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보건곤-12화 (13/61)

제 12 장     죽 는 다 는 건   정 말   힘 들 군

1

바람이 아주 심하게 부는 날이었다.

그 자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길가의 커다란

바위위에 동그마니 앉은 채 멍하니 허공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처음 노독행은 그냥 그를 스쳐 지나가려 했다.

그때 무언가가 노독행의 마음을 붙들었다.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는 노독행도 알지 못했다.

아마 하늘높이 솟구치는 누런 황토바람속에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이 외로워 보였기 때문인지 모른다.

아니면 그 자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그 표정이 마음에

걸렸을까?

흥안령(興安嶺)의 어느 이름모를 구릉이었다.

해는 중천에 떠 있는데 황토바람이 어찌나 심하게

불어오는지 날은 어둡도록 칙칙했다. 만주에서나 볼 수

있는 누런 하늘색이 보는 사람의 마음에 이상한 적막감을

불러 일으키고 있었다.

누런 하늘...

텅빈 고갯길...

그리고 길옆에 앉아 있는 외로운 사나이 하나...

노독행은 한동안 걸음을 멈추고 바위위에 앉아 있는

사나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문득 하늘을 올려다 보던 사나이가 중얼거리는 듯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이런 날은 처음 보는군. 하늘은 누렇고 칙칙한데

미치도록 아름다우니 말이야..."

목소리가 너무 나직해서 혼자 입속으로 중얼거리다가

마는 듯한 음성이었다. 남들이 들을 것을 기대하지도 않고

또 그러기를 바라지도 않고, 단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자니 마음이 답답할 것 같아 할 수 없이 내뱉는

듯한 그런 목소리였다.

휘휘휭....

거칠게 불어오는 바람 사이로 그의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이런 날 죽을 수 있다는 것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

일일까?"

노독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서 있었다.

사나이가 고개를 떨구어 그를 바라보았다.

이상하게도 쓸쓸한 눈빛을 가진 사나이였다.

나이는 삼십 대 초반쯤으로 보였는데 얼굴에 시퍼런

수염자국이 가득 나 있었다. 아마 아무리 면도를 자주

해도 수염자국이 가시지 않을 그런 얼굴이었다.

눈썹은 짙고 코도 우뚝했다. 두툼한 입술 부근에 웃는

듯한 미소가 반쯤 매달려 있었다.

하나 노독행은 그 미소가 몹시 우울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사나이는 물끄러미 노독행을 바라보고 있다가 불쑥

물었다.

"혹시 이 근처에 자살(自殺)하기 좋은 곳을 알고 있나?"

노독행은 외눈을 번뜩이며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을 보자 노독행은 그가 농담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사나이는 정말로 자살할 곳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자살하고 싶나?"

사나이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노독행은 왜 자살하려 하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는

짤막하게 말했을 뿐이다.

"따라 와."

그는 주저없이 몸을 돌려 앞으로 걸어나갔다. 사나이가

따라오는지 아닌지를 확인하지도 않았다.

하나 그가 언덕을 하나 넘었을 때 사나이는 그의 옆에

바짝 붙어서 걷고 있었다.

한동안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걸음을 재촉했다.

노독행은 다시 하나의 언덕을 넘어 울퉁불퉁한 바위들이

잔뜩 늘어선 바위산으로 올라갔다. 그 산은 흥안령

일대에서 가장 험한 호아강(虎牙崗)이었다.

호아강은 이름 그대로 마치 호랑이이빨처럼 날카로운

기암절벽들로 이루어져 있어 흥안령에서 평생을 살아온

노련한 사냥꾼들도 좀처럼 접근하려 하지 않는 험준한

산봉우리였다.

사나이가 있던 곳에서 호아강까지 가는데는 한

시진가량이 소요되었다.

그동안에 두 사람중 어느 누구도 입을 열어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마치 입을 열면 무언가 무서운 일이 벌어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들은 입을 굳게 다문 채 호아강의 험준한

절벽위를 올라갔다.

휘이잉...

호아강의 정상에 올라서자 바람은 예리한 칼날처럼

그들의 몸을 켰고 지나갔다.

옷자락이 금시라도 찢어져 나갈 듯이 세차게

펄럭거렸다.

호아강의 정상에 서자 드넓은 흥안령의 구석구석이 한

눈에 내려다 보였다.

사나이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나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멋진 곳이로군."

노독행은 팔 년전쯤 이곳에 온 적이 있었는데 그때

호아강의 험준함과 산정에서 본 절경에 깊은 인상을

받았었다. 그런데 팔 년만에 전혀 엉뚱한 일로 이곳에

다시 오리라고는 미처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노독행은 별로 넓지 않은 호아강의 한쪽 모퉁이에 걸터

앉았다.

사나이는 호아강의 절벽 끝에 가서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천길 낭떠러지가 무서운 눈을 부릅뜨고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사나이의 몸이 가볍게 떨렸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서 추위를 느낀 탓일 것이다. 아니면

갑자기 두려움을 느낀 것일까?

노독행은 사나이를 쳐다보지도 않고 끝없이 펼쳐진

흥안령의 계곡을 주시했다.

사나이의 눈빛이 더욱 침침해졌다.

그는 약간 망설이는 걸음으로 절벽의 가장자리로

다가갔다.

"이곳인가?"

노독행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곳을 알고 있군. 이런 곳이라면 죽는 것도

어렵지는 않겠어."

말은 그렇게 했으면서도 사나이의 안색은 경직되어

있었다.

노독행은 묵묵히 그를 지켜보았다.

아마 사나이는 지금 어지러움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노독행은 이런 절벽에서 떨어진다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를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몸이 붕 뜬다고 느낄 것이다. 약간의

어지러움과 떨어진다는 의식이 거의 동시에 찾아들고 잠깐

동안 기절을 하게 된다.

그리고는 모든게 끝나 있는 것이다.

노독행도 절벽에서 떨어져 본 적이 있었다.

사나이처럼 자살을 하기 위해서는 아니고 상대에게  겨

할 수 없이 떨어진 것이다.

노독행이 떨어졌던 곳은 이곳에서 이 천리쯤 되는

철각령의 귀면암 근처였다. 칠 년전의 어느 날, 그는

장홍칠절의 추적을 뿌리치기 위해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절벽 아래로 뛰어내린 적 이 있지 않은가?

물론 이곳은 철각령이 아니었고, 절벽도 귀면암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의 기분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사나이는 약간 걱정스러운 눈으로 절벽 아래를

내려보다가 아찔한 현기증이 나는 지 주춤 뒤로 물러섰다.

노독행은 차갑게 웃었다.

"걱정할 필요없어. 그저 한 걸음 크게 내딛기만 하면

모든 일이 끝나는거야."

사나이도 따라 웃었다.

"그렇겠지."

억지로 웃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그래도 역시

어색했다.

사나이도 그걸 깨달았는지 웃음을 거두었다.

"그래도 조금 두려운데..."

노독행은 외눈을 번뜩이며 사나이를 응시했다.

자살을 하고 싶어 하면서도 죽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는

사나이.

또 자신이 두려워 한다는 것을 솔직하게 말하는 사나이.

노독행은 문득 이 사나이에게서 이상한 친밀감을

느꼈다.

그래서 평소의 그답지 않게 한 마디를 더 내뱉었다.

"흔한 일은 아니니까."

"그래. 흔한 일은 아니지."

사나이는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킬킬거렸다.

"크녠..."

처음에는 소리죽여 웃다가 나중에는 어깨까지 들썩이며

큰 소리로 웃었다.

"크하하...."

한참동안 정신없이 웃던 그는 차츰 웃음을 멈추었다.

얼마나 웃었는지 눈가에 눈물 한 방울이 맺혀 있었다.

사나이는 눈물을 훔치며 노독행을 돌아보았다.

"미안해. 갑자기 웃음을 참을 수가 없어서..."

노독행은 조용하게 물었다.

"무엇이 그렇게 우스웠지?"

사나이는 다시 웃었다. 조금전과는 다른 어딘지 모르게

씁쓸하고 공허한 웃음이었다.

"그저 여러가지 일들이 떠올랐을 뿐이야. 내가 죽은걸

알면 남들이 어떤 얼굴을 할까 하고..."

"남들때문에 죽으려고 한건가?"

사나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야. 그저 언제부터인가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뿐이지."

"......"

"그런데 막상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두려워지는군."

사나이는 고개를 돌려 노독행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의 무표정한 얼굴과 검은 안대, 그리고 외눈에서

흘러나오는 눈빛을 한참동안이나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히죽 웃었다.

"당신같은 사람은 죽음이 두렵지 않겠군."

노독행은 반문했다.

"나같은 사람?"

"그래. 마치 죽음의 신(神)같은 얼굴을 하고 있잖아. 내

말이 틀렸나?"

노독행은 잠시 침묵했다. 그러다가 특유의 나직하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잘 모르겠군. 난 한 번도 자살같은건 생각해 보지

않아서."

사나이는 다시 키득거렸다.

"그럴거라고 생각했어. 자살이나 죽음같은 단어는

당신하고 별로 어울릴 것 같지 않아. 나같은 인간이나 쓸

법한 말이지."

"사치스러운 소리를 하는군."

노독행은 외눈을 번뜩였다.

"죽음이 어울리는 인간같은건 없어. 해야할 일이 있는

인간은 결코 죽을 수가 없지."

사나이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런데 여보게. 난 해야할 일이 없어. 해야할 일

따위란 가지고 있지 않아."

"그런 인간은 없어. 누구나가 무언가를 가지고 있지.

당신도 있을거야."

사나이는 머뭇거렸다.

"글쎄...어쩌면 당신말이 맞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는

죽고 싶다구. 이미 죽기로 결정해 버렸다니까."

노독행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나이가 멍하니 그를 보고 있을 때 노독행은 그에게

다가와서 그의 어깨를 두 팔로 꽉 움켜쥐었다.

사나이는 그의 양 손에 실린 힘을 이기지 못하고 눈썹을

찡그렸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노독행은 그의 두

어깨를 양 손으로 움켜잡은 채 그의 몸을 끌고 절벽의

가장자리로 걸어갔다.

사나이는 바둥거렸으나 도저히 자신의 어깨를 움켜잡은

노독행의 양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노독행은 절벽의 가장자리에 바짝 다가선 채 두 팔을

앞으로 쭉 내뻗었다.

그의 손에 붙잡힌 사나이의 두 발이 절벽 너머 허공에서

바둥거렸다.

노독행은 사나이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한 자 한 자

씹어 뱉듯이 말했다.

"손을 놓을까?"

사나이는 발버둥치는 것을 멈춘 채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끝도 보이지 않는 깊은 낭떠러지를 두려운 듯이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고개를 들어 노독행을 바라보았다.

노독행은 그의 두 눈에 엷은 물기가 스며있는 것을

발견했다.

사나이는 물기젖은 눈으로 그를 보며 웃었다.

"여보게. 나는 정말 죽고 싶네. 미치도록 죽고 싶다구.

하지만...."

사나이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주르르 흘러 내렸다.

"아직은 죽고 싶지 않네. 적어도 지금은 죽고 싶지

않아."

노독행은 그를 응시하다가 뒤로 조금 물러나 그의 몸을

바닥에 내려 놓았다.

노독행이 어깨를 잡았던 손을 풀자 사나이는 한 차례

휘청거리더니 바닥에 주저 앉았다.

그리고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소리내어 울지는 않았지만 수염자국가득한 두 뺨이 흠뻑

젖도록 눈물을 흘렸다.

노독행은 한쪽에 우두커니 선 채 사나이가 울음을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후에야 사나이는 울음을 멈췄다.

그는 소맷자락으로 대충 눈물을 닦은 다음 중얼거렸다.

"죽는다는 건 정말 힘들군. 마치 살아가는 것처럼

힘들어."

노독행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나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름이 뭔가?"

노독행은 짤막하게 말했다.

"노독행."

"노독행이라...정말 자네에게 어울리는 이름이군.

나는..."

사나이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예의 그 중얼거리는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내 이름은 방립동(方立東)일세."

2

황혼이 지는 흥안령의 고개마루는 무한한 정취가

있었다.

두 사람은 흥안령의 언덕에 있는 이름모를 주루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주루라고 해봐야 천막 몇 개를 나란히 쳐 놓은 것에

불과했지만 어쨌든 술이 있고 안주가 있었다.

그리고 같이 술을 마실 사람이 있다.

그것만으로도 그들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노독행은 그랬다.

그는 그저 술을 한 잔 마시고 싶었고, 그런 면에서

방립동은 술을 같이 마시기에는 더할 수 없이 적합한

인물이었다.

그는 적당히 마시면 취할 줄도 알았고, 쓸데없이 말이

많지도 않았다. 술주정같은 것도 없었다.

무엇보다도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지 않았다.

두 사람은 별다른 말도 없이 서 너병의 술을 들이켰다.

방립동은 약간 취기가 감도는 눈으로 노을속에 잠겨가는

흥안령의 끝없이 이어진 구릉들을 응시했다.

"정말 죽고 싶도록 아름답군. 항상 이런 곳에서

죽었으면 하고 생각했지."

노독행은 말없이 술병째 들어 마시고 있었다.

방립동은 그가 듣는지 안듣는지 신경쓰지 않고 입속으로

중얼거리듯 소근거렸다.

"그녀도 저처럼 아름다웠네. 저 노을처럼...난 그때도

지금처럼 보자마자 그대로 취하고 말았지."

방립동의 눈빛이 암울하게 젖어들었다.

"그녀의 품속에 안겨 죽을 수만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했지. 그 품속에 안겨....그 눈빛을

보면서..."

돌연 방립동은 노독행을 돌아보면서 피식 웃었다.

"우습지 않나? 난 아름다운 것만 보면 이상하게도 그

속에 파묻혀 죽고 싶단 말이야. 정말 죽고

싶은데...아직까지 죽지 못했어."

노독행은 술병을 내려 놓으며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아직 죽고 싶지 않았던거지."

"뭐라고?"

"죽고 싶다고 생각은 했지만 진정으로 죽고 싶지는

않았던거야. 만약 그랬다면 죽었겠지."

방립동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랬을까?"

노독행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고, 방립동도 한 동안

침묵을 지켰다.

한참 후에 방립동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지도 모르지. 난 사실은 죽고 싶지 않았는지도

몰라. 하지만 죽고 싶은 마음에는 변함이 없네."

노독행은 묵묵히 술병을 들었다.

꿀꺽..꿀꺽...

술이 그의 목젖을 넘어가는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렸다.

방립동은 멍하니 그가 술을 마시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이 사람이 참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우선은 말이 거의 없었다. 특별히 꼭 해야할 말을

제외하고는 가급적 입을 열지 않았다.

게다가 전신에서 풍겨나오는 기운이 여느 사람과

판이했다.

냉혹하고 거친 듯 하면서도 어딘지 모르는 우수(憂愁)를

담고 있었다.

그 점은 자신도 비슷하다고 생각하면서 방립동은 피식

웃었다.

글쎄,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은

우수인가...고독인가....아니면 절망(絶望)인가....

그가 노독행의 목 한가운데 흉터가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은 그때였다.

목젖의 바로 옆에 두 치쯤 되는 흉터가 나 있었다.

흉터는 마치 뱀이 지나간 듯 선명하고 깊게 새겨져

있었다.

보기만 해도 무언가 예리한 것에 목을 관통당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제서야 방립동은 그의 목소리가 왜 그렇게 낮고

탁한지 알게 되었다. 또한 노독행이 왜 술을 술잔에

따르지 않고 병째 들이키는지도...

노독행은 목젖이 크게 상해 술병째 넘기지 않고는 술을

마실 수 없었던 것이다.

방립동은 노독행의 목의 흉터와 술병을 잡고 있는

상처로 뒤덮힌 손, 그리고 검은 안대를 한 외눈을 차레로

바라보다가 조그만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아프지 않았나?"

노독행은 술병을 내려놓고 고개를 쳐들었다.

방립동은 손가락으로 그의 목과 눈을 가리켰다.

노독행의 메마른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방립동의 모습이 마치 수줍은

어린 소년같았기 때문이다. 그 소년같은 모습을 보고 있자

노독행은 자신도 어린 아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땠을 것 같나?"

방립동도 따라서 웃었다.

"굉장히 아팠을 것 같네. 상상만 해도 식은 땀이

나는군."

노독행은 고개를 저었다.

"아프지 않았어."

방립동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정말인가?"

노독행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때 난 살아야 겠다고 생각했지. 오직 그

생각뿐이었어. 아픔을 느낄 겨를 따위는 없었던거야."

그의 음성은 나직했으나 방립동은 이상하게 가슴이

뭉클해졌다.

또한 계면쩍게도 생각되었다.

자신은 그토록 죽으려고 애를 쓰는데 이 사람은 살기

위해서 목을 관통당하고 눈알이 빠지는 고통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방립동은 더 이상 노독행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을 수가

없어 고개를 떨구어 술잔을 쥐고 있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

보았다.

"미안하네. 다른 뜻은 없었어."

노독행은 묵묵히 그의 떨구어진 목덜미를 내려다

보았다.

방립동은 고개를 쳐들며 씁쓸하게 웃었다.

"난 그런 상처를 당해보지 않았어. 태어나서 지금까지

조그만 상처 하나 입은 적이 없었네. 믿지 않을지

모르지만 정말이야. 그래서 난 궁금했던 걸세."

그는 술잔을 들고 있는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보라구. 티끌 한 점 없이 깨끗하지 않나?"

그의 손은 정말 깨끗했다.

아무리 조심스럽게 자라난 사람이라 할지다로 손에

조그만 흉터 하나는 있을 법한데 방립동의 양 손은 조그만

흠집하나 없이 완벽했다. 마디가 굵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여인의 섬섬옥수(纖纖玉手)라고 해도 될 정도였다.

방립동은 웃으며 말했다.

"다섯 살 때인가 한 번은 정원에서 놀다가 넘어져서

무릎을 깨뜨린 적이 있었네. 무릎이 약간 까지고 피가

났지. 하지만 심한 상처는 아니었어. 그런데..."

방립동은 들고 있던 술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 일로 나를 경호하던 무사 다섯 명과 유모(乳母)의

목이 달아났어. 겨우 다섯 살짜리 꼬마의 무릎이 조금

까진 일로 여섯 개의 아까운 목숨이 없어졌단 말일세."

"........"

"그때 난 결심했지.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다치지

않겠다고. 나 때문에 다른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되는 일은

두 번 다시 없도록 하겠다고 말이야.

방립동의 시선은 비어 있는 술잔속을 맴돌고 있었다. 빈

술잔을 응시하는 방립동의 눈은 암울한 빛으로 가득했다.

"그 뒤로 나는 다친 적이 없네. 아파본 적도 없었지.

사실은 몇 번인가 아픈 때도 있었지만 내가 아프다는게

알려지면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가 갈까봐 내색하지도

못했어. 혼자서 속으로만 끙끙 앓았지."

방립동은 피식 웃었다.

"웃기는 이야기지. 나는 자기 마음대로 아프지도 못하는

미련한 바보란 말이야. 그러니 남들이 아픈걸 어떻게

알겠나?"

그는 웃고 있었지만 눈가에 감도는 빛은 끝없는

슬픔이었다.

"지금은 자네도 보다시피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겁장이가 되어 버렸어."

노독행은 다시 술병을 잡았다.

"아프다는 것도 행복한 일이라는 걸 이제야 알겠군.

아픔을 느낄 수도 없는 사람도 있으니..."

노독행의 목젖이 크게 움직이며 술병이 순식간에 바닥이

났다.

노독행은 빈 술병을 탁자위에 거칠게 올려 놓으며

방립동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두라구. 한 번만 더 내 앞에서

죽는다는 소리를 지껄이면 진짜로 당신을 죽여버릴거야."

방립동은 노독행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다가

이내 히죽 웃었다.

"자네...취했군."

노독행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지도 모르지. 하지만 농담따위는 하고 있지 않아."

"그래. 맞아. 친구 앞에서는 그런 소리는 하는게

아니지."

"당신도 취했군. 우리가 친구인가?"

"그럼 아닌가?"

"글쎄...모르겠군."

"....."

한동안 두 사람은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가 방립동이 다시 술잔에 술을 따르며 웃었다.

"이것 한 가지만은 자신있게 말할 수 있어."

노독행이 무슨 소리냐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방립동은 술잔을 빙빙 돌리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오늘만큼 기분좋게 술을 마셔본 적은 아직 없었어.

술이란게 이렇게 좋은건지도 오늘 처음 알았네.

그래서...."

방립동은 술잔을 단숨에 비운 후 말했다.

"나는 앞으로 술주정뱅이가 되기로 결심했어."

노독행은 피식 웃었다.

냉막하기만 하던 그에게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웃음이었다.

"술주정뱅이라...자살자(自殺者)보다는 그게 낫군."

"하하...자네는 머지않아 세상에서 제일가는 술주정뱅이

친구를 가지게 될거야."

"......."

"우리는 친구지?"

"그런가?"

"그럴꺼야....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이왕이면 친구인게

더 낫지."

노독행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많은 술을 마셨고, 많은 시간동안 함께 앉아

있었다.

방립동은 더 이상 죽음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노독행도 그 점에 대해서는 더 언급하지 않았다.

주루에 있는 술이 바닥이 났을 때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하고 근처에서 가장 높은 산봉우리에 올라갔다.

산봉우리 정상에서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바라보며

나란히 바위위에 걸터 앉았다.

주위는 아주 조용했고, 밤바람은 신선하기만 했다.

방립동은 어두운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너무 조용하군. 풍악이 그친 연회장같아."

노독행은 거치른 바위의 표면에 등을 기댔다. 방립동도

그를 따라서 등을 기댔다. 허공에 걸려 있는 달이 두

사람의 얼굴에 짙은 음영을 드리우고 있었다.

방립동은 조용히 노독행을 불렀다.

"독행."

노독행이 방립동을 돌아보자 방립동은 노독행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우리는 친구지?"

노독행은 그의 쓸쓸한 눈과 수염자국 가득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달빛에 비친 그의 눈은 무언가를 간절히

갈망하는 소년의 눈빛같았다.

노독행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방립동은 미소지었다.

"안심했어."

그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다. 잠시 후 그의

코고는 소리가 나직하게 들려왔다.

노독행은 자신의 어깨에 기대오는 방립동의 몸무게를

느끼며 잠시 그대로 앉아 있었다.

얼마후에는 그도 잠이 들었다.

새벽에 잠이 깼을 때 노독행은 자신만이 동그마니

산봉우리의 정상에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방립동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마치 밤에만 나타났다가 아침 해를 받으면

사라지는 밤이슬처럼 사라지고 만 것이다.

노독행은 그가 쪽지라도 남기지 않았나 하고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그런 것은 없었다.

아무 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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