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2 장 당 신 을 다 시 찾 아 오 겠 소
1
이제 장내에 살아있는 사람이라고는 귀왕곡의 곡주인
풍일립과 혁련광 뿐이었다.
채 반 시진도 되지 않는 은 순간에 강호무림의 최절정
고수 다섯 명이 차가운 시신이 되어 쓰러져 버린 것이다.
풍일립의 주름진 얼굴이 가볍게 떨렸다.
태사의를 움켜쥔 그의 손은 얼마나 세게 움켜쥐었는지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그가 오늘 본 광경은 팔십 평생 처음 보는 끔찍하고
처참한 살인극(殺人劇)이었다.
노독행이 자신을 향해 몸을 돌렸을 때 풍일립은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한 가지 제안을 하겠네."
그는 음성이 떨려나오지 않도록 조심했다.
이런 곳에서 약세를 보였다가는 상황을 훨씬 악화시키게
된다는 것을 오랜 경험으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노독행은 말없이 천천히 다가왔다.
풍일립의 이마에 땀이 고이기 시작했다.
"자네가 이대로 물러난다면 본곡(本谷)에서는
지금까지의 모든 일을 불문(不問)에 붙이고 영원히 자네의
일에 개입하지 않겠네."
노독행은 여전히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풍일립은 급히 말을 이었다.
"아울러 두 번 다시 무림에 등장하거나 천상회의 일에
협조하는 일도 없을걸세. 노부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
아마 다른 사람이 이 말을 들었다면 자신의 귀를
의심했을 것이다.
천하에 명성이 자자한 귀왕곡주가 단 한 사람이
두려워서 거의 일방적인 항복에 가까운 제안을 하고 있는
것이다.
웬만한 고수였다면 귀왕곡주에게서 이런 제안을 받은
것에 만족을 하고 물러섰을 것이다. 아무리 사나운
고양이라도 궁한 쥐는 쫓지 않는 법이다.
하나 아쉽게도 상대는 노독행이었다.
노독행은 남에게 빚을 지는 것도 싫어했고, 남이
자신에게 빚을 지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고 일단
빚을 졌으면 그것을 갚지 않고는 도저히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그는 단순한 사람이었다.
한 번 결심한 일은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해치우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는 원래 귀왕곡과는 아무런 은원관계도 없었다.
그가 귀왕곡에 온 것은 단지 이곳으로 도망친 북리강을
쫓아온 것 뿐이다.
그런데 그들은 사람을 매복시켜 자신을 죽이려 했다.
그들이 자신을 죽이려 했으므로 자신도 그들을 죽여야
한다.
이것이 바로 노독행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아무도 그의 이 생각을 바꿀 수는 없었다.
풍일립이 그것을 깨달은 것은 노독행이 자신의 지척까지
다가왔을 때였다.
그의 외눈에서 흘러나오는 그 냉혹무정한 눈빛을 보자
풍일립은 더 이상의 어떤 말도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등골이 싸늘하게 식어지며 손에 땀이 고이는 것을
느꼈다.
애초에 이런 자와 원한을 맺은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이었다.
하지만 수십년 동안 피땀을 흘려 쌓아올린 귀왕곡의
명예를 이대로 날려버릴 수는 없는 일 아닌가?
풍일립은 슬쩍 혁련광을 돌아보았다.
그때 마침 혁련광도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풍일립은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떠올렸다.
"자네에게 미안하군. 노부의 순간의 실수로 자네까지
위험에 처하게 했으니 말일세."
혁련광은 고개를 저었다.
"형님은 아무런 잘못도 없습니다. 원래 일이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 뿐입니다."
그의 얼굴이 온통 백포로 감겨 있기 때문인지 음성도
침침하게 가라앉은 느낌을 주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상당히 맑고 낭랑했을 음성이었다.
풍일립은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사실은...언제고 자네에게 말하려고 했네만..."
혁련광의 시선이 그의 입을 주시했다.
풍일립은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동안 나를 믿고 따라주어서 정말 고마웠네. 이 말을
꼭 하고 싶었네."
"형님..."
혁련광의 음성이 가늘게 떨렸다.
풍일립은 미소를 지으려고 애를 썼으나 잘 되지 않았다.
"더 늦기 전에 자네에게 말하고 싶었네."
혁련광은 마음이 격해진 듯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풍일립은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그런 다음 고개를 돌려 노독행을 바라보았다.
"자. 그럼 저 자에게 귀왕쌍존(鬼王雙尊)의 실력을
보여주기로 하세."
그의 음성과 태도는 예전의 냉정함을 되찾은 것 같았다.
혁련광도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지요."
두 사람은 몸을 날려 노독행의 앞뒤에 내려섰다.
노독행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는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찌보면 그는 전혀 아무런 인간적인 감정도 지니지
않은 냉혈(冷血)의 철인(鐵人)같았다. 기쁘고, 슬퍼하고,
화내고 즐거워하는 모든 감정을 상실한 사람같았다.
이런 자에게 자비를 구하거나 인정(人情)을 바란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노독행의 앞에 서서 그의 무정한 눈을 보고 풍일립은
새삼 그것을 깨달았다.
하나 그도 이미 두려움따위는 느끼지 않았다.
이미 혁련광과 시선을 주고 받았을 때부터 죽음을
각오한 그였다.
어차피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일곡(一谷)의
주인답게 죽고 싶었다.
그는 양손에 공력을 가득 끌어올린 채 형형한 안광이
번뜩이는 눈으로 노독행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혁련광 또한 언제 뽑아들었는지 회초리처럼 기다란
장검을 오른손에 든 채 먹이를 노리는 한 마리 매처럼
날카롭게 노독행을 쏘아보고 있었다.
장내의 공기가 급격하게 식어지며 싸늘한 살기가
퍼져나갔다.
일촉즉발의 팽팽한 순간,
갑자기 외마디 호통과 함께 대청의 입구에 두 개의
인영이 어른거렸다.
"잠깐, 여길 봐라!"
대청 입구에 나타난 인영을 보자 풍일립의 냉정하게
굳어있던 얼굴이 홱 변했다.
"조산. 네가 여기는 왠 일이냐?"
나타난 인영중 하나는 바로 풍조산이었다.
풍조산은 다른 한 인영의 목덜미를 움켜잡은 채 검으로
그 자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풍조산에게 목을 잡힌 채 질질 끌려 들어오고 있는
인영은 홍초혜 엽동이었다. 엽동은 노독행과 시선이
마주치자 어깨를 으쓱거리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조금전에 엽동은 표향령주의 행방을 찾아보겠다며
노독행과 떨어져 귀왕곡의 내부로 들어갔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풍조산에게 종적이 발각되어 그의 손에
사로잡히게 된 모양이었다.
풍조산은 평상시의 그답지 않게 안면에 싸늘한 빛을
띠운 채 노독행을 노려보았다.
"손을 멈추고 물러나라. 그렇지 않으면 여기 있는 이
자를 죽이겠다."
그는 자신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듯 손에 잡은 검에
약간 힘을 주었다.
그러자 엽동의 목이 조금 갈라지며 선혈이 주르르 흘러
내렸다.
엽동은 안색이 창백해진 채 애원하는 눈으로 노독행을
바라보았다.
하나 노독행의 눈빛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풍일립은 안색이 대변해 풍조산을 바라보며 호통을
질렀다.
"조산. 이게 무슨 짓이냐?"
풍조산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아버지. 이 자는 저 놈과 일행이 분명합니다. 이 자가
제 수중에 있는 한 아버지를 해치지는 못할 겁니다."
풍일립의 눈꼬리가 덜덜 떨렸다.
"이...이 바보같은 놈! 어서 손을 거두지 못하겠느냐?"
그가 안면근육까지 부들부들 떤 채 고함을 지르자
풍조산은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아버지...."
"네가 나를 아버지라고 생각한다면 지금 당장 검을
거두고 물러나라. 어서!"
풍일립이 펄펄 뛸수록 풍조산은 영문을 몰라 더욱
망설이는 표정이었다.
보다 못한 혁련광이 황급히 입을 열었다.
"조산아. 형님은 네가 걱정되어서 그런다. 저 자는 그런
일로 동요될 자가 아니니 어서 그를 풀어주고 물러나라."
풍조산은 혁련광마저 그렇게 말하자 더욱 당황했다.
그가 지금 풍일립의 애타는 심정을 어찌 알겠는가?
풍일립은 노독행이 이런 일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인물이라는 것을 똑똑이 알고 있었다. 자칫 하다가
노독행의 분노를 사서 풍조산에게까지 해가 끼친다면 그의
가문은 영영 대(代)가 끊어지고 마는 것이 아닌가?
"아버지...."
풍조산이 계속 머뭇거리자 풍일립이 그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는 풍조산의 손에서 검을 빼앗더니 그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
"이 어리석은 놈!"
쫘악!
풍조산의 고개가 홱 돌아가며 그의 입가에 한 줄기
선혈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풍조산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멀거니
풍일립을 응시했다. 태어나서 아버지에게 맞아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풍일립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만큼 애지중지했던
아들의 입에서 피가 흘러나오자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팠으나 내색하지 않고 싸늘하게 호통을 쳤다.
"어서 빨리 이 분께 사과하고 물러나지 못할까?"
풍조산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며 두 눈이 시뻘게졌다.
"아버지...남자는 절대로 남에게 굽신거려서는 안된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던 아버지께서 왜 이런 행동을
하십니까? 소자는...소자는 정말..."
그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떨구었다.
풍일립은 도저히 그 모습을 더 지켜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급히 고개를 돌리며 풍조산의 손에 잡혀 있던
엽동의 혈도를 풀어주었다.
"미안하게 되었네. 자네는 혹시 홍초혜 엽동이 아닌가?"
엽동은 풍일립의 돌연한 행동에 움찔거리다가 포권을
했다.
"제가 바로 엽동입니다."
풍일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사마표향을 찾아온 것이라면 본곡의 뒤쪽에
있는 취향각(聚香閣)으로 가보게. 그녀와 엽표는 그곳에
있을걸세."
제법 자상하게 말하는 풍일립은 도저히 소문으로만 듣던
그 무시무시한 귀왕곡의 주인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엽동은 완전히 귀신에 홀린 심정이 되어 아무런 말도
못하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풍일립은 다시 노독행의 앞으로 걸어왔다.
"이번 일은 전적으로 노부의 불찰이네. 저 아이는 이번
일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니 개입시키지 말게."
조심스럽게 노독행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여는 풍일립의
모습에서 과거 위풍당당했던 귀왕곡주 귀지귀왕의 모습은
찾아볼 길이 없었다.
그는 한낮 아들의 안위를 염려하는 걱정많은 노인에
불과할 뿐이었다.
노독행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묵묵히 서 있었다.
그때 한쪽에 서 있던 풍조산이 얼굴이 시뻘겋게 변한 채
소리를 질렀다.
"아버지! 그 놈에게 사정하지 마십시오. 전 죽어도 그
놈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겠습니다!"
풍일립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지며 무서운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풍조산은 풍일립의 표정을 보자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았다.
그는 이토록 살벌한 아버지의 모습을 여지껏 본 적이
없었다.
풍일립은 한광(寒光)이 뿜어나오는 눈으로 풍조산을
노려보며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너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곳에서 꼼짝도 하지 말아라.
만약에 네가 이번에도 내 말을 거역한다면....너는 내
자식이 아니다!"
내 자식이 아니다 라는 말을 듣자 풍조산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제서야 그는 풍일립이 지금 얼마나 절박한 심정인지
어렴풋이나마 깨닫게 된 것이다.
아버지는 이 자가 두려운 것이다.
이 자가 자신을 해칠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아버지가 자신때문에 얼마나 마음을 졸였을가를
생각하니 그의 가슴속에는 뜨거운 그 무엇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아울러 지금까지 자만에 빠져서 방탕한 생활을 일삼아
왔던 과거가 미치도록 후회스러웠다.
자신의 무공이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적어도 아버지는 저런 모습은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은 왜 진작에 좀 더 무공에 전념하지 못했었을까?
하나 아무리 자책해도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가
없었다.
풍조산이 힘없이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풍일립의
마음속에도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이 녀석. 이제는 정말 너 혼자 뿐이다. 이 아비는 이젠
더 이상 너를 돌봐줄 수가 없다.'
그는 한 번 더 각별한 눈으로 풍조산을 본 후 몸을
돌렸다.
이어 노독행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자. 이제 우리 사이의 일을 매듭지으세."
그는 혹시라도 노독행이 풍조산에게 살심(殺心)을
품을까봐 황급히 혁련광에게 눈짓을 했다.
혁련광도 그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즉시 수중에 든
활사구검(活蛇口劍)을 힘껏 움켜잡은 채 노독행을
응시했다.
그러다가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거의 동시에
노독행을 향해서 달려들었다.
2
풍조산은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
그의 아버지와 하나뿐인 숙부는 이미 질펀한 피바다속에
쓰러져 있었다.
그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지던 광경을 풍조산은 잊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악몽과도 같은 광경이었다.
아버지의 구환마지(九環魔指)가 그토록 빠르게
날아들고, 숙부의 활사구검이 그토록 영활하게
움직였는데도 그 악마같은 사나이의 손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 자의 주먹에 부딪친 아버지의 아홉 손가락은 모두
부러져 나갔고, 이어서 그 자의 어깨가 아버지의 가슴팍을
송두리째 박살내었다.
숙부의 죽음은 더욱 처참했다.
숙부는 내뻗었던 활사구검을 미처 거두지도 못한 채 그
자의 팔꿈치에 거푸 다섯 번이나 아랫배를 강타당한 채
허물어지듯 쓰러지고 말았다.
그때 바닥에 나뒹굴던 숙부의 두 눈이 왜 그렇게
고통스러워 보였는지...
아버지의 얼굴은 차마 보지 못했다.
볼 수가 없었다.
그 피로 물들어진 얼굴을 보기만 해도 그는 그대로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그는 천천히 붉게 충혈된 눈을 들어 한 사람의 모습을
찾았다.
있었다.
그 악마같은 사나이는 어느 새 그에게서 멀지 않은
곳까지 다가와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 자의 외눈과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분노와 허탈한
슬픔에 가득찼던 풍조산의 마음에도 한 줄기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이 자는 나를 죽일 셈인가?'
죽는 것은 두렵지 않다.
하지만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대로 아버지의 원한도 갚지 못한 채 죽는 것은 너무도
억울한 일이다.
아버지도 그랬을까?
아버지도 내가 원한을 갚지 못하고 개죽음 당할 것이
자신의 죽음보다도 더 두려웠을까?
풍조산의 손끝이 덜덜 떨렸다.
그때 그 자의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복수하고 싶나?"
괴이한 음성이었다.
마치 고목나무를 갉는 듯한 탁하고 쉰 것 같은
음성이었다. 그런데도 듣는 순간 머리끝이 쭈삣해지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풍조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자가 자신을 당장 죽인다고 해도 비굴한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살아서 아버지의 당당한 아들이 되지 못했다면
죽어서라도 당당한 아들이 되고 싶었다.
한데 그 자의 다음 말이 그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복수를 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찾아와. 하지만 올 때는
죽을 각오를 하고 와야돼."
풍조산은 처음에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는 멀거니 사나이를 쳐다보다가 그 눈을 보자
그제서야 사나이가 농담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렸다.
이 자는 지금 나를 살려주려고 하고 있다.
나는 지금 죽지 않아도 된다.
나는....복수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는 한 번 더 확인하려는 듯 사나이를 쳐다보았다.
하나 그럴 필요가 없었다.
어느 새 사나이는 등을 돌린 채 저만큼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 크지 않은 몸집이었는데도 그의 뒷등은 어마어마한
거인이 걸어가는 듯한 착각이 들게 했다.
풍조산은 두 눈을 번뜩인 채 그의 등을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다가 아버지가 쓰러진 곳으로 다가갔다.
피바다속에 누워 있는 아버지의 시신은 고통에 가득찬
것이었다.
그는 속으로 피눈물을 삼키며 아버지의 시신을 가슴에
안았다.
마지막으로 대청을 벗어나기 직전, 그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사나이를 돌아보았다.
"당신의 이름은?"
사나이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말했다.
"노독행."
"노독행...."
풍조산은 그의 이름을 나직하게 되뇌었다.
마치 마음 깊숙한 곳에 영원히 새겨두려는 듯.
그리고는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반드시 당신을 다시 찾아오겠소. 그때까지는
절대로 죽지 마시오."
사나이는 짤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풍조산은 한 번 더 그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본 후
서슴없이 몸을 돌려 대청을 벗어났다.
아버지의 시신을 안고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은 더 이상
나약하고 방탕한 귀공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복수의
한(恨)을 가슴에 묻고 칼을 가는 무인(武人)의 모습인
것이다.
노독행은 엽동에게로 다가갔다.
노독행과 시선이 마주치자 엽동은 어색하게 웃었다.
"번번히 폐를 끼치는구료."
노독행은 그 말에는 대꾸하지 않고 불쑥 물었다.
"왜 그랬지?"
엽동은 몸을 움찔했다.
"왜라니?"
노독행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왜 그에게 잡혔나?"
엽동의 몸이 가볍게 떨렸다. 그는 힐끗 노독행을
바라보다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내가 일부러 그에게 잡혔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소?"
"그의 실력으로는 결코 당신을 발견할 수가 없어."
엽동은 추적에 관한한 누구나가 인정하는 당금 무림의
제일인자(第一人者)였다.
추적의 달인(達人)이라면 당연히 다른 사람의
추적으로부터 몸을 피하는 것에도 일가견이 있기
마련이다.
엽동이 일부러 풍조산에게 사로잡힐 생각이 아니었다면
풍조산으로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를 잡을 수 없었을
것이다.
엽동은 새삼 노독행의 예리한 눈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사람은 단순히 무공만 강한 것이 아니라 날카로운
판단력과 비수처럼 예리한 이성(理性)을 지니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어느 순간에도 결코 냉정을 잃지 않는다는
것이 이 자의 가장 무서운 점이었다.
그것을 알지 않고서는 진정으로 이 자를 안다고 할 수가
없었다.
엽동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풍조산은 사실 그리 악한 사람이 아니오."
노독행은 말없이 그를 응시했다.
엽동은 그의 시선이 거북한 듯 까치집같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의 아버지가 그를 잘못키워 버릇이 조금 나쁘기는
했지만 그래도 본성은 괜찮은 청년이오. 무엇보다도..."
엽동의 눈이 반짝거렸다.
"그는 영주(令主)에게 잘 대해 주었소."
노독행은 불쑥 물었다.
"그녀를 찾았나?"
엽동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그리 어렵지 않았지. 조금전에 풍일립이
말한 대로 후원의 취향각에 있었소."
"......!"
"그 취향각은 풍조산이 그녀를 위해서 특별히 새로 지은
것이오. 아주 아름답고 호화로운 누각이어서 그가
그녀에게 얼마나 세심한 정성을 기울였는지 여실히 알 수
있더군."
"그래서 그를 도와주려고 생각했나?"
"처음부터 그러려고 했던 것은 아니오. 단지 풍조산이
아버지를 구하려고 안절부절하는 모습이 안쓰러워서 잠깐
그의 인질이 되어 주었던거요."
노독행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희미하게 웃었다.
"별로 좋은 생각은 아니었어."
엽동은 멋적은 듯 따라 웃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하나 노독행의 다음 말을 듣자 그의 웃음은 그대로
멈춰지고 말았다.
"한 번만 더 그런 일을 하면 내 손으로 직접 당신을
죽일거야."
엽동은 노독행을 바라보았다.
노독행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하나 그 미소를 보자 엽동은 도저히 더 이상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떨리는 음성으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앞으로 그런 일은 없을거요."
노독행은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그때 대청앞에 다시 하나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그리고 들려오는 음성 하나.
"당신이었군요."
묘한 분위기의 나직한 저음.
'그녀'의 음성이었다.
노독행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