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보건곤-20화 (1권중 끝) (21/61)

제 20 장     내 앞을  막는  자는  살려두지  않아

1

그것은 하나의 호화로운 대청이었다.

대청의 너비는 거의 십 여장에 달해 하나의 거대한

연무장을 연상케 했다.

사방에 우뚝 솟은 기둥은 운남(雲南) 대리국(大里國)의

최고급 대리석으로 만든 것이고, 바닥에 깔려 있는 비단은

천축에서도 구하기 힘든 공작주단(孔雀紬緞)이었다.

벽에는 한 눈에 보기에도 진품(眞品)임을 알 수 있는

북송(北宋)의 대화가인 이공린(李公麟)의

오마도(五馬圖)와 남송(南宋)의 목계(牧谿)의 걸작인

팔팔조도(叭叭鳥圖)가 나란히 걸려 있었다.

뿐만 아니라 대청의 구석구석에 있는 작은 집기까지

명품(名品)이 아닌 것이 없었다.

그 대청의 중앙에는 두 개의 커다란 태사의가 있고 그

앞에 다섯 개의 의자가 마주보는 위치로 나란히 놓여져

있었다.

좌측 태사의에 앉은 인물은 곤룡포를 걸치고 머리에는

통천관(通天冠)을 썼는데 입고 있는 옷과는 달리 몸이

비쩍 마르고 얼굴에는 주름살이 가득했다.

하나 주름살 가득한 얼굴 깊숙히 박혀 있는 두 개의

눈이 움직일 때마다 보는 이의 가슴을 서늘하게 하는

날카로운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우측 태사의에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통

백포(白布)로 칭칭 감은 괴인이 앉아 있었다.

괴인의 몸중에서 유일하게 밖으로 드러난 것은 두 눈과

양 손 뿐인데 눈알이 온통 붉은 빛으로 충혈되어 있어

섬뜩한 느낌이 들게 했다.

태사의와 마주보고 있는 다섯 개의 의자중 세 개의

의자에는 붉은 장포를 걸친 중년인들이 있었다.

그중 하나는 북리궁이었고, 다른 두 명은 싸늘한 안색에

각기 검(劍)과 도(刀)를 차고 있는 인물들이었다.

가장 끝에는 머리를 산발한 두 명의 괴인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있는데도 대청은 아주 조용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가 그중 검을 차고 있는 혈포중년인이 곤룡포를

입은 노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풍곡주(馮谷主)님. 정말 안되겠습니까?"

곤룡포의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안돼."

마치 깊은 우물속에서 울려퍼지는 듯한 음성이었다.

별로 크지 않은 목소리였는데도 그 음성에는 누구도

꺾을 수 없는 광오함과 위엄이 서려 있어 듣는 이로

하여금 거역하기 힘들다는 느낌을 들게 하는 것이었다.

혈포중년인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떠올랐다.

"하지만 처음에 본회와 약속했을 때는 그녀를

넘겨주기로 하시지 않았습니까?"

곤룡포의 노인은 순순히 시인을 했다.

"그때는 그랬지."

"그럼 지금은 사정이 바뀌었단 말씀입니까?"

"그래."

너무도 쉽게 나오는 곤룡포 노인의 대답에 혈포중년인은

오히려 맥이 빠지는 모습이었다.

"대체 그동안에 무슨 사정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곤룡포 노인의 주름살 가득한 눈에 실날같은 광채가

번뜩였다.

"자네한테 그런 것까지 말해야 할 필요는 없어. 아뭏든

그녀는 내줄 수가 없으니 그리 알게."

곤룡포 노인의 음성은 나직한 저음이었으나 칼로 자르는

듯한 단호함이 있었다.

혈포중년인은 무어라 입을 열려 했으나 곤룡포 노인의

눈빛이 싸늘해지자 감히 더 말을 하지 못했다.

그가 머뭇거리고 있을 때 혈포중년인의 옆에 앉아 있던

얼굴이 네모지고 옆구리에 붉은 빛이 감도는 기형도를 찬

혈포인이 불쑥 입을 열었다.

"풍곡주. 이번 일이 본회에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잊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곤룡포 노인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두터운 눈썹 깊숙히 숨어 있는 노인의 눈에서 칼날같이

예리한 광채가 번뜩거렸다. 하나 혈포인은 조금도 피하지

않고 그 시선을 태연히 받았다.

곤룡포 노인은 다시 안광을 거두고 조금 가라앉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영호명. 물론 노부는 알고 있어. 중요하지 않았다면

굳이 십대고수중의 두 명까지 함께 오지는 않았겠지.

하지만 그녀는 내어 줄 수가 없어. 그렇게 되었어."

도를 찬 혈포인은 장홍칠절의 우두머리인 홍도낙백

영호명이었다.

영호명은 비단 장홍칠절중의 제일가는 고수일 뿐 아니라

천상회 내에서의 지위도 십대고수에 못지 않았다.

때문에 곤룡포 노인도 조금전의 혈포중년인, 홍검유명

곽일로에게 하듯이 함부로 그를 대하지는 않았다.

영호명의 눈빛에 기광이 번쩍거렸다.

"내줄 수가 없게 되었다니...그녀의 신상(身上)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곤룡포 노인은 다시 무심한 표정이 되었다.

"그럴리가 있나? 본곡에서는 최고의 예우로 그녀를

대접하고 있네."

"그렇다면 내줄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영호명이 집요하게 물었으나 곤룡포 노인의 대답은

변함이 없었다.

"말 그대로일세. 그것외에는 달리 할 말이 없군."

영호명은 유성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곤룡포 노인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하나 주름살로 뒤덮힌 곤룡포 노인의 얼굴은 마치

두터운 장막을 친 듯 전혀 아무런 표정의 변화를 읽을

수가 없었다.

영호명은 잠시 침음하다가 말머리를 돌렸다.

"듣자하니 곡주께는 한 분의 재지가 탁월하고 비범한

아들이 계시다고 하던데..."

곤룡포 노인의 무표정하던 얼굴에 한 줄기 꿈틀거림이

일어났다.

곤룡포 노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로 대단하지는 않고 그런데로 쓸만한

녀석이지."

영호명은 빙긋 웃었다.

"그 풍소곡주(馮小谷主)는 인물됨이 비범하고 얼굴이

관옥과 같이 준수할 뿐 아니라 무공에도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다고 하는데 단지 흠이라면..."

곤룡포 노인은 흠칫하는 눈으로 영호명을 바라보았다.

"여색(女色)을 좋아해서 간혹 무림에 심심치않게

염문(艶聞)을 뿌린다고 들었습니다."

"영웅이라면 호색(好色)하는 것이 흠이 될 수가 없지."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풍소곡주는 언제부터인가

입버릇처럼 무림의 양대미인(兩大美人)을 모두 안아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이번과 같은 절호의

기회를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모르겠군요."

곤룡포 노인은 한참동안이나 영호명을 응시하다가 돌연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의 안목은 정말 예리하군. 확실히 그런 일이

있네."

영호명의 눈이 번쩍하고 빛났다.

"그럼 곡주께서 그녀를 내주지 않으려는 것은 풍소곡주

때문이겠군요?"

곤룡포 노인은 눈쌀을 살짝 찌푸릴 뿐 그 말에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영호명은 담담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풍소곡주는 자타가 공인하는 무림의 일대기재이고 그녀

또한 당대 무림의 첫손가락에 꼽히는 미녀이니 두 사람이

어울린다면 천하에서 가장 어울리는 한 쌍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대사(大事)를 강제로 한다는건..."

곤룡포 노인의 얼굴에 처음으로 어떤 감정의 빛이 짙게

흘러나왔다.

"누가 강제로 한다고 했나?"

영호명은 일단 곤룡포 노인의 약점을 발견한 이상

태도가 한결 느긋해졌다.

"그럼 풍소곡주는 그녀를 강제로 취하지 않았습니까?"

"그 아이는 자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막돼먹은 녀석이

아니네. 절대 그런 일은 없었어."

영호명은 좀처럼 속마음을 내색하지 않기로 알려진

곤룡포 노인이 펄펄 뛰는 광경을 보자 내심 미소가

흘러나왔다.

'과연 풍일립(馮一立), 저 늙은 괴물의 약점은 아들인

풍조산(馮朝山)에 있다는 총호법의 말씀대로군.'

영호명은 이곳에 오기 전에 총호법이 자신에게 특별히

당부했던 말을 떠올리며 짐짓 포권을 했다.

"제가 실언했다면 용서하십시오. 풍소곡주를 모욕하려는

뜻은 전혀 없었습니다."

곤룡포 노인은 문득 자신의 실태를 깨달았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는 주름살 가득한 이마를 찡그리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입가에 냉랭한 미소를 떠올렸다.

"나는 자네를 잘 알지. 자네는 결코 이런 심기(心機)를

부릴 사람이 아니야. 총호법이 시킨 일인가?"

영호명은 부인하지 않았다.

"총호법의 혜안(慧眼)은 하늘과 같아서 저는 항상 그

분의 말씀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말은 돌려서 했지만 그 속에 숨은 뜻은 곤룡포 노인의

짐작이 맞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었다.

곤룡포 노인의 눈가에 한 줄기 어두운 기색이 스치고

지나갔다.

'천상회의 총호법은 천하에서 상대하기가 가장 까다로운

인물이라고 하더니 과연... 조산때문에 그녀를 내놓지

않으리라는 것까지 짐작하고 있었단 말인가?'

곤룡포 노인은 돌연 싸늘한 음성으로 물었다.

"만약 노부가 그녀를 내놓을 수 없다면? 그때는

총호법이 어떻게 하라고 하던가?"

그의 심정속에는 내가 끝까지 그녀를 내놓지 않는다면

너희들이 어떻게 할거냐는 오기 비슷한 것이 숨어 있었다.

영호명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총호법께선 혼인은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라 결코

억지로 할 수 없는 일이니 곡주께서 맡겨 주신다면 빠른

시일내에 책임지고 성사(成事)시켜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곤룡포 노인은 약간 마음이 움직였다.

천상회의 총호법은 한 번 내뱉은 말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는 사람으로 유명했다.

그가 일단 그렇게 하겠다고 하면 반드시 일은 그렇게

진행될 것이다.

지금까지 모든 일이 그래왔다.

곤룡포 노인은 잠시 침음하다가 다시 물었다.

"그녀를 무슨 수로 설득시킬 수 있단 말인가?"

"총호법께서 하시는 일을 제가 어찌 다 알겠습니까만 그

분의 평소 행사(行事)하시는 것으로 볼때 반드시 무언가

방법을 알고 계실 겁니다."

영호명의 음성속에는 총호법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담겨 있었다.

곤룡포 노인도 그것을 알아차렸는지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다.

'사실 한 달 가까이나 그녀를 붙잡아 놓고 온갖 수를

동원했지만 혼인승락을 받기는 커녕 조산이 그녀의 근처에

조차 접근할 수 없게 되었다. 어차피 안되는 일이라면 그

자에게 맡겨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영호명은 그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눈치채고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이 성사된다면 본회와 귀곡(貴谷)과의 유대에도

좋은 결과를 미칠 것이므로 총호법께서도 전력을 다하실

것입니다. 곡주께서도 총호법의 능력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곤룡포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는 노부도 처음보는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지."

영호명은 빙그레 웃었다.

"그렇다면 그녀를 저희들에게 맡겨 주시겠습니까?"

곤룡포 노인은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할 수 없군. 이번에는...."

한데 그가 막 고개를 끄덕이려 할 때였다.

"안됩니다, 아버지. 그녀를 결코 그들에게 넘길 수는

없습니다."

커다란 외침과 함께 하나의 인영이 대청안으로

날아들었다.

영호명은 눈쌀을 찌푸렸다.

'하필이면 이럴 때에 나타나다니....'

들어온 인영은 키가 훤칠하고 이목구비가 수려한

금의청년이었다.

금의청년의 전신에는 호화찬란한 장신구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고, 의복은 물론이고 신발과 머리에 쓴 두건,

그리고 혁대에 이르기까지 좀처럼 보기 힘든 최고급품

일색이었다.

얼굴도 상당히 준수했는데 한 가지 흠이라면 피부가

여자처럼 창백하고 입술이 유달리 붉은 색을 띄고 있어서

어딘지 유약해 보인다는 것이었다.

금의청년은 바로 곤룡포 노인의 아들인 풍조산이었다.

곤룡포 노인은 이곳 귀왕곡의 대곡주(大谷主)인

구지귀왕(九指鬼王) 풍일립(馮一立)이었다.

귀왕곡에는 풍일립외에도 한 명의 곡주가 더 있는데,

그의 옆에 있는 백포괴인이 바로 이곡주(二谷主)인

백매신(白魅神) 혁련광(赫連光)이었다.

풍일립은 돌연히 풍조산이 나타나자 주름살 가득한

얼굴이 더욱 찌푸려졌다.

"조산아."

금의청년, 풍조산은 급히 풍일립의 앞으로 다가가며

소리쳤다.

"아버지. 저와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녀를 그들에게

넘기지 않겠다고...저는 반드시 그녀의 마음을 돌릴

자신이 있습니다."

풍일립은 한숨부터 흘러나왔다.

'바보같은 녀석. 여자에게 눈이 멀어 앞뒤 분간을

못하고 본곡의 이름에 먹칠을 하고 있다니...'

풍일립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풍조산의 음성이 더욱

커졌다.

"아버지는 그녀가 그들과 결코 세불양립(勢不兩立)할 수

없는 사이라는 것을 잊으셨습니까? 그녀를 그들에게

넘겨주면 그들은 필시 그녀를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풍일립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졌다

"조산아!"

"저는 이미 그녀에게 본 곡의 모든 힘을 다해 그녀를

돕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아주 기뻐하더군요. 이런

관계가 잘만 지속된다면 틀림없이 그녀도..."

"조산!"

풍일립의 얼굴이 노화로 붉게 물들었다.

풍조산은 막 정신없이 떠들다가 아버지의 주름살 가득한

얼굴이 붉게 물든 것을 보고 아차하는 심정이 되어 급히

입을 다물었다.

풍일립은 여간 화가 나지 않고서는 좀처럼 표정의

변화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얼굴이 붉어졌다는 것은

그의 노화가 이미 참을 수 없는 지경에 까지 이르러

있다는 것을 뜻한다.

풍일립의 얼굴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 그 나이가 되도록 무엇이 더

중요한지도 모르고...."

"저도 그건 압니다. 제게는 그녀의 사랑이 무엇보다도

중요하..."

"닥쳐라!"

마침내 풍일립의 입에서 엄청난 폭갈이 터져나왔다.

그 음성이 어찌나 굉량했던지 풍조산은 고막이 터지는

듯한 통증을 견디지 못하고 뒤로 다섯 걸음이나 물러서고

말았다.

그는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겁먹은 얼굴로 풍일립을

바라보았다.

아직 단 한 번도 풍일립이 그에게 이렇게 고함을 친

적은 없었다. 더구나 여러 중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호통을 친다는 것은 풍조산으로서는 지금까지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아버지..."

풍일립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호통을 내질렀다.

"못난 놈! 네 놈이 이 아비의 팔십 년 공(功)을 한

순간에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리는구나. 노부에게 어찌

너같은 멍청한 놈이 태어났단 말이냐?"

그는 너무도 화가 치밀어 금시라도 가슴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풍조산은 풍일립이 거의 오십이 다 되어서 낳은 유일한

아들이었다.

자연히 그동안 풍일립은 그야말로 애지중지하여 그를

키웠는데 어려서부터 떠받듬을 받아온 풍조산은 버릇이

없고 모든 일을 자기 본위로만 생각하는 극도로 이기적인

성격이 되고 말았다.

그 바람에 결국 오늘과 같은 일까지 벌어지게 된

것이다.

풍조산은 풍일립의 기세가 너무도 살벌하자 기가 질려서

아무 소리도 하지 못하고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다.

풍일립은 두 눈에 줄기줄기 한광을 내뿜으며 거친

음성으로 소리쳤다.

"당장 네 방으로 들어가서 다시 부를 때까지 나오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네 놈의 다리를 부러뜨려 두 번 다시

걷지 못하게 하겠다."

그의 살기등등한 말에 풍조산의 목은 더욱 수그러

들었다.

그는 아무 소리도 하지 못하고 풀이 죽어 고개를 떨군

채 대청밖으로 사라졌다.

풍일립은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도 분을 참지

못하고 몸을 가늘게 떨고 있었다.

그러다가 돌연 무거운 탄식을 토해냈다.

"아! 이게 모두 내가 저 놈을 그동안 너무 제멋대로

키운 결과이니 이제와서 누굴 원망하겠는가?"

그는 넋두리처럼 중얼거리며 몇 번이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가 영호명을 돌아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녀를 넘겨 줄테니 데려 가게."

영호명은 반색을 하며 포권을 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풍곡주."

풍일립은 다소 의기소침한 모습이었다.

"총호법에게 약속이나 잊지 말고 지키라고 하게."

"여부가 있겠습니까? 총호법께서는 아직 단 한 번도

허언(虛言)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풍일립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불쑥 물었다.

"그런데...그 자는 어떻게 하려는가?"

영호명은 그가 묻는 뜻을 몰라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그 자라니요?"

풍일립은 약간 짜증이 난 음성으로 말했다.

"자네들이 이곳으로 유인해 온 인물 말일세. 노독행인가

뭔가 하는 애송이..."

영호명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그는 이내 다시 웃었으나 이미 안면근육이 경직되어

있었다.

"아! 그자 말이군요. 물론 저희들이 처리하겠습니다."

풍일립의 눈에서 날카로운 한광이 흘러나왔다.

그는 영호명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물었다.

"정말 자네들이 처리할 수 있겠나?"

영호명은 내심 움찔했으나 곧 자신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믿지 못하겠다면 곡주께서 지켜

보십시오."

풍일립은 한동안 물끄러미 영호명을 바라보고 있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자네 말을 믿지. 하지만 어쩌면 자네들이 신경쓰지

않아도 될지 모르네."

영호명은 눈을 번쩍 빛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풍일립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이미 내가 곡총관에게 혈리칠도수와 십팔지살수를

데려가서 그 자를 해치우라고 지시했네. 지금쯤은 이미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을걸세."

영호명의 안색이 홱 변했다.

"뭐라고요? 그건...."

풍일립은 느긋하게 웃었다.

"무얼 그리 놀라나? 자네들은 엄연히 본곡에 온

손님인데 그런 사소한 일 정도는 해결해 줘야 하지

않겠나?"

영호명은 얼굴이 창백하게 변한 채 속으로 소리쳤다.

'그게 아니다. 이 늙은 괴물아! 넌 큰 착각을 하고

있어!'

하나 그가 채 소리를 지르기도 전에 대청앞에 하나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그리고 천천히 노독행이 걸어 들어왔다.

2

그는 별로 빠르지도 않고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게 계속

걸어왔다.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중인들은 흡사 먹이를 본 한

마리의 늑대가 어슬렁거리며 걸어오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 느낌은 너무도 강렬하여 전율이 일어날 정도였다.

걷는다는 단순한 동작 하나에 한 사람이 이토록 많은

것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은 처음 알았을 것이다.

노독행은 대청의 중앙에 와서 우뚝 멈춰섰다.

풍일립의 주름살 가득한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네 놈은 누구냐?"

노독행은 말없이 웃었다.

그 미소를 보자 풍일립은 왠지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는 움찔하여 자신도 모르게 안광을 돋구어 노독행을

쏘아보았다.

하나 그때 노독행은 이미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몸을 돌려 영호명과 곽일로, 그리고 북리궁을

쳐다보았다.

세 사람은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노독행은 번뜩이는 외눈으로 영호명과 곽일로, 북리궁을

차례로 켰어보며 웃었다.

"드디어 다시 만났군."

나직한 음성이었는데 그 음성을 듣자 세 사람의 안색은

새파랗게 굳어 버렸다.

마치 한 마리 굶주린 늑대가 으르렁거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풍일립의 싸늘한 음성이 들려왔다.

"묻는 말이 들리지 않느냐? 웬 놈이냐?"

노독행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짤막하게 말했다.

"알 거 없어."

풍일립은 처음에는 자신이 잘못 들었는줄 알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러다가 그의 얼굴이 점차로 굳어지며

눈빛에서 횃불같은 광채가 이글거렸다.

그때 영호명이 작은 음성으로 말했다.

"이 자가 바로 노독행이오, 풍곡주."

풍일립은 몸을 움찔거렸다.

그는 화광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노독행의 전신을

훑었다.

"네 놈이 노독행이라고?"

그의 안색이 조금 변했다.

"네 놈이 어떻게 여기까지 들어왔느냐? 곡총관은 어떻게

되었느냐?"

노독행은 그를 힐끗 돌아보았다.

"나를 막더군."

풍일립은 그의 말이 반말조라는 것도 잊고 급히 물었다.

"그래서?"

노독행은 표정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내 앞을 가로막는 자는 살려두지 않아."

풍일립은 자신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라고? 그럼 네 놈이 곡총관을 죽였단 말이냐?"

"더 말할 필요 없잖아."

풍일립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는 노독행의 말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야마 곡창은 물론이고 그가 데려간 혈리칠도수만 해도

강호무림의 누구와 싸워도 패하지 않을 절정고수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불과 반시진도 되지 않아 모두 죽고

말았단 말인가?

하나 지금 자신의 앞에 노독행이 서 있는 이상 그 말을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과연 이 자가 야마 곡창과 혈리칠도수를 해치울 정도의

실력자란 말인가?

그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노독행을 바라보았다.

체구도 그리 크지 않고 용모도 평범했다.

게다가 무림인이라면 치명적인 결함이라고 할 수 있는

애꾸였다.

그러나 그의 외눈과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풍일립은

그의 진면목(眞面目)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평범한 몸집뒤에 숨어 있는 가공할 힘과 놀라운

잔인함을 알아본 것이다.

풍일립의 등골이 식은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이 자는 무예를 익히는 모든 무림인들이 꿈꾸는 조건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다.

강함과 쾌속함, 그리고 악랄함까지....

어떻게 이런 자가 나타날 수 있단 말인가?

이 자와 같은 나이에 이런 분위기를 풍기는 인물이 과연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그제서야 풍일립은 어째서 조금전에 영호명이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알 것 같았다. 또 북리궁이 왜 그토록

공포에 질린 채로 이곳으로 도망쳐 왔는지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자와 적(敵)이 된다는 것은 너무도 어리석은

일이다.

설사 천상회 전체와 등을 돌린다 할지라도 이 자를

적으로 삼을 수는 없다.

하지만 자신은 이미 이 자를 적으로 삼지 않았는가?

그때 비로소 풍일립은 자신이 왜 상대를 제대로 확인도

해보지 않고 고수들을 풀어 해치려고 했는지 후회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때 노독행의 음성이 들렸다.

"누구부터 시작할까?"

말 한 마디로 사람을 공포에 질리게 할 수 있다면 아마

지금 이 말이 가장 적합한 것일 것이다.

그 나직한 한 마디 말에 장내의 공기는 완전히 싸늘하게

식어 버렸다.

영호명과 곽일로, 북리궁은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풍일립은 태사의의 손잡이를 힘껏 움켜 쥐었고, 백매신

혁련광도 긴장된 모습을 숨기지 않았다.

그 순간이었다.

"우리부터 하지."

굵직한 저음과 함께 두 개의 인영이 노독행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이제껏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은 채 앉아 있었던

두 명의 산발괴인들이었다.

노독행은 눈을 빛낸 채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몹시 특이한 용모를 하고 있었다.

우측의 괴인은 위태할 정도로 앙상하게 마르고 키가 큰

인물이었다.

유달리 깡말라서 더 커보였는지는 모르지만 아뭏든

노독행으로서도 처음으로 보는 꺽다리였다. 헝클어진

머리와 비쩍 마른 몸통 아래 늘어서 있는 두 개의 앙상한

다리는 왠만한 사람의 다리보다 두 배는 더 길어 보였다.

그 다리로 쓰러지지 않고 서 있는 것이 용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좌측의 괴인은 반대로 키가 작달막하고 옆으로 잔뜩

퍼진 뚱뚱한 인물이었다.

이토록 작은 키에 이토록 뚱뚱한 체구를 지닌 인물도

드물 것이다.

단순히 뚱뚱한 게 아니라 몸 전체가 단단한 근육으로

뭉쳐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뚱뚱보가 꺽다리와 나란히

서 있자 우스꽝스럽기 조차 했다.

하나 노독행은 웃지 않았다.

그 깡마른 키다리와 작달막한 뚱보가 실로 상대하기

어려운 인물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것이 이들이야말로 천상회에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는 십대고수중의 쌍괴(雙怪)였던 것이다.

깡마른 키다리가 팔각신주(八脚神蛛)

장문귀(章紋歸)였고, 작달막한 뚱보가 독시봉(毒翅蜂)

전충(典蟲)이었다.

이들은 총호법 외에는 누구의 명에도 따르지 않는

인물들로, 천상회주 조차도 상대하기 꺼려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전충의 두꺼운 입술이 열리며 조금전의 굵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네가 북만주에서 혈기개천 목천파를 죽였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게 사실이냐?"

노독행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

전충은 뚱한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둔해 보일 법

한데도 전혀 그렇지 않고 오히려 음산한 느낌을 불러

일으키는 그런 미소였다.

"목천파는 너무 병기의 우월함을 믿고 실력을 키우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다르다. 우리는 수십 년간 오직

본신의 실력을 키우는데만 전념을 했다. 그래서

이제는...."

전충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소름이 오싹 끼칠 정도로 살기어린 미소였다.

"천하의 누구라도 우리 손에 걸리면 살아남지 못하게

되었다. 이제 곧 그것을 증명해 주겠다."

노독행도 따라 웃었다.

전충의 미소와는 어딘지 달랐으나 보는 이의 등골을

서늘하게 한다는 점에는 비슷해 보였다.

"그 자도 비슷한 말을 하더군. 하지만 별거 없었어."

전충의 얼굴에 떠올랐던 미소가 서서히 굳어졌다.

동시에 그의 몸에서 기이한 음향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우우웅....

마치 벌떼가 밀려오는 듯한 소리와 함께 그의 옷자락이

급속도로 팽창했다.

가뜩이나 뚱뚱했던 그의 옷이 부풀어 오르자 금시라도

터져 버릴 것 같았다.

그와 함께 장문귀의 몸에도 이상한 변화가 생겼다.

파스스...

그의 몸에서 거무스름한 연기가 피어 오르며 그의 전신

피부가 먹물을 묻힌 것처럼 검게 변했다.

앙상할 정도로 마른 그의 몸이 검게 변하자 괴기스러운

느낌이 강하게 일어났다.

한 눈에 보기에도 그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무서운

절학(絶學)을 끌어올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노독행은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진 채 양 손을

늘어뜨리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어찌보면 전혀 대적(對敵)할 마음이 없는 사람같았다.

"차앗!"

우렁찬 음성과 함께 터질 듯 부풀어 올랐던 전충의 몸이

번개같이 노독행을 향해서 돌진해 들어갔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전충의 쏘아져 오는 속도는 그야말로 빛살과도 같았다.

그가 끌어올린 것은 마도(魔道)의 십대공력(十大功力)중

하나인 합마공(蛤魔功)이라는 것으로, 일단 이 공력을

펼치면 전신이 하나의 고무공처럼 탄력이 좋아져 어떤

장력에도 다치지 않게 된다.

뿐만 아니라 몸 전체에 강력한 반탄력이 형성되어

부딛치기만 해도 상대를 격살(擊殺)시킬 수가 있는

것이다.

노독행은 그의 몸이 지척으로 다가올 때까지 가만히 서

있다가 오른손을 불쑥 내밀어 전충의 어깨를 움켜 잡았다.

그의 손은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하나 빨랐다.

전충의 몸이 쏘아져오는 속도를 감안하면 도저히 붙잡을

수 없는 상태인데도 그는 너무도 수월하게 전충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그리고는 그대로 집어 던졌다.

휙!

전충의 몸은 그야말로 하나의 고무공처럼 반대쪽 벽면을

향해 날아갔다.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팡!

벽면에 부딪쳐 나가 떨어질 줄 알았던 전충의 몸이

튕겨지며 날아갈때보다 더욱 빠르게 되돌아 오는

것이었다.

그와 함께 노독행의 전신으로 길다란 그림자가 덮쳐

들었다.

전신이 시커멓게 변한 장문귀가 양 손을 휘두르며

공격해 들어왔다.

장문귀의 공격하는 모습은 너무도 특이했다.

장대같이 긴 두 다리를 바닥에 고정시킨 채 상체와

허리를 이용하여 이 장이나 떨어진 노독행의 뒤통수를

후려갈겨 오는 것이다.

노독행은 몸을 옆으로 뉘이며 그의 공격을 피하려 했다.

스으응!

순간 장문귀의 몸이 하체는 그대로 있고 상체만 옆으로

이동하며 계속적으로 노독행의 머리통을 노리고 들어왔다.

마치 바닥에 몸이 고정된 채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오뚜기와 같은 모습이었다.

앞에는 엄청난 속도로 쏘아져 오는 전충의 몸통공격!

뒤에는 기이한 각도에서 공격해 오는 장문귀의 장력!

앞뒤로 포위공격을 받는 노독행의 몸은 금시라도 피를

뿌리며 쓰러질 것만 같았다.

<          2         권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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