평초처럼 정처없이

떠돌다가 이따끔씩 푸른 물결 넘실대는 나룻터에서

느끼고는 하는 객수(客愁)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래도 지금처럼 가슴이 슬픔으로 메어진 적은

없었다.

그녀는 부인하려고 했지만 이게 모두 저 무정한 사나이

때문임이 틀림없었다. 조금씩 마음 한 구석에 트이기

시작한 그를 향한 감정을 무어라고 해야 할까?

아직 사랑은 아니었지만 분명히 호감은 넘어서고

있었다.

그런데 저 냉혈무정의 사나이는 그녀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것 같았다.

차라리 싫다면 싫은 내색이라도 하면 되는데 아예

무관심했다.

여인에게 있어 무관심이란 싫다는 것보다 더욱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다행히 그녀는 성격이 강한 여자였다.

'쉽게 포기하지는 않겠어.'

그녀는 언제고 기회는 올거라고 생각했다.

저 냉혹하고 무정한 사나이에게도 고독하고 외로움을

느끼는 시간은 있을 것이다. 그때를 잘 포착한다면 그의

꽁꽁 얼어붙은 마음을 녹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세상 일이란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일 아닌가?

더구나 남자와 여자 사이의 일은 더더욱 예측할 수 없는

법이다.

그녀는 이렇게 생각하며 우울했던 마음을 떨쳐버렸다.

일단 우울한 마음을 떨쳐버리고 나자 푸른 하늘과

넘실대는 강물이 전혀 새롭게만 느껴졌다.

그녀는 불어오는 강바람을 맞으며 심호흡을 했다.

그러다가 이쪽을 향해서 다가오는 한 척의 배를

발견했다.

그 배는 제법 커다란 범선(帆船)이었다.

붉고 화사한 색으로 단장을 했고,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을만큼 커다란 돛대가 매달려 있었다.

붉은 색 범선은 빠른 속도로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가까이 오자 돛대에 펄럭이고 있는 깃발이 시야에

들어왔다.

깃발에는 하얀 색의 커다란 호랑이가 포효하고 있는

그림이 정교하게 수놓아져 있었다.

그 호랑이 깃발을 보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경악성을

터뜨렸다.

"아! 저건 포호산장(抱虎山莊)의 깃발이다!"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붉은 색 배를 바라보고

있던 중인들이 그 음성을 듣자 너도 나도 놀란 외침을

토해냈다.

"포호산장이래!"

"저게 바로 포호산장의 옥호기(玉虎旗)로군."

"강남제일문파(江南第一門派)가 여기는 웬일이지?"

주위가 시장바닥처럼 소란스러워졌다.

이상한 것은 모용추수와 서문정을 비롯한

삼인(三人)이었다.

그들은 포호산장이라는 말을 듣자 눈에 띄게 몸이

경직되어 안절부절하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에 붉은 색 배는 순식간에 그들이 탄 배에

다가왔다.

쿵!

배와 배가 살짝 부딪치며 갑판이 크게 흔들렸다.

그 순간 붉은 색 배에서 네 개의 그림자가 섬전과 같은

속도로 이쪽 배의 갑판위로 날아왔다.

그들의 신법이 어찌나 표홀했던지 요동치는 갑판위에

내려섰는데도 신형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들은 누런 황의를 걸친 네 명의 중년인들이었다.

하나같이 체구가 당당하고 두 눈에 신광(神光)이

번득이는 것으로 보아 내외공(內外功)을 겸비한

절세고수들임이 분명했다.

그들은 갑판위에 내려서자 날카로운 눈으로 사방을

쓸어보았다.

중인들은 그들의 무서운 눈빛에 주눅이 들어 급히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주위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네 명의 황의인들은 중인들을 차례로 훑어보다가 시선이

남포노인과 모용추수 등으로 향하자 눈을 빛냈다.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거의 동시에 성큼성큼

모용추수의 앞으로 다가갔다.

네 사람의 일사불란한 행동으로 보아 그들이 만약

합격술(合擊術)을 연마했다면 필시 가공할 위력을 지니고

있을게 분명했다.

스슥!

네 명의 황의인은 그녀의 앞에 다가오자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작은 마님. 오랫만입니다."

모용추수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방립을 더욱 깊숙히

눌러썼다.

대신에 그 옆에 있던 서문정이 엉거주춤 일어나며

황의인들을 향해 더듬거렸다.

"네...네 분께선 무슨 일이신지..."

가장 우측의 황의인이 힐끗 그를 쳐다보았다. 순간 그의

두 눈에서는 진득한 살기가 폭사되어 나오고 있었다.

"서문정! 허튼 수작은 부리지 마라. 네 놈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처참한 최후가 준비되어 있으니까."

서문정은 그 말을 듣자 더 이상 그들을 피할 수 없음을

알고 오히려 홀가분하게 방립을 벗어 버렸다.

그러자 준수한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서문정은 움츠렸던 어깨를 쭉 펴며 조금전과는 달리

당당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권포사룡(圈抱四龍)! 너희들만으로 그럴 수 있겠느냐?"

우측의 황의인의 입가에 냉랭한 미소가 떠올랐다.

"충분히 가능하지. 너는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다."

이어 그의 시선은 서문정의 옆에 앉아 있는

남포노인에게로 향했다.

남포노인을 대하는 황의인의 모습은 서문정이나

모용추수를 대할때와는 또 달랐다.

그는 엄숙한 표정으로 포권을 했다.

"상관노사(上官老邪). 노주인께서는 이번 일에

상관노사께서 개입하신 것을 아쉽게 생각하고 계십니다."

남포노인은 그의 말은 듣는지 마는지 그저 먼산만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황의인은 개의치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노주인께서는 상관노사께서 사리판별이 분명하신

분이라 작은 마님이 집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으로 믿고 계십니다."

그 말에 처음으로 남포노인은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개방귀같은 소리군."

황의인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무어라고 하셨습니까?"

남포노인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올려다 보았다.

"귀가 먹었나? 개방귀같은 소리를 늘어놓고 있다고

했다."

황의인의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말씀이 너무 지나치신게 아닙니까?"

남포노인은 히죽 웃었다.

"흐흐...네 놈들은 노부가 네 놈들의 노주인을

두려워해서 그의 말에 고분고분 따르리라고 생각하나 본데

어림 반 푼없는 이야기지. 노부는 외할아버지의 자격으로

끝까지 그녀를 보호해 주기로 작정했다."

황의인은 냉엄한 눈으로 남포노인을 바라보다가 침착한

음성으로 말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상관노사같은 분께서 사사로운

정(情)때문에 노주인에게 등을 돌리려 하시다니..."

남포노인의 눈빛이 스산하게 변했다.

"자꾸 노주인 노주인 하지마라. 네 놈들에게는

노주인일지 몰라도 노부에게는 그저 동방늙은이일

뿐이다."

황의인의 태도는 어디까지나 흔들리지 않았다.

"후회하시게 될 겁니다."

"미친 놈. 노부가 누구인지 알고 함부로 그따위 소리를

지껄이는거냐?"

바로 그때였다.

어디선가 올빼미가 울부짖는 듯한 듣기 거북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크크녠....상관노괴! 몇 년 안본 사이에 담이 커졌군.

감히 노주(老主)께 대항하려 하다니..."

동시에 붉은 배위에서 다시 두 개의 인영이 선상으로

날아올랐다.

나타난 사람들을 보자 냉정을 잃지 않았던 남포노인의

안색도 가볍게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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