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보건곤 1부(하) - 용대운 저
제 21 장 어 떤 기 분 인 지 알 겠 지 ?
1
노독행의 몸이 앞으로 움직였다.
그는 피하지 않고 무서운 속도로 자신을 향해 쏘아져
오는 전충의 몸과 정면으로 어깨를 부딪쳐 갔다.
전충의 입꼬리에 악독한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흐흐...이 놈! 걸렸다!'
그는 자신의 합마공에 절대적인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노독행이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오자 이건 끝난
승부라고 생각했다.
그는 공력을 십성까지 끌어올린 채 더욱 빠르게 돌진해
들어왔다.
마침내 그의 어깨와 노독행의 어깨가 허공에서 정면으로
격돌했다.
쾅!
엄청난 폭음이 터지며 거대한 대청이 금시라도 무너질
듯 뒤흔들렸다. 동시에 하나의 인영이 빛살같은 속도로
튕겨져 나갔다.
중인들의 눈이 부릅떠졌다.
십 여장 밖으로 튕겨져 나가는 인영은 다름아닌 독시봉
전충이 아닌가?
그토록 기세등등하게 날아들었던 전충의 몸은 날아올
때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뒤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전충의 몸이 격퇴됨과 동시에 등뒤에서 날아들던
장문귀의 쌍장은 정확하게 노독행의 등판에 작렬했다.
아니, 작렬한 것처럼 보였다.
그 순간 노독행의 몸은 어느 새 뒤로 돌아 장문귀의
쌍장을 어깨로 받아내고 있었다. 그의 몸이 어찌나 빨리
돌았는지 중인들의 눈에는 순간적으로 그의 몸이 앞뒤가
똑같은 것같은 착각이 들었다.
장문귀는 자신이 노리고 있던 노독행의 등판이 돌연
사라지며 그의 어깨가 불쑥 다가오자 흠칫 놀라 옆으로
몸을 비틀었다.
아마 다른 고수였다면 제아무리 신법이 빠르다고 해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나 장문귀는 하체를 고정시키고
허리와 상체만을 이용하여 움직이기 때문에 몸의 움직임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민첩했다.
이것은 도영섭허(蹈影攝虛)라는 것으로 마도에서도
손꼽히는 절정의 신법(身法)이었다.
하나 장문귀의 몸이 옆으로 틀어지는 순간에 노독행의
몸은 어느 새 그의 옆으로 바짝 다가오고 있었다.
장문귀의 몸이 다시 한 차례 휘청거렸다.
그러자 분명히 노독행의 앞에 있던 그의 몸이 뒤쪽에 가
있는 것이 아닌가?
노독행의 몸이 순간적으로 멈칫거렸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장문귀의 쌍장이 날아들었다.
꽈릉!
시커멓게 변한 두 개의 손이 두 가닥 뇌전(雷電)처럼
노독행의 척추를 향해 다가왔다.
그 손이 막 노독행의 척추뼈를 조각조각 내려는 순간,
스윽!
우뚝 서 있던 노독행의 몸이 뒤로 확 밀려왔다.
인간은 신체 구조상 앞으로는 얼마든지 빨리 움직일 수
있어도 뒤로는 행동에 상당한 제약을 받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노독행의 몸이 뒤로 날아오는 속도는 앞으로
돌진할 때와 조금도 차이가 없었다.
장문귀는 깜짝 놀랐으나 피할 사이도 없이 그의 양 손은
노독행의 철탑같이 강한 등판과 부딪치고 말았다.
펑!
흑마수(黑魔手)로 단련된 손이었는데도 노독행의 등판과
부딪치는 순간 그는 손이 으스러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그 통증이 등골을 타고 뇌에 전해지기도 전에 노독행의
몸이 빙글 돌며 왼쪽 팔꿈치가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이것은 무쌍류의 가공할 철주(鐵 )공격중 하나인
반선철주(半旋鐵 )였다. 그 위력은 황소라도 단번에
숨통을 끊어 버릴 만큼 강맹한 것으로, 일단 격중되기만
하면 인간의 몸으로는 도저히 견딜 수 없게 된다.
장문귀는 급히 고정시켰던 하체를 풀어 뒤로 훌쩍
물러났다.
그의 길다란 다리가 한 번 움직이자 거의 오 장이나
이동되었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거미가 성큼성큼 움직이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노독행은 팔꿈치를 거둔 채 오 장뒤로 물러나 있는
장문귀를 바라보며 웃었다.
장문귀는 비록 노독행의 살인적인 팔꿈치공격은
피해냈으나 양 손바닥이 퉁퉁 부어올라 진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그의 흑마수는 금석(金石)이라도 두부처럼 으깨버리는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런 꼴을 면치 못한
것이다.
그는 인간의 몸뚱아리가 이렇게 단단하리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때 웃고 있는 노독행의 등뒤로 무언가 강력한 기운이
빠르게 다가왔다.
그것은 독시봉 전충이었다.
놀랍게도 십 여장 밖으로 튕겨져 나갔던 전충의 몸이
바닥을 박차고 그 탄력을 이용해 다시 돌진해 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그 속도는 처음보다 배는 빠른 것 같았다.
노독행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이번에도 그는 피하지 않고 오른쪽 어깨로 전충을
받아쳤다.
쾅!
전충의 몸은 다시 나가 떨어졌다.
하나 바닥에 닿았다가 튀어 오르는 고무공처럼 그의
몸은 또 다시 노독행을 향해 쏘아오고 있었다.
노독행이 출도한 이래 그의 고산팔벽 공격을 당하고도
쓰러지지 않은 것은 전충이 처음이었다.
전충이 노독행의 철산벽에 두 번이나 부딪치고도 다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물론 그의 특이한 합마공
때문이었다.
노독행은 이번에도 역시 피하지 않았다.
그의 어깨와 전충의 몸이 세 번째로 격돌을 했다.
하나 막 어깨와 어깨가 부딪치려는 순간,
빙글!
노독행의 몸이 미끄러지듯 전충의 몸을 비껴가며 그의
뒤로 돌아갔다.
전충은 그때 사력을 다해 돌진해오고 있었기 때문에
도저히 노독행의 움직임을 예측하거나 제지할 수가
없었다.
전충의 뒤로 돌아간 노독행은 양 손으로 그의 허리를
움켜잡고 한쪽 다리로 그의 하체를 휘감은 채 그대로 몸을
뒤로 제껴 머리뒤로 땅에 내리꽂았다.
피하고 자시고 할 사이도 없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쾅!
전충의 뚱뚱한 몸이 머리부터 거꾸로 바닥에 쳐박혔다.
그의 머리는 두꺼운 청석(靑石)으로 된 바닥을 반이나
뚫고 들어갔다.
노독행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확인해 볼 것도 없이 그는 전충의 목뼈가 부러져
즉사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목은 인간의 신체중에서 가장 약한 부위중 하나였다.
합마공으로 비록 몸은 보호할 수 있을지언정 목과
머리까지 보호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방금 노독행이 사용한 것은 무쌍류의 근접격투기술중
하나인 법륜구전(法輪九轉)중의 음양전도(陰陽轉倒)라는
수법이었다.
이것은 정면에서 공격해 오는 상대의 힘을 이용해
되치는 수법으로, 상대의 공격해 오는 힘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 타격은 더욱 증대하게 된다.
단순한 동작같아도 이것을 완벽하게 시전하기 위해서는
상대의 몸보다 훨씬 빨리 움직여야 할 뿐 아니라, 두 팔로
상대의 상체를 제압하고 다리로 하체를 제압하여 상대로
하여금 반격하거나 피할 여지를 전혀 없애야 하기 때문에
상당한 수련과 적절한 시기의 선택이 필요하다.
쿵!
거꾸로 쳐박혀 있던 전충의 몸이 이제서야 바닥에
쓰러졌다.
그의 머리는 거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뭉개져
있었다.
구멍뚫린 청석 바닥은 그의 머리에서 흘러나오는 핏물이
가득 고여 있었고, 주변이 완전히 피바다로 변해 있었다.
장문귀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몸을 부들부들 떤
채 전충의 처참한 시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충과 장문귀는 이미 수십 년동안 바늘과 실처럼
붙어다니며 온갖 어려움을 헤쳐온 사이였다. 친혈육보다도
더욱 가까웠던 전충의 비참한 죽음을 보자 장문귀는 거의
이성(理性)을 잃을 정도로 분노했다.
하나 분노로 모든게 해결되는 것이 아님은 장문귀도 잘
알고 있었다.
조금전에 부딪친 일전(一戰)과 전충의 죽음으로 그는
노독행이 어떤 사람인지를 똑똑히 알게 되었다.
'나 혼자로는 이 놈의 적수가 될 수 없다!'
장문귀의 시선이 한쪽에 서 있는 영호명에게로 향했다.
영호명은 즉시 장문귀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곽일로와
북리강에게 눈짓을 했다.
제일 먼저 곽일로가 혈검을 뽑아들고 노독행의 좌측으로
다가갔다. 이어서 북리강이 머뭇거리다가 노독행의 등뒤로
접근했고 제일 마지막으로 영호명이 어슬렁거리며
노독행의 앞으로 걸어갔다.
노독행의 우측에 서 있는 장문귀 까지 합하면 완벽한
사위합격진(四圍合擊陣)의 모양이 갖춰진 셈이었다.
노독행은 다른 세 사람은 쳐다보지도 않고 자신의
정면으로 걸어오고 있는 영호명을 보며 웃었다.
"당신이 마음에 들어."
영호명은 노독행이 말하는 의도를 정확히 알 수가 없어
눈쌀을 살짝 찌푸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노독행은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자신이 한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거든."
영호명은 그제서야 노독행의 말뜻을 알 수 있었다.
팔 년전에 영호명은 노독행을 향해 단 일도(一刀)만을
사용하겠다고 했다.
그는 한 번 칼을 휘둘렀고, 노독행은 몸으로 그 일도를
받았다.
그리고 영호명은 약속대로 그에게 더 이상 칼을
휘두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 영호명이 한 번만 더 칼질을 했다면 오늘 노독행은
이 자리에 서 있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그 일로 빚을 졌다고 생각한 것일까?
"그래서 나도 한 가지를 약속하지."
노독행의 조용한 음성을 들으며 영호명은 한 가닥
기대를 품게 되었다.
이 자는 빚을 갚으려 하는 것일까?
노독행의 외눈에서 흘러나오는 빛은 전혀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음성 또한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오늘 당신이 내 손에서 살아난다면 두 번 다시 당신을
찾지 않겠어."
영호명은 잠깐이나마 헛된 기대를 품었던 자신이 우습게
생각되었다.
결국 노독행은 빚을 갚기는 갚은 셈이었다.
자기 식(式)으로 말이다.
노독행은 이런 사람이었다.
영호명은 이상하게 담담한 심정이었다.
영호명의 나이는 올해 마흔 다섯.
처음 칼을 잡은 것은 일곱 살때였다.
그의 사부는 마도의 오대도객(五大刀客)중 하나인
혈전도(血電刀) 냉수독(冷壽獨)이었다.
영호명은 어려서 부터 무공에 천부적인 재질을 발휘하여
냉수독의 네 명의 제자들중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그의 나이 열 일곱 살때 처음으로 강호에 출도했다. 삼
년동안 그는 스물 일곱 번을 싸워 스물 여섯 번을 이겼다.
그의 유일한 패배는 강북제일쾌도(江北第一快刀)라
불리웠던 전궁무영도(電穹無影刀) 한시민(韓施悶)에게
당한 것이었다.
영호명은 그 패배에 충격을 받고 그 길로 심산에 파묻혀
미친 듯이 도법을 연마했다.
오년 후인 스물 다섯 살 때 강호에 재출도했을 때는
그는 사부인 냉수독을 훨씬 능가하는 절정의 도객이 되어
있었다.
그는 다시 한시민에게 도전을 했고 불과 십 이초만에
그의 오른팔을 잘라 혁혁한 명성을 날리게 되었다.
그로부터 삼 년후에 그는 몇 명의 뜻이 맞는 고수들을
규합해 장홍파(長紅派)를 조직했다.
전체 인원은 자신을 포함하여 일곱 명.
단 칠인(七人)뿐이었으나 그들은 하나같이 무서운
능력을 지닌 절정고수들이었기 때문에 아무도 장홍파를
무시하지 못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그들을 장홍칠절이라
부르게 되었다.
낙백도(落魄刀)라는 자신의 외호도
홍도낙백(紅刀落魄)으로 바뀌었고, 다른 여섯 사람도 각각
장홍칠절에 어울리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십 년 전에 영호명은 자신의 인생에 새로운 계기를 맞게
될 인물을 만났다.
그가 바로 천상회의 총호법이었다.
영호명은 첫 대면때부터 그에게 심복(心服)되었으며,
머지않아 그의 휘하세력중 하나가 되었다.
그로부터 얼마후에 영호명은 총호법으로부터 첫 번째
지시를 받게 되었다.
어떤 장소로 가서 한 사람을 죽이라는 것이었다.
상대가 겨우 열 일곱 살의 무공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어린 소년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영호명은 내심 불만에 차
있었다.
하나 총호법은 그 일이 결코 쉽지 않을거라고 말했다.
그 소년이 아주 특이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영호명은 호기심을 느꼈고, 장홍칠절의 다른 여섯
사람을 풀어 완벽한 포위망을 구축했다.
그들은 거의 절대적인 자신이 있었다.
설사 그들보다 뛰어난 무공을 지닌 고수라 할지라도
해치울 수 있다고 믿었다. 하물며 정식으로 무공도 배우지
못한 열일곱 살의 어린 소년쯤이야....
하나 결과는 그들의 예상을 완전히 뒤집는 것이었다.
그들은 전력을 기울였는데도 소년을 해치우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둘이나 부상을 당했다.
영호명이 절벽밑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만에 하나
소년이 절벽에서 떨어졌을 때 그 시체를 직접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절벽 아래에서 소년을 처음 보았을 때 영호명은 솔직히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도저히 살아있는 사람의 몰골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소년은 자신의 옆구리에 박혀 있던 장검을
뽑아 들고 그에게 맞서려고 했다.
그때 비로소 그는 총호법이 한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소년은 여지껏 그가 만났던 사람중에서 가장 괴이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때 영호명의 가슴속에 스치고 지나간 감정을 무어라고
해야할까...
나중에야 영호명은 그때 자신이 느꼈던 감정이
두려움이었다고 솔직하게 인정을 했다.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들이 뒤섞여 있었지만 어쨌든
가장 큰 감정은 두려움, 그리고 공포였다.
그때 그는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그 애꾸의 소년이
두려웠던 것이다.
인간인 이상 그도 두려움을 느낄 수는 있었다.
하지만 이런 소년에게서 두려움을 느끼게 될 줄은
영호명으로서도 짐작조차 못한 일이었다.
그는 그 생각을 떨치기 위해 전력으로 칼을 휘둘렀다.
그의 칼은 정확했다.
소년의 아랫배는 길게 갈라진 채 내장이 삐져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도 소년은 쓰러지지 않았다.
영호명은 더 손을 쓰고 싶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죽이지 않는다면 자신에게는 영원히 기회가 없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더 이상 손을 쓸 수가 없었다.
갑자기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 소년이 어디까지 가는지를....
몇 년후에 소년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보고 싶었던
것이다.
우스운 생각이었으나 그때 영호명은 그랬다.
그것은 호랑이를 무서워 하면서도 호랑이 새끼를 보면
키우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심리와 크게 다를 바가 없는
것이었다.
그 소년은 영호명이 만난 가장 괴이한 인물이었다.
소년은 과연 어디까지 성장할 것인가?
몇 년후에 자신은 과연 완전하게 성장한 호랑이를 볼 수
있을 것인가?
지난 팔 년동안 그에게는 그것이 가장 큰 의문이었다.
그리고 이제....
영호명은 보았다.
살아있는, 막연히 상상으로만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무섭고 잔인한 괴물의 모습을...
호랑이를 보려고 했는데 그는 괴물을 보고 만 것이다.
2
한 자루의 칼, 한 자루의 검, 한 쌍의 손, 그리고 여덟
개의 유엽비수.
모두 열 두 개의 살인흉기들이 동시에 움직였다.
그것은 차라리 아름다워 보였다.
파파파파....
장내는 온통 도풍(刀風)과 장영(掌影), 그리고 폭발치는
듯한 검광(劍光)에 휩싸여 버렸다.
설사 대라동인(大羅銅人)이라 해도 그 속에서는 살아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 속에는 지금 피와 살로 이루어진 하나의 인간이
있었다.
단지 그 인간은 여타 인간과는 조금 다른
별종인간(別種人間)이었을 뿐이다.
가장 먼저 노독행의 몸으로 접근한 것은 북리궁이 던진
여덟 개의 유엽비수였다.
유엽비수의 날아오는 방위는 완벽한 것이었다. 노독행이
피할 수 있는 모든 범위가 포함되어 있었다.
더구나 등뒤에서 날아오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피하기가
불가능해 보였다.
합공을 당했을 때 가장 상대하기 까다로운 것이 바로
이와같이 등뒤로 날아오는 암기(暗器)였다.
소리없이 다가오기 때문에 막기가 까다로울 뿐 아니라
자칫 그것에만 신경을 썼다가는 다른 공격에 맥없이
당하기기가 십상이었다.
그렇다고 조금이라도 소홀히 했다가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부담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과연, 유엽비수와 함께 곽일로의 장검과 장문귀의
흑마수도 어느 새 노독행의 좌우측을 압박해 들어오고
있었다.
노독행의 몸은 곧장 앞으로 움직였다.
그의 앞에는 영호명의 붉은 칼이 눈부신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노독행은 서슴없이 그 붉은 도영(刀影)속으로
뛰어들었다.
파파팍!
영호명의 도가 빛발처럼 노독행의 전신으로 퍼부어졌다.
노독행의 앞 가슴이 피투성이로 변하려는 찰나,
스윽!
그의 몸이 쭈욱 길어진 듯한 착각이 들더니 어느 새
영호명의 뒤로 이동했다.
그것은 정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분명히 곧장 앞으로 돌진해 왔던 노독행의 몸이 마치
벽을 뚫고 지나가듯 영호명의 몸을 통과해 그의 뒤에 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무쌍류의 비전보법(秘傳步法)인
수미육합(須彌六合)임을 영호명이 어찌 알겠는가?
수미란 찰나의 순간을 말한다.
육합이란 하늘과 땅, 동서남북이다. 즉 천하(天下)를
가리키는 것이다.
수미육합이란 다시 말해서 찰나의 순간에
천지사방(天地四方)을 움직일 수 있다는 뜻이다.
영호명은 금시라도 자신의 칼에 피를 뿌리고 쓰러질 줄
알았던 노독행의 몸이 마치 허깨비처럼 사라지고 대신에
북리강이 날렸던 여덟 개의 유엽비수가 자신의 코앞으로
날아들자 안색이 대변해 황급히 칼을 휘둘렀다.
따따땅!
연속적인 마찰음이 터지며 무서운 속도로 날아들던 일곱
개의 비수가 빛을 잃고 사방으로 튕겨져 나갔다.
하나 그중 하나의 유엽비수는 그의 왼쪽 팔뚝에
사정없이 틀어박혔다.
콱!
'윽!'
영호명은 이를 악문 채 터져나오려는 비명을 눌러
삼켰다.
그런다음 번개같이 몸을 돌리며 칼을 종횡(縱橫)으로
그어댔다.
하나 없었다.
분명히 자신의 등뒤로 돌아간 노독행의 몸이 어느 새
사라지고 텅빈 공간만이 갈라지고 있을 뿐이었다.
영호명이 순간적으로 노독행의 행방을 놓치고
주춤거리고 있을 때 오른쪽에서 곽일로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대형! 이쪽입니다!"
영호명은 반사적으로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노독행의 몸은 어느 사이에 그의 오른쪽으로 이동해서
곽일로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노독행이 영호명을 가운데 뒤고 앞에서 뒤로, 다시
우측으로 이동한 것이다. 그것은 확실히 효과적인
움직임이었다.
영호명이 채 그쪽으로 몸을 돌리기도 전에 차가운
기운과 함께 두 개의 시커먼 손이 그의 반대쪽에서
날아왔다.
노독행을 공격해 들어왔던 장문귀의 흑마수가 그의 몸이
갑자기 사라지자 오히려 영호명을 공격하는 격이 되어
버린 것이다.
영호명은 졸지에 노독행 대신 북리강과 장문귀의 협공을
받은 꼴이 되어 버렸다.
그것은 그만큼 노독행의 몸이 거의 알아차릴 수도
없을만큼 눈부신 속도로 움직였다는 것을 뜻한다. 만약
그의 몸놀림이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영호명은 다급한 김에 그 자리에 넙죽 주저앉았다.
놀라기는 장문귀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분명히 노독행의 옆구리를 향해서 정확하게 공격을
했는데 그의 몸이 갑자기 사라지고 대신에 영호명이
자신의 장세(掌勢)속에 빠져있자 깜짝 놀라 황급히 장력을
위로 쳐 올렸다.
꽈릉!
먹물같은 흑마수의 장력이 아슬아슬하게 영호명의
머리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 바람에 영호명의 머리가 풀어 헤쳐져 산발한 머리가
허리까지 늘어졌다.
영호명은 등골이 서늘해져서 주저앉은 자세로 장문귀를
쳐다보았다. 장문귀의 얼굴에도 낭패스런 표정이
떠올랐다.
하나 머뭇거리고 있을 사이가 없었다.
그들이 주춤거리고 있는 동안에 노독행은 어느새
곽일로의 코앞으로 육박해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얍!"
곽일로는 노독행의 몸이 노도와 같은 기세로 자신을
향해 날아오자 사력을 다해 검을 떨쳤다.
쐐애액!
마치 독사의 혓바닥같은 검기가 노독행의 미간과
목덜미, 명치끝을 향해 날아들었다.
곽일로가 펼친 것은 적화무영검법(赤花無影劍法)중의
절초인 삼지혈화(三枝血花)였다.
노독행은 오른손을 앞으로 쭉 내뻗었다.
그의 손은 곽일로가 뿜어낸 세 가닥 검기속을 교묘하게
뚫고 들어갔다.
곽일로는 노독행의 손이 너무도 수월하게 자신의
검세속을 뚫고 들어오자 안색이 창백하게 변하며 황급히
장검을 일직선으로 찔러갔다.
일지천심(一枝穿心)이라는 수법이었는데 빠르고
날카롭기가 가히 강호일절(江湖一絶)이라 할만 했다.
하나 검세가 채 완전히 뻗어나가기도 전에 하나의
싸늘한 손이 덥썩 그의 손목을 움켜 잡았다.
곽일로의 낯빛이 핼쓱해졌다.
어느 사이에 노독행이 검을 휘두르는 그의 손목을 잡은
채 우뚝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노독행은 상처로 뒤덮힌 손으로 곽일로의 손목을 잡은
채 희미하게 웃었다.
그 웃음을 보자 곽일로는 소름이 쭈욱 끼쳤다.
그가 손목을 떨쳐 노독행의 수중에서 벗어나야 된다고
생각하기도 전에 노독행의 왼손이 곽일로의 오른쪽 눈으로
다가왔다.
"아...안돼!"
곽일로는 사력을 다해 몸을 뒤틀었으나 오른손목을
잡히고 있어서 마음대로 몸을 빼낼 수가 없었다.
쾅!
피가 하늘높이 솟구치며 곽일로의 입에서 처참한 비명이
흘러나왔다.
"크악!"
곽일로는 오른쪽 눈에 구멍이 뻥 뚫린 채 뒤로 정신없이
물러났다.
노독행은 왼손을 곽일로의 피로 붉게 물들인 채
나직하게 웃었다.
"이제 어떤 기분인지 알겠지?"
그가 천천히 손바닥을 펼치자 그 안에 뽑혀진 눈알이
나타났다.
"끄으으..."
곽일로는 신음같기도 하고 비명같기도 한 거친 숨소리를
내며 몸을 휘청거렸다.
영호명과 장문귀가 날아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악독한 놈!"
장문귀는 이를 갈아붙이며 노독행의 뒷통수를 향해서
전력으로 흑마수를 갈겨댔다. 영호명 또한 낯빛이
딱딱하게 굳어진 채 노독행의 옆구리를 향해 칼을
찔러왔다.
두 사람은 모두 있는 힘을 다했기 때문에 이번의 공격은
먼저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흉험했다.
노독행은 뒤에도 눈이 달린 사람처럼 슬쩍 몸을 옆으로
움직여 장문귀의 흑마수를 피했다. 동시에 자신의
옆구리를 찔러오는 영호명을 향해 왼손을 휘둘렀다.
!
무언가 붉으스름한 것이 영호명의 코앞으로 쏘아져왔다.
영호명은 얼떨결에 노독행의 옆구리를 찔러가던 칼의
방향을 바꾸어 자신의 코앞으로 날아오는 물체를
후려쳤다.
팟!
붉은 핏물이 영호명의 얼굴에 화악 끼쳐졌다.
영호명은 자신의 칼에 잘라지는 것이 사람의 눈알임을
알고 눈꼬리가 부르르 떨렸다. 그것은 바로 곽일로의
뽑혀진 눈알이었던 것이다.
"으와아....!"
그때 갑자기 괴이한 비명과 함께 곽일로가 미친 듯이
노독행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는 자신의 몸은 돌보지 않고 무조건 노독행의 외눈을
향해 검을 찔러갔다.
"곽이제(郭二弟)! 조심하게!"
영호명이 다급히 외치며 쏜살같이 날아왔고, 장문귀도
흑마수를 휘두르며 덮쳐들었다.
하나 때는 늦어 있었다.
노독행은 자신의 눈을 찔러 오는 곽일로의 장검을 슬쩍
피하며 한 손으로 그의 손목을 잡았다. 잡은 손목을
앞으로 힘껏 잡아 당김과 동시에 그의 어깨는 주르르
달려오는 곽일로의 몸을 정통으로 강타하고 있었다.
쾅!
"크악!"
곽일로의 입에서 피분수가 뿜어나오며 그의 몸이 뒤로
튕겨나갔다.
드넓은 대청을 가로질러 반대쪽 벽면으로 떨어지는
곽일로의 몸은 이미 전신의 뼈가 조각난 채 갈가리 찢겨진
처참한 몰골이었다.
곽일로는 장홍칠절중에서도 두 번째 고수로, 검에
관한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절세의 검객이었다. 그가
이성을 잃고 달려들지만 않았다면 이토록 허무하게
쓰러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놈!"
곽일로가 피를 뿌리며 나가 떨어졌을 때 영호명의 칼이
노독행의 목덜미로 떨어져 내렸다. 동시에 장문귀의
흑마수도 노독행의 가슴팍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노독행의 몸이 앞으로 수그러지며 영호명을 향해
뒷발질을 해왔다. 그와 함께 자신의 앞가슴으로 다가오는
흑마수를 향해 주먹을 내뻗었다.
일반적으로 무림의 고수들간에서 뒷발질을 하는 것은
좀처럼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모양이 보기 흉해서 고수로서의 품위가 손상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나 무쌍류에서는 다르다.
무쌍류는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부위를 사용하며,
모양이나 자세에 조금도 구애받지 않는다.
지금 노독행이 펼친 것도 역륜퇴(逆輪腿)라고 하는
무쌍류의 실전무예중 한 가지였다.
영호명은 설마 상대가 뒷발질을 해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하고 있었던지라 완전히 허(虛)를 찔린 격이 되고
말았다.
"흡!"
그는 다급한 헛소리를 내며 찔러오던 칼을 빙글 돌려
허공으로 내치고 그 탄력을 이용해 위로 솟구쳐 올랐다.
장문귀의 흑마수는 노독행의 가슴에 거의 도달하기
직전에 제지되었다.
파팍!
노독행의 양 손이 흑마수와 얽히며 네 개의 손과 손이
허공에서 정면으로 격돌했다.
뿌드득!
손목끼리 부딪치며 괴이한 음향이 터져나왔다.
노독행의 손목과 부딪치는 순간 장문귀는 자신의 손목이
떨어져 나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하나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강하게 부딪쳤던 노독행의 손이 흡사 나무등걸을 타고
오르는 한 마리 뱀처럼 장문귀의 손목을 지나 팔뚝으로
기어올랐다.
그 움직임이 어찌나 빠르고 민활했던지 장문귀가 손목에
통증을 느끼고 인상을 찡그렸을 때 노독행의 손은 이미
그의 팔꿈치 곡지혈(曲池穴)을 누르고 있었다.
콱!
곡지혈을 잡히자 조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통증이
팔꿈치를 타고 어깨를 지나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윽!"
장문귀는 짤막한 신음을 지르며 반대쪽 손으로 자신의
곡지혈을 움켜쥔 노독행의 손을 후려쳤다.
하나 그때 노독행의 반대쪽 손도 어느 새 장문귀의 다른
팔 곡지혈을 움켜쥐고 있었다.
졸지에 장문귀는 양쪽 팔을 모두 제압당해 버린 것이다.
곡지혈을 움켜쥔 노독행의 손에 강한 힘이 가해졌다.
우득!
뼈마디가 으스러지는 음향과 함께 장문귀의 양쪽 팔뚝이
그대로 부러져 나갔다.
"크윽!"
장문귀는 술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 순간 노독행은 번개같이 그의 품속으로 뛰어들며
오른손 을 쭉 내뻗었다.
그의 오른손은 특이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엄지를 제외한 네 손가락이 구부러져 손끝이 손가락
뿌리에닿아 있었다.
바로 파자권(把子拳)이었다.
손가락의 구부러진 마디는 정확하게 장문귀의 콧등을
가격했다.
우직!
장문귀의 코뼈가 주저앉으며 시커먼 피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장문귀가 비명을 지를 사이도 없이 그의 콧등을
가격했던 노독행의 구부러진 손가락이 바싹 쥐어지며
주먹으로 변해 그의 오른쪽 뺨을 가격했다.
광대뼈가 움푹 꺼지는 순간에 노독행의 주먹은 다시
빙글 돌려져 구부러진 손목이 장문귀의 아래턱을
강타했다.
쾅!
노독행의 구수(鉤手)에 장문귀의 아래턱이 완전히
부서지며 흐물흐물해졌다.
하나 공격은 아직도 끝난 것이 아니었다.
구부러진 손목이 다시 돌려지며 이번에는 팔꿈치가
날아들었다.
노독행의 팔꿈치는 장문귀의 가슴뼈를 산산히 박살내
놓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노독행의 몸 전체가 돌려지며 가공할
철산벽(鐵山壁)의 공세가 장문귀의 몸을 사정없이 짓뭉개
버렸다.
콰쾅!
비명도 없었다.
진한 피비린내가 코를 진동하는 가운데 힘없이 날아가는
장문귀의 몸은 하나의 혈구(血球)에 지나지 않았다.
실로 너무도 빠르고 무서운 연쇄 공격이 아닐 수
없었다.
처음 파자권으로 시작하여 주먹, 구수, 팔꿈치, 그리고
어깨로 이어지는 노독행의 다섯 번에 걸친 연환공격은
그야말로 질풍노도와 같았다.
이것은 오타연환벽(五打連環壁)이라는 것으로, 단
일순간에 손가락에서 어깨로 이어지는 상반신 전체를
수레바퀴처럼 돌리며 공격해 들어오기 때문에 일단
걸려들면 상대는 어찌된 영문인지도 모르고 피떡이 되어
쓰러지고 마는 것이다.
순식간에 네 명중 둘이 쓰러지고 둘만이 남게 되었다.
쓰러진 사람들이 누구인지 생각한다면 그것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노독행은 숨결조차 가빠지지 않았다.
그가 천천히 몸을 돌리자 경악과 공포로 새파랗게 질려
있는 영호명과 북리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3
대청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누구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중인들은 입을 열기만 하면 무언가 무서운 일이
벌어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입을 굳게 다문 채 이 애꾸눈의
사나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노독행은 느릿느릿 영호명과 북리강에게로 걸어갔다.
영호명은 의외로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십대고수중의 두 명과 의형제의 처참한 죽음을
보았는데도 조금전과 달리 그렇게 흥분되거나 분노가
솟구치지 않았다.
두려운 마음도 어느 샌가 사라졌다.
다만 아릿한 슬픔같은 감정이 가슴 한 구석에서
미묘하게 소용돌이치고 있을 뿐이었다.
무림에 뛰어든 지 삼십 년...
적지 않은 세월동안 그는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 물론
만족한 인생은 아니었으나 적어도 후회는 없었다.
팔년전의 일도 후회하지 않는다.
그때 이미 그는 오늘같은 일을 어느 정도는
예견(豫見)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단지, 이제는 정말 마지막이다 라고 생각하자 후회도
아니고 아쉬움도 아닌 어떤 공허한 감정같은 것이
떠오르고 있었다.
결국 무림인(武林人)의 삶이란 이런 것이다.
언제 어디서 어떤 최후를 맞이하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그야말로 뿌리없는 부평초처럼 정처없이 떠돌다가 한
방울 이슬처럼 사라지는 인생인 것이다.
그것을 슬퍼할 필요는 없다.
인간이라면 언젠가 한 번은 반드시 죽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순간을 어떻게 맞이하느냐 하는 것이다.
'우는 소리 따위는 늘어 놓고 싶지 않아.'
영호명은 삼십 년동안 자신과 동고동락을 해왔던 붉은
칼을 힘껏 움켜 잡았다.
그리고는 노독행을 향해 달려들며 전력으로 칼을
휘둘렀다.
북리강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전혀 죽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적어도 지금은 죽고 싶지 않았다.
제일 처음에 노독행을 향해 여덟 개의 유엽비수를 날린
후로 그는 싸움에 가담하지 않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노독행의 일거수 일투족을 자세히 주시하고 있었다.
노독행이 강하다는건 물론 그도 인정을 했다.
하지만 무림에서의 일이 무공만으로 결판나는 것은
아니다.
어딘가에 이 괴물같은 놈을 쓰러뜨릴 방법이 있을
것이다.
노독행도 인간이다.
인간인 이상 틀림없이 어딘가에 약점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 약점을 찾아낼 수만 있다면....
'그때는 이 악마같은 놈을 없앨 수 있다.'
그 생각을 하기만 해도 북리강의 가슴은 금시라도 터질
듯 세차게 두근거렸다.
외견상으로 노독행은 완벽했다.
전혀 헛점이 없어 보였다.
움직임은 번개보다 빠르고 민첩했고, 별로 크지 않은
체구임에도 가공할 힘을 지니고 있었다. 성격 또한
냉정하고 잔인해서 손끝에 한 치의 사정도 두고 있지
않았다.
그야말로 격투를 위해서 태어난 인간같았다.
신체조건과 무공, 성격까지 무인(武人)들이 가장 꿈꾸는
이상형이었다.
하지만....
관찰에 관찰을 거듭한 결과 북리강은 노독행에게서 두
가지의 헛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첫째는 그가 한쪽 눈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그는 한쪽 눈이 없는 것에 대해서 나름대로 훈련을
쌓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눈이 하나 있고 없고는
천양지차였다.
그것은 단순히 훈련으로만은 극복할 수 없는 치명적인
약점을 지니고 있었다.
눈이 보이지 않아 생기는 사각(死角)에 대비하기 위해서
노독행은 틀림없이 청력을 극대화시켰을 것이다. 그의
싸우는 모습으로 보아 아무리 사소한 움직임이라도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는게 분명했다.
하지만 직접 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일도 있는
법이다.
예를 들면 소리없이 독(毒)을 쓰는 일 같은 것 말이다.
그렇다.
노독행을 해치울 수 있는 방법은 바로 그것이다.
노독행의 또 한 가지의 헛점은 바로 그의 자만심이다.
그는 자신의 무공에 절대적인 자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상대가 무슨 수를 쓰던 별로 개의치않고 있다.
하지만 만약 누군가가 그의 눈이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에서 아무런 기척도 없이 독(毒)을 사용한다면?
만약 그때 또 다른 누군가가 노독행을 공격하여 그의
신경을 그쪽으로 쏠리게 한다면?
그리고 만약 그 독이 일단 중독되면 도저히
해독(解毒)할 방법이 없는 천하제일의 극독(劇毒)이라면?
노독행은 결국 쓰러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북리강은 마침 자신에게 알맞은 물건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얼마전에 사천(四川)지방에 사는 친척 하나가 아주
특이한 물건을 보내왔었다.
그것은 천하에서 가장 독성(毒性)이 강한
묘강금사주망(苗疆金絲珠莽)과 천년복사(千年腹蛇)가
교미를 할때 생기는 타액(唾液)이었다.
묘강금사주망은 말할 것도 없고 천년복사 또한 한
방울의 독만으로도 수십 마리의 황소를 떼죽음시킬 수
있는 무시무시한 독물(毒物)들이었다.
숫컷의 금사주망과 암컷의 천년복사가 교미를 할 때는
입에서 침이 흘러내리는데 이때 흘러내리는 침은 이들의
몸속에 있는 독이 모두 격발되어 그야말로 천하에서 가장
무서운 맹독이 된다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암컷의 천년복사가 흘리는 침이 더욱
무서운데, 천년복사가 침을 흘리는 모습이 마치
미인(美人)이 눈물을 흘리는 것과 비슷한 형상이라고 하여
그 타액을 미인루(美人淚)라고 불렀다.
그 친척이 보내온 것은 바로 이 미인루였다.
우연히 당문(唐門)의 고수에게서 입수했다고 하며 그
미인루 한 방울을 조그만 병에 담아왔던 것이다.
그때 그 친척이 신신당부 하기를, 미인루의 독기는
너무나 지독하기 때문에 결코 그 뚜껑을 열어서는 안되며,
만일 뚜껑을 열게 되면 반드시 뚜껑을 자신의 몸과
반대방향으로 하고 뚜껑을 열음과 동시에 장력을 날리라고
했다.
뚜껑 밖으로 흘러나온 미인루는 즉시 공기와 결합하여
하나의 독향(毒香)으로 변하는데 그 독향에 스치기만 하면
사람이든 동물이든 단숨에 한줌의 핏물로 변해버린다는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친 북리강은 몰래 미인루가 들은 병을
품속에서 꺼냈다.
그 병은 작은 뚜껑으로 단단히 막혀 있는데 오른쪽
소매자락사이에 숨기자 밖으로 전혀 드러나지가 않았다.
그 병을 손에 쥐자 북리강은 천군만마(千軍萬馬)를 얻은
듯한 기분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어떻게 노독행의 한쪽 눈이 미치지 않는
사각지대로 접근하여 병 뚜껑을 여느냐 하는 것 뿐이다.
그런데 그때 마침 영호명이 미친 듯이 칼을 휘두르며
노독행을 향해 덤벼들었다.
북리강은 이것은 하늘이 내린 기회라고 생각했다.
영호명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그가 노독행과 격돌을 할
때 접근한다면 노독행은 결코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일단 병을 꺼내 뚜껑을 열어 그에게 던지기만
하면...
'흐흐...그때는 네 놈도 끝장이다.'
북리강의 입꼬리가 긴장과 흥분으로 가늘게 떨렸다.
영호명이 노독행의 정면에서 덤벼들자 순간적으로 그의
몸이 노독행의 시야를 가려 북리강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북리강의 몸은 그림자처럼
노독행의 왼쪽으로 다가갔다.
왼쪽 눈이 없는 노독행의 사각지대는 왼쪽 어깨에서
등에 이르는 부분이었던 것이다.
쾌액!
영호명의 칼은 무서운 속도로 노독행의 양미간 사이를
찔러왔다.
그 속에는 그의 삼십 년에 걸친 각고의 노력이 모두
담겨 있었다.
노독행은 자신의 미간을 노리고 들어오는 칼날은
쳐다보지도 않고 영호명의 얼굴을 응시하고 있었다.
영호명의 얼굴은 일체의 두려움이나 흔들림이 없이
물처럼 고요했다. 그속에는 오직 진지함만이 가득
자리잡고 있을 뿐이었다.
노독행은 엄숙하기 조차한 그의 눈을 빤히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적어도 무인이라면 그래야지. 당신에게 어울리는
최후를 선사하겠어."
그의 왼손이 아래로 늘어지며 가운데 손가락이
움직였다.
팟!
칼도 없는데 한 가닥 도광(刀光)이 피어 올랐다.
그것은 너무도 찬연하게 허공을 가르고 지나갔다.
그 순간 영호명은 전신이 빙굴에 빠진 듯한 느낌과 함께
자신이 펄친 강력한 도기가 산산히 흩어지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무언가 차가운 것이 아랫배를 가르고 지나가는
섬뜩한 감촉!
영호명의 입가에 언뜻 미소가 떠올랐다.
'바로 이것이었나, 노독행? 너도 예전에 이런 감촉을
느꼈겠지?'
북리강은 자신의 암습이 완벽하다고 생각했다.
소리없이 조심스레 노독행의 왼쪽 사각지대로 접근하여
그의 신경이 온통 영호명에게 쏠린 순간 미인루가 담긴
병을 던진다...!
충분히 실현 가능한 계획이었고 그것은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적어도 노독행의 왼쪽 등뒤로 접근하여 그 병을 꺼내쥘
때까지는...
그는 영호명의 일격이 그의 사력을 다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십 여년을 함께 지내왔지만 지금처럼 무서운 위력을
발휘하는 영호명의 칼은 본 적이 없었다.
설사 노독행이 그 칼을 피한다 해도 자신에게까지
신경을 쓸 여유는 절대로 없을 것이다.
북리강은 한결 느긋한 마음으로 소매속에 감추어둔
미인루가 담긴 병을 움켜잡았다. 그가 막 뚜껑을 열려할
때 노독행의 왼손에서 무언가 섬광이 튀어나왔다.
그것은 너무도 순식간에 피었다가 사라졌다.
북리강은 뚜껑을 열고 그것을 던지려고 했다.
하나 그는 뚜껑을 열 수가 없었다.
하나의 손.
이루 셀 수 없는 흉터로 뒤덮힌 상처투성이의 손 하나가
병을 쥐고 있는 그의 손을 덥썩 움켜잡고 있었던 것이다.
북리강은 심장이 목구멍밖으로 튀어나올 듯이 놀라
황급히 고개를 쳐들었다.
분명히 자신에게서 등을 돌린 채 영호명을 마주보고 서
있던 노독행의 몸이 어느 새 자신의 앞에 우뚝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외눈에서 흘러나오는 빛을 보자 북리강의 몸이
사시나무떨 듯 덜덜 떨려왔다.
노독행은 물끄러미 그의 손에 쥐어진 병을 내려다
보았다.
언뜻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재미있는 것을 가지고 있군."
그 미소를 보면서 북리강은 한 가지를 절실하게
깨달았다.
애초에 노독행에게 사각지대 따위는 없었다!
이 악마같은 놈은 이미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 그것은 너무도 늦은 깨달음이었다.
퍽!
노독행의 왼손이 북리강의 아랫배에 깊숙히 파묻혔다.
"헉!"
북리강은 배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고통을 참지 못하고
입을 딱 벌렸다.
그 순간 노독행은 북리강이 들고 있던 병을 빼앗아
그것을 북리강의 벌어진 입속에 쳐 넣었다.
북리강은 입으로 피를 게워내면서도 필사적으로 그 병을
뱉어내려고 했으나 그 때 노독행의 오른주먹이 그의
아래턱을 사정없이 강타했다.
쾅!
턱뼈가 완전히 박살나며 입안이 온통 부서진 이빨과
잘라진 혓바닥으로 범벅이 되었다. 그와 동시에 병이
깨어지며 입안 가득 유리조각이 파편처럼 꽂혔다.
북리강은 턱이 부서진 아픔보다 더한 공포를 느끼고
눈을 부릅떴다.
병이 깨어짐과 동시에 무언가 차가운 것이 그의
목구멍을 타고 식도를 지나 뱃속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으으...."
그의 눈이 흰자위만 남도로 까뒤집히며 몸에서 경련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얼굴이 시커멓게 변하더니 금세 목을 지나
손바닥까지 검게 물들었다. 북리강은 마치 간질병에 걸린
사람처럼 마구 전신을 뒤틀며 자신의 피부를 긁어댔다.
살갗이 벗겨지며 피가 흘러내리는 데도 그것도 의식하지
못하고 자신의 목을 움켜잡으며 마구 손톱으로 살을
후벼팠다.
"크으으..."
그의 입에서 사람의 음성이라고는 할 수 없는 괴이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러더니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져 버렸다.
쿵!
눈을 까뒤집은 채 쓰러진 그의 몸은 다시 한 차례
격렬한 경련을 일으켰다.
하나 그것도 잠시,
파스스...
그의 몸은 곧 심한 악취를 풍기며 그대로 녹아들어가기
시작했다. 눈깜짝할 사이에 그의 몸은 한 줌의 검은
핏물로 변해 버렸다.
실로 무섭기 그지없는 맹독이었다.
노독행은 별반 표정없는 얼굴로 바닥에 고인 검은
핏물을 내려보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영호명은 아직까지도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뚝...뚝...
갈라진 그의 아랫배에서 시뻘건 선혈이 떨어져 내려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영호명은 한 손에 칼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자신의
아랫배를 움켜잡은 채로 용케도 쓰러지지 않았다.
노독행은 한동안 그를 응시하다가 나직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사나이야. 그래서 나도 최선을 다한거야."
그의 음성을 들었는지 영호명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하나 그 미소는 채 떠오르기도 전에 그대로 굳어졌다.
영호명의 몸은 허물어지듯 서서히 바닥에 쓰러졌다.
쿵!
배를 끌어안은 채 바닥에 쓰러지면서도 그는 손에 쥔
칼을 놓지 않았다.
그의 몸 주위는 이미 자신의 배에서 흘러나온 선혈로
피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그 피바다속에 몸을 뉘인
영호명의 눈은 아직도 부릅떠져 있었다.
노독행은 천천히 다가가 그 눈을 감겨 주었다.
그에게는 그것외에는 달리 해줄 일이 없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영호명도 만족을 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