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 장 믿 을 필 요 없 어
1
요양(遼陽).
요양은 태자하(太子河)의 남안에 위치한 도시였다.
예로부터 군사상의 요지를 이루어 한대(漢代)때부터
시진(市鎭)이 형성되었다.
요양에서 남쪽으로 이십 리쯤 가다보면 하나의
고색창연한 사찰이 나온다.
그 사찰은 그렇게 크지는 않았으나 한 가지 특이한 점을
지니고 있었다.
바로 사찰의 뒤쪽에 있는 새하얀 탑(塔)이었다.
탑은 칠층으로 되어 있는데 비단 조각이 섬세하고
우아할 뿐 아니라 전체적인 구도가 잘 잡혀 있어서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감탄성이 우러나오게 했다.
이것이 유명한 광우사(廣佑寺)의 백탑(白塔)이었다.
기울어가는 석양이 백탑의 한쪽 모퉁이에 비끼자 세상에
그처럼 아름다운 광경은 없을 것 같았다.
언제부터인가 광우사의 담벼락에 기대선 채 석양속에
잠겨 있는 백탑을 바라보고 있는 하나의 인영이 있었다.
무척 우람한 체구의 사나이였다.
전신에 붉은 빛이 감도는 고동색 장포를 걸쳤는데 작은
동산만한 체구에 몸시도 어울려 보였다.
우뚝 솟은 코에 두툼한 입술, 부리부리한 호목(虎目)에
턱밑으로는 구레나룻이 자욱했다. 전체적인 인상은 거칠고
투박해 보였는데 의외로 이목구비는 단정한 편이었다.
등뒤에는 붉은 헝겊으로 둘둘 말은 길다란 철봉같은
것을 매고 있었는데 철봉의 끝에 매달린 붉은 수실이
가끔씩 바람에 날릴 때마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묘한
분위기를 느끼게 하고 있었다.
고동색 장포의 사나이는 뒷짐을 진 채 백납 너머로
기울어가는 석양을 바라본 채 무언가 사색에 잠긴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다가 그의 커다란 눈에서 언뜻 신광(神光)이
흘러나왔다.
"좌기(左忌)냐?"
그의 등뒤 멀지 않은 곳에서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예."
언제 나타났는지 하나의 인영이 석양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그의 뒤에 우뚝 서 있었다. 그는 짙은 흑삼을
걸친 훤칠한 키의 청년이었다.
흑삼청년의 몸은 유달리 호리호리했는데 얼굴이
얼음장을 씌운 듯 냉막하기 그지 없었다.
고동색 장포의 사나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불쑥
물었다.
"찾았느냐?"
흑삼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서 동남쪽으로 삼십 리쯤 되는 곳에 공동묘지가
하나 있습니다. 그 근처에서 종적을 발견했습니다."
"삼살(三煞)은?"
"그녀가 혹시 다른 곳으로 숨어버릴지 모르기 때문에 그
주위에 잠복해 있습니다."
고동색 장포의 사나이는 백탑을 올려보며 잠시
침음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녀가 이곳으로 온 것은 이 근처에 있는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서다. 그러니 그녀가 만나려는 자가 누구인지
밝혀질 때까지는 그녀를 건드려서는 안된다."
"알겠습니다."
"일단 그녀가 만나려는 자가 누구인지 알게되면...."
고동색 장포의 사나이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의 눈에서 한 가닥 예리한 광채가 번뜩이고 지나갔다.
"그때가 바로 그들이 죽는 날이다."
그 음성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강한 울림을 담고 있어
듣는 이의 가슴에 강한 인상을 남기는 것이었다.
그때 문득 고동색 장포의 사나이의 시선이 한 곳을
향했다. 흑삼청년은 자신도 모르게 그쪽으로 고개를
돌렷다.
노을이 물드는 광우사의 경내로 들어서는 하나의 인영이
있었다.
거친 흑의....검은 안대....그리고 고독한 눈빛...
나타난 사람은 노독행이었다.
노독행은 어슬렁거리는 걸음으로 그들이 있는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의 걸음은 그다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그런데
왠지 두 사람은 그에게서 좀처럼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황혼을 등지고 걸어오는 노독행의 모습은 마치 황야를
헤매는 한 마리 늑대를 연상시키는 것이었다.
고동색 장포의 사나이와 흑삼청년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데도 전혀 의식하지 못한 듯 그는 천천히
백탑 앞으로 다가오더니 그 자리에 팔베게를 하고 벌렁
드러 누웠다.
고동색 장포의 사나이와 흑삼청년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흑삼청년이 노독행을 향해 무어라고 소리치려는 순간
고동색 장포의 사나이는 눈으로 그를 제지했다.
"너는 먼저 그곳에 가 있어라. 나는 잠시후에 가겠다."
흑삼청년은 머리를 조아리고는 바닥에 누워 있는
노독행을 힐끗 쳐다보더니 몸을 돌렸다.
슷!
그의 몸은 한 마리 비조(飛鳥)처럼 놀라운 신법으로
남쪽으로 사라져갔다.
고동색 장포의 사나이는 느릿느릿 노독행이 누워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노독행은 두 팔을 머리에 베고 누운 채 조금씩
어두워지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고동색 장포의 사나이는 노독행의 바로 옆까지 다가와서
물끄러미 그를 내려다 보았다. 노독행의 눈은 붉은 색으로
짙게 물든 석양을 담고 있었다.
언뜻 고동색 장포 사나이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같은
것이 떠올랐다.
하나 미소는 아니었다.
"황혼이 좋군. 이 지방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노독행은 그는 쳐다보지도 않은 채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동색 장포의 사나이는 한동안 유심히 노독행의 얼굴을
훑어보다가 다시 물었다.
"어디에서 왔나?"
노독행은 짤막하게 말했다.
"북쪽."
고동색 장포의 사나이는 그의 음성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탁하게 갈라진 노독행의
목소리는 처음 듣는 사람에게는 묘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이곳에는 무슨 일로 왔나?"
"사람을 만나러."
고동색 장포의 사나이의 눈에서 번쩍하는 섬광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만나려는 사람이 누구인가?"
고동색 장포의 사나이가 집요하게 물어보자 그제서야
노독행은 천천히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고동색 장포의 사나이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가라앉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알 필요없어."
매몰찰 정도로 냉정한 대답이었으나 고동색 장포의
사나이는 오히려 피식 웃었다.
아울러 그의 얼굴 표정이 음산하게 변했다.
"필요가 있지. 만약 네가 만나려는 자가 엽(葉)씨 성에
붉은 옷을 즐겨 입는 여자라면 ...."
노독행은 다시 석양을 바라보았다.
"엽씨 성은 맞지만 여자가 아니야."
고동색 장포의 사나이는 조금 어리둥절한 모습이었다.
그가 다시 무슨 말인가 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멀리서
예리한 호각소리가 들렸다.
삐익!
그 호각소리를 듣자 고동색 장포의 사나이는 안색이
약간 경직되었다.
그는 힐끗 노독행을 내려보다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운이 좋은 놈이로군. 시간이 있다면 그 버르장머리를
단단히 고쳐주었을텐데...."
기척도 없이 그의 몸은 허공을 날아 호각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멀어져갔다.
육중한 몸에 어울리지 않게 너무도 표홀하게 날아가는
그의 모습은 마치 한 마리 거대한 붕새같았다.
노독행은 그가 사라지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바닥에 누운 채 어두워오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휘이잉...
한 줄기 바람이 하늘 한쪽에서 불어오자 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진 것 같았다. 그토록 아름다웠던 황혼은 어느
사이엔가 어둠의 장막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짙어가는 어둠속에서 하나의 인영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 인영은 누워 있는 노독행의 앞으로 다가오더니 히죽
웃었다.
"오래 기다렸소?"
노독행은 팔베게를 풀고 천천히 바닥에서 일어났다.
"별로...알아냈나?"
나타난 인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붉은 짚신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뛰어다녀서 겨우
알아냈소."
그러고보니 나타난 인영은 과연 맨발에 붉은 짚신을
신고 있었다.
그는 다름아닌 홍초혜 엽동이었다.
오 일전, 노독행은 이곳에서 엽동을 만나기로 했던
것이다.
"조양홍은 지금 어디 있나?"
노독행은 언제나처럼 직선적으로 물었다.
그는 말을 뱅뱅 돌려서 하는 것을 싫어했다. 간단하고
명료하게 묻고 대답하는 것이 그의 천성이었다.
엽동은 약간 머뭇거렸다.
"그 자의 행방을 알려주는건 어렵지 않은데..."
노독행은 그가 머뭇거리는 뜻을 알아차렸다.
"조건이 있다는 말이군."
단도직입적인 그의 말에 엽동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까치집처럼 헝클어진 머리를 긁적거렸다.
"조건이라고 할 것은 없고...대신 부탁이 하나 있소."
노독행은 말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을 받자 엽동은 머리뿐이 아니고 온 몸이
간지러워졌다
"저...그러니까 이건 부탁이라기 보다...그냥 일에 대한
보수(報酬)라고 할 수 있는데..."
그가 우물쭈물하며 더듬거리고 있을 때 노독행의 음성이
들려왔다.
"원하는게 뭐지?"
엽동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묻는다는건 부탁을 들어주겠다는 뜻이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한묘(漢墓)가 있소. 그곳에
가서 한 사람을 구해 주시오."
노독행은 외눈을 번뜩이다가 불쑥 물었다.
"어떻게 생겼나?"
"키가 호리호리하고 제법 예쁘장하게 생겼소. 머리에
부용화(芙蓉花)를 꽂고 있어서 알아보는데 그리 어렵지
않을거요."
"여자인가?"
"그렇소."
"그녀가 누군가?"
엽동은 안색이 어두워지며 허공을 올려보더니 이내
무거운 탄식을 토해냈다.
"내 동생이오."
노독행은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엽씨성에 붉은 옷을 즐겨 입는 여자..."
엽동은 그의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눈이 번쩍 뜨여
급히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알았소?"
노독행은 고개를 저으며 몸을 돌렸다.
"늦었을지도 모르겠군."
엽동이 움찔 놀랐을 때 노독행의 몸은 벌써 저만큼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엽동은 영문을 몰라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때 막 광우사의 경내를 벗어나던 노독행이 고개를
돌려 엽동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이름은?"
엽동은 퍼뜩 상념에서 깨어나 급히 입을 열었다.
"엽적화(葉荻花)."
그는 그것으로 설명이 부족했다고 느꼈는지 한 마디를
덧붙였다.
"남들은 독부용(毒芙蓉)이라고 부른다오."
2
요양에서 동남쪽으로 태자하를 따라 이십 여리쯤
걸어가다 보면 오래된 수백 개의 무덤들이 나온다.
이곳은 요양을 지키던 한(漢)나라 병사들의 무덤으로,
요양한묘(遼陽漢墓)라고 했다. 요양한묘는 군사상의
요지인 이곳을 놓고 처절한 사투를 벌였던 한나라때의
병사들의 고충을 웅변적으로 나타내 주고 있는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초경(初更)무렵.
노독행이 한묘에 도착했을 때 주위는 이미 짙은 어둠이
깔려 있었다.
어둠속에 잠긴 수 백개의 크고 작은 무덤은 귀기스럽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무덤중에는 반쯤 파헤쳐지거나
무너진 곳도 상당수 있어서 그야말로 황량하고 음산했다.
노독행은 천천히 한묘의 안으로 들어섰다.
주위는 아주 조용했다.
이따끔 불어오는 밤바람이 풀잎을 스치는 소리만이
간간이 들려올 뿐 적막하기 그지 없었다.
공동묘지는 상당히 넓어서 한 눈에 다 들어오지 않았다.
노독행은 무덤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녔으나 인기척은 커녕
들쥐 한 마리 발견할 수 없었다.
노독행은 별로 서두르는 기색도 없이 천천히 무덤들을
지나 한묘의 중앙으로 걸어갔다.
중앙부근은 십 여장 정도의 공터인데 무덤도 없고
잡초만 무성했다.
노독행은 공터에서 주변을 둘러보다가 근처에서 멀지
않은 무덤앞으로 가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런 다음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 나오는게 어때?"
나직한 음성이었으나 주위가 워낙 조용해서인지 그
음성은 상당히 멀리까지 퍼져 나갔다.
그 음성의 여운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그가 서 있는
무덤뒤에서 하나의 인영이 서서히 일어났다.
몸에 착 달라 붙는 붉은 옷을 걸친 여인이었다.
나이는 대략 이십 대 초반쯤 되었을까?
얼굴 전체에 차가운 냉기같은 것이 서려 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누가 보기에도 엄지손가락을 내밀만큼
아름다운 미녀였다.
붉은 옷을 입어서인지 피부가 한층 더 하얗게 보였다.
아니면 몸에 이상이 있어 안색이 창백했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의복은 여기저기가 찢겨지고 혈흔(血痕)이
내비쳤고, 흑단같은 머리는 반이나 풀어 헤쳐져
낭패스러운 모습이었다.
어둠속에서도 그녀의 흑단같은 머리중앙에 꽂혀 있는
붉은 색 부용화를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홍의미녀는 무덤뒤에서 일어나서 예리한 눈으로
노독행을 바라보았다.
"내가 이곳에 있는 걸 어떻게 알았지요?"
노독행은 아무런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이 근처에 하루살이들이 유달리 많더군."
"그래서...?"
"하루살이들은 사람 냄새를 좋아하지."
홍삼미녀는 몸을 움찔거리다가 이내 싸늘하게 웃었다.
"대단한 안목이군요. 겨우 그런 것으로 내가 숨어 있는
곳을 알다니..."
노독행으로서는 별로 대단한 일도 아니었다.
그는 이곳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우거진
밀림지대속에서 자신을 노리고 숨어 있는 표범을 단번에
발견하여 해치운 적도 있었다.
동물의 종적을 찾는데 있어서 그는 천부적인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홍삼미녀는 한동안 노독행을 뚫어지게 응시하다가 불쑥
물었다.
"당신은 누구에요?"
노독행의 대답은 짤막했다.
"당신 오빠가 보낸 사람."
홍삼미녀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그걸 무엇으로 믿지요?"
노독행은 웃었다.
그 미소를 보자 홍삼미녀는 왠지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희미한 미소.
마치 유령의 웃음같은 미소였다.
"믿을 필요 없어. 곧 알게 될테니까."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하나의 냉랭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흐흐...과연 네 놈이로군."
홍삼미녀는 흠칫 놀라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이내 안색이 굳어져 버렸다.
그들에게서 멀지 않은 어둠속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네 개의 그림자가 있었다.
그들은 어둠만큼이나 짙은 흑삼을 걸친 네 명의
청년들이었다.
네 명의 흑삼청년들의 움직임은 그리 빠르지 않았다.
그런데 단번에 노독행과 홍삼미녀의 퇴로는 완전히
봉쇄되고 말았다.
짧은 순간에 이같은 위치를 선택한 안목과 동작은
그들이 모두 모두 무서운 수련을 쌓은 절정고수들임을
분명하게 나타내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십 여장 떨어진 커다란 무덤뒤에서 천천히 걸어나오고
있는 한 명의 중년인이 있었다.
그가 걸친 고동색 장포가 어둠속에서도 선명하게 드러나
보였다.
고동색 장포의 사나이는 뒷짐을 진 채 느릿느릿
그들에게로 걸어왔다.
"짐작대로군. 기다리고 있으면 언젠가는 반드시
나타나리라고 생각했지."
노독행은 말없이 미소만 짓고 있었다.
고동색 장포의 사나이의 입가에도 엶은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비웃음 같기도 했고 득의만면한 웃음같기도 했다.
아뭏든 노독행의 미소와는 어딘지 모르게 달랐다.
"너같은 자는 상대하기 까다롭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마 나름대로 무공에도 상당한 자신이 있겠지. 하지만
너는 오늘 운이 나빴다."
고동색 장포의 사나이는 천천히 뒷짐을 풀고 커다란
손가락으로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오늘 네가 만난 사람이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그의 음성과 태도에는 강한 자신감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장내의 누구도 그를 오만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그런 자신감을 가져도 충분한 사람이었다.
홍삼미녀는 그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고동색 장포의 사나이를 보는 순간부터 그녀의
눈빛은 암담하게 변해 있었다.
고동색 장포의 사나이는 안색이 창백하게 변해 있는
그녀를 돌아보며 웃었다.
"엽적화. 이곳까지 도망친 것도 대단한 일이다.
독부용이란 이름을 그냥 얻은건 아니었어. 하지만 너도
이제 마지막이다. 애초에 표향령(飄香令) 따위로
본회(本會)에 대항할 수 있다고 믿은 것이 잘못이지."
홍의미녀, 엽적화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결연한 표정으로 두 손에 공력을 가득 끌어올렸을
뿐이다.
고동색 장포의 사나이는 껄껄 웃었다.
"하하...너는 내 상대가 아니다. 사살(四煞)중의 둘
이라면 그런데로 어울릴 수 있을지 모르지."
그는 슬쩍 손가락을 퉁겼다.
그러자 네 명의 흑삼청년중 두 명이 엽적화의 앞으로
걸어나왔다.
엽적화는 그들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고동색 장포 사나이의 측근들로
혈기사살(血旗四煞)중의 상홀(上忽)과 하로(下怒)였다.
다른 두 명의 인물들은 좌기(左忌)와 우공(右恐)이라고
했다.
그들은 물론 개개인이 놀라운 무공을 지닌 인물들일 뿐
아니라 특히 합격술에 능해서 이인(二人) 이상이 뭉치면
그들보다 월등한 고수들도 당해내지 못했다.
일대일이라면 엽적화는 어쩌면 약간의 승산이 있을지
모르지만 상홀과 하로가 동시에 덤벼든다면 전혀 승패를
자신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설사 그들을 이긴다고 해도 더욱 무서운 좌기와
우공이 있고, 고동색 장포의 사나이가 있다.
엽적화는 오늘 자신이 살아서 이곳을 벗어나기
어려울거라고 생각했다.
'그냥 죽지는 않겠어.'
엽적화가 여인답지 않은 비장한 결심을 하고 앞으로
나서려 할 때 노독행이 먼저 움직였다.
슷!
그의 몸은 가장 앞서 있던 상홀은 향해 날아갔다.
상홀은 무언가 차가운 바람이 일렁거림과 함께 노독행의
몸이 자신을 향해 쏘아져 오자 입가에 냉랭한 미소를
떠올렸다.
그는 몸을 비스듬히 옆으로 움직이며 벼락같은
삼장(三掌)을 내갈겼다.
파파팡!
그의 삼장은 첫 번째 장(掌)보다 두 번째 장이 빠르고,
두 번째 장보다 세 번째 장력이 더 빨라 종내에는 세 개의
장력이 동시에 퍼부어지는 듯한 형상이 되었다.
상홀의 이 수법은 연환삼뢰(連環三雷)라는 것으로, 그의
외호에 홀(忽)이 붙은 것도 그의 손속이 이처럼 빠르고
날카로웠기 때문이다.
하나 노독행의 몸은 그의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상홀의 번개같은 삼장이 채 완전히 뻗어나오기도 전에
노독행의 몸은 어느 새 그의 코앞에 도달해 있었다.
그것은 실로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상홀이 내갈긴 세 개의 장력은 헛되이 노독행의 몸 뒤로
흘러가 버리고 희미한 미소가 감도는 노독행의 얼굴만이
상홀의 눈앞으로 바짝 쏘아져 들어왔다.
"이...이렇게 빠를수가..."
상홀이 어처구니가 없어 입을 딱 벌리는 순간 노독행의
어깨가 그의 콧등을 사정없이 강타했다.
콰직!
상홀은 코뼈가 완전히 박살나고 앞이빨이 송두리째
부러진 채 사 오장 밖으로 날아갔다. 광대뼈가 움푹
꺼지며 부러진 뼈가 뒷통수까지 삐져 나왔다.
땅에 쓰러지기 직전 그가 느낀 것은 얼굴이 짓뭉개지는
엄청난 통증과 경악어린 불신(不信)이었다. 죽는 순간
까지도 그는 인간의 몸이 이토록 빨리 움직일 수 있다고
도저히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놀란 것은 비단 상홀 뿐만이 아니었다.
중인들은 무엇이 어찌된 영문인지 채 알기도 전에
상홀이 얼굴이 박살난 채 사 오장 밖으로 나가 떨어지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나 놀라고 있을 사이도 없이 노독행의 몸은 어느 새
상홀의 옆에 우두커니 서 있는 하로를 향해서 돌진해
들어가고 있었다.
하로는 퍼뜩 정신이 들어 무작정 허공으로 몸을
솟구쳤다.
촉망중에도 일단 피해야 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의 판단은 옳았다.
하지만 그의 몸은 자신의 생각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그의 몸이 채 허공으로 일 장도 올라가기 전에 노독행의
몸이 바싹 따라 붙었다.
하로는 노독행이 무서운 속도로 자신을 향해 쏘아져
오자 안색이 창백해 진 채 사력을 다해 양 손을 휘둘렀다.
"안돼...오지 마!"
그의 오른손이 돌진해 들어오는 노독행의 왼쪽 어깨를
가격했다.
쾅!
순간 그의 오른손목은 그대로 부러지고 말았다. 하로는
노독행의 어깨를 강타한 자신의 손이 마치 강철벽을
후려친 듯 뼈마디가 완전히 으스러지는 것을 깨달았다.
미처 통증을 느낄 사이도 없이 그의 왼손이 노독행의
오른쪽 가슴에 격중했다.
왼손이 부러지는 것은 느끼지 못했다.
왜냐하면 바로 그때 노독행의 몸이 정면으로 하로의
앞가슴에 부딛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콰쾅!
폭음과 함께 처절한 비명이 어둠을 뚫고 멀리까지 퍼져
나갔다.
"아악!"
자욱한 피분수가 허공을 수놓았다.
하로의 몸은 거의 칠팔장이나 날아가 허름한 무덤에
그대로 내려 꽂혔다.
쿵!
무덤을 부수고 안으로 쳐박힌 하로의 모습은 이미
살아있는 사람의 그것이 아니었다.
실로 너무도 간단하게 두 명의 절정고수가 쓰러지고 만
것이다.
하나 상황은 아직도 끝난게 아니었다.
노독행의 몸은 멈출 줄을 몰랐다.
단숨에 상홀과 하로를 박살내고도 모자라는지 그의 몸은
땅을 박차고 어느새 좌기와 우공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좌기와 우공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시선이 교차되는 순간 그들은 자신들이 취해야할 행동을
결정했다.
그들은 제각기 반대쪽으로 몸을 날렸다. 좌기는
노독행의 왼쪽으로 돌아 움직였고, 우공은 노독행의
오른쪽 허공으로 몸을 솟구쳤다.
그들은 이미 노독행의 몸통공격이 얼마나 살인적인지를
두 눈으로 똑똑이 보았기 때문에 그 몸통공격을 가장
효과적으로 막기 위해 두 방향으로 움직인 것이다.
"아!"
엽적화는 순간적으로 움직이는 그들의 동작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렸다.
좌기와 우공이 거의 동시에 펼친 상하(上下)의
연환공격은 확실히 효과적이었다. 게다가 한 사람은 좌측
하단을 노리고 또 한 사람은 우측 상단을 노리기 때문에
동시에 막거나 피하기란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그것은 그야말로 오랫동안의 피나는 연습과
경험으로만이 나타낼 수 있는 완벽한
합벽술(合劈術)이었던 것이다.
엽적화는 이번에는 노독행도 단순한 몸통공격으로
그들의 합벽술을 피할 수 없을거라고 생각했다.
하나 노독행의 행동은 그의 예상을 초월했다.
노독행은 돌진해 오는 속도를 조금도 늦추지 않았다.
날아오는 동작 그대로 그의 몸이 갑자기 아래로 뚝
떨어져 내렸다.
그의 하체를 노리고 들어오던 좌기는 노독행의 몸이
아래로 떨어지며 자신을 향해 쏘아져오자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좋다. 이 놈!'
그는 피하지 않고 두 손에 청강수(靑剛手)공력을 가득
돋구어 노독행의 가슴팍을 후려쳐갔다.
그의 양 손이 푸르뎅뎅하게 변한 채 빛살처럼 노독행을
향해 날아갔다.
그 순간 허공에 떠 있던 우공의 시야에는 노독행의
상반신이 그대로 노출되었다.
우공은 노독행이 자신은 전혀 무시하고 오직 좌기를
향해 몸을 던지자 입가에 섬뜩한 살소(殺笑)를 머금었다.
'흐흐...이젠 끝이다!'
그는 자신이 회심의 절기로 생각하는 혈극수(血極手)를
잔뜩 끌어올려 그대로 노독행의 머리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노독행은 자신의 머리위로 떨어져 내리는 혈극수의
공력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은 채 좌기를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좌기의 청강수는 노독행의 가슴팍에 정통으로 격중했다.
아니 격중한 것 처럼 보였다.
그 순간 좌기는 자신의 양 손이 헛되이 허공을 가르는
것을 깨달았다. 그 직후에 다가오는 이제껏 느껴보지
못했던 강력한 작렬감!
좌기는 자신의 얼굴뼈가 산산이 조각나며 부서진
뼈조각들이 머리속을 온통 찢어놓는 것을 느끼며
마음속으로 절규했다.
'어째서...어째서.....'
쓰러지는 순간 까지도 좌기는 자신의 청강수가 어떻게
빗나갔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좌기가 피를 뿌리며 나뒹구는 순간에 우공의 시뻘겋게
변한 오른손은 노독행의 뒷통수를 향해 내리 꽂히고
있었다.
바로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 일은 너무도 순식간에 너무도 뜻밖으로 벌어졌는지라
누 구도 자세한 내막을 알지 못했다.
막 좌기의 얼굴을 강타했던 노독행의 어깨가 어느
사이에 완전히 방향이 틀어진채 우공의 안면에 도달해
있었던 것이다.
어찌 인간의 몸이 아무런 사전 동작없이 순식간에 전혀
반대 방향으로 돌려질 수 있단 말인가?
엽적화는 물론이고 고동색 장포의 사나이조차 노독행의
몸이 언제 우공의 앞으로 이동했는지 알아보지 못했다.
우공은 더욱 더 알 수 없었다.
단지 그가 알 수 있는 것이라고는 분명히 그의
장세(掌勢)아래 완전하게 노출되어 있던 노독행의 상체가
순식간에 자신의 코앞으로 쏘아져 오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피하고 자시고 할 사이도 없었다.
쾅!
우공의 머리가 수박처럼 깨어지며 시뻘건 선혈이 뇌수와
함께 사방으로 흩어져 나갔다.
죽음같은 침묵이 흘렀다.
중인들은 모두 몸이 굳어진 채 아무도 움직일 줄을
몰랐다.
휘잉!
한 차례 밤바람이 불어오자 진한 피비린내가 화악 코를
자극했다. 그제서야 중인들은 퍼뜩 정신이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눈앞에 한 폭의 지옥도(地獄圖)가 펼쳐져 있었다.
방금전 까지도 팔팔했고 뜨거운 온기를 지니고 있던 네
명의 청년들이 눈깜짝할 사이에 네 개의 핏덩이로 변해
버렸다. 그들이 지닌 무공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엽적화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한 차례 부르르 떨었다.
그녀는 혈기사살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비록 강호무림의 최절정고수들은 아니었으나
이토록 쉽사리 남에게 당할 인물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은 상황이 달랐다.
상대가 너무 강했던 것이다.
그녀는 아직 이토록 살인적이고 무시무시한 몸통공격은
일찌기 본 적이 없었다. 보기는 커녕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대체 그와같은 무공이 강호상에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그녀가 오늘 목격한 것은 지금까지 그녀가 알고 있던
강호의 상식을 송두리째 뒤엎는 것이었다.
그녀는 경악과 두려움에 찬 눈으로 노독행을
바라보았다.
노독행은 여전히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외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그가 방금전에 좌기와 우공을 쓰러뜨린 수법은
고산팔벽중의 철산벽(鐵山壁)과 이산벽(移山壁)이었다. 이
두 수법은 고산팔벽중에서도 위력이 강맹한 것이며, 특히
이산벽의 순간이동공격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