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보건곤-19화 (20/61)

제 19 장      말  해  도    모  를  거  야

1

그곳은 하나의 겨대한 분지(盆地)였다.

끝도 모를 정도로 광활한 분지에는 이름모를

기화이초(奇花異草)들이 즐비했고, 꽃향기가 진동을 했다.

멀리 꽃밭 너머로 형형색색의 전각(殿閣)들이 늘어선

모습이 한 폭의 그림처럼 선명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흑혈림과 협곡을 통과했을 때 연상했던 칙칙하고 음습한

기운은 어디론가로 사라지고 이곳의 분위기는 아주

아늑하면서도 쾌적한 것이었다.

'이곳이 정말 귀왕곡인가?'

엽동은 마음속으로 상상했던 것과 너무도 다른 분위기에

어리둥절해져서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무엇을 보았는지 그의 눈이 번쩍하고 빛났다.

꽃밭의 한쪽에 하나의 호화로운 가마가 놓여져 있었다.

엽동은 급히 가마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가까이 가 보니 그 가마는 네 사람이 들 수 있는

사인교(四人轎)였다.

네 귀퉁이에 날아가는 듯한 봉황의 조상(彫像)이 있고,

푸른 색 구슬이 주렁주렁 달린 주렴에 손잡이는 황금빛

이었다.

두 사람은 충분히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가마였는데 지금은 문이 활짝 열려져 있어 안이 그대로

드려다 보였다.

가마의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나 엽동의 예리한 눈은 가마의 바닥에 검붉은

핏자국이 나 있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엽동의 가슴이 심하게 뛰었다.

'내 추측이 맞았다. 이 가마가 부인봉에서 그들을

이곳으로 데려왔을 것이다.'

그는 한동안 가마안을 샅샅이 조사했으나 핏자국외에

다른 흔적은 찾지 못했다.

엽동은 다시 가마밖의 지면(地面)을 유심히 관찰했다.

곧 희미하나마 몇 개의 발자국을 발견했다. 엽동은

적어도 네 명 이상의 사람이 지나간 자국이라고 생각했다.

그중에서 특히 한 사람의 발자국이 아직도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풀잎이 눌린 자국이 깊게 파여진 것으로 보아 부상을

당했거나 제대로 걷지 못하는 사람이 간신히 발을 떼어

놓은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엽동의 시선은 그 발자국을 따라 움직였다.

그 발자국은 꽃밭을 가로질러 전각들이 즐비한 안쪽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엽동은 그 발자국을 따라 가려다가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 고개를 돌렸다.

노독행은 꽃밭의 한 가운데 우뚝 선 채 물끄러미 허공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엽동은 궁금해져서 그에게 다가갔다.

"무얼 보고 있는거요?"

노독행은 여전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지금은 유시(酉時)로군."

엽동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렇소. 그게 어쨌다는거요?"

"그 자가 이곳에 들어온지 한 시진이 지났어. 지금쯤은

그들도 내가 온 것을 알았을거야."

엽동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왜 아무도 나오지 않는거요?"

"아마도..."

노독행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굶주린

늑대를 연상시키는 차가운 미소였다.

"이미 나와 있을지도 모르지."

엽동의 안색이 변했다.

그 순간이었다.

파아아....

그들이 서 있던 꽃밭일대가 송두리째 뒤집어지며

땅속에서 수십 개의 인영이 솟구쳐 올랐다. 그들의 손에

들린 검에서 흘러나오는 예리한 검광이 주위를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파파팟!

수십 가닥의 검기가 폭죽처럼 피어오르며 두 사람의

전신을 완전히 에워쌌다.

너무도 갑작스럽고 동시다발적인 공격이라 도저히 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노독행은 오른쪽 다리로 땅을 세차게 밟았다.

쾅!

우뢰같은 폭음이 터지며 그의 발이 발목까지 땅에

파묻혔다.

땅이 마구 뒤흔들리며 부러진 꽃들과 흙더미가

하늘높이까지 솟구쳐 올랐다.

대진각(大震脚)이란 것인데 그 위력은 막 땅속에서

솟구쳐 올라오는 암습자들을 대경실색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우욱!"

"큭!"

그들중 몇 사람이 땅이 진동하는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피를 토하며 나가 떨어졌다.

나머지 인영들의 신형도 휘청거리며 찔러오던 검광이

흔들거렸다.

찰나 노독행의 몸은 땅에 박힌 오른쪽 다리를

축(軸)으로 해서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파파팍!

사람은 보이지 않고 한 차례 거센 회오리바람이

몰아치는 것 같았다.

콰콰쾅!

벼락치는 듯한 폭음이 연거푸 터지며 처절한 비명소리가

어두워오는 귀왕곡의 하늘을 뒤흔들었다.

"끄아악!"

"케에엑!"

십 여개의 그림자가 달려들 때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튕겨져 나갔다.

땅속에서 솟아올랐을 때는 생생하게 살아 숨쉬는

사람들이었으나 튕겨져 나간 그들은 한 줌의 핏덩이에

지나지 않았다.

순식간에 장내에 피비린내가 진동을 하며 신음소리가

여기저기가 터져나왔다.

숨이 끊어지지 않은 몇 명의 인영들의 입에서 고통에

가득찬 신음이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설명은 길었지만 땅속에서 수십 개의 인영들이 솟구쳐

올라오고, 노독행이 발로 땅을 차며 몸을 회전시켜 그들을

격퇴시키기 까지는 그야말로 눈 한 번 깜짝할 시간밖에는

소요되지 않았다.

엽동이 느낀 것은 노독행이 대진각을 펼쳤을 때 속이

뒤틀리는 듯한 충격을 받고 바닥에 나뒹굴었다는 것

뿐이었다.

그가 정신을 차리고 바닥에서 일어났을 때는 이미

주위는 아수라장으로 변해 있었다.

지살수(地殺手)들의 수는 열 여덟 명이었다.

그들중 열 두 명이 즉사를 하고 네 명은 중상을 입고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간신히 서 있는 두 명의 지살수들 조차도 내장이

진동하고 심맥(心脈)이 뒤틀려 연신 입가로 피를 게워내고

있었다.

짧은 순간에 벌어진 일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만큼

처참한 상황이었다.

짝짝짝....

어디선가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굉장한 솜씨로군. 본곡(本谷)의

십팔지살수(十八地殺手)를 이토록 간단하게 해치울 수

있는 자가 있다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낭랑한 음성과 함께 한 명의 인물이 천천히 그들의

앞으로 걸어왔다.

그는 짙은 남색 장삼을 걸친 수려한 용모의

중년인이었다.

턱밑으로 검은 수염을 탐스럽게 기르고 눈빛이 차고

맑았다.

단지 흠이라면 피부가 마치 분을 바르듯 창백해서

어딘지 음산한 느낌을 불러 일으킨다는 것이었다.

남삼중년인은 그들의 앞으로 다가와서 히죽 웃었다.

"손님 접대가 소홀해서 미안하군. 노부는 귀왕곡의

총관을 맡고 있는 야마(夜魔) 곡창(谷昌)이라 한다."

그는 중년인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는데도 스스로를

노부라고 칭했다.

'야마 곡창?'

엽동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는 이름같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돌연 그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며 떨리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그럼 혹시 사십 년전에 단신으로

무당산(武當山)에 올라가 무당칠자(武當七子)를

죽였던..."

남삼중년인은 엽동을 돌아보며 하얗게 웃었다.

"아직도 나를 기억하는 후인(後人)이 있군. 노부가 바로

당시의 그 사람이다."

엽동의 안색이 창백하게 굳어졌다.

야마 곡창은 이미 오래전에 강호무림에서 혁혁한 명성을

떨쳤던 일세(一世)의 대마두(大魔頭)였다.

사십 년전에 그는 무당파로 쳐들어가서 당시 명성이

천하를 진동하고 있던 무당칠자 일곱 사람을 모두

쳐죽여서 세상을 경악시켰다.

그 일은 한때 천하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만큼 널리

알려진 일로, 그 이후에 무림인치고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가 삼십 년전부터 무림에 그의 모습이 사라져서

많은 사람들을 의아하게 만들었는데 오늘 이곳에 다시

나타난 것이다.

'정말 믿어지지 않는군. 이 전대(前代)의 노마두가

귀왕곡에서 총관을 하고 있었다니...'

엽동은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곡창이라면 지금 적어도 칠십이 훨씬 넘었을텐데 아무리

봐도 기껏 삼사십 대의 중년인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곡창의 시선은 엽동을 지나 노독행에게로 향했다.

노독행은 땅에 박혀 있던 오른쪽 발을 빼내더니 발을

탁탁 털었다.

마치 야마 곡창이라는 이름을 전혀 들어보지도 못한

것같은 태평한 모습이었다.

곡창의 눈이 차갑게 번뜩이며 입꼬리에 매달려 있던

미소가 한층 더 짙어졌다.

"젊은 친구가 대단하군. 사부가 누구인가?"

노독행은 힐끗 그를 쳐다보다가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말해도 모를거야."

"뭐라고?"

곡창은 처음에는 어리둥절한 얼굴이다가 이내 눈빛이

부르르 떨렸다.

그가 언제 남에게서 이와같은 말투를 들어보았겠는가?

엽동은 내심 조마조마한 심정이 되었으나 한편으로는

통쾌한 기분도 들었다.

'세상에 야마 곡창에게 반말을 하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이 자는 정말 괴인(怪人)중의 괴인이다.'

곡창은 어이가 없는지 한참동안 입을 다물고 있다가

음산하게 웃었다.

"정말 광오한 놈이로군. 그깟 장홍칠절중의 몇 놈을

죽였다고 하늘높은줄 모르고 날뛰다니..."

노독행의 음성은 변함이 없었다.

"그 자들을 내보내. 그러지 않으면 내가 들어 가겠다."

엽동은 지금까지 몇 차례나 노독행의 음성을 들었으나

그때마다 가슴 한 구석이 움찔움찔해지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그의 음성은 극도로 나직했고 감정이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었다.

말투에 음성의 고저(高低)가 없었고, 경어(敬語)나 존칭

따위는 아예 무시했다.

그리고 말하는 내용은 언제나 단도직입적이었다.

그야말로 꼭 필요한 말만을 가장 효과적으로 내뱉는

것이다.

엽동은 새삼 그의 말의 간결성과 효용성에 대해서

감탄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 곡창은 달랐다.

그는 자신의 앞에서 이런 식으로 지껄이는 놈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이런 놈을 만나리라고 상상해 본

적조차 없었다.

그러니 지금 그의 심정이 오죽하겠는가.

곡창은 낮빛이 싸늘하게 굳어진 채 무서운 안광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노독행을 쏘아보았다.

엽동은 그가 금시라도 노독행을 향해 달려들까봐 가슴이

두근거렸으나 의외로 곡창은 그 자리에 못박힌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의 입이 열리며 뼈골이 시릴 듯 싸늘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곳을 네 놈 마음대로 들락날락 거릴 수 있다고

믿었다면 네 놈은 천하에 둘도 없는 멍청이다. 그 자들은

안에 있으니 어디 들어갈 수 있으면 들어가 보아라."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어둠속에서 몇 줄기의 검은

인영이 불쑥 나타났다.

소리도 없이 어둠속을 미끄러지듯 날아오는 그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귀영(鬼影)이라 할만했다.

엽동은 그들이 나타난 신법만 보고도 그들이 보기 드문

절정고수들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들은 치렁치렁한 흑포를 걸친 일곱 명의

괴인들이었다.

하나같이 앙상하게 말랐고, 창백한 낮빛을 하고 있었다.

특이한 것은 그들의 눈으로, 거의 무색투명한 빛을 띄고

있었다.

엽동은 그 눈빛을 보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 눈빛은 무서운 수련을 거친 절정(絶頂)의

무인(武人)들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일곱 명의 흑포괴인들은 미끄러지듯 다가와 노독행을

에워쌌다.

스릉!

마치 한 사람이 뽑는 듯 단 한 번의 음향이 울리며

그들의 손에 섬뜩한 빛을 뿌리는 기형도가 쥐어졌다.

일곱 개의 손.

일곱 자루의 칼.

그들의 칼을 뽑는 동작과 칼을 쥔 자세는 그야말로

완벽했다.

그들이 단순히 칼을 쥐고 있기만 했는데도 주위의

공기가 급격하게 식어지며 싸늘한 살기가 질식할 듯

피어올랐다.

곡창은 일곱 명의 흑포괴인들에 둘러 싸인 노독행을

바라보며 음산하게 웃었다.

"이 자들은 본곡의 혈리칠도수(血狸七刀手)들이다.

이들이라면 네 놈에게 본곡의 무서움을 똑똑이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음성에는 강한 자신감이 배어 있었다.

엽동은 그의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이 자들은 강호무림에 나가도 개개인이 능히 절정의

도객(刀客)으로 인정받을 수 있은 인물들이다. 곡창과

혈리칠도수...대체 귀왕곡에는 이런 고수들이 얼마나 있는

것일까?'

그는 새삼 귀왕곡의 무서움을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파앗!

그가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에 장내에 한 차례의 도광이

번쩍거렸다.

엽동은 퍼뜩 상념에서 깨어나 급히 장내를 바라보았다.

이미 장내에는 매서운 칼바람과 무시무시한 도광이 춤을

추고 있었다.

파파팍!

도광 한 줄기가 바닥을 스치고 지나가자 흙먼지가

어두운 밤하늘에 자욱히 피어 올랐다.

2

가장 먼저 손을 쓴 것은 중앙에 서 있던 혈리도수였다.

그는 불문곡직하고 노독행의 미간을 향해서 칼을

휘둘러왔다.

완전히 수비는 도외시한 채 오직 상대를 베기 위한

공격이었다. 그만큼 위력적이었고 빨랐다.

그의 칼이 채 반도 뻗어나오기 전에 노독행의 뒤쪽에서

다시 두 개의 칼날이 날아들었다.

그들의 공격은 하나같이 살인적(殺人的)이었다. 일체의

군더기도 없이 오직 상대를 베기위해 공간을 압축해

들어오는 것이다.

노독행은 왼쪽으로 한 걸음 비켜섰다.

미간을 향해 날아왔던 칼날이 아슬아슬하게 옆으로

지나갔다.

이어서 그는 빙글 돌아서며 양쪽으로 몸을 흔들었다.

파앗!

뒤에서 날아들던 두 개의 칼날이 흔들리는 그의 몸을

격중시키지 못하고 허공을 가르고 지나갔다.

하나 혈리도수의 공격은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쾌액!

흔들리던 노독행의 몸이 채 멈춰서기도 전에 이번에는

세 개의 칼날이 날아들었다.

세 개의 칼날이 각기 상중하(上中下)를 노리고 재빠르게

날아들자 도저히 피할 곳이 없어 보였다.

그들이 사용하는 것은 강호에서 오랫동안 절전(絶傳)된

것으로 알려진 마도(魔道)의 전설적인

혈리도법(血狸刀法)이었다.

혈리도법은 인성(人性)을 완전히 무시한 채 오직 상대를

베어넘기기 위해 앞뒤를 가리지 않는 악랄한 도법으로,

심지어 자신의 몸 조차 돌보지 않고 덤벼들기 때문에

예전에는 혈리도법이란 이름만 들어도 무림인들이 치를 떨

정도였다.

노독행은 피하기는 커녕 오히려 한 발짝 앞으로

다가서며 양 손을 슬쩍 쳐들었다.

팟!

놀랍게도 그의 관자놀이와 가슴을 노리고 날아들던 두

개의 칼날이 그의 양손에 덥썩 움켜잡혔다.

칼을 휘두르던 두 명의 혈리도수의 눈에 어이없어 하는

빛이 떠올랐다.

그순간 세 번째의 칼날이 노독행의 아랫배를 향해

다가들었다.

노독행은 양손에 잡힌 칼날을 아래로 잡아 당겼다.

깡!

칼날과 칼날이 서로 부딪치며 귀청이 떨어지는 듯한

파공음을 냈다.

세 명의 혈리도수는 서로 칼날이 부딪치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바로 그때였다.

스으읏!

어느 새 하나의 칼날이 노독행의 목덜미를 지척에서

찔러오는 것이 아닌가?

도데체 언제 칼날이 소리도 없이 다가왔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이것이 바로 혈리도법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혈파관(血破貫)이었다. 얼마나 많은 강호의 고수들이 이

악독한 초식에 영문도 모른채 목이 꿰뚫리고 말았는지

모른다.

노독행의 목에서도 금시라도 구멍이 뚫리며 시뻘건 피가

솟구쳐 나올 것만 같았다.

"컥!"

답답한 비명이 흘러나오며 진한 피비린내가 화악

풍겨나왔다.

한 사람이 폭포수처럼 선혈을 흘리며 서서히 쓰러지고

있었다.

막 득의의 미소를 지은 채 장내를 주시하고 있던 곡창은

돌연 두 눈을 찢어질 듯 부릅떴다.

"저...저럴수가..."

놀랍게도 아랫배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채 쓰러지고

있는 인물은 노독행의 목덜미를 공격했던 혈리도수가

아닌가?

그의 아랫배에는 어느 새 노독행의 오른발이 깊숙히

틀어박혀 있었다.

따땅!

혈리도수의 손에 들려있던 기형도가 빛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제서야 노독행은 발을 빼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발을 빼냄과 동시에 노독행의 몸은 거의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나머지 혈리도수들을 향해 쏘아져갔다.

가장 앞서 있던 혈리도수가 미처 피하지 못하고 수중의

기형도를 세차게 휘두르며 맞서왔다.

하나 칼이 채 휘둘러지기도 전에 노독행의 몸은 그의

가슴앞으로 바짝 다가서 있었다. 노독행은 오른손을

내밀어 혈리도수의 칼을 휘두르는 손을 덥썩 움켜잡고

옆으로 비틀었다.

우드득!

혈리도수의 손목이 그대로 부러지며 그자의 몸이

휘청거렸다.

하나 비명을 내지를 사이도 없이 노독행의 무릎이 그

자의 아랫배를 사정없이 강타해 버렸다.

쾅!

"커억....!"

혈리도수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떴다가 떨어졌다. 그의

몸이 채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노독행은 다른

혈리도수의 코앞으로 육박해 가고 있었다.

그 혈리도수는 눈깜박할 사이에 동료들이 거푸 쓰러지자

안색이 변해 뒤로 물러서며 칼을 휘둘렀다.

파앗!

칼이 아슬아슬하게 노독행의 머리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 순간 노독행의 몸은 혈리도수의 다리를 향해 돌진해

들어가고 있었다.

혈리도수는 설마 노독행이 몸을 던지듯 자신의 하체를

공격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콰쾅!

허공으로 피해야 겠다는 생각이 채 들기도 전에 그 자의

다리는 노독행의 강력한 어깨에 부딛쳐 그대로 부러져

나가고 말았다.

다른 네 명의 혈리도수들은 이를 부드득 갈며 노독행을

향해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파파팟!

수십 가닥의 도광이 밤하늘을 가르고 지나갔다.

노독행의 몸은 유성처럼 도광과 도광사이를 빠져나갔다.

그가 손을 휘두르자 세 개의 칼날이 서로 뒤엉키며

불똥이 튀었다.

따땅!

그들이 주춤거릴 때 노독행의 몸은 그들 사이를 지나 네

번째 혈리도수에게로 쏘아져갔다.

네 번째 혈리도수는 막 칼을 휘두르다가 노독행이 곧장

자신에게 쏘아져 오자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렸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으나 그때 노독행은 그의 옆을 돌아

오른발을 휘둘렀다.

쾅!

혈리도수는 옆구리를 정통으로 강타당하고 바닥을

굴렀다.

갈비뼈가 모두 부러져 나갔는지 그의 입과 코로 시커먼

피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하나 그가 간신히 다시 일어서려 했을 때 노독행의

팔꿈치가 그의 관자놀이를 내려 찍었다.

그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질펀한 뇌수를 사방으로

뿌리며 쓰러졌다.

살아 남은 세 명의 혈리도수는 사색이 된 채 뒤로

물러났다.

이건 아예 상대가 되지 않았다.

처음에 그들은 절대적인 자신이 있었으나 부딛쳐 본

결과 도저히 자신들로서는 감당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하나 올 때는 마음대로 올 수 있었지만 물러날 때는

그렇지 못했다.

네 번째 혈리도수를 쓰러뜨린 노독행의 몸은 멈추지

않는 뇌전(雷電)처럼 나머지 세 명의 혈리도수를 향해

곧장 돌진해 들어왔다.

겁에 질린 그들은 사력을 다해 대항했으나 그때는 이미

몸이 굳어져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쾅!

폭음과 함께 다시 한 명의 혈리도수가 피떡이 되어

날아갔다.

나머지 두 명의 혈리도수는 제각기 몸을 빼내 곡창이

있는 쪽으로 도망쳤다.

아마 그들로서는 곡창이라면 노독행을 막을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니면, 설마 등을 보이고

도망치는 자신들에게 까지 살수를 쓰지는 않을 것이란 한

가닥 기대를 했을까?

하나 그것은 노독행을 너무 모르고 하는 소리였다.

일단 손을 쓰기로 작정한 이상 노독행은 절대로 상대를

용서하지 않는 성미였다.

파앗!

노독행의 몸이 공간을 압축해서 다른 혈리도수의 등뒤로

날아갔다.

그 자가 채 노독행이 온 것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노독행의 무쇠같은 주먹은 사정없이 그자의 등뼈를 부수어

놓았다.

콰직!

"끄아악...!"

그 자는 입으로 폭포수같은 선혈을 내뿜으며 등이

반으로 꺾인 채로 쓰러지고 말았다.

"자...잔인한...."

곡창은 몸을 부르르 떨며 마지막 남은 혈리도수가

필사적으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그는 혈리도수를 구해줘야 할지 말아야할지

망설였다.

그 순간 노독행의 상처로 뒤덮힌 손은 마지막 남은

혈리도수의 목덜미를 움켜 쥐었다.

"큭!"

목덜미를 붙잡힌 혈리도수는 발버둥을 쳤으나 도저히

노독행의 손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그는 온 몸을 식은 땀으로 범벅을 한 채 떨리는

음성으로 더듬거렸다.

"사...살려주시오."

그는 오랫동안 무서운 수련을 쌓아 죽음도 두렵지 않는

인물이었으나 노독행의 앞에서는 그렇지가 못했다.

노독행의 외눈에서 흘러나오는 빛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에게 조차 공포심을 불러 일으키게 했다.

노독행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 미소를 보자 혈리도수는 몸을 사시나무 떨 듯

떨었다.

자신도 왜 이렇게 이 사람이 두려운지 알지 못했다.

단지 조금이라도 빨리 이 사람에게서 떠나고 싶을

뿐이었다.

"제...제발..."

노독행은 웃으면서 조용히 말했다.

"이렇게 사정하면 용서를 해주는 사람도 있나보지?

하지만 나는 아니야."

동시에 그의 손아귀에 무서운 힘이 가해졌다.

우드득!

목뼈가 부러지는 음향이 어둠속에서 유난히 크게 울려

퍼졌다.

"끄으으...."

혈리도수는 눈을 까뒤집은 채 발버둥을 치다가 오공으로

시커먼 피를 쏟으며 축 늘어졌다.

그제서야 노독행은 손을 놓았다.

쿵!

혈리도수의 몸이 힘없이 바닥에 쓰러지며 내는 음향은

흡사 조종(弔鐘)소리와도 같았다.

노독행은 천천히 몸을 돌려 곡창을 바라보았다.

곡창은 안색이 창백하게 변해 있다가 노독행과 시선이

마주치자 몸을 떨었다.

노독행은 그를 향해 웃었다.

"나는 이제 들어가겠어. 막을 수 있으면 막아봐."

곡창은 여러 차례 안색이 변했다.

지금 그의 마음속에 소용돌이치고 있는 감정은 무어라고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곡창의 얼굴이 차츰 굳어지며 한 줄기 비장한 안색이

떠올랐다.

"노부가 잘못 생각했다. 너는 확실히 강하다. 노부는

칠십 평생 아직 너같이 강하고 악랄한 자를 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의 눈에서 주위를 질식시킬 듯한 무서운 광망이

이글거렸다.

"너는 절대로 살아서 이곳을 나가지 못한다."

폭갈과 함께 곡창의 몸은 노독행을 향해서 일직선으로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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