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 장 드 디 어 다 시 나 타 났 구 나
1
한 사람이 천천히 노독행의 앞으로 걸어왔다.
고동색 장포의 사나이였다.
그의 안색은 이상하리만치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일전에 이와같은 몸통공격을 하는 유파(流派)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다."
그는 느릿느릿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마치 한 자 한 자를 신중하게 고려한 끝에 내뱉는 듯한
음성이었다.
"벌써 오래된 이야기지. 너무나 오래되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막
생각이 났다."
노독행은 묵묵히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고동색 장포의 사나이의 눈에서 번쩍하는 섬광이 피어
올랐다.
"그 유파는 철저한 실전주의(實戰主義) 무예(武藝)만을
추구하여 아무도 당해낼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이미
오래전에 절전(絶傳)되어 후계자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했지. 너는 무쌍류의 후계자냐?"
노독행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동색 장포의 사나이의 얼굴에 한 줄기 무거운 기색이
떠올랐다. 예상은 했었지만 막상 사실을 알고 나자 내심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무쌍류...무쌍류라! 드디어 강호에 무쌍류가 다시
나타났구나..."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그의 음성은 얼굴에 떠오른
표정만큼이나 낮게 가라앉은 것이었다.
그는 천천히 뒷짐을 풀며 노독행의 앞에 우뚝 섰다.
"너의 무쌍류는 확실히 소문으로 듣던 만큼이나
대단하다. 하지만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다. 백 년이란
짧은 세월이 아니지. 그동안의 강호는 너희 무쌍류를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만큼 발전해 왔다. 내가 그걸
증명해 주겠다."
그는 등뒤에 매고 있던 붉은 천으로 둘둘 말은 길다란
철봉을 뽑아 들었다.
촤르르...
붉은 천이 풀어지며 드러난 것은 하나의 깃발이었다.
그 혈기(血旗)는 폭이 거의 반 장에 달하는 거대한 붉은
천에 깃대는 일 장에 육박했다.
깃봉에 매달린 붉은 수실....아무런 장식이나 무늬도
들어가 있지 않은 피처럼 붉은 깃발... 그리고 거무틱틱한
빛을 뿌리는 깃대....
어두운 밤하늘에 시뻘건 깃발이 한 차례 펄럭거리자
장내는 순식간에 음습한 살기로 뒤덮혀 버렸다.
고동색 장포의 사나이는 혈기를 손에 들자 호기가
하늘을 찌를 듯 솟구치는 모습이었다.
"이것은 혈번기(血飜旗)라 한다. 지난 이십 년동안 나의
혈번기 아래 쓰러진 고수는 모두 예순 두 명이다. 그리고
네가 예순 세 번째 희생자가 될 것이다."
혈번기!
만약 노독행이 강호경험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혈번기라는 이름을 듣고 고동색 장포의 사나이가 누구인지
알아차렸을 것이다.
혈번기는 한 인물의 상징과도 같은 병기였다.
그는 혈기개천(血旗開天) 목천파(睦穿波)라고 했다.
목천파는 두 가지 점에서 강호무림에 쟁쟁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인물이었다. 한 가지는 그의 혈번기를
휘두르는 공력조예가 거의 신화경(神化境)에 이르러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가 강북무림(江北武林)의
패자(覇者)인 천상회의 십대고수(十大高手)중 하나라는
것이었다.
천상회는 조직이 방대하고 휘하에 구름같은 고수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 천상회에서도 십대고수의 지위는
매우 특이하고도 높아서 당금 무림의 누구도 그들을
두려워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특히 그의 혈번기는 깃발을 특수한
혈염마포(血染魔布)로 만들고 깃대는 단단하기 그지없는
묵강(墨鋼)으로 제작하여 절세마병(絶世魔兵)으로 이름이
높았다.
제아무리 막강한 호신강기를 지니고 있는 고수라
할지라도 일단 그 혈염마포로 만든 깃발에 피부가
스치기만 하면 살이 갈라지고 뼈가 깎이고 마는 것이다.
목천파가 자신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었다.
목천파는 노독행의 몸통공격이 제아무리 살인적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혈염마포에 격중되면 오히려 그의 몸이
갈가리 찢겨지고 말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게다가 노독행은 아무런 병장기도 지니고 있지 않았다.
맨 손으로는 절대로 혈번기의 가공할 위력을 막아낼
수가 없는 것이다.
파르르....
한 차례 밤바람이 불어오자 혈번기의 깃발이 금시라도
찢어질 듯 세차게 펄럭거렸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돌연 예리한 바람소리가 일며 혈번기의 깃폭이
움직였다.
목천파는 깃대를 잡은 채 노독행을 향해 맹렬하게
덮쳐갔다.
붉은 깃발이 번뜩거리며 한 점의 붉은 구름처럼
노독행의 머리 위로 덮쳐 내려갔다.
그 속도와 위세는 옆에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엽표조차도 몸을 움찔거릴 정도로 막강한 것이었다.
노독행의 몸은 금시라도 그 노도와 같이 덮쳐오는 붉은
깃발에 휩쓸려 버릴 것만 같았다.
노독행은 휘몰아쳐 오는 붉은 깃발이 자신의 지척으로
다가올 때까지 외눈을 번뜩인 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가 훌쩍 몸을 옆으로 이 장쯤 움직여 피했다.
그가 상대의 공격에 정면으로 대응하지 않고 피하기만
한 것은 야차곡을 나온 이래 이번이 처음이었다.
혈번기는 땅바닥에서 한 바퀴 원을 그리더니 타닥거리는
바람소리와 함께 다시 노독행의 앞으로 덮쳐갔다.
혈번기의 무게는 백 근이 넘었다. 그토록 무거운
혈번기를 거의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것만 보아도 목천파의 공력은 이미 절정의
단계에 이르러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노독행은 다시 우측으로 삼 장 가량 움직여 피했다.
그로서는 피하는 수 밖에 다른 방도는 없어 보였다.
피와 살로 이루어진 육장(肉掌)으로는 도저히 혈번기와
정면으로 맞부딪힐 수 없는 것이다.
목천파는 더욱 맹렬하게 깃대를 돌렸다.
파파파파....
붉은 깃발에서는 아까보다 더욱 눈부신 광채가 쏟아져
나왔으며 깃발은 두 어치쯤 깃대에 감겼다.
이와같이 깃발을 깃대에 감는 것은 접근전을 할 때 즐겨
쓰는 수법이었다. 그것은 마치 채찍을 자신의 몸에 감아서
길이를 짧게 하여 가까이 있는 적(敵)을 공격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단지 다른 것은 깃발을 자신의 몸이 아닌 깃대에 감았기
때문에 동작을 훨씬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다.
노독행의 흑의가 몰아쳐 오는 기풍(旗風)에 휘말려
금시라도 찢어질 듯 세차게 펄럭거렸다.
엽적화는 금시라도 노독행이 혈번기에 피를 뿌리며
쓰러질 것만 같아 절로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하나 노독행의 얼굴은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사실 이제서야 비로소 무쌍류의 필살무예를 펼쳐볼
수 있는 상대를 만난 듯한 느낌이었다.
출도한 이래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이 익힌 그 처절한
필살무예를 펼쳐볼 기회를 얻지 못했다. 필살무예의 가장
기본이 되는 고산팔벽만으로도 충분히 상대를 쓰러뜨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 년동안 지옥같은 고통을 겪으면서 배운 무예를
제대로 써볼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는 것은 노독행으로서는
불행한 일이아닐 수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혈번기라는 마병을 사용하는 목천파와의
대결은 새로운 기분을 느끼게 했다.
노독행은 더 이상 피하지 않고 혈번기의
기영(旗影)속으로 뛰어 들었다.
파라락!
깃발이 깃대에 더욱 빠르게 감기며 반으로 줄어든
깃폭이 세차게 펄럭거렸다.
마치 수 백개의 칼날이 파동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칼날중 하나에라도 격중된다면 팔이건 다리건 그대로
잘려지고 말 것은 너무도 뻔한 일이었다.
노독행의 몸이 달려들던 속도 그대로 뒤로 물러났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원래 사람의 몸은 빠르게 움직일수록 그만큼 몸을 멈춰
세우거나 방향을 바꾸기가 어렵게 된다. 그런데 노독행의
진퇴(進退)하는 모습은 조금도 그 영향을 받지 않는 것
같았다.
그의 동작이 너무도 신속해서 목천파가 노독행이
다가오는 것을 알고 깃폭을 줄였을 때는 이미 그의 몸은
저만큼 멀리로 떨어져 있었다.
목천파는 황급히 들고 있던 깃봉을 반대쪽을 향해 휙
뿌리쳤다.
촤르르...
깃발이 다시 풀리고 붉은 천은 너울너울 춤을 추면서
노독행을 향해 쏘아져갔다.
하나 깃발이 채 완전히 풀리기도 전에 노독행의 몸은
어느 사이엔가 목천파의 앞으로 바짝 다가서고 있었다.
그야말로 다가섰다 물러서고 다시 다가서는 동작이 거의
눈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빨랐다.
목천파는 도저히 다시 깃발을 깃대에 감을 시간적
여유가 없음을 깨달았다.
돌연 그는 양 손을 앞으로 거두어 들였다. 그러자 붉은
깃발의 끝이 빠르게 선회하며 노독행의 배후를 맹렬하게
후려쳐갔다.
목천파의 이 수법은 혈선추혼(血旋追魂)이라는 것으로
깃발을 깃대에 감지 않고도 가까이 있는 적을 공격하는
무시무시한 초식이었다.
노독행의 등짝이 혈번기의 날카로운 깃발에 그대로
꿰뚫릴 순간,
스윽!
그의 몸이 땅을 박차는 동작도 없이 허깨비처럼
허공으로 솟구쳐 올라갔다.
노독행의 움직임 하나 하나는 아무런 사전 동작도 없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었다.
제아무리 몸이 빠른 사람이라 하더라도 달려들거나
방향을 바꾸거나 허공으로 솟구치려면 약간의 준비동작이
필요한데 그에게는 그런 것이 전혀 없었다. 마치 아무런
공기의 저항이나 행동의 제약을 받지 않는 사람처럼
자유자재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파앗!
아슬아슬하게 혈번기의 깃발 끝이 노독행의 발밑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순간 목천파의 입가에는 냉혹하고 악독한 웃음이
서려 있었다.
그는 사실 노독행이 자신의 공세를 피해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혈궁만리(血窮萬里)--!"
엄청난 호통소리가 터져 나오며 목천파의 혈번기가 더욱
위맹한 기세로 난무하기 시작했다.
파파파파파!
깃발이 펄럭일 때마다 노독행의 발밑으로 붉은 광채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갔다.
사람인 이상 허공에서 무한정으로 떠 있을 수는 없었다.
언젠가는 아래로 떨어져야 되는데 지금 그 아래에
혈번기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소용돌이치고 있는 것이다.
과연 노독행의 몸은 점차 아래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무서운 속도로 회전하는 붉은 광채가
금시라도 그의 하체를 짓이길 듯 다가들었다.
노독행의 몸이 혈번기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그때 갑자기 노독행의 몸이 아래로 뚝 떨어졌다. 그것은
마치 날아가던 기러기가 화살을 맞고 추락하는 것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앗?"
엽적화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노독행의 몸은 순식간에 무섭게 회전하는 혈번기의 공세
한 가운데로 떨어졌다.
혈번기의 시뻘건 깃발이 악마의 혓바닥처럼 그의 몸을
사정없이 강타하려는 찰나, 노독행의 상처투성이 오른손이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그리고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콱!
노독행의 손은 그토록 무섭게 회전하며 다가서던 깃발의
한쪽끝을 그대로 움켜 잡았던 것이다.
목천파는 그야말로 심장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
그의 혈번기는 스치기만 해도 살이 갈라지고 뼈가
부서지는 마병인데 어찌 그걸 맨손으로 잡을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거의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맹렬하게
회전하고 있는 깃발의 한쪽 끝을 허공에서 떨어지는
자세로 잡는 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나 지금 그 불가능을 몸으로 해 보인 사람이 있다.
파라락!
한쪽 끝이 노독행의 손에 잡힌 채로 혈번기의 깃발은
맹렬하게 펄럭거렸다. 노독행은 다시 왼 손으로 깃발의
다른 한쪽을 마저 붙잡았다.
얼핏 보기에는 간단한 동작같았으나 조금이라도 그의
손이 깃발을 잘못 붙잡았다가는 그대로 잘려지고 말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이상하게도 닿기만 해도 살이 잘라진다는 혈번기의
깃발을 맨손으로 움켜잡았는데도 노독행의 양손은
잘려지기는 커녕 조그만 상처조차 나지 않았다.
목천파는 안색이 대변해 사력을 다해 혈번기를
휘둘렀다.
그 순간 노독행은 양손으로 움켜잡고 있던 혈번기의
깃발을 힘껏 잡아 찢었다.
찌-이-익!
질기기가 천하제일이라는 혈염마포로 만든 혈번기의
붉은 깃발이 찢겨져 나가기 시작했다.
목천파가 채 깃발을 반도 휘두르기 전에 노독행은
혈번기를 반으로 완전히 찢어 버렸다. 그런 다음에도 그의
양손은 계속 움직였다.
삽시간에 깃발은 갈기갈기 찢어졌다. 찢어진 깃발은
붉은 눈송이처럼 하늘에서 난무했다.
목천파가 미처 손을 쓸 사이도 없이 혈번기는 완전히
찢겨져 깃대만 달랑 남게 되었다.
목천파는 어처구니가 없는지 깃대를 든 채 망연자실하여
노독행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가 아니라 누구라 해도 지금은 멍청해 있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마병이라고 까지 알려졌던 자신의 무기가 눈앞에서
산산히 파괴되는 광경을 지켜보는 심정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그것도 자신이 전력을 다해 공격을 하고 있는
시점에서 말인다.
그는 지금 눈으로 직접 보고도 어떻게 노독행이 자신의
혈번기를 맨손으로 움켜잡고 찢을 수 있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하나 보기에는 간단하고 수월해 보였으나 노독행은
조금전에 무쌍류의 필살무예중 세 가지를 연거푸 사용한
것이었다.
그가 허공에서 혈번기의 가공할 공세속으로 떨어져
내리면서도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은 것은
수미육합(須彌六合)이라는 무쌍류 비전(秘傳)의
보법(步法)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혈번기를 움켜쥔 수법은 무쌍류의 십팔쇄나(十八鎖拿)중
하나인 금강인(金剛引)이었고, 제일 마지막으로
혈염마포로 만든 혈번기의 깃발을 찢을 수 있었던 것은 양
손에 극강(極强)의 철렬공(鐵裂功)을 운용했기
때문이었다.
즉, 쉽게 해치운 것 같아도 노독행은 눈으로 알아차릴
수 없는 짧은 순간에 무쌍류의 비전중 세 가지를 이용해서
목천파가 천하에 자랑하는 혈번기를 찢어버렸던 것이다.
목천파는 온 몸에 경련을 일으킨 채 깃대만 남은
혈번기를 들고 서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맹수의 울부짖음같은 고함을 지르며
노독행을 향해 달려 들었다.
"이 놈!"
그는 깃대로 노독행의 머리를 사정없이 내려쳤다.
지금의 그는 분노와 공포가 뒤섞인 복잡한 감정이
가슴속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는 상태였다.
자신의 애병(愛兵)인 혈번기가 파손된 것에 분노했고,
혈번기를 간단하게 파손시킨 노독행이 두려웠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견딜 수 없는 것은 무색투명하게 자신을
응시하는 노독행의 외눈이었다.
노독행은 훌쩍 몸을 뒤로 날려 철봉을 피했다.
하나 다음 순간 그의 몸은 번개같이 앞으로 쏘아져
들어가고 있었다.
목천파는 수중에 들고 있는 철봉을 풍차처럼 마구
휘둘렀다.
이것은 혈풍번천(血風飜天)이라는 수법으로, 원래 이
수법을 펼치면 혈번기의 깃발이 사방천지를 폭풍노도처럼
휩쓰는 가공할 기세가 구름처럼 일어나는 것이었다.
지금 비록 깃발이 없어졌다고 해도 묵강으로 만들어진
쇠막대는 노독행의 전신을 짓이겨 버릴 듯 무섭게
회오리치고 있었다.
노독행은 주저없이 그 회전하는 쇠막대의 그림자속으로
돌진해 들어가며 양 손을 쳐들었다.
타타탁!
그의 손이 세차게 휘둘러지는 쇠막대와 연거푸 열 다섯
번이나 마주쳤다. 당연히 손목이 으스러지고 뼈가
부서져야 하는데 어찌된 일인지 노독행의 손은 전혀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한 번 씩 격돌할 때마다 노독행의 손이 점차로
다가오더니 열 다섯 번의 격돌이 모두 끝난 후에는 그의
손은 어느새 목천파의 코앞으로 다가들고 있었다.
목천파는 안색이 창백하게 굳어진 채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이야압!"
그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고함을 내지르며 사력을
다해 깃대를 장검처럼 노독행의 목을 향해 찔러갔다.
쾌액!
섬뜩한 음향과 함께 깃대의 끝은 빛살처럼 노독행의
인후혈에 도달했다. 하나 그 순간 노독행의 상처투성이
손은 깃대의 끝을 움켜잡고 있었다.
무서운 속도로 날아오던 깃대가 강력한 힘에 의해
그대로 정지되었다.
노독행은 움켜쥔 깃대를 앞으로 잡아 당겼다.
목천파의 몸이 창졸지간에 주르르 앞으로 달려왔다.
노독행의 어깨가 목천파의 얼굴로 다가왔다. 목천파는
재빨리 깃대를 놓으며 옆으로 몸을 비틀었다.
그 순간 노독행의 몸이 반쯤 돌려지며 팔꿈치가
날아들었다.
목천파로서는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엄청나게 빠른
공격이었다.
쾅!
굉음과 함께 목천파는 정통으로 관자놀이를 강타당했다.
"우욱!"
시커먼 선혈과 부서진 이빨이 폭포수처럼 입밖으로
쏟아져나왔다.
목천파는 신형을 휘청거리며 뒤로 정신없이 물러났다.
노독행은 물러나는 그의 뒤를 그대로 따라오며 연거푸
양쪽 팔꿈치를 휘둘렀다.
콰쾅!
눈깜박할 새 목천파는 다섯 번이나 팔꿈치에 강타당한
채 십 여장 밖으로 나가 떨어졌다.
실로 무시무시한 팔꿈치 공격이 아닐 수 없었다.
이것이야말로 백 년만에 다시 나타난 무쌍류의
연환철주(連環鐵 )인 것이다.
그 가공할 위력은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무엇이 어찌된 영문인지 알기도 전에 목천파의 몸은
그야말로 산산히 짓이겨져 있었다.
목천파는 전신의 뼈가 산산히 박살난 채 자신이 흘린
피바다속에 누워서 바둥거렸다.
"크...크으...."
그는 노독행을 올려보며 무어라고 입을 열려 했으나
결국 한 마디도 내뱉지 못하고 그대로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천상회의 십대고수중 하나이며 강호무림에서 누구나가
두려워마지 않는 무시무시한 혈번기의 주인답지 않은
허무한 최후였다.
2
엽적화는 지금 눈앞에서 벌어진 일들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목천파는 결코 이토록 쉽사리 남의
손에 쓰러질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이렇게 쓰러져서는
안되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질펀한 피바다속에 누워 있는 목천파의 시신은
이것이 분명한 현실임을 나타내주고 있었다.
노독행의 체구는 그리 크지 않았다.
일반 사람들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조금 작은 편에
속했다.
하나 지금 엽적화의 눈에 비친 그의 모습은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움직이는 활화산(活火山)같다고나 할까?
그의 몸 구석구석에는 폭발치는 듯한 힘이 숨겨져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노독행이 자신의 앞으로 다가왔을 때 엽적화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흠칫 떨었다.
다행히 그때 그녀는 엽동을 보았다.
엽동은 그리 멀지 않은 무덤뒤에서 천천히 걸어나오고
있었다.
엽적화와 시선이 마주치자 엽동의 얼굴에는 약간 경직된
미소가 떠올랐다.
"오랜만이구나."
엽적화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할 말이 없어서는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나 할 말이
많아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엽동도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했으나 결국 입을 다물어
버렸다.
잠시 장내에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을 깬 사람은 노독행이었다.
"그는 어디 있지?"
나직한 음성이었으나 엽동은 오히려 그 덕분에 어색했던
분위기를 벗어나게 된 것 같아 절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엽동은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는...."
엽동이 말하는 동안 노독행은 묵묵히 서 있었다.
그러다가 그의 말이 끝나자 주저없이 몸을 돌려
걸어갔다.
어둠속으로 멀어져가는 노독행의 뒷모습을 보면서
엽동은 생각했다.
나는 지금 전설(傳說)의 탄생을 보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강호의 역사는 저 자에 의해서 다시 쓰여질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누구도 깨뜨릴 수 없는 무적(無敵)의
전설이 될 것이다.....라고.
그가 우두커니 노독행의 멀어져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때 한 사람이 천천히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엽동은
돌아보지 않아도 자신의 옆으로 다가온 사람이 엽적화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 사람이 누구지요?"
엽동은 돌아서며 씁쓸하게 웃었다.
"나도 잘 모른다."
엽적화는 그의 얼굴을 빤히 주시했다.
"오빠가 보낸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서로 약속을 했었지. 저 자는 널 구해주고 나는 저
자가 필요한 것을 알아주기로."
엽적화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단지 그것뿐인가요?"
"그렇다."
엽적화는 자신도 모르게 노독행이 사라진 쪽을
돌아보았다.
"저렇게 강한 사람이 있을까요?"
"글쎄...강호는 워낙 넓고 기인이사(奇人異士)들이
모래알처럼 많으니 알 수 없지.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엽동은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저 자가 무쌍류의 후계자임이 분명하다면 앞으로의
천하는 한바탕 회오리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이지."
엽적화는 동감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오늘 그녀가 목격했던 그 놀라운 광경들은
영원히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때 문득 엽동이 생각난 듯 그녀를 향해 돌아섰다.
"네가 이쪽으로 도망쳐 오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때 몹시
놀랐다. 이곳에 온 건 나를 만나기 위해서 였느냐?"
엽적화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요. 오빠를 만나기 위해서에요."
"무슨 일이냐?"
묻는 엽동의 표정은 평상시와 달리 조금 굳어져 있었다.
엽적화는 이곳에 오기 위해서 많은 위험을 무릅써야만
했다. 그러니만큼 평범한 일은 아닐 것이다.
과연 그녀의 다음 말은 엽동의 가슴을 뒤흔들어 놓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영주(令主)님이 실종되셨어요."
엽동의 안색이 홱 변했다.
그는 충격을 받은 듯 음성이 자신도 모르게 떨려
나왔다.
"그...그녀가 실종되었다고?"
엽적화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엽동의 눈자위가 실룩거렸다. 두 눈에 갈등어린 빛이
짙게 스치고 지나갔다.
하나 이내 그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굳어진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엽적화는 움찔하여 그를 쳐다보았다.
"오빠...."
엽동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미 내게는 잊혀진 사람이야. 그녀가 어떤 일을
당했건 내가 신경쓸 필요가 없지."
"하지만..."
"더 말할 필요 없다. 그녀 때문에 온 거라면 네가
잘못왔다. 나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엽적화는 단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엽동을 보며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러다가 나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단지 영주님만이 아니에요."
"그게 무슨 말이냐?"
엽적화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둘째 오빠도 함께 실종되었어요."
이번에는 엽동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그는 한동안
아무 말없이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어두운 하늘에는 하나 둘씩 별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점점이 반짝이는 별들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별빛만큼이나 음울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엽동은 조용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게 언제냐?"
엽적화는 그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재빨리 대답했다.
"열흘전이에요. 그때 우리는 천상회의 십대고수들인
백발선랑(白髮仙娘)과 사망유자(死亡幽子)에게 쫏기고
있었는데 그들의 추적을 피해 만나기로 했던 장소에 가
보니 영주님과 둘째오빠의 모습만 보이지 않았어요."
"......."
"우리는 이틀동안을 꼬박 기다렸다가 다시 왔던 길을
거슬러 올라갔지만 두 사람을 발견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상의끝에 큰 오빠에게 도움을 부탁하기로 하고 내가
온거에요. 그런데 천상회에서 어떻게 알았는지
장성(長城)을 넘기도 전에 혈기개천 목천파의 추적을
받았어요."
엽동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그의 추적을 뿌리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할 수
없이 이곳으로 온거로구나."
"오빠라면 무슨 방법을 취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녀는 피식 웃었다.
"그런 괴물같은 자를 보내서 나를 구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엽동의 얼굴에도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하나 그것은
이내 사라져 버렸다.
"그들이 사라진 곳은 어디 부근이냐?"
"처음 우리들이 백발선랑과 사망유자의 습격을 받은
곳은 하북(河北)의 석문(石門)근처였어요. 그래서 우리는
흩어져서 산서(山西)의 평정(平定)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그때 엽동이 그녀의 말을 막았다.
"지금 습격이라고 했느냐?"
엽적화는 그가 묻는 의도를 몰라 조금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그래요. 그때 우리는 태원(太原)으로 가던 중이었어요.
그런데 그들이 갑자기 덮쳐 왔어요. 마치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말을 하다 말고 그녀의 표정이 점차 변했다.
그제서야 그녀도 엽동이 묻는 뜻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그녀는 안색이 변해 급히 물었다.
"오빠는 그들이 이미 우리의 행방을 알고 잠복해
있었다고 생각하나요? 그럴리 없어요. 우리는 행동 하나
하나를 조심스럽게 했기 때문에..."
"그래서 더 그렇게 생각한다."
엽동은 신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나도 너희들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영주는 아주 치밀하고 냉정한 여자다.
그녀는 결코 쉽사리 흔적을 남기거나 하지 않지. 그런데도
그들의 습격을 받았다는 것은 너희들의 행동이 사전에
누출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녀는 도리질을 했다.
"아니에요. 그들이 우연히 우리와 마주쳤을 수도..."
"천상회의 십대고수는 절대로 쉽사리 움직이지 않는다.
더구나 그들중 두 명이나 나왔다는 것은 그들이 치밀한
사전정보를 가지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지."
"하지만..."
그녀는 부인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엽동의 말에 일리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확실히 당시 그녀들이 습격을 받았던 일에는 여러 가지
의문점이 있었다.
그녀는 강호의 비밀결사(秘密結社)인 표향령(飄香令)의
일원이었다.
표향령이 조직된지는 거의 팔 년이나 되었다.
그들은 천상회의 강북독패(江北獨覇)에 불만을 품고
조직된 세력이라고 했다.
그들의 인원은 철저한 비밀에 가려져 있지만 무림에
알려진 바로는 채 스무명도 되지 않을 거라고 했다. 하나
그들은 개개인이 모두 내노라하는 절정고수들일 뿐 아니라
신분과 거처를 철저하게 감추고 있었기 때문에
천상회에서도 쉽사리 그들을 제거하지 못했다.
천상회에서는 수십 차례나 고수들을 풀어 그들을 없애려
했으나 아직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만큼 표향령의 행동이 은밀하고 신비스러웠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처음으로 십대고수중 두명의 습격을
받았고, 덕분에 수뇌급 인물이 두 사람이나 실종되었다.
표향령이 생긴 이래 최대의 타격이라고 할 만했다.
그녀는 생각할수록 엽동의 말이 타당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엽동이 다시 물었다.
"태원에는 무슨 일로 가려고 했느냐?"
엽적화는 퍼뜩 상념에서 깨어났다.
"철모방(鐵矛幇)의 방주(幇主)인 광룡(狂龍)
철력파(鐵歷坡)와 비밀회담을 하려고 했어요. 그 일은
아주 중대해서 영주님도 최선을 다해 기밀을 유지하려고
한 것인데..."
엽동은 의외인 듯 눈을 빛냈다.
"철모방과 결맹(結盟)하기로 했느냐?"
엽적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엽동은 내심 침음했다.
철모방은 강북에서 천상회의 휘하에 포섭되지 않는
극소수 방파중 하나였다. 그들의 방주인 광룡 철력파는
성질이 화급하고 자존심이 강학기로 천하에서 손꼽히는
인물이었다.
또한 일단 내뱉은 말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기 때문에
'광룡일락(狂龍一諾) 강수서류(江水西流)'라고 까지
알려져 있었다.
즉, 광룡이 한 번 승락하면 강물의 방향도 바꾼다는
말이었다.
철력파와 표향령이 힘을 합친다면 천상회로서도 무시할
수 없는 강적이 탄생하는 셈이 될 것이다.
"그 비밀회담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은 누구냐?"
엽적화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붉은 입술을 살짝
열었다.
"우리쪽에서는 영주님외에 쌍절(雙絶)과 저를 비롯한
삼봉(三鳳), 그리고 군사(軍師)밖에 없어요.
철모방에서는....철방주(鐵幇主)만이 알고 있어요."
그녀는 급히 부연했다.
"하지만 철력파는 절대로 비밀을 누설할 사람이
아니에요."
엽동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동행한 사람은 누구냐?"
"영주님과 쌍절, 그리고 저와 흑나찰(黑羅刹)
조교연(趙嬌燕)이에요."
"다섯 사람이 갔는데 두 사람이 실종되었군."
"그래요."
엽동은 반짝이는 눈으로 엽적화를 응시했다.
"그럼 생각해보자. 기밀이 누설되었다면 네가 말한 여덟
명중 누군가에게서 일 것이다. 네 말대로 철력파가
아니라고 한다면 남은 사람은 너희 측 일곱 사람뿐이다."
엽적화는 안색이 약간 변했다.
엽동은 그녀의 표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그중에서 영주는 당연히 제외한다면 남은 사람은 여섯
인데..."
엽적화가 재빠르게 말했다.
"우리측에서는 그럴 사람이 없어요."
"너희측도 아니고 저쪽도 아니라면 어디에서 기밀이
새어나갔겠느냐?"
"오빠는 꼭 기밀이 새어나간 거라고 어떻게 단정할 수
있죠? 그저 우연일수도 있잖아요."
엽동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럼 그만두자. 내가 관여할 성질의 일도 아니니...."
엽적화는 자신의 말이 너무 심했다고 생각했는지 음성이
조금 수그러들었다.
"꼭 그런 뜻으로 말한건 아니에요."
엽동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석문에서 평정으로 갔다면 태행산(太行山)을
넘었을텐데..."
"우리는 추적을 피하기 위해 세 갈래로 갈라졌어요.
나와 조교연은 태행산을 북쪽으로 우회하고 영주님과
둘째오빠는 태행산을 곧장 넘어갔어요. 그리고 나머지 한
사람은 태행산의 남쪽을 돌아갔어요."
"나머지 한 사람이라면 쌍절중의..."
"그래요. 무적철환(無敵鐵丸) 구여해(丘如海)에요."
엽동은 잠시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그런데 너희들과 구여해는 약속장소에 도착을 했는데
태행산을 넘어온 영주와 둘째만 오지 않았다...?"
엽적화의 얼굴에 한 줄기 수심이 어렸다.
"우리는 군사에게 연락을 취해서 앞으로의 행동을
의논했어요. 군사님은 우선 철력파에게 회담을 연기하자고
통보하고 영주님과 둘째 오빠의 행방을 수소문하기로
했어요."
"그러다 문득 내가 떠오른거로군."
엽적화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오빠를 이용할 생각은 없어요. 단지 오빠외에는 이번
일을 부탁할 사람이 생각나지 않아서..."
엽동은 빙그레 웃었다.
"괜찮다. 이런 일에라도 쓸모가 있다는게 다행이군.
내가 완전한 폐물(廢物)은 아니라는 증거이니 말이다."
"누구도 오빠를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어요!"
"누가 어떻게 생각하건 중요한게 아니다. 다만 내가
그렇게 느끼고 있다는 것 뿐이지."
엽적화는 무어라고 말하려고 했으나 엽동의 눈가에
떠올라 있는 씁쓸한 빛을 발견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엽동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와 나 사이의 일은 이미 오래된 이야기니 잊었다고
해야 옳겠지. 사실 나로서는 어떤 일로도 더 이상
그녀와는 관련되고 싶지 않다는 것이 솔직한 생각이다."
"오빠를 이해해요."
엽적화는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는 엽동의 과거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엽동의 지금 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일이
위급한 지경에 이르지 않았다면 그녀는 결코 엽동을
찾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엽동의 아픈 과거를 들춰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이번 일에는 둘째 오빠가 연관되어 있어요. 큰
오빠가 도와주지 않는다면 영주님은 물론이지만 둘째
오빠의 생사(生死)도 알 수 없게 되요. 그리고 그들이
없으면 표향령도 무너지고 말아요. 오빠가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 조직했던 표향령이...."
엽동의 얼굴이 굳어졌다.
표향령은 '그녀'와 그가 세운 집단이었다.
그때 그는 정열이 있었고, 꿈이 있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었다.
하나 꿈은 깨어지고 그는 홀로 북만주를 떠도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꿈은 비록 깨어졌지만 표향령은 그의 피와 땀과 눈물이
배인 곳이었다. 그것이 무너진다는 것은 곧 그의 지나온
모든 것이 단절(斷絶)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그녀'와의 완전한 단절도...
엽동은 어두운 하늘을 올려보다가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흐음...과거의 정(情)이란 이다지도 끊기가 어렵단
말인가?"
그는 뜻모를 소리를 중얼거리더니 씁쓸한 웃음을
떠올리며 엽적화를 바라보았다.
"좋다. 네 부탁대로 그들의 행방을 찾아보겠다."
엽적화는 반색을 하며 그의 팔을 붙잡았다.
"오빠!"
"하지만 이번만이다. 나는 그들의 행방을 알려주는데로
떠날 것이니 두 번 다시 나를 찾을 생각은 마라."
엽동은 엄격하게 말했으나 엽적화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팔에 매달렸다.
"고마워요. 오빠."
활짝 웃는 그녀의 모습은 독부용이라는 외호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랑스러운 것이었다.
하나 엽동의 시선은 이미 그녀를 지나 짙은 어둠이 깔린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표향....결국 나는 다시 그녀에게 돌아가게 되는가?)
그의 얼굴에는 한 줄기 씁쓸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