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7 장 어 차 피 결 과 는 마 찬 가 지 야
1
"헉헉....."
숨이 턱에까지 차왔다. 하나 쉴 수가 없었다.
그들의 추적은 너무나 집요했다.
벌써 삼 백리나 도망쳐 왔지만 그들을 따돌릴 수가
없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도망쳐야 할 것인가. 그녀는 점차로
자신감이 사라져 가는 것을 느꼈다.
모두 세 명이었다.
붉은 혈포를 걸친 그 삼인(三人)은 두 개의 산을 넘고
세 개의 강을 건널 때까지도 그녀의 뒤를 끈질기게
따라오고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 하나의 계곡이 나타났다.
계곡의 입구는 우거진 수림에 가려 눈여겨 보지 않으면
놓치기기 십상이었다. 그녀는 지친 다리를 이끌며 계곡의
안으로 들어갔다.
계곡의 안은 가파른 암석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어
몸을 숨기기에는 더할 나위없이 적당했다. 하나 그만큼
계곡을 오르기가 힘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녀가 기암괴석들이 끝없이 이어진 계곡을 중간쯤
지나갔을 때였다.
삐익!
날카로운 호각소리가 계곡의 입구에서 울려퍼졌다.
동시에 계곡의 입구에 세 개의 붉은 인영이 어른거렸다.
그녀는 그 쪽을 돌아보다가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소매로 훔치며 중얼거렸다.
"이곳까지 따라왔군. 이제 더 이상 피할 곳도
없는데..."
그녀의 얼굴에 허탈한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땀을 닦자 드러난 얼굴은 가무잡잡한 피부를 지닌 이십
대 초반의 여인이었다.
그리 아름다운 용모라고는 할 수가 없었다. 약간은
매부리코에 눈도 그렇게 크지 않았고, 광대뼈가 유난히
불거져 차갑고 표독스런 얼굴이었다.
하지만 검은 피부에 약간은 이국(異國)적인 체취를
풍기는 여인에게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특히 지치고 피곤한 표정 가운데도 결코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는 강인함이 엿보였다.
조교연.
별호는 흑나찰(黑羅刹).
올해 나이는 스물 한 살이었다.
섬서의 동관(潼關)출신이며 열 일곱 살에 강호에 처음
출도했다. 이 년후에 표향령에 가입을 했고, 그 후로
표향령주(飄香令主) 휘하의 삼봉(三鳳)중 하나로 천하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하나 지금 그녀의 신세는 천하무림에 명성이 자자한
표향삼봉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위태로운 것이었다.
그녀 자신도 자기가 왜 이렇게 기게 되었는지 그
정확한 이유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군사(軍師)의 밀명을 받고 태원으로 한 사람을 만나러
가는 도중이었다. 그 일은 표향령에서도 극소수의 수뇌급
인물들외에는 아는 사람이 없는데 산서성에 들어서자 마자
그녀는 뜻밖의 추적을 당한 것이다.
추적자들은 사막의 도마뱀처럼 집요하고 끈질겨서
그녀는 그들을 추적을 뿌리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
기울였으나 마침내 이곳까지 몰리고 말았다.
이제 그녀에게는 더 이상 그들을 따돌릴 힘도, 시간도
남아 있지 않았다.
조교연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이대로 저 자들에게 붙잡힐 수는 없다. 이번 일은
표향령 전체의 안위가 걸린 일인만큼 무슨 일이 있어도
밀서(密書)가 남의 수중에 들어가는 일은 막아야 한다.'
그녀는 신중한 눈으로 주변의 지형지물을 살폈다.
이 일대는 유달리 기암괴석들이 많고 지세(地勢)가
가파랐다.
그녀는 그중 가장 커다란 암석으로 다가가서 상의를
벗었다.
땀으로 범벅이 된 검은 무복(武服)을 벗자 몸에 착
달라붙는 얇은 내의가 드러났으나 그녀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벗은 무복을 암석의 뒤편에 걸어 놓았다.
그녀는 무복의 한쪽 끝자락이 암석의 옆으로 살짝 삐져
나오게 한 후 반대쪽 암석의 뒤로 가서 숨었다. 그녀의
손에는 어느 새 꺼내 들었는지 예리한 빛을 발하는 세
개의 철연자(鐵蓮子)가 쥐어져 있었다.
헐렁한 무복을 벗은 그녀의 몸은 생각보다 훨씬
풍만하고 굴곡이 뚜렷했다. 그녀가 숨을 몰아쉴 때마다
봉긋 솟은 가슴부위가 묘하게 일렁거렸다.
장내는 아주 고요했다.
이따끔 불어오는 산바람만이 몇 차례인가 주위를 스치고
지나갔을 뿐 산새의 울부짖음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조교연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시간이
흘러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문득 조교연은 무언가 기이함을 느끼고 한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무엇을 보았는지 눈을 부릅뜬 채
그대로 몸이 굳어지고 말았다.
그녀의 모습이 빤히 내려다 보이는 계곡의 정상 부근에
한 사나이가 비스듬히 앉은 채 그녀를 바라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처음에 그녀는 자신이 잘못 보았나 했다.
하나 그것은 아니었다.
검은 흑의를 입고 한쪽 눈에 안대를 한 그 사나이는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자 빙그레 웃기 까지 했다. 제법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도 그 자의 웃고 있는 모습이 그녀의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조교연은 그 사나이의 정체를 몰라 잠시 머뭇거렸다.
자신을 집요하게 추적했던 세 사람중 하나는 분명히
아니었다.
하나 이런 외진 곳에서 마치 그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높은 위치에 태연히 앉아 있는 그를 보고
긴장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자가 만에 하나 자신을
추적하는 무리들과 같은 일행이라면 자신이 그들을 암습할
수 있는 기회는 산산이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더욱 더 위태로운 상황에 빠지게 될 것이
뻔한 노릇이었다.
다행히 사나이는 어떠한 이상한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소리를 지르거나 그녀의 행방을 알리는 어떤 신호도
보내지 않고 그냥 앉아 있기만 했다.
그때 그림자가 어른거리며 몇 개의 붉은 인영이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세 명의 혈포괴인이 그녀가 펼쳐놓은 덫속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더 머뭇거릴 여유가 없음을 알고 마음을
결정했다.
자신을 내려다 보고 있는 검은 안대의 사나이가
누구이든 신경쓰지 않고 처음의 계획대로 세 혈포괴인을
암습하기로 한 것이다.
어쨌든 현재의 그녀에게는 그 방법외에는 달리 취할
길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로서는 검은 안대의 사나이가 이곳에 나타난 것이
철저한 우연이기를 바랄 수 밖에 없었다. 아니면 그 자의
목표가 자신이 아니던가...
조교연은 입술을 질끈 깨문 채 수중의 철연자를 힘껏
쥐고 세 명의 혈포괴인들이 공격범위내에 들어오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두 개의 붉은 인영이 그녀가 옷을 벗어 놓은
커다란 암석으로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다른 하나의 인영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한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이 약간 마음에
걸렸으나 더 머뭇거리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두 혈포괴인은 각기 좌우로 빠르게 움직이며 암석의
뒤로 돌아갔다.
사람은 보이지 않고 땀에 절은 옷만이 걸려 있는 것을
보자 둘 중 누군가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속았다!"
그 순간 그녀는 숨어 있던 곳에서 튀어나오며 수중의
철연자를 전력을 다해 뿌렸다.
쐐 !
세 개의 철련자가 빛살같은 광망을 뿌리며 두
혈포괴인의 뒷통수를 향해 날아들었다. 철련자가 날아드는
속도와 방위는 가히 완벽해서 그들로서는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나 그들의 머리가 막 철련자에 관통당하려는 순간,
"흐흐...속은 것은 바로 너다, 조교연!"
음산한 웃음소리와 함께 어디선가 세 개의 유엽비수가
날아왔다.
따땅!
세 개의 유엽비수는 정확하게 철련자들을 격중시켰다.
철련자는 크기가 콩알만하고 끝이 뾰쪽하여 빠른 속도로
던져내면 피하기는 커녕 막는 것 조차 쉽지가 않았다.
그런데 세 개의 유엽비수는 엄청난 속도로 날아오는
철련자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격중시켰으니 유엽비수를
던진 자의 공력이 얼마나 무서운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녀는 아차하는 심정이 되어 황급히 몸을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어느 새 그녀의 뒤에는 하나의 혈포괴인이 우뚝 서서
살기어린 미소를 띤 채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다른 두 명의 혈포괴인은 재빠른 동작으로 그녀의
퇴로를 막아섰다.
순식간에 전세가 역전되어 그녀가 오히려 독안에 든 쥐
꼴이 되고 말았다.
유엽비수를 날렸던 혈포괴인은 눈꼬리가 옆으로 쭉
찢어지고 음산하게 생긴 중년인이었다. 그는 악독한
눈빛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며 낮게 웃었다.
"흐흐...조교연. 혼자서만 약은 척을 하더니 결국 제
무덤을 제가 판 꼴이 되었군."
조교연은 입술을 깨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혈포괴인은 득의의 미소를 짓고 있다가 시선이 그녀의
얼굴에서 아래로 향했다. 이어 그 자의 눈은 조교연의
반쯤 드러난 상반신을 쭈욱 켰었다.
조교연은 그의 눈길이 닿는 부분에 마치 뱀이라도
지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어 소름이 쭈욱 끼쳤다.
"멋진 몸매로군. 이대로 무덤속으로 들여 보내기에는
아까운데..."
그녀의 뒤에서 낄낄대는 음성이 들려왔다.
"흐흐...북리형(北里兄). 그렇게 아까우면 죽이기 전에
마음껏 사랑해주면 될거 아니오."
또 다른 음성이 그 뒤를 이었다.
"우리는 그저 자네가 먹다 남긴 찌꺼기만 추스려도
충분하네. 저 정도 몸이라면 우리 셋을 모두 감당하고도
힘이 남겠는걸."
이어 그들은 통쾌한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크하하!"
조교연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죽일 놈들."
그녀는 당장에라도 이 세 명의 악적(惡敵)들을 찢어
죽이고 싶었으나 쉽사리 경동할 수가 없었다. 조금전에
유엽비수를 날린 자의 무공만 보아도 이들이 결코 쉽게
상대할 수 없는 자들임을 여실히 알 수 있었다.
어쩌면 이들이 이런 말을 하는 것도 그녀를 흥분시키기
위해 격장지계(擊將之計)를 사용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과연, 농담을 하고 있는 것 같아도 그들의 눈빛은
그녀에게 고정된 채 날카롭게 번뜩이고 있었다.
그 눈빛에는 욕정 따위는 보이지 않았고, 대신에
얼음장같은 냉혹함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그녀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녀는 강호의 경험이 결코 적다고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런 냉정한 눈을 가진 자들이야말로 다른 어떤
고수들보다도 상대하기 까다롭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비단 상대하기 까다로울 뿐 아니라 이런 자들은
대부분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냉혈한(冷血漢)들이었다.
자신이 과연 이 세 명의 냉혈한들로부터 무사히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그녀의 얼굴에 한 줄기 결연한 표정이 떠올랐다.
'결코 이 자들에게 사로 잡혀 수치를 당하지는 않겠다.'
그녀는 최악의 경우에는 밀서를 없애고
자진(自盡)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녀의 결심을 눈치챘는지 세 혈포괴인들의 낮빛도 점차
음산하게 굳어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앞에 서 있는 혈포괴인이 달래는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조교연. 우리는 사실 너의 몸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네가 밀서만 넘겨 준다면 우리는 네 몸에 손끝하나 대지
않고 물러나 주겠다."
조교연은 눈을 반짝거렸다.
과연 이 자들의 목표는 그녀가 가지고 있는 밀서였던
것이다.
그녀에게 밀서가 있다는 것을 이 자들은 어떻게
알았을까?
혈포괴인은 다시 입을 열었다.
"밀서가 아무리 중요하다 해도 기껏 한 장의 종이쪽지에
불과하다. 그런 종이쪽지 한 장에 목숨을 내건다는 것은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지. 너는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할
여자가 아니라고 본다."
조교연은 빙긋 웃었다.
이 자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안 이상 더욱 더 밀서를
이들에게 넘겨줄 수는 없었다. 그녀는 어떤 경우에라도
밀서를 파괴하여 이들의 목적이 달성될 수 없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의 여유을 되찾았다.
그녀의 검은 자위가 많은 눈이 유달리 반짝거렸다.
"그런데 아쉽게도 나는 어리석은 여자에요."
혈포괴인은 그녀의 눈을 한 번 보는 것만으로도 그녀가
어떤 결심을 굳혔는지 알아차린 것 같았다.
눈빛이 싸늘하게 굳어지며 음성이 한층 냉막하게
변했다.
"그런 것 같군."
하나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이내 그의 입가에는 야릇한
미소가 떠올랐다.
"궁금하지 않나? 우리가 어떻게 네가 그 밀서를 지닌
것을 알았는지?"
조교연은 흠칫하는 표정이었다.
확실히 그것은 그녀가 가장 의문스럽게 생각하는
점이었다. 대체 이 자들은 표향령 내에서도 몇 사람 알고
있지 못하는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었단 말인가?
혈포괴인은 웃으면서 말했다.
"사실을 알고 나면 아주 간단해. 우리는 한 사람에게서
그 소식을 전해 들었거든."
조교연은 자신도 모르게 불쑥 물었다.
"그가 누구지요?"
"그는..."
조교연의 시선이 혈포괴인의 입을 주시했다.
혈포괴인의 입이 천천히 열리며 전음성이 그녀의 귀에
전해졌다. 그 전음을 듣는 순간 조교연의 낮빛은 창백하게
변해 버리고 말았다.
"그런 터무니없는...."
그녀의 몸이 경악으로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바로
그때가 혈포괴인이 노리던 순간이었다.
그의 눈에서 기광이 번뜩거리는 것을 본 그녀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황급히 몸을 움직였다.
"흐흐...늦었다!"
그녀의 귓전에 음산한 웃음소리가 들려오며 무언가
차갑고 날카로운 것이 그녀의 뒷덜미를 강타했다.
팍!
그녀는 정신이 아찔하며 목구멍속에서 뜨거운 핏덩이가
화악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우웩!"
그녀의 몸이 휘청거리며 한 덩이의 선혈을 토해냈다.
순간 그녀의 앞에 서 있던 혈포괴인이 번개같이 그녀에게
달려들며 손을 휘둘렀다.
파팍!
미처 몸을 피할 사이도 없이 그녀는 혈도가 제압당해
맥없이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실로 눈깜박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혈포괴인은 그녀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말로 그녀의
신경을 쏠리게 한 다음 그녀의 경계심이 늦추어진 순간을
놓치지 않고 앞뒤에서 암습을 가해 그녀를 쓰러뜨렸던
것이다.
그녀는 그제서야 자신이 상대의 술수에 넘어갔음을
알았으나 이미 때는 늦은 것이었다.
혈포괴인은 득의의 미소를 띤 채 그녀에게 다가왔다.
"흐흐...조교연. 순순히 내 말을 들었으면 이런 꼴은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만..."
그는 그녀의 바로 앞까지 다가와서 음독한 웃음을
날렸다.
"이제 때는 늦었다."
그의 시선은 조교연의 봉긋한 가슴 부위와 굴곡이
완연한 몸매를 훑고 있었다.
"확실이 이대로 죽이기에는 아까운 몸매로군. 우선
밀서부터 찾은 다음에 흐흐..."
조교연은 그의 음충한 웃음소리를 듣자 안색이 암담한
절망감으로 물들었다.
'아...한 순간의 방심으로 천추의 한(恨)을 남기게 될
줄이야...'
그녀는 혀라도 깨물고 싶었으나 혈도를 짚혀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가 없었다.
혈포괴인의 털복숭이 손이 서서히 그녀의 가슴으로
다가갔다.
이어 막 그녀의 풍만한 젖가슴속으로 손을 집어
넣으려는 순간,
".....!"
혈포괴인은 무언가 따가운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언제 나타났는지 그들에게서 사 오장 떨어진 암석 위에
하나의 인영이 걸터 앉은 채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검은 안대를 한 냉혹한 눈빛의 사나이.
노독행이었다.
2
노독행은 사실 조교연과 아무런 관련도 없었다.
따라서 그가 이곳에 온 것은 그녀때문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우연히 이곳에 나타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의 목표는 세 명의 혈포괴인이었던 것이다.
세 명의 혈포괴인.
그들은 다름아닌 장홍칠절중의 세 사람이었다.
조금전 유엽비수를 날려 조교연의 암습을 막아낸 인물은
홍안사심(紅眼蛇心) 북리강(北里薑)이었고, 그녀의 뒤로
다가가 칼날같은 장풍을 날려 그녀를 쓰러뜨린 자는
홍장회풍(紅掌廻風) 이태(易颱)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조표(趙杓)가 있었다.
지난 세월동안 그들은 별로 변한 것이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노독행은 몰라볼 정도로 변해 있었다.
당연히 그들은 노독행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
"웬 놈이냐?"
북리강은 싸늘한 눈으로 노독행을 노려보았다.
노독행은 천천히 암석위에서 일어나 아래로 내려왔다.
노독행이 말없이 자신들에게로 다가오자 북리강은 슬쩍
이태와 나란히 뒤에 서 있던 조표를 돌아보았다.
조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노독행의 앞을 막아섰다.
"웬 놈이냐고 물어보잖아!"
노독행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몰라서 묻는거야?"
그는 아주 나직한 음성으로 되물었다.
그 음성을 듣자 조표의 눈쌀이 자신도 모르게 살짝
찌푸려졌다.
상대가 대뜸 반말로 물어오는 것에 기분이 상했을 뿐
아나리 그 어조와 입가에 떠있는 미소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무언가 그의 신경에 거슬리는 것이 있었다.
조표는 노독행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몸을 흠칫
떨었다.
자신을 보며 웃고 있는 노독행의 외눈을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외눈 뿐만이 아니었다. 냉혹하리만치 차가운 미소가
매달린 입가와 콧등, 그리고 얼굴의 윤곽마저 눈에
익었다. 차츰 조표의 눈이 커졌다.
그러다가 그의 시야에 노독행의 목덜미가 들어왔다.
목덜미. 무언가가 관통당한 듯한 끔찍한 흉터와 아직도
희미하게 피부가 죽어 있는 열 손가락의 생생한 흔적....
그것은 바로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낸 상처가 아닌가?
조표는 소름이 쭈욱 끼쳤다.
"너...너는...."
노독행은 차갑게 웃었다.
"이제 알았나?"
조표의 몸이 옆에서 보기에도 확연하게 알 수 있을만큼
덜덜 떨렸다.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그날의 그 끔찍했던 광경들을...
그것은 정말 조표의 일생일대 최악의 날이었다.
그날 조표는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으나 거의 이
년동안을 침상에 누워 있어야만 했다. 옆구리에 박혔던
단도가 그의 앞가슴을 거의 반이나 가르고 지나가 그
상처가 아무는데만도 일 년이 넘게 걸렸다.
부서진 턱뼈와 갈비뼈는 더 오래 걸렸다.
하나 공포심을 떨쳐내는 데는 그보다 배 이상되는
시간이 소요되었다.
한동안 조표는 악몽에 시달려 밤에도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눈만 감으면 외눈을 번득인 채 자신의 옆구리에 단도를
꽂아오던 노독행의 모습이 떠올랐던 것이다. 비단 그 뿐만
아니라 장홍칠절의 다른 사람들도 노독행의 그림자를
뇌리에서 지우는데 상당한 시간들을 허비해야 했다.
불과 이 삼년전에야 조표는 겨우 심신(心身)이 완전하게
회복되어 강호로 되돌아 올 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 노독행을 다시 보게 되자 그는 과거의
악몽이 재현(再現)되는 것 같아 몸도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조표가 몸을 덜덜 떨고만 있자 이태가 급히 다가왔다.
"일곱째. 무슨 일인가? 아는 자인가?"
"이...이 자는...."
조표의 음성은 보기에 안타까울 정도로 떨려 나왔다.
이태가 답답하다는 듯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이 자가 누구라고?"
조표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노...독행."
그의 말이 너무 낮았기 때문에 이태는 처음에는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하나 다음 순간 그의 낮빛도 창백하게 변했다.
"노독행?"
어찌나 놀랐는지 그의 음성은 마치 비명과도 같았다.
한쪽에서 막 조교연의 몸을 뒤지려던 북리강은
노독행이라는 말에 펄쩍 뛰어올랐다.
"뭐라고? 그럴리가....!"
고개를 돌려 황급히 노독행을 돌아보는 북리강의 얼굴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노독행은 그들의 경악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느릿느릿 다가왔다.
조표는 자신도 모르게 주춤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노독행은 소리없이 웃었다.
"떨 거 없어. 어차피 결과는 마찬가지일테니까."
그 말에 조표는 물러서던 몸을 멈추었다.
그렇다.
어차피 결과는 뻔한 것이다.
노독행이 다시 나타난 이상 그가 죽던지 아니면 그들이
죽던지 결판이 나야 하는 것이다.
조표는 지난 팔년 동안 가슴을 졸이며 두려워하던
상황이 직접 닥치자 가슴이 진탕되고 숨이 가빠왔으나
그렇다고 무작정 물러설 수만은 없었다.
마침 이태와 북리강도 충격에서 벗어났는지 천천히
노독행을 에워싸고 있었다.
조표는 심호흡을 한 후 그들과 나란히 섰다.
노독행은 두 손을 늘어뜨린 채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셋 중 하나는 오늘 죽지 않을거야. 누구 운이 가장
좋을지 한 번 생각해 보라구."
나직한 음성이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말을 듣자 꼭 일이
그렇게 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절대로 어긋나거나
틀릴 리가 없는 음성이었다.
확고한 자신감과 절대적인 능력을 지닌 자만이 할 수
있는 그런 음성이었던 것이다.
바람이 불지도 않았는데 세 사람의 옷자락이 세차게
펄럭거렸다.
물론 그들은 두려웠다.
팔 년전의 애송이였을 때에도 두려웠는데 팔 년이 지난
지금 그가 어떻게 변했을지 생각하면 너무나 두려워서
진땀이 날 정도였다.
하나 그렇다고 무작정 두려움에 젖어 떨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적어도 그들은 강북지방에서 혁혁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장홍칠절중의 삼인(三人)이었다. 이대로 맥없이 상대의
손에 쓰러지기를 기다리고 있을 리는 없는 것이다.
세 사람은 서로 시선을 마주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일 먼저 손을 쓴 사람은 가장 공포에 질려 있던
조표였다.
사실 조표는 더 이상 두려움을 견디기 어려워 먼저 손을
쓴 것이다.
조표의 장기는 홍지단혼(紅指斷魂)이라는 별호에서 알
수 있듯이 열 손가락으로 펼쳐내는 가공할
철마지력(鐵魔指力)이었다.
팔 년전에 조표는 이 철마지력을 이용해 노독행의
오른쪽 다섯 손가락을 모두 부러뜨린 적이 있었다.
지금도 조표는 갈쿠리처럼 변한 양손을 쫘악 벌려
노독행의 가슴을 움켜잡아왔다.
노독행은 오른손을 불쑥 앞으로 내밀었다.
그것은 팔 년전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조표는 내심 쾌재를 부르며 더욱 빠르게 손을 뻗어갔다.
다른 것은 몰라도 열 손가락의 공력만큼은 천하의 어느
누구도 무섭지 않은 조표였다.
그의 손가락과 노독행의 손가락이 팔 년전의 그날처럼
허공에서 정면으로 얽혀 들었다.
뿌드득!
뼈마디가 으스러지는 음향이 들리며 처절한 비명소리가
장내를 뒤흔들었다.
"크아악!"
조표는 오른손을 부여잡은 채 뒤로 정신없이 물러났다.
그의 오른쪽 다섯 손가락은 이미 처참하게 부러진 채
뒤로 완전히 젖혀져 있었다.
노독행의 손가락과 마주치는 순간 그토록 강인하던 그의
손가락이 흡사 나무젖가락처럼 맥없이 부러져 나가고 만
것이다.
조표는 손가락이 으스러지는 고통보다도 자신이
천하제일로 자신하고 있던 철마지력이 허무하게 깨어진
것이 더욱 큰 충격이었다.
조표가 격퇴당하자 이태와 북리강은 황급히 노독행의 양
옆을 협공해 들어갔다.
꽈릉!
이태의 쌍장이 무서운 회오리를 일으키며 노독행의
옆구리로 파고 들었다.
동시에 북리강이 날려보낸 다섯 개의 유엽비수가
노독행의 상반신 오개대혈(五個大穴)을 노리고 빛살처럼
쏘아져 왔다.
두 사람의 연수합공(連手合攻)은 아주 시기적절했고
배합도 절묘했다.
노독행이 이태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서는 앞이나 뒤로
물러서야 하는데 어느 쪽으로 피하든 유엽비수의 범위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그렇다고 유엽비수를 피하기 위해서 옆으로 움직인다면
이태의 쌍장이 옆구리를 부숴 놓을 것이다.
절대절명의 순간, 노독행은 오른 손을 앞으로 내밀어
자신의 상반신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날아오는 유엽비수를
잡아갔다.
'미친 놈! 맨 손으로 나의 유엽비수를 잡으려
하다니...'
언뜻 북리강의 입꼬리에 살기를 가득담은 미소가
떠올랐다.
하나 그 미소는 채 반도 떠오르기 전에 그대로 굳어지고
말았다.
팟! 팟! 팟!
놀랍게도 그토록 가공할 속도로 쏘아져 오던 다섯 개의
유엽비수가 모두 노독행의 손아귀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이 아닌가?
빨려 들어갔다고 하는 것이 옳은 표현일 것이다.
노독행의 손이 움직이는대로 유엽비수가 하나씩 그의
수중으로 들어갔으니 말이다. 이것이야 말로 백 년만에
다시 나타난 무쌍류의 초절정 금나수법(擒拿手法)인
금강십팔나법(金剛十八拿法)중의 금강섭천(金剛攝天)임을
북리강이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는가?
노독행은 북리강이 떨쳐낸 다섯 개의 유엽비수를
움켜잡음과 동시에 왼쪽 팔꿈치를 수평으로 휘둘렀다.
쾅!
이태의 쌍장이 노독행의 왼쪽 팔꿈치와 정면으로
격돌했다. 그 순간 이태는 자신의 두 손이 짓이겨지는
통증을 느끼고 몸을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윽!"
그의 양 손은 이미 손목부위가 탈골되어 손마디 뼈가
모두 부서진 이상한 모습으로 구부러져 있었다.
이태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노독행은 주저없이 그에게 달려들며 발길질을 해댔다.
그의 발길질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저 빠를 뿐이었다.
이태는 안색이 대변해 체면도 잊고 바닥에 몸을 굴렀다.
그의 동작은 상당히 민첩하여 누가 보기에도 노독행의
발길질을 완전하게 피한 것처럼 보였다.
하나 그렇지를 못했다.
분명히 스치고 지나간 듯 하던 노독행의 발이 허공에서
기이하게 회전하며 완전히 반대방향에서 날아왔다. 그것은
그 자세에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각도였다.
콰쾅!
"크아악!"
이태는 정면으로 얼굴을 발에 강타당하고 피를 뿌리며
십 여장이나 날아갔다.
그의 얼굴은 완전히 박살이 나서 도저히 처음의 용모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변해 있었다.
"으...무서운 놈...."
북리강은 그 위세에 질렸는지 덤벼들 생각도 하지
못하고 뒤로 몸을 날렸다.
노독행이 번쩍 몸을 돌렸다.
북리강을 향해 덤벼들 줄 알았던 그의 몸은 의외로
한쪽에 우두커니 서 있는 조표를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조표는 그때까지도 손가락이 부러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멍하니 서 있다가 노독행의 몸이 엄청난 속도로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것을 보고 사력을 다해 피하려
했다.
하나 무쌍류의 파산벽(破山壁)은 천하에서 가장 빠른
몸통공격으로, 조표로서는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조표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자신의 콧등을 향해
다가오는 노독행의 어깨를 왼쪽 손으로 움켜잡는
일뿐이었다.
콰직!
노독행의 어깨에 닿는 순간 조표의 왼손 다섯 손가락은
모두 부러져 나갔다. 이어서 그의 손목뼈가 으스러졌고,
그 통증이 채 뇌리에 전해지기도 전에 노독행의 어깨는
그의 아래턱에 깊숙히 파묻혔다.
쾅!
조표는 아래턱이 완전히 박살나 비명도 지를 수가
없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느낀 것은 머리속이 온통 부러진
이빨과 뼈의 파편(破片)들로 산산히 찢어지는
느낌뿐이었다.
숨이 끊어지기 직전, 조표는 문득 자신은 이제 더 이상
누구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웃으려고 했으나 미소가 떠오르기도 전에 그의 의식은
영원히 끊어지고 말았다.
주위는 아주 조용했다.
노독행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계곡의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이십 여장 밖에 하나의 붉은 인영이 섬전같은 속도로
치달려 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노독행은 희미하게 웃었다.
"운이 좋군, 북리강. 하지만 머지않아 이 자들을
부러워하게 될거야."
아마 지금 정신없이 도망치는 북리강이 이 음성을
들었다면 차라리 지옥의 염라대왕에게로 도망칠 지언정 두
번 다시 그를 만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노독행은 천천히 몸을 돌려 걸어갔다.
그러다가 문득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바닥 한 구석에 보기 민망한 자세로 쓰러져 있는
조교연의 모습이 들어왔다.
겉옷을 벗고 있었기 때문에 바닥에 누워 있는 그녀의
가슴부위가 깊은 곳까지 드러나 보였다. 게다가 그녀의
몸은 유달리 풍만하고 피부가 가무잡잡해서 보는 이의
시선을 뜨겁게 만드는 묘한 색감(色感)을 지니고 있었다.
하나 그녀를 바라보는 노독행의 눈빛은 냉정하기만
했다.
노독행은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휘저었다.
팟!
혈도가 풀리자 그녀는 벌떡 일어났다.
하나 곧 목을 부여잡으며 몸을 휘청거렸다.
"음...!"
그녀는 조금전에 이태의 장력에 목덜미를 격중당했기
때문에 그 충격이 아직까지 지속되고 있었다.
그녀는 입술을 지그시 깨문 채 들끓는 기혈(氣血)을
가라앉히려 했다. 이어 노독행을 돌아보며 포권을 했다.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노독행은 표정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한 가지만 말해줘."
그녀는 그의 냉정한 말투에 내심 어이가 없었지만 그의
가공할 무공을 조금전에 어렴풋이나마 보았는지라 함부로
쏘아붙이지 못했다.
그녀는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무언가요?"
노독행의 외눈에서 한 줄기 기광이 번뜩거렸다.
"표향령주는 누구지?"
조교연은 조금 어이없는 표정이 되었다. 세상에
표향령주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도 있다니...
하나 그녀는 그의 눈빛을 보자 차마 비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눈앞의 이 무시무시한 무공을 지닌 애꾸괴인이
강호에 나온지 얼마 되지 않는 인물일거라고 생각했다.
"사마표향. 영주님의 이름은 사마표향이에요."
사마표향!
이 이름을 듣자 노독행은 고개를 쳐들어 묵묵히 허공을
응시했다.
조교연은 허공을 올려보고 있는 그의 무표정한 얼굴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왜 묻는거죠? 영주님을 알고 있나요?"
노독행은 그녀를 내려보며 나직하게 웃었다.
"알고 있을 것 같아?"
그녀는 아리송한 표정이 되었다.
그가 표향령주를 알고 있는지 어떤지 짐작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알고 있다면 그는 표향령주와 어떤 사이인가?
현재의 표향령은 몹시 어려운 형편에 처해 있었다. 이런
때에 이 괴인같은 절대의 고수가 힘을 합쳐 준다면 얼마나
큰 도움이 되겠는가?
그녀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 되어 다시 물었다.
"영주님과 어떤 사이죠? 그 분을 잘 아세요?"
노독행은 말없이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차가운 얼굴에 차가운 웃음이었다.
그런데 조교연은 어딘지 모르게 쓸쓸해 보인다는 느낌을
받았다.
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는 그녀도 몰랐다.
단지 지금까지 냉혹하고 무섭게만 보였던 눈앞의 애꾸
사나이가 고독하고 외로운 젊은이로 보였다.
그녀는 새삼스런 눈으로 노독행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참으로 평범한 얼굴이었다.
한쪽 눈에 검은 안대를 하고 있지 않았다면 시중(市中)
어디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는 그런 얼굴이었다. 특별히
잘 생기지도 않았고 개성이 강해 보이는 얼굴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한 번 보는 것 만으로도 사람의 마음에 깊은
인상을 주는 그런 얼굴이었다.
번뜩이는 외눈 때문인지 모른다. 아니면 어떤 일이
있어도 허물어질 것 같지 않는 그 무표정한
얼굴표정때문인지도...
그것도 아니라면...
그 자의 마음속에 숨어있는 깊은 고독(孤獨)을
잠깐이나마 엿보았기 때문일까?
"그녀는 어디 있지?"
노독행의 차가운 음성에 그녀는 퍼뜩 상념에서
깨어났다.
"네? 뭐라고요?"
노독행의 번뜩이는 시선이 그녀의 눈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조교연의 얼굴이 자신도 모르게 붉어졌다. 원래 피부가
가무잡잡했기 때문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아예
홍당무처럼 새빨개졌을 것이다.
동시에 그녀의 가슴은 심하게 두근거렸다.
그녀는 더 이상 그의 시선을 받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나도 몰라요. 영주님은....실종되셨어요."
그녀는 거의 기어들어가는 듯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그녀 자신도 왜 이렇게 가슴이 뛰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흑나찰 조교연은 여인답지 않게 강인하고 싸늘한 여자로
알려져 있었다. 그녀의 외호에 나찰이라는 외호가 그냥
붙은게 아니었다.
하나 지금 고개를 떨군 채 얼굴을 붉히는 그녀의 모습은
전혀 나찰다운데가 없었다.
노독행의 시선이 아주 잠깐 그녀의 목덜미로 향했다.
목덜미 아래 탐스런 젖무덤의 윗부분이 벌어진 옷자락
사이로 살짝 드러나 보였다.
노독행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말없이 앞으로 걸어나갔다.
조교연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고 있다가 그의 음성이
들리지 않자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가 그가 저만큼 앞으로
걸어나가자 당황하여 급히 그를 불렀다.
"이봐요!"
노독행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속 걸어갔다.
조교연은 몇 번이나 망설였으나 끝내 그 자리에 멍하니
선 채 멀어져 가는 노독행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마침내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그녀는 뜻모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그녀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한동안 허공을 응시한 채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다가 웃옷을 벗어놓은 곳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천천히 검은 무복을 다시 걸쳐 입었다.
3
팟!
아슬아슬한 차이였다.
실날같은 차이로 유엽비수는 북리강의 머리를 스치고
옆에 있는 고목나무의 등걸에 틀어 박혔다. 비수에 실린
힘이 어찌나 강력했던지 비수는 거의 손잡이만을 남겨놓고
모두 나무속에 박혀 있었다.
북리강은 숨을 헐떡였다.
벌써 세 번째였다.
잠시도 마음을 놓고 있으려고만 하면 어디선가 어김없이
유엽비수가 날아드는 것이다.
처음 유엽비수가 날아들었을 때 북리강은 꼼짝없이
유엽비수에 자신의 목이 관통당하는 줄로만 알았다.
유엽비수는 너무도 갑작스럽고 빠르게 날아왔던 것이다.
하나 금시라도 그의 목에 틀어박힐 듯 하던 유엽비수는
마지막 순간에 방향을 바꾸어 아슬아슬하게 그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때 북리강은 자신이 참으로 운(運)이 좋다고
생각했다.
하나....
두 번째 유엽비수는 그가 백 여리를 더 달려간 후에
나무에 기대어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을 때 날아들었다.
그것이 날아드는 속도와 방위는 그야말로 완벽해서
북리강은 도저히 피할 곳을 찾지 못했다.
그는 이번에야 말로 끝장이다 라고 생각했으나 이번에도
유엽비수는 아슬아슬하게 그의 관자놀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때 북리강은 처음으로 상대가 일부러 그를 죽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수치심과 분노, 그리고 공포가 뒤섞인 복잡한
눈으로 미친 듯이 주위를 두리번거렸으나 개미새끼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괴괴한 침묵속에 잠긴 울창한 수림은 북리궁에게 말할
수 없는 두려움을 안겨다 주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그는 다시 이 백리를 도망쳐왔다. 그의
생애에서 그때처럼 빠르게 달린 적이 없었다.
도중에 다섯 번이나 방향을 바꾸고, 세 번은 다른
곳으로 간 듯한 흔적을 남겨 놓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에야 말로 안전하겠지 하고 숨을 내쉬고
있을 때 세 번째 유엽비수가 날아들었던 것이다.
북리강의 가슴은 금시라도 터져버릴 것 같았다.
그때 처음으로 북리강은 어떤 절망감에 빠져 들었다.
유엽비수는 북리강 자신의 것이었다.
특수한 청강(靑剛)으로 만들어서 푸른 빛이 일렁이는
비수의 날이 그랬고, 힘을 받을 수 있게 정교하게 파여진
손잡이의 문양이 그랬다.
무엇보다도 유엽비수의 밑둥에 작게 새겨진
<북리(北里)>라는 글자가 이 유엽비수들이 누구의
것인지를 웅변적으로 나타내 주고 있었다.
북리강은 이 유엽비수를 던진 자가 누구인지도 알고
있었다.
그 자를 떠올리기만 해도 북리강은 손끝이 덜덜
떨려왔다.
그 번뜩이는 외눈과 입가에 떠올라 있는 희미한 미소...
북리강은 아직 태어나서 누구를 이토록 두려워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부인하려고 했지만 자신이 지금 무섭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해야만 했다.
'그래, 나는 무섭다. 그 망할 놈의 자식이 나는 정말
무섭단 말이다. 하지만 그게 어쨌단 말인가? 그런 놈은
내가 아닌 천하의 누구라도 무서워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북리강은 발작적으로 절규했으나 그 음성은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았다.
북리강은 침착하자고 스스로 생각했다.
오랜 동안의 강호경험으로 그는 냉정을 되찾는 것만이
난관을 헤쳐나가는 유일한 길임을 알고 있었다.
침착하자!
그 놈에게도 헛점이 있을 것이다.
그 놈이 마치 장난감을 가지고 놀 듯 나를 우롱하는
꼴을 더 이상 당하지는 않을테다.
북리강의 머리속이 정신없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 놈은 나를 충분히 죽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위협만 할 뿐 해치지 않고 있다.
그 놈의 목적은 과연 무엇인가?
단순히 자신을 괴롭히기 위해서만은 아닐거라고
생각했다.
그 놈은 그처럼 단순한 놈이 아니다.
무언가 노리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만 있다면 그 놈을 오히려 함정에
빠뜨릴 수도 있을텐데....
그 놈이 자신에게서 노리는 것이 무엇일까?
혹시...
북리강의 눈빛이 번쩍거렸다.
그 놈은 나를 통해서 장홍칠절의 나머지 사람들의
행방을 알아내려는 것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그 놈은 내가 이대로 허겁지겁 다른
사람들을 찾아가기를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북리강의 입가에 처음으로 미소가 떠올랐다.
좋은 방법이 떠올랐던 것이다.
놈이 그걸 기대한다면 놈의 기대대로 움직여 준다!
그 놈은 아마 자신의 무공을 믿고 장홍칠절의 나머지
사람들을 별로 염두에 두지 않고 있을 것이다. 아마
종적만 발견한다면 쉽게 해치울 수 있다고 믿고 있겠지.
그 놈의 무공으로 보아 결코 무리한 생각은 아니었다.
하나 대형(大兄)과 둘째인 홍검유명 곽일로는 지금
특정한 장소에 가 있었다.
그들이 그곳에 있는한 그들을 해치울 수 있는 자는
천하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곳이라면....
북리강은 득의의 미소를 떠올렸다.
제 아무리 그 놈이 대단한 무공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곳에서라면 마음대로 활개칠 수 없을 것이다. 그곳은 한
개인의 힘으로는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곳이었다.
'흐흐...좋다, 이놈! 너를 대형이 계신 곳으로 데려다
주지. 그곳이 바로 네 놈의 무덤이 될 것이다.'
북리강은 악독한 미소를 지은 채 주위를 둘러보다가
동남쪽을 향해 몸을 날렸다.
곧 그의 몸은 울창한 수림속으로 사라져갔다.
노독행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까지 그는 북리강이 있던 곳에서 십 여장 떨어진
나무위에 걸터앉아 있었던 것이다.
북리강은 형제들을 찾아가기로 마음을 결정한
모양이었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곧장 일직선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노독행은 그 광경을 보면서 입가에 차가운 미소를
매달았다.
"이제 비로소 본격적인 사냥이 시작되겠군."
그는 나무위에서 내려왔다.
그리고는 별로 서두르는 기색도 없이 느릿느릿 북리강이
사라진 쪽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하늘은 점점 어두워 오고 있었다.
하늘 한 편에서 제법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옷자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노독행은 유람이라도 나온 사람처럼
산길을 십 여리쯤 걸어갔다.
멀지 않은 곳에 두 그루의 나무가 부러지고 수풀이 밟힌
흔적이 보였다.
노독행은 그곳으로 다가가서 나무가 부러진 방향과
수풀이 누운 위치를 살펴보았다. 두 방향 모두 동남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다시 오 리쯤 가자 울창한 수림이 나타났다.
수림이 막 시작되려는 곳에서 노독행은 다시 발자국을
발견했다.
마치 누군가가 힘껏 땅을 박차고 날아 오른 듯 선명한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노독행은 발자국을 자세히 살폈다.
앞부분보다 뒷꿈치쪽이 조금 더 깊이 파여 있었다.
언뜻 노독행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발의 뒷쪽이 더 깊이 파여 있다는 것은 발자국을 낸
사람이 공력을 끌어올려 땅을 힘껏 밟았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신법(身法)을 전개하면서 땅을 박차고
날아오른 것이 아니라 이 자리에 우뚝 선 채로 땅에
발자국을 새긴 것이다.
신법을 전개하는 도중이었다면 앞부분이 더 파여 있을
것이다.
발자국을 낸 사람은 노독행이 발자국을 쉽게 발견할 수
있도록 일부러 흔적을 남긴 것이 분명했다.
제법 약은 수작이었으나 노독행의 눈에는 어린 아이
장난처럼 보였다.
하나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보통 일부러 이런 흔적을 남긴 것은 상대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서였다.
하나 노독행은 이 발자국의 임자가 실제로 발자국의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발자국 주위에 미세하게 꺾여 있는 풀잎의 방향이
그것을 나타내 주고 있었다.
만약 발자국을 이쪽으로 내고 다른 곳으로 몸을
날렸다면 풀잎의 꺾인 방향도 달라졌을 것이다.
고의적으로 자신이 간 방향을 알려주려는 상대의 의도는
과연 무엇인가?
노독행은 전에도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곰의 뒤를 고 있는 도중에 곰이 일부러 흔적을 내서
자신을 안심시킨 후 삥 돌아 그를 뒤에서 습격하려고 했던
것이다.
물론 북리강은 곰이 아니었다.
노독행을 배후에서 습격하려는 생각 따위는 감히 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때문에 자신의 흔적을 스스로 남긴
것일까?
노독행은 이것이 여우사냥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여우란 놈은 무척 약아서 좀처럼 쉽게 잡히지 않는다.
십 여년전에 노독행은 오대산에서 은빛 여우 한쌍을
잡기 위해 한 달 가까이나 그 뒤를 은 적이 있었다.
그 한 쌍의 은빛 여우를 잡아 그 가죽으로 아버지에게
털조끼를 선물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한 달동안 그는 무진 고생을 한 끝에 마침내 암놈의
흔적을 발견했다.
그는 다른 한 놈의 행방도 알아내어 한꺼번에 처치할
욕심으로 그 암놈의 뒤를 집요하게 았다.
얼마나 많은 계곡과 개울을 건넜는지 모른다.
암놈 여우도 그가 아오는 것을 알고 그의 추격을
따돌리기 위해서 필사적이었으나 눈위에 자신의 발자국을
남기는 일만은 도저히 어쩔 수가 없었다.
하루 종일 그는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채 이 백리가 넘는
언덕과 산을 여우의 발자국을 아 헤매고 다녔다. 암놈
여우는 일부러 방향을 바꾸기도 하고 몇 차례나 개울을
타고 움직이기도 했으나 노독행을 떼어놓을 수는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그는 암놈 여우의 발자국이 거의
일직선으로 한곳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침내 암놈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다른 한 놈에게로
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노독행은 황급히 그 뒤를
아갔다.
암놈의 발자국은 커다란 절벽을 지나 하나의 동굴로
이어졌다.
노독행은 죽창을 든 채 서슴없이 동굴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집채만한 호랑이의 습격을 받았다.
그의 추격을 받던 암놈이 그를 호랑이굴로 이끌고 왔던
것이다.
암놈 여우는 물론 호랑이에게 갈가리 찢겨 죽었으나
노독행도 하마터면 그 여우의 신세가 될 뻔했다.
그때 호랑에게 물린 흉터는 지금도 노독행의 어깨에
생생하게 나 있었다.
지금 이 발자국을 보자 노독행은 당시의 광경이 뇌리에
떠올랐다.
북리강은 과연 당시의 은빛 여우와 같은 행동을 취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이 발자국은 그를 호랑이굴로 유인하는
함정인가?
노독행은 빙긋 웃었다.
북리강이 은빛 여우라도 상관없고, 이 길이 호랑이굴로
가는 길이어도 상관없다.
당시에 그는 전혀 무방비 상태에서도 호랑이를 해치우고
살아 남았다.
이번에는 그때보다 상황이 훨씬 좋았다.
적어도 당시처럼 무방비상태로 습격을 당하지는
않을테니까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