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보건곤-15화 (16/61)

제 15 장        누  가     죽  였  지  ?

1

조양홍은 오늘 기분이 몹시 좋았다.

오늘은 그의 마흔 다섯 번째 생일날이었다.

아침부터 조가장(趙家莊)은 하객들로 술렁거렸으며 여러

곳에서 선물이 답지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천상회의

총호법(總護法)이 직접 사람을 보내 축하인사를 했다는

것이 조양홍을 가장 흐뭇하게 만들었다.

강북의 패자인 천상회에서도 서열 오위안에 드는 수뇌급

인물이 자신의 생일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의 위상이 보통이 아님을 나타내 주는 것이라고

생각되어 미소가 그치지 않았다.

덕분에 항상 저녁때면 통증을 느끼던 코뼈와 두 다리의

관절도 별다른 아픔을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조양홍은 총호법이 보낸 천축(天竺)의 질좋은 비단으로

만든 금의(錦衣)를 걸쳐 보았다.

거울에 비친 조양홍의 모습은 나무랄데가 없는

미남자였다.

하늘을 나는 용의 무늬가 은은하게 새겨진 금의를 걸친

모습은 자신이 보기에도 멋이 있었다.

이제는 제법 관록도 붙어 얼굴에 위엄이 어리기

시작했고, 체구도 당당해서 누구도 무시못할 실력자라는

인상을 짙게 풍겼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우뚝 솟아야할 콧등이 움푹 꺼져

있다는 것인데, 그때문인지 전체적인 그의 인상이 어딘지

약간 비뚤어져 보인다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었다.

부러진 코뼈를 생각하자 조양홍은 돌연 피가 싸늘하게

식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의 코뼈가 부러진 것은 팔년전이었다.

'팔년...벌써 그렇게 흘렀나?'

조양홍은 자신도 모르게 주저앉은 콧등을 쓰다듬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해지고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렸다. 심지어는 자다가도 깜짝깜짝 놀라서

잠을 깬 적도 있었다.

그럴때면 그의 온 몸은 식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고는

했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새도록 뒤척이다가 뜬 눈으로

밤을 꼬박 지새운 날도 많았다.

눈만 감으면 그 날의 장면들이 하나 둘씩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 날...그 장소...그 얼굴....

조양홍은 가급적이면 그 얼굴만큼은 떠올리려고 하지

않았다.

자신의 콧뼈를 부러뜨리고 전신을 만신창이로 만든 그

무서운 얼굴...부릅떠진 외눈에서 흘러나오는 그 눈빛을

두 번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그때를 생각하면 이렇게 멀쩡한 몸으로 살아 있는 것도

기적같은 일이었다. 하마터면 그는 반신불수가 될 뻔

했으나 총호법의 도움으로 간신히 회복될 수 있었다.

그로부터 적지 않은 세월이 흘렀다.

이제 그는 나름대로 확고한 기반도 닦았고, 상당한

명성도 쌓을 수 있었다. 창응검객 조양홍이라고 하면

장성(長城) 일대에서는 누구나가 첫손가락에 꼽는

검객(劍客)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이제....'

조양홍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빙그레

미소지었다.

'올해만 지나가면 나도 천상회의 요직을 맡게 될

것이다.'

그것은 총호법이 직접 그에게 언질한 것이었다.

내년 초에는 천상회에서 대대적인 조직개편이 있을

예정이고 그때 조양홍도 천상회의 하부조직중 하나를

맡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때 하인이 붉은 색 배첩 하나를 들고 들어왔다.

조양홍은 별 생각없이 배첩을 받아 들었다.

피처럼 붉은 배첩의 겉에는 아무 글씨도 쓰여 있지

않았다.

조양홍은 배첩을 펼쳤다.

<잘 있었나.>

아무런 서명도 없이 짤막하게 써 있는 글귀 하나만이

눈에 들어왔다.

조양홍의 눈살이 자신도 모르게 찌푸려졌다.

'누구지?'

조양홍은 고개를 갸우뚱거렸으나 아무리 살펴보아도

눈에 익은 필체는 아니었다.

조양홍은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들어오라고

했다.

잠시 후, 한 사람이 하인의 안내를 받으며 천천히

안으로 들어섰다.

조양홍은 의자에 앉은 채 들어온 사람을 보다가 약간

어리둥절한 모습이 되었다.

처음보는 얼굴이었던 것이다.

한쪽 눈에 검은 안대를 한 평범한 모습의 청년이었다.

상대가 애꾸라는 것이 이상하게 신경쓰였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에 남루한 흑의를 걸쳤다는 것도

조양홍에게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항상

단정하고 깔끔한 것을 좋아했다.

조양홍은 거의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살짝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자네는 누군가?"

검은 안대의 청년은 아무 말없이 웃었다.

그 미소를 보자 조양홍은 더욱 기분이 나빠졌다.

'건방진 놈이군.'

조양홍은 상대에 대한 첫 인상이 좋지 않아 더 이상

만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자연히 음성이 퉁명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용건이 무언가?"

검은 안대의 청년은 계속 웃고 있었다.

웃으면서 말했다.

"궁금한게 있어서..."

그의 음성은 첫 인상만큼이나 기분나쁜 것이었다. 마치

악을 고래고래 쓰고 목이 쉰 사람처럼 낮고 음울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게다가 말투가 거의 반말에 가까웠다.

조양홍의 눈쌀이 잔뜩 찌푸려졌다.

'뭐 이런 자식이 다 있어?'

그는 생각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이 버르장머리 없는 놈을

내 고 싶었지만 혹시라도 이 놈이 자신의 생일을

축하하러 온 하객인지도 모르는 일이라 간신히 솟구쳐

오르는 화를 억눌러 참았다.

"알고 싶은게 뭔가?"

검은 안대의 청년은 줄곧 입가에 미소가 그치지 않았다.

무엇이 그렇게 우스운 것일까?

그리고 그 미소는 왜 이렇게 사람의 신경을 건드리는

것일까?

검은 안대의 청년은 웃으면서 천천히 다가왔다.

조양홍은 왠지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왜 갑자기 그런 기분이 들었는지는 그도 몰랐다.

단지 갑자기 주위의 공기가 싸늘하게 식어지며 등골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의자의 손잡이를

힘껏 움켜 잡았다.

그때 청년의 음성이 들려왔다.

"누가 죽였지?"

조양홍은 어리둥절하여 반문했다.

"죽이다니...그게 무슨 말인가?"

"내 형(兄)."

조양홍은 움찔 놀랐다.

"자네 형이라니...자네 형이 대체 누군가?"

검은 안대의 청년은 소리없이 웃었다.

조양홍이 문득 그의 모습이 어딘가 눈에 익다고 느낀

것은 바로 그때였다.

외눈을 번뜩이면서 다가오고 있는 그 자의 모습에서

어떤 무서운 일이 연상되었다. 그 일이 무엇인지는 갑자기

생각나지 않았으나 조양홍은 전신에 소름이 쭈욱 끼쳤다.

검은 안대의 청년은 웃으면서 말했다.

"벌써 잊었나? 노가살수문의 노군행 말이야."

그때 조양홍은 그가 누구인지 기억해 냈다.

그는 너무도 놀라고 두려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너....너는 노(路)...."

그 순간 노독행의 몸은 그의 코앞으로 맹렬하게

쏘아져오고 있었다.

조양홍과 노독행의 거리는 삼장 정도 되었다. 물론 먼

거리라고는 할 수 없으나 그렇다고 손을 내뻗기만 하면

닿는 가까운 거리는 결코 아니었다.

그런데 조양홍이 눈앞에 무언가가 번뜩거린다고 느낀

순간 노독행의 몸은 어느 새 삼장의 거리를 압축해서

조양홍의 면전(面前)으로 바짝 다가들고 있었다.

조양홍은 사색이 된 채 피하려 했으나 몸을 채 반도

돌리기 전에 노독행의 무쇠같은 주먹은 그의 콧등을

사정없이 가격하고 있었다.

쾅!

벼락치는 음향과 함께 조양홍은 얼굴에 엄청난 통증을

느끼고 자신도 모르게 커다란 비명을 내질렀다.

"아악!"

가뜩이나 볼품없이 주저앉아 있던 콧등이 완전히

부서지며 움푹 꺼져 버렸다.

조양홍은 입을 딱 벌리며 무언가 소리치려 했으나 그때

다시 노독행의 주먹이 날아들었다.

퍽!

이번에는 조양홍의 허리가 반으로 꺾였다. 노독행의

주먹은 거의 손목부근까지 조양홍의 아랫배에 파묻혔다.

조양홍은 입을 딱 벌린 채 마구 쓴 물을 토해냈다.

"우웩!"

아랫배가 마치 커다란 철추에 관통당하는 것 같았다.

노독행은 구부러진 그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조양홍은 입가로 오물과 붉은 피를 게워내며

바둥거렸으나 노독행은 주저하지 않고 다시 그의 아랫배를

가격했다.

퍽!

조양홍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입으로 피거품을

토해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하나 노독행은 웃으며 다시 그의 몸을 붙잡아 일으켰다.

난생 처음으로 조양홍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제....제발..."

그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사정하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노독행은 빙그레 웃으며 그의 뺨을 툭툭

쳤다.

"괜찮을거야. 인간은 이 정도로 죽지는 않아."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주먹은 조양홍의 아랫배에

깊숙히 파묻혔다.

쾅!

조양홍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떴다가 바닥에 쓰러졌다.

이번의 일격은 그야말로 강력하기 그지 없어서 조양홍은

입과 코로 검붉은 피를 쏟으며 꼼짝도 못하고 바닥에

널부러져 있었다.

"끄으으..."

그의 입에서는 괴이한 신음성이 계속 흘러나왔다.

노독행을 이곳으로 안내해 왔던 하인은 벌써 꽁무니를

뺀 지 오래였다.

넓다란 대청의 바닥 한 가운데 피를 흘리며 나뒹굴고

있는 조양홍의 모습은 왠지 황량하기조차 했다.

노독행은 천천히 쓰러진 조양홍에게 다가갔다.

조양홍의 안색은 완전한 잿빛으로 변해 있었다. 입과

코, 귀에서까지 피가 흘러내려 그야말로 얼굴전체가

피투성이였다.

노독행이 세 번째로 조양홍을 일으켜 세웠을 때

조양홍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 내렸다.

노독행은 조양홍의 피와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똑바로 응시하며 물었다.

"누가 내 형을 죽였지?"

조양홍은 경련을 일으키며 꺼져가는 음성으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하...할심독검(割心毒劍) 고현(古玄)...그건 고현의

짓이었어..."

입을 열자 부서진 이빨이 시커먼 핏덩이에 섞여

꾸역꾸역 흘러나왔다.

노독행의 외눈에서 번쩍하는 섬광이 떠올랐다.

"고현이 누구지?"

조양홍은 갈비뼈가 송두리째 부서진 듯 숨을 쉴때 마다

배창자가 끊어지는 것처럼 고통스러웠으나 헐떡거리면서도

황급히 노독행의 질문에 대답을 했다. 조금이라도

머뭇거리다가 다시 그의 주먹이 날아오는 것이 무엇보다도

두려웠던 것이다.

"처...천상회의 십대고수중 하나야."

"그 자는 지금 어디 있지?"

조양홍은 노독행의 외눈에서 흘러나오는 섬뜩한

한광(寒光)에 자신도 모르게 진저리를 쳤다.

"그...그는 총호법(總護法)의 측근이기 때문에 나도

행방을 잘 몰라. 아마 천상회의 총단(總壇)에 있기

쉬울거야."

"총호법?"

"다...당시의 그 일은 모두 총호법이 계획했던 거야."

노독행은 웃었다.

"그거 재미있는 소리군. 계속해 봐."

조양홍은 노독행의 미소를 보자 더욱 몸을 떨었다. 그

미소는 마치 먹이를 노려보는 굶주린 승냥이의

미소같았다.

"내...내가 아는 것은 많지 않아. 나는 단지 총호법이

노가살수문의 내부 지리에 정통한 자를 찾고 있다고 해서

그를 찾아갔던 것 뿐이라구. 정말이야."

노독행은 아무 말없이 조양홍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조양홍은 도저히 그 번뜩이는 외눈을 마주볼 수가

없었다.

그때 갑자기 밖이 소란스러워지며 한 떼의 인영이

안으로 들어왔다.

"저 자입니다. 저 자가 장주(莊主)님을

쓰러뜨렸습니다."

노독행을 손가락질하며 소리친 인물은 처음에 그를

안내했던 하인이었다.

그의 뒤에는 십 여명의 병장기를 든 무림인들이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은 이번에 조양홍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조가장에

왔던 하객들로, 조양홍이 정체불명의 괴인에게 두들겨

맞고 있다는 하인의 말을 듣고 허겁지겁 달려온 것이다.

2

그들의 눈에 처음으로 들어온 것은 피투성이로 변한 채

간신히 서 있는 조양홍의 처참한 몰골이었다. 이어서

그들에게 등을 돌린 채 조양홍의 앞에 우뚝 서 있는

평범한 체구의 사나이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들은 조양홍의 피범벅이 된 얼굴을 보자 안색이

대변해 분노에 찬 눈으로 노독행의 뒷등을 노려보았다.

"웬 놈이냐?"

노독행은 몸을 돌리지도 않고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방해하지 말고 꺼져."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거의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었으나

중인들은 모두 그의 음성을 똑똑이 들을 수 있었다.

한 순간에 주위의 공기가 싸늘하게 식어지며 무언지

모를 불길한 기운이 감돌았다.

나중에 이날 유일하게 살아남은 산수무영(散手無影)

학일리(鶴一狸)는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처음에는 왠 겁도 없는 미친 놈인가 했었소.

나뿐만 아니라 모두들 그렇게 생각했지.

그런데 어딘가 틀렸소.

그 자의 음성....

그 낮게 가라앉으면서도 기이한 울림을 담고 있는

음성을 듣는 순간 나는 이게 아닌데 라는 생각이 들었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들었는지 모르지만 아뭏든 나는

그렇게 들었소.

이건 지옥에서나 들을 수 있는 음성이다 라고.

그때 나는 그냥 돌아나오고 싶었소.

정말이오.

그 자의 말대로 그냥 꺼지고 싶었던 거요. 아마 장내에

나 혼자 뿐이었다면 틀림없이 그렇게 했겠지.

하지만 아쉽게도 그때 그곳에는 나 말고도 십 여명이나

다른 고수들이 있었소. 그래서 그냥 나올 수 없었던거요.

아마 나 뿐만이 아니고 모두들 나와 같은

심정이었을거요.

우리는 정말 그냥 돌아 나오고 싶었소.

하지만 그러지를 못했소.

그리고 결국 예상했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지....>

"죽일 놈...이곳이 감히 어디인줄 알고.."

중인들중 고리눈에 수염이 덥수룩한 우람한 체구의

중년인이 버럭 노호성을 지르며 노독행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는 이 일대에서 혁혁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쌍장탁천(雙掌托天) 위장송(威長松)이었다.

위장송은 쌍장탁천이라는 별호답게 양 손바닥의 공력이

절정에 다다른 인물이었다. 위장송이 커다란 손을 휘둘러

무서운 속도로 노독행의 앞가슴을 후려쳐오자 누가

보기에도 노독행의 몸이 폭풍을 만난 가랑잎처럼 그대로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았다.

노독행은 고개를 돌려 위장송을 바라보았다.

막 노독행의 가슴을 가격하려던 위장송은 노독행의

시선과 눈이 마주치자 왠지 모를 섬뜩함을 느끼고 안색이

변했다.

노독행은 하얀 이를 살짝 드러내며 웃었다.

그 순간 위장송은 그의 가슴에 거의 닿을 뻔 했던

자신의 양 손이 거역할 수 없는 강력한 힘에 튕겨지며

오히려 활짝 벌려진 자신의 앞가슴으로 노독행의 어깨가

부딛쳐 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직후 그는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고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쾅!

"크아악!"

위장송의 몸은 드넓은 대청을 완전히 가로지르고 날아가

반대쪽 벽면에 사정없이 부딪쳤다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위장송의 가슴뼈는 완전히 박살난 채 움푹 파여들어가

보기만해도 끔찍한 몰골이 되어 있었다.

한순간에 주위가 쥐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중인들은 입을 딱 벌린 채 처참한 모습으로 쓰러져 있는

위장송의 시신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노독행의 나직한 음성이 괴이한 정적이 감도는 대청안에

울려퍼졌다.

"아직 모르는군. 나는 두 번 말하지 않는 성미야."

동시에 노독행의 오른 주먹은 간신히 비틀거리며 서

있는 조양홍의 옆구리에 사정없이 틀어박혔다.

우드득!

갈비뼈가 부서지는 음향이 들리며 조양홍의 허리가

이상하게 뒤틀렸다.

"허헉!"

조양홍은 괴상한 신음을 토하며 발끝을 들었다가 서서히

허무러지듯 쓰러졌다.

그는 숨도 제대로 쉴 수 없는 지독한 통증을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혼절(昏絶)해 버리고 말았다.

"자...잔인한 놈!"

중인들중 누군가가 신음하듯 중얼거릴 때 노독행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번뜩이는 외눈이 중인들의 시야에 바짝 쏘아져

들어왔다.

그 순간 노독행은 중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가장 앞쪽에 서 있던 인물은 조양홍과 가장 친한 친구중

하나인 혈응조(血鷹鳥) 이벽(易劈)이었다. 이벽은

난데없이 노독행이 자신에게로 달려들자 흠칫 놀라 뒤로

몸을 날려 피했다.

하나 그가 피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어느 새 노독행의

어깨는 그의 콧등을 파고 들고 있었다.

콰쾅!

"아아악!"

이벽은 얼굴이 완전히 짓뭉개진 채 구슬픈 비명을

지르며 십 여장 밖으로 나가 떨어졌다.

그의 비명소리가 채 사라지기도 전에 노독행의 몸은

질풍처럼 이벽의 옆에 서 있던 중조삼랑(中條三狼)

하씨삼형제(賀氏三兄弟)에게 돌진해 들어갔다.

"미친 놈!"

중조삼랑중 첫째인 대랑(大狼) 하무인(賀無仁)이

싸늘하게 중얼거리며 다가오는 노독행을 향해 수중의

도(刀)를 휘둘렀다.

파앗!

차가운 도광(刀光)이 장내에 번뜩거렸다.

피가 튀기며 하무인의 목이 그대로 잘려졌다.

정말이었다.

허공으로 솟구친 목은 노독행이 아닌 하무인의

것이었다. 누구도 어떻게 칼을 휘두르던 하무인의 목이

오히려 잘려져 나갔는지는 알지 못했다.

하무인이 칼을 휘두르는 그 짧은 순간에 노독행이

번개같이 손을 내밀어 하무인의 머리통을 붙잡아 오히려

자신의 칼날아래 오도록 했다는 것은 그들로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알지 못할 것이다.

중조삼랑의 다른 두 사람인 이랑(二狼)

하무량(賀無亮)과 삼랑(三狼) 하무명(賀無明)의 최후는

더욱 비참했다. 그들은 대형인 하무인의 처참한 죽음에

놀라 멍하니 서 있다가 노독행의 양 손에 그대로 목덜미를

붙잡혔다.

우두둑!

뼈마디가 부러지는 음향과 함께 그들의 목뼈가

으스러지며 혓바닥이 툭 튀어나왔다.

그들은 비명도 제대로 질러보지 못하고 정승처럼 우뚝

서 있다가 노독행이 손을 놓자 맥없이 바닥으로 쓰러져

버렸다.

중조삼랑의 바로 뒤에 서 있던 인물은 섬서성에서 세

손가락안에 드는 권법(拳法)의 고수라는 추풍권(追風拳)

낙전(洛電)이었다.

낙전은 자신의 앞에 서 있던 중조삼랑이 태풍앞의

가랑잎처럼 우수수 쓰러지고 순식간에 노독행의 몸이

자신에게 짓쳐들자 안색이 대변해 허공으로 몸을 솟구치며

벼락같은 십이권(十二拳)을 앞으로 내갈겼다.

파파파파...!

실로 추풍권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눈부신

연환십이권(連環十二拳)이었다.

노독행의 몸이 마치 쭈욱 길어진 듯한 착각이 들었다.

십이권이 질풍처럼 퍼부어지는 그 긴박한 순간에

노독행의 몸은 열 두 번이나 움직여 그 십이권을 하나

하나 몽땅 피해버렸다.

그리고는 앞으로 곧장 주먹을 내뻗었다.

낙전은 노독행의 몸이 자신이 내갈긴 십이권을 너무도

수월하게 뚫고 들어오자 사색이 된 채 뒤로 물러났다.

하나 노독행의 주먹이 조금 더 빨랐다.

쾅!

단 한 주먹에 낙전은 아랫배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채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십 여장밖으로 훌훌 날아가 버렸다.

단순히 앞으로 내뻗은 듯한 가벼운 주먹이었는데 그

위력은 눈으로 보고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가공한

것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그 주먹이야말로 무쌍류의

비전인 붕추권(崩錘拳)이었던 것이다.

순식간에 다섯 명의 고수들이 피떡이 되어 쓰러지자

장내는 완전히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겁에 질린 몇 명의 인물들이 슬금슬금 꽁무니를 빼려

했고, 몇 사람은 손을 모아 노독행의 돌진을 막아보려고

했다.

하나 모두 부질없는 짓이었다.

콰쾅!

다시 두 명의 고수들이 피분수를 뿌리며 나가 떨어졌다.

섬전쌍검(閃電雙劍)이란 이름으로 관중(關中)지방에서

혁혁한 명성을 떨치고 있던 종씨형제(宗氏兄弟)는 채 검을

반도 휘두르지 못하고 부러진 검조각이 전신에 박혀

죽었다.

낙수(洛水)근처를 주름잡던 벽력부(霹靂斧)

염평(廉平)은 자신이 휘두르던 도끼가 오히려 목에 박혀

눈을 까뒤집은 채 쓰러졌다.

마치 양떼속으로 한 마리의 굶주린 늑대가 뛰어든

것같은 형상이었다.

나머지 살아남은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사방으로

도망쳤다.

"도...도망가자!"

"저 자는 악마다!"

열 일곱이나 되었던 고수들이 눈깜박할 사이에 채 다섯

명도 남지 않았다.

그들 다섯중에서 다시 네 명은 대청을 벗어나기 전에

피떡이 되어 날아갔다.

산수무영 학일리는 중인들중 가장 뒤에 있었던 데다

신법(身法)방면에서 남달리 뛰어났기 때문에 간신히 피와

죽음이 난무하는 대청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는 태어난 이래 그때처럼 공포에 질려본 적이 없었다.

대청을 벗어난 뒤에도 그는 다리가 후들거리고 가슴이

떨려 한동안 제대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하나 금시라도

그 애꾸눈의 사나이가  아올 것만 같아 도저히 그곳에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백 여리를 달려간 후에야 간신히 몸을 멈춰세웠다.

그러나 떨리는 가슴은 진정되지 않았다.

학일리는 아무도 없는 빈 절간에서 삼 일동안을 꼼짝도

않고 숨어 있었다.

나중에 사람들이 그를 발견했을 때는 그는 굶주림과

공포로 거의 반 광란(狂亂)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는 오 일동안 안정을 취한 다음에야 겨우 입을 열 수

있었다.

"조가장에서 혈겁을 일으킨 흉수(凶手)가 누구지?"

그를 발견해서 데려왔던 무리들중 하나가 그에게

물었다.

학일리는 멀거니 그 인물을 쳐다보았다.

무척 특이한 인상의 인물이었다.

머리카락이 붉은 색을 띄고 있었고, 얼굴도 자주빛으로

붉었다. 뿐만아니라 신광(神光)이 이글거리는 두 눈도

붉은 빛으로 번뜩여서 감히 제대로 마주볼 수 조차 없을

정도였다.

체구는 작은 동산을 연상케 할 정도로 우람했는데

의외로 나이는 그렇게 많아 보이지 않았다. 기껏해야 이십

대 후반쯤으로 보였다.

하나 나중에 학일리는 비록 젊어 보였으나 그 자의

나이가 사십이 넘었다는 것을 알고 다시 한 번 놀라게

되었다.

학일리는 마치 불타오르는 것처럼 붉은 머리카락을

휘날리고 있는 그를 보며 더듬거렸다.

"다...당신은 누구요?"

붉은 머리칼의 사내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나는 초력(楚礫)이라 한다. 내 이름은 들어 보았겠지?"

평상시의 학일리라면 초력이라는 이름을 듣고 경악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하나 지금의 그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져도 더 이상

놀라거나 두려워할 기운이 남아 있지 않았다.

학일리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 보았소. 당신이 바로 그 유명한 천상회의

혈사자(血獅子)였구료."

혈사자 초력!

그는 천상회의 삼대사자(三大使者)중 하나로 강호에서

열혈한(熱血漢)으로 이름이 높은 인물이었다. 비단 성질이

불같이 급할 뿐 아니라 펼치는 무공도 하나같이

패도무쌍(覇道無雙)한 것이어서 천상회 내에서도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특히 천상회의 실질적인 이인자(二人者)인 총호법의

신임이 두터워 천상회내에서의 지위도 십대고수에 못지

않았다.

초력은 혈광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학일리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아직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조가장혈겁의

흉수는 누구냐?"

학일리의 몸이 다시 경련을 일으켰다.

당시의 무시무시한 상황이 다시 뇌리에 떠올랐던

것이다.

"그...그는...."

학일리는 온 몸을 식은 땀으로 적신 채 몸을 덜덜

떨었다.

"그...그 자는...악마요."

초력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뭐라고?"

학일리는 실성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그 자는 악마요. 악마가 아니라면...그것과 비슷한

자일거요. 틀림없소. 그것외에는 달리 그 자를 설명할

말이 없소."

초력은 눈쌀을 찌푸리다가 벼락같이 학일리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쓸데없는 소리말고 똑바로 말해. 흉수는 누구냐?

이름이 뭐야?"

초력의 힘은 대단해서 그가 목을 잡고 흔들자 학일리의

몸은 어린아이마냥 흔들릴 수 밖에 없었다. 학일리는 그가

흔드는 데로 몸을 맡긴 채 멀거니 그를 쳐다보았다.

"이름은 모르오."

초력은 이대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는지 움켜쥐었던

멱살을 놓으며 조금 가라앉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학일리. 너를 추궁하는건 아니야. 하지만 당시

조가장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네가 유일하다. 흉수를 본건

오직 너뿐이야. 그러니 네가 말하지 않는다면 본회로서는

너를 고분고분하게 대할 수가 없다구."

그는 특히 본회(本會)라는 말에 힘을 주었다.

천상회라는 이름은 적어도 강북에서는 절대적인 권위를

지닌 것이었다.

하나 이번에는 천상회의 이름으로도 별 효험이 없었다.

학일리는 힘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정말 그 자에 대해서는 아는게 없소. 내가 그

자를 본 건 정말 아주 잠깐이오. 그 전에는 결코 그 자를

본 적도 없었고, 그런 자에 대해 듣지도 못했소."

초력은 학일리의 얼굴을 뚫어지게 살펴보고 나서야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내심 침음했다.

'일이 까다롭게 되었군. 학일리는 정말 흉수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하는게 분명하다. 총호법께서 반드시 흉수를

찾아오라고 하셨는데 큰일이군.'

그때 학일리가 무슨 생각이 난 듯 나직한 탄성을

터뜨렸다.

"아! 그러고 보니..."

초력은 귀가 번쩍 뜨여 급히 그를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냐?"

학일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자에게는 한 가지 특징이 있소."

"그게 무어냐?"

"그 자는 애꾸요."

초력의 눈에 이글거리는 광망이 떠올랐다.

"애꾸라고?"

학일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왼쪽 눈을 가리켰다.

"이쪽 눈에 검은 안대를 하고 있었소. 그것외에는 정말

기억나는 것이 없소. 평범한 얼굴에 평범한 체구였소."

"왼쪽 눈에 검은 안대라...."

초력은 중얼거리며 허공을 응시했다.

그는 아무리 생각을 굴려 보았으나 당금 무림에서 검은

안대를 한 절정고수는 생각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강호에 새로운 살성(煞星) 하나가 나타난

모양이군. 그래보았자 얼마 살지 못할 피래미에

불과할테지만 말이야."

초력은 차갑게 웃었다.

천상회의 눈에 벗어난 이상 그 자가 제아무리 대단한

고수라 할지라도 처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아마 그 자는 조가장이 천상회의 조종을 받는

휘하세력중 하나라는 사실을 꿈에도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자가 나중에 그 사실을 알았을때는

이미 때는 늦은 것이다.

머지않아 자신이 직접 그 자의 숨통을 끊어놓을 테니까.

그때 학일리가 쭈삣거리며 물었다.

"그런데 조양홍은 어떻게 되었소?"

학일리는 이미 어느 정도는 결과를 예상하고 있었으나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사정이 어찌 되었건 자신은 그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조가장을 찾았던 하객이었으니 말이다.

초력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아! 아직 완전히 찾지 못했어."

학일리는 어리둥절했다.

"완전히라니?"

초력은 히죽 웃었다.

"몸의 다른 부분은 다 찾았는데 머리통만 아직 찾지

못했어. 아마 흉수가 가져간 모양이지만...."

학일리는 머리끝이 쭈빗해왔다.

초력은 입가에 계속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의 음성 한

구석에도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다.

"정말 알 수 없단 말이야. 조양홍의 머리통은 무엇에

쓰려고 가져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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