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보건곤-16화 (17/61)

제 16 장    나는  아직  잊지  않고  있습니다

1

유난히 흐린 봄날이었다.

사방에 신록이 움트고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건만 오늘은

하늘이 잔뜩 찌푸렸고, 낮은 구름이 짙게 깔려 있었다.

금시라도 비가 내릴 듯 어둡고 침침한 날이었다.

노독행은 천천히 허리를 폈다.

봉분은 쉽게 완성되었다.

봉분이라고 해보았자 별다른 것은 없었다.

귀면암 부근에서 줏어모은 몇 개의 뼈를 묻은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작고 초라한 봉분을 바라보는

노독행의 눈에는 평소와 다른 무엇이 번뜩이고 있었다.

그 봉분은 형인 노군행의 것이었다.

팔 년이 지난 이제서야 노독행은 다시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노군행도 비로소 자신의 안식처를 찾게 되었다.

노독행은 봉분앞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들고 있던

상자를 열어 인두(人頭) 하나를 꺼냈다.

조양홍의 피로 범벅이 된 얼굴이 드러났다.

노군행은 조양홍의 머리통을 형의 봉분앞에 내려놓았다.

처량한 말 따위는 늘어 놓지 않았다.

향불도 피지 않았다.

그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형에게 왔다는 인사를 했고,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서 노독행은 다시 품속을 뒤졌다.

잠시 후에 그가 꺼내든 것은 꽃잎이 모두 떨어진 말라

비틀어진 나무줄기 하나였다.

- 내 무덤에 장미꽃을 꽂아 주어라.

형의 마지막 말이 아직도 귓전에 메아리치고 있었다.

노독행은 그 장미꽃을 용케도 간직하고 있었다.

눈알이 뽑히고 목에 비수가 꽂히는 상황에서도 그는

장미꽃만큼은 품속 깊숙히 간직하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도 오랜 세월이 흘러 꽃잎은 모두  아 없어지고 그

줄기만이 바짝 마른 모습으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장미꽃에 얽힌 사연따위는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단지 형의 마지막 부탁이니만큼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 뿐이었다.

노독행은 줄기만 남은 장미꽃을 봉분앞에 꽂고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는 주저없이 몸을 돌렸다.

곧 그의 신형은 봉분을 뒤로 하고 아득하게 멀어져갔다.

그가 사라진 봉분앞 바닥에는 끄적거려진 글씨 한 줄이

씌여져 있었다.

- 형님. 나는 아직 잊지 않고 있습니다.

*                  *                  *

철각령의 고개를 넘자 멀리 하나의 폐허가 보였다.

그 폐허를 보면서 노독행은 팔년전의 어느 날을

생각했다.

팔년전의 어느 날,

서쪽 하늘이 피처럼 붉은 가을 저녁에 백호랑이의

가죽을 등에 질머지고 철각령을 넘던 하나의 소년이

떠올랐다.

그때 철각령의 정상에서 바라본 붉은 빛 노을은 왜

그렇게 아름다웠는지...

그리고 말발굽소리...

무심코 고개를 돌렸을 때 마주친 별빛 같은 눈동자...

노독행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감상(感傷)에 젖을 때가 아니었다.

적어도 지금의 자기에게 감상은 사치다.

폐허로 변한 노가살수문의 기왓장을 밟으면서 노독행은

쓸데없는 생각에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과거나 회상하려고 이곳에 온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이곳에 와야할 필연적인 이유가 있었다.

한동안 노독행은 무너진 잿더미를 이리저리 헤집고

다녔다.

노가살수문은 그야말로 철저하게 파괴되어 있었다.

누각 한 채, 담벼락 하나 제대로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불타버린 전각과 앙상하게 남은 기둥만이 무성하게 자란

풀더미속에 보기 흉하게 누워 있을 뿐이었다.

찾는 것을 발견한 것은 한 시진쯤 지나서였다.

그것은 하나의 거무튀튀한 철궤(鐵机)였다.

철궤는 폐허에서도 가장 심하게 파괴된 동쪽 잿더미의

돌틈속에 깊숙히 묻혀 있었다.

대충 철궤가 그쯤에 있으리라고 알고 있지 않았다면

도저히 찾을 수 없을만큼 부서진 돌조각과 무너진

담벼락이 철궤의 위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노독행은 자신의 양 손이 시커멓게 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돌더미를 헤치고 철궤를 꺼냈다.

철궤의 크기는 대략 석 자 정도 되었다.

이 동쪽의 잿더미는 아버지의 서재(書齋)가 파괴된

잔해였다.

그리고 이 철궤는 아버지의 서류보관함이었다.

아버지는 항상 무언가 귀중한 문서나 물건들이 있으면

이 철궤에 넣어두고는 했다.

녹이 잔뜩 슬은 그 볼품없는 철궤를 만지고 있으니

노독행은 마치 아버지를 다시 대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노독행은 철궤의 자물통을 붙잡고 비틀었다.

투툭!

녹슬은 자물통이 힘없이 부서져 나갔다.

철궤의 뚜껑을 열자 매퀘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노독행은 철궤의 안을 들여다 보았다.

색이 누렇게 바랜 몇 장의 종이와 약간의 장신구,

그리고 한 통의 편지가 있었다.

종이들은 노가살수문과 친분을 맺었던 여러

문파(門派)들의 친분을 맹세한 서약서(誓約書)였고,

장신구는 어머니의 유품(遺品)이었다.

노독행은 서약서와 장신구를 치우고 편지를 집어

들었다.

한 통의 빛 바랜 편지.

팔년전의 그날, 노독행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읽고 있었던 바로 그 편지였다.

이 편지를 받고 아버지는 길을 떠났고,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그리고 이 백년을 내려왔던

노가살수문은 그날 밤에 강호무림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노독행은 편지를 펼쳤다.

누런 종이위에 쓰여진 수려한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일환(一環).

그 녀석이 마침내 일을 저지를 결심인가 보네.

자네의 도움이 필요하네.

일련(日聯).>

간단한 글이었고, 단순한 내용이었다.

일환은 노독행의 아버지인 노일환을 말하는 것이었다.

일련이 천상회의 회주인 사마일련이라는 것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하나 사마일련이 말한 '그 녀석'이란 과연 누구일까?

그 날 천상회에는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아버지는 그곳으로 가서 무슨 일을 당했을까?

노독행은 이곳에 오기 전에 이 편지를 읽어 보면 당시의

혈겁에 대한 어떤 단서를 찾게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이

편지의 내용만으로는 아무 것도 알아낼 수가 없었다.

오히려 의문점만 더해줄 뿐이었다.

노독행은 편지를 네 겹으로 접어서 품속에 넣었다.

그는 결코 서두르거나 초조해 하지 않았다.

이곳에 단서가 없다면 다른 곳에서 찾으면 된다. 그래도

찾지 못할 때는 천상회로 직접 가서 사마일련을 만나보면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단서가 반드시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혈겁의 내막이 어떻게 되었건 분명히 혈겁은

일어났으며, 노가살수문은 그 피해자였다. 그들이

노가살수문을 피로  었으므로 당연히 그들은 그 핏빛을

받아야 한다.

이것은 강호의 철칙(鐵則)이었다.

노독행은 그 철칙을 지키는데 결코 주저하지 않을

것이며 내막 따위를 모른다고 결심을 늦추지도 않을

것이다.

노독행은 철궤를 뒤집었다.

철궤의 바닥은 이중(二重)으로 되어 있었다. 바닥을

뜯자 하나의 물건이 튀어 나왔다.

그것은 하나의 칼이었다.

칼은 특이하게도 반달(半月)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길이는 일곱 치 반 정도되어 다른 칼의 삼분지 일도 되지

않았다. 얼핏 보면 여자들의 장신구같기도 했다.

하나 도신(刀身)이 굉장히 짧은 대신에 도폭은 상당히

두툼하여 만도(彎刀)를 연상케 했다.

손잡이는 손가락모양으로 정교하게 파여있어 잡기가

수월했고, 일단 잡으면 모든 힘을 사용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손잡이의 끝에 달린 붉은 수실에는 하나의 가는 실이

매달려 있었다. 그 실은 특수한 무형은사(無形銀絲)로

만든 것으로, 평상시에는 손목에 감도록 되어 있었다.

일단 무형은사를 손목에 감으면 칼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주인과 떨어지지 않게 된다.

이 칼의 이름은 월영도(月影刀)라고 했다.

월영도는 대대로 노가살수문의 문주들만이 사용하는

독문무기였다.

노가살수문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이 칼을 몸에서 떼어놓은 적이

없었으나 이상하게도 혈겁이 벌어지기 전에 길을 떠날

때는 이 칼을 가지고 가지 않았었다.

그 후에 벌어진 일을 생각하면 확실히 아버지는 무언가

불길한 전조를 느끼고 계셨던 것이 분명했다.

노독행은 손으로 월영도의 도신을 어루만졌다.

그 둔탁한 듯 하면서도 서늘한 칼의 촉감이 왠지

친숙하게만 느껴졌다.

노독행은 무형은사를 왼쪽 손목에 단단하게 잡아

매었다. 그런다음 왼쪽 소매를 걷어 월영도를 팔뚝에

찼다.

월영도의 칼집에는 팔뚝에 찰 수 있는 가죽끈이 매달려

있어 평상시에 칼을 팔뚝에 차고 소매로 가리면 좀처럼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칼을 뽑을 때는 손목에 매어단 무형은사를 살짝

잡아당기면 된다.

노독행은 칼을 뽑는 동작을 몇 번 반복해 보았다.

처음에는 만족스런 속도가 나오지 않았으나 일각쯤

되풀이하자 점차 속도가 빨라지더니 나중에는 손이

움직이는 속도와 비슷한 빠르기가 되었다.

그제서야 노독행은 손을 멈추었다.

멀리 서쪽 하늘을 올려보니 어두웠던 하늘이 개이고

붉은 색 노을이 조금씩 번져가고 있었다.

어디선가 선선한 봄바람이 불어왔고, 주위의 수림에서는

나무 특유의 냄새가 짙게 풍겨져 나왔다. 이따금씩 산새의

나직한 울부짖음만이 들려올 뿐 사방은 아주 조용했다.

정말 평화로운 광경이었고, 고요한 봄의

저녁무렵이었다.

한동안 노독행은 무너진 폐허의 중앙에 우두커니 선 채

붉은 색으로 물들어가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그의 마음속에 무슨 생각들이 스치고 지나갔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을 것이다.

단지 알 수 있는 것은 몸을 돌렸을 때 그의 외눈이

이상하리만치 반짝거리고 있다는 것 뿐이었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한 차례 불어오는 산바람이 그의 옷자락을 한바탕

펄럭이고 지나갔다. 피처럼 붉은 노을속으로 사라지는

그의 모습은 흡사 앞으로 벌어질 피비린내나는 일들을

나타내주고 있는 것 같았다.

2

'이상한 놈이군.'

사도굉(司徒宏)은 눈쌀을 찡그렸다.

이곳은 관도(官道)위였다.

한낮의 해는 제법 따사로움을 느낄 정도로 내리쬐고

있었고, 주위는 조금씩 신록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화창한 날이었고, 날씨도 아주 신선했다.

이런 날이라면 누구라도 상쾌하고 밝은 기분에 젖어들

것이다.

그런데 사도굉의 기분은 영 그렇지가 못했다.

그게 다 길을 막고 우뚝 서 있는 저 괴상한 사나이

때문이었다.

그 사나이는 화창한 봄날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칙칙한 흑의를 걸치고 있었다. 한쪽 눈에 검은 안대를

했고, 머리는 헝클어져 아무렇게나 뒤로 대충 묶어맨

상태였다.

문제는 그 자의 복장이나 머리형태가 아니었다.

그 자의 몸 속 어디에선가 사람을 섬뜩하게 만드는

분위기가 풍겨나오고 있었다.

사도굉은 수십 년간 도산검림(刀山劍林)을 헤쳐나오면서

두려움을 모르고 살아왔으나 자신의 앞을 불쑥 가로막은

채 말없이 서 있는 이 애꾸눈의 사나이에게 만큼은 이상한

위압감이 들었다.

사도굉의 손이 자신도 모르게 왼쪽 팔뚝으로 향했다.

그의 왼쪽 손목아래부분부터 팔뚝까지는 뱀의

혓바닥처럼 가늘고 붉은 빛이 감도는 채찍이 칭칭 감겨

있었다.

그 붉은 채찍을 어루만지자 사도굉은 긴장되었던 마음이

차츰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그 채찍은 지난 세월동안 단 한 번도 그의 기대에

어긋난 적이 없었다. 사도굉은 채찍을 어루만지며 싸늘한

음성으로 물었다.

"네 놈은 누구냐?"

애꾸사나이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우뚝 선 채로

사도굉을 응시하고만 있었다.

그 번뜩거리는 외눈에서 흘러나오는 눈빛을 보자

사도굉은 몸을 움찔거렸다.

'정말 무서운 눈을 가진 놈이로군.'

사도굉의 오른손이 채찍의 손잡이를 살짝 움켜잡았다.

애꾸사나이는 사도굉이 채찍을 잡는 것을 보면서도 몸을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 그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 미소는 사도굉의 마음에 찬 바람을 불게 했다.

그는 눈앞의 애꾸사나이가 결코 평범한 인물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나, 그가 대체 누구이며 무엇때문에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지는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혹시.....?'

사도굉은 퍼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급히 물었다.

"표향령의 인물이냐? 조교연을 구하러 온 것이냐?"

애꾸사나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의 얄팍한 입술이 살짝

열리며 나직하면서도 음울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표향령 따위는 몰라."

사도굉의 눈쌀이 잔뜩 찌푸려졌다.

그 음성이 몹시도 귀에 거슬렸던 것이다.

그 음성속에는 사람의 마음을 초조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대형(大兄)의 명령을 받고 나오는 길이었다.

사도굉은 이곳에서 멀지 않은 장소에서 다른 한 사람과

함께 한 가지 일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쉬운 일은

아니었으나 사도굉과 다른 한 사람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기에 사도굉은 길을 떠날 때 가벼운

마음이었다.

그런데 돌연히 나타난 괴이한 분위기의 사나이가 그의

마음에 먹구름을 안겨다 주고 있는 것이다.

사도굉은 마음속의 먹구름을 몰아내려는 듯 싸늘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네 놈은 누구냐? 무슨 일로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거냐?"

애꾸사나이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모골이 송연해지리만치 냉혹한 미소였다.

"나는 말이지..."

애꾸사나이의 독특한 색조를 띤 음성이 들려왔다.

"누가 내 앞을 가로막으면 이유따위는 묻지 않아. 그저

상대를 때려눕힐 뿐이지."

사도굉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이 자는 지금 자신을 조롱하고 있었다. 시비를

걸어왔는데도 쓸데없이 이것저것 물어보는 사도굉의

행동을 비웃고 있는 것이다.

사도굉은 아직 남에게서 이런 모욕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더욱 이상한 것은 이런 모욕을 당하면서도

사도굉은 선뜻 눈앞의 이 애꾸사나이에게 손을 쓰기가

망설여진다는 것이었다.

대체 무엇을 망설이고 있는가?

그때서야 비로소 사도굉은 채찍을 움켜쥔 자신의 손에

식은 땀이 흥건하게 고여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지금 자신이 눈앞의 이 자를 두려워 하고 있다는

것을 애써 부인하려 했다.

자신이 이런 한쪽 눈도 없는 애꾸를 두려워 할 리가

없었다.

한쪽 눈이 없다는 것은 무인(武人)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눈에 사각(死角)이 형성되어 시야가 좁아지기

때문에 절정의 무예를 수련할 수가 없다.

설사 절정의 무공을 익힌다 할지라도 남과 대적할 때

눈의 사각이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여 제대로 실력을

발휘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눈앞의 이 애꾸도 분위기만 그럴 듯 할 뿐 막상

겨뤄보면 별게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선뜻 손이 나가지지 않았다.

그가 출수(出手)를 한 것은 그때 마침 멀지 않은 곳에서

한 사람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붉은 혈포를 입고 도끼를 든 인물

하나가 멀리서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 도끼를 든 혈포인을 보자 사도굉의 마음속에는

분노와 함께 수치심이 솟구쳐 올랐다.

'내가 여기서 이름도 모르는 애꾸놈에게 모욕을

당하고도 가만히 있다면 어찌 다른 형제들의 낯을 볼 수

있단 말인가?'

충동적으로 사도굉은 오른손을 세차게 떨쳤다.

쉬악!

팔뚝에 감겨 있던 붉은 채찍이 한 마리의 독사처럼

꿈틀거리며 애꾸사나이의 목덜미를 향해 날아갔다.

일반적으로 채찍은 횡(橫)으로의 이동은 쉬워도

종(縱)으로의 이동은 몹시 까다롭다. 즉, 채찍 자체가

옆으로 휘둘러 사용하는 병기이기 때문에 검이나 도처럼

찌르는 공격은 좀처럼 하지 않는다.

그런데 사도굉의 채찍을 휘두르는 수법은 옆으로

휘두르는 것보다는 앞으로 찔러오는 동작이 훨씬 빠르고

능숙했다.

그의 이 수법은 혈사비등편법(血蛇飛騰鞭法)이라는

것으로, 이름 그대로 마치 한 마리의 핏빛 뱀이 하늘을

날라 오는 것처럼 빠르고 위력적이어서 웬만한 고수는

피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쓰러지고 만다.

지금도 공간을 압축해서 들어오는 채찍의 날카로운 끝은

순식간에 애꾸사나이의 목덜미를 그대로 관통해 버릴 것만

같았다.

애꾸사나이는 사도굉의 채찍이 이렇게 빠를 줄은 짐작도

못했는지 채찍이 거의 목에 닿을 순간이 되어서도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별 것 아니었잖아.'

사도굉의 입가에 실소가 떠올랐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석상처럼 꼼짝도 않고 서 있었던 애꾸사나이의 어깨가

가볍게 흔들렸다.

팟!

사도굉의 채찍이 아슬아슬하게 애꾸사나이의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사도굉은 흠칫 놀라 황급히 손목을

움직여 채찍을 회수하려 했다.

하나 내뻗어졌던 채찍은 돌아오지 않았다.

어느 사이엔가 애꾸사나이의 오른손이 채찍의 한쪽 끝을

움켜잡고 있었던 것이다.

사도굉은 안색이 대변해 있는 힘껏 채찍을 잡아 당겼다.

핑! 핑!

요란한 파공음과 함께 채찍이 금시라도 끊어질 듯

팽팽하게 당겨졌다.

사도굉의 채찍은 천축에서만 자라는

금적련사(金赤練蛇)의 껍질을 철심목(鐵心木)의

수액(樹液)에 담궜다가 다시 혈정액(血精液)을 발라 한

달동안 그늘에서 말린 것으로 질기고 단단하기가 가히

천하제일이었다.

게다가 탄력성이 좋아서 어떤 물체에던지 닿기만 하면

칭칭 감기면서 찢어버리기 때문에 도저히 맨손으로는 잡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애꾸사나이는 마치  은 새끼줄이라도 잡듯이

너무도 수월하게 혈편을 잡아 버린 것이다.

사도굉은 아직 단 한 번도 자신의 혈편을 상대에게

붙잡힌 적이 없어서 순간적으로 당황하여 손목을 세차게

떨었다.

파르르...

혈편이 마치 발광하는 한 마리의 독사처럼 심하게

요동을 치며 막대한 압력을 전했다.

하나 애꾸사나이의 손아귀에 잡힌 채찍의 끝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쓰윽!

오히려 애꾸사나이가 손을 당기자 사도굉의 몸이 그의

앞으로 주르르 딸려왔다.

사도굉은 사색이 된 채 끌려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이

발버둥쳤으나 생각과는 달리 그의 몸은 너무도 맥없이

애꾸사나이에게로 끌려가고 있었다.

멀찌감치에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혈포인이 사도굉의

위기를 눈치챘는지 도끼를 든 채로 부리나케 달려왔다.

"멈춰라!"

하나 혈포인이 채 반도 달려오기 전에 사도굉의 몸은

애꾸사나이의 지척으로 끌려왔다.

사도굉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잡고 있던 채찍의

손잡이를 놓으며 뒤로 물러났다.

그 순간 애꾸사나이는 세차게 손을 떨쳤다.

촤악!

미처 피할 사이도 없었다. 사도굉의 몸이 채 허공으로

완전히 솟구치기도 전에 혈편이 그의 하체에 감기며 피가

솟구쳐 올랐다.

"크윽!"

사도굉은 자신의 오른쪽 다리가 혈편에 격중되어 살이

갈라지는 통증을 느끼고 몸을 휘청거렸다.

그는 반사적으로 앞으로 주춤 달려나가며 애꾸사나이를

향해 쌍장을 휘둘렀다. 애꾸사나이는 피식 웃으며 들고

있던 채찍을 위로 쳐올렸다.

사도굉은 오른쪽 다리가 채찍에 감긴 채로 몸의 균형을

잃고 뒤로 기우뚱거리며 쓰러졌다.

"이...이런...."

사도굉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할 때 처음으로

애꾸사나이의 몸이 그를 향해 돌진해 들어왔다.

"안돼...!"

날카로운 고함소리가 허공을 찢고 울려퍼졌다. 하나 그

고함소리는 뒤이어 터져나온 폭음과 비명소리에 묻혀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었다.

콰쾅!

"크아악!"

사도굉은 애꾸사나이의 발에 정면으로 아랫배를

강타당하고 허공으로 이 장이나 몸이 떠올랐다.

다시 바닥에 내려왔을 때 그의 몸은 이미 피로 범벅이

된 채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정천척(鄭賤戚)은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진 처참한

광경에 할 말을 잊고 달려오던 몸을 멈추었다.

자신이 뻔히 보고 있는 동안에 자신의 의형이며

강호무림의 절정고수인 사도굉이 정체불명의 괴인에 의해

처참한 최후를 맞이했던 것이다.

그는 사도굉이 오공(五孔)에서 시뻘건 선혈을

폭포수처럼 쏟으며 허무하게 쓰러진 그 광경을 도저히

잊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너...이 놈...!"

정천척은 이를 부드득 갈아붙이며 사도굉을 죽인 애꾸의

괴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죽어라!"

그의 수중에 들려있는 혈부(血斧)가 섬뜩한 광망을

뿌리며 애꾸사나이의 뒷통수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정천척은 솟구치는 분노와 살기를 억제하지 못하고 있는

힘을 다해 휘둘렀기 때문에 혈부에 실린 힘은 가히 상상을

불허할 정도였다.

애꾸사나이는 미처 피할 사이가 없었던 지 몸을 돌리며

왼손을 쳐들었다.

그것은 마치 미친 듯이 돌진해오는 수레바퀴에 앞발을

들고 맞서보려는 사마귀의 행동같이 부질없어 보였다.

팟!

섬광이 사라지고 정천척의 핼쓱한 얼굴이 드러났다.

정천척은 입꼬리를 가늘게 떤 채 식은 땀을 주르르

흘리고 있었다.

그토록 가공할 기세로 떨어져 내리던 혈부의 도끼날을

애꾸사나이의 왼손이 정면으로 받아냈던 것이다.

설사 쇠로 만든 손이라 할지라도 부러지거나 잘려져야

하거늘 어찌 피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의 손이 엄청난

기세로 떨어지는 도끼의 날을 잡고도 멀쩡할 수 있단

말인가?

"이...이..."

정천척은 사력을 다해 도끼를 잡아 빼려고 했으나

애꾸사나이의 손에 쥐어진 도끼날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조금전에 채찍을 잡힌 채로 그것을 잡아

빼려고 애를 쓰던 사도굉과 흡사한 모습이었다.

정천척의 이마와 콧등에 손가락만한 땀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우드득!

정천척은 체내의 모든 잠력(潛力)을 끌어 올려

애꾸사나이의 손에 쥐어진 도끼를 잡아 빼려고 했다. 바로

그때 애꾸사나이가 도끼날을 쥐었던 손을 놓았다.

우스꽝스러운 광경이 벌어졌다.

전력을 다해 도끼를 들어올리던 정천척은 갑자기 상대가

도끼를 놓자 자신의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뒤로 한 바퀴를

돌며 나가 떨어졌던 것이다.

콰당!

고통을 느낄 사이도 없이 정천척은 쓰러질 때보다 더욱

빨리 일어났다.

하나 그때 그는 하나의 무시무시한 눈이 자신의

코앞에서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눈과 시선이 마주치자 정천척은 모골이 송연해졌다.

애꾸사나이는 어느 새 그의 바로 앞에 다가와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정천척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너...너는 누구냐?"

애꾸사나이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새 잊었나?"

정천척은 순간적으로 애꾸사나이의 말뜻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애꾸사나이의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가 그치지 않았다.

굶주린 늑대같은 미소였다.

"예전에도 내 죽창에 꿰뚫릴 뻔 하지 않았나?"

"죽창?"

정천척은 움찔 놀라다가 갑자기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죽창이라는 말을 듣자 오래전의 어떤 일이 생각이 났던

것이다. 벌써 거의 팔 년이나 흐른 뒤였으나 당시의 일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너무나 놀라고 당황하여 자신도 모르게

더듬거렸다.

"너....너는 노가살수문의 그...."

순간 노독행의 몸은 그에게로 바짝 쏘아져 오고 있었다.

"알았으면 됐어. 다른 자들은 너희들처럼 쉽게 죽지는

않을거야."

정천척은 상대의 몸이 너무도 빠르게 다가와 도저히

피할 수 없음을 알고 절망적으로 도끼를 휘둘렀다.

파아...

그의 도끼가 허공을 가르고 지나갔다.

그 순간 정천척은 이제껏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던

지독한 통증이 자신의 가슴을 갈가리 찢는 것을 느끼고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크아악-!"

그는 가슴이 산산이 박살난 채 십 여장이나 날아가

바닥에 쳐박혔다.

쿵!

질펀한 피가 분수처럼 쏟아지는 가운데 그는 몇 차례

몸을 꿈틀거리다가 축 늘어지고 말았다.

이로써 오랫동안 강북무림에서 무서운 명성을 떨치고

있던 장홍칠절(長紅七絶)중의 두 사람인

홍심적담(紅心赤膽) 사도굉과 홍비일겁(紅飛一劫)

정천척은 파란만장한 인생의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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