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보건곤-9화 (10/61)

제 9 장         넌   대 체    누 구 냐

1

호노호하(瑚努呼河)의 물살은 아직도 차가웠다.

호노호하는 북해에서 발원하여 태자하(太子河)를 거쳐

요하(遼河)로 흘러드는 강이었다.

주위는 조금씩 봄의 따사로움이 감돌고 있었지만 강가에는

여전히 차가운 바람이 불고, 강물은 손을 집어 넣을 수 없을

정도로 차가웠다.

북해에서 만주로 들어가는 호노호하의 나룻터는 항상 사람들로

붐볐다.

오늘은 유달리 붐볐다. 특히 이곳 특유의 털옷이 아닌

경장(輕裝)을 한 무림인들의 모습이 많이 눈에 띄여 나룻터

전체에 이상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낙마루(落馬樓)!

주루 이름치고는 조금 이상한 이름의 주루였다.

낙마루는 호노호하를 건너는 나룻터에 있는 수십 개의 주루중

하나였다.

이곳을 안들리고 그냥 지나치다가는 반드시 말에서 떨어진다고

하여 이런 이상한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음식 맛은 썩 좋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 근처에서는 그래도

제법 크고 깨끗해서 항상 손님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해가 기를 쓰고 중천(中天)으로 떠오르려고 하는 정오 무렵.

그날도 엽동(葉潼)은 낙마루의 창문가에 앉아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달리 특별히 할 일도 없고, 그렇다고 그냥 멍하니 앉아 있기는

심심하여 엽동은 고개를 반쯤 창문밖으로 내민 채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이제는 제법 한낮의 날씨가 따뜻하여 형형색색의 옷을 입은

남녀들이 분주히 거리를 오가고 있었다.

엽동은 지나가는 여인들의 팽팽한 가슴부위와 잘록한 허리,

풍만한 엉덩이의 곡선을 힐끔힐끔 훔쳐보며 혼자 희희낙락하고

있었다.

그때 문득 그의 시야에 특이한 복장을 한 사람이 들어왔다.

날이 따뜻해 졌다고 해도 아직도 바람은 차가운데 그 사람은

홑겁데기에 가까운 얇은 적삼을 걸치고 있었다.

한손에는 폭이 유난히 넓은 도(刀)를 들고 있었는데 그 도는

아무리 보기에도 병기라기 보다는 주방에서 쓰는 부엌칼을

연상시켰다.

엽동은 그 칼을 든채 휘적휘적 걸어오는 적삼사내의 모습이

너무도 우스꽝스러워 혼자 킥킥거리고 있었는데 그때 문득

적삼사내의 눈이 그를 쳐다보았다.

그 순간 적삼사내의 눈에서는 칼날같은 섬뜩한 안광이

폭사되어 나왔다.

엽동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찔 떨었다.

'정말 무서운 눈빛이구나.'

그때는 이미 적삼사내는 안광을 거두고 등을 보인 채 저만큼

걸어가고 있었다.

엽동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멀어져가는 적삼사내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넓은 칼, 싸늘한 눈....저 자가 바로 마안도(魔眼刀)

섭대명(攝大明)이로군.'

그가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을 때 다시 하나의 인영이 그의

눈길을 끌었다.

그는 전신에 치렁한 흑포를 걸친 깡마른 노인이었다.

흑포노인은 어찌나 말랐던지 바람이라도 세게 불면 그냥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았다.

하나 흑포노인을 본 순간 엽동의 안색은 가볍게 굳어졌다.

그의 시선은 흑포노인의 소맷자락밖으로 삐져 나온 주름진

손에 고정되어 있었다.

흑포노인의 손은 마치 닭의 발처럼 온통 상처 투성이에

쭈글쭈글한 주름살로 뒤덮혀 있었다. 특이한 것은 손톱으로,

유난히 거무틱틱할 뿐 아니라 매의 발톱처럼 끝이 뾰족하게

다듬어져 있어 가만히 보고 있노라니 왠지 섬뜩한 느낌을 불러

일으켰다.

엽동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귀조(鬼爪) 막봉(莫蜂)! 저 늙은 귀신도 왔군...'

엽동은 다시 시선을 돌렸다.

멀리 인파사이로 백의를 입고 얼굴이 비슷하게 생긴 두 명의

검객이 걸어오는 모습이 언뜻 눈에 띄었다.

'관동쌍검(關東雙劍) 혁련형제(赫連兄弟)로군. 과연 저 자들은

자신들에게까지 기회가 오리라고 생각하는걸까?'

한동안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속으로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던 엽동의 눈이 갑자기 고리짝만하게 부릅떠졌다.

'억?'

무엇을 보았는지 그는 시선을 한 곳에 고정시킨 채 몸을

가늘게 떨었다.

'저 자가 왜 이곳에 왔지?'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한 명의 점잖게 생긴 중노인이

느릿느릿 걸어가고 있었다.

나이는 대략 오십 대 초반쯤 되어 보였다.

이목구비가 상당히 수려하고 전신에 짙은 남삼을 걸치고

있어서 키도 커 보였다.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 뒤로 넘겼고,

허리춤에는 금으로 장식된 허리띠를 매고 있어 여유있고 부유해

보였다.

무엇보다도 얼굴에 봄바람같은 부드러운 미소가 그치지 않고

있어 보는 사람을 유쾌하게 만들었다.

남삼노인은 무엇이 그리도 즐거운지 입가에 연신 엷은 미소를

지은 채 여유자작한 걸음으로 걸어오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엽동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남삼노인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엽동은 움찔하여 자신도 모르게 급히 고개를 돌렸다.

남삼노인은 빙그레 웃으며 말없이 낙마루의 옆을 지나쳐갔다.

엽동은 남삼노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고개를 돌리고

있다가 자신도 모르게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십 년은 감수했군. 나를 알아봤을까?'

엽동의 얼굴에 한 줄기 의혹의 빛이 떠올랐다.

'그나저나 이건 완전히 천지가 개벽(開闢)할 일이군. 저

자까지 산장(山莊)에서 내려온걸 보니 이번 일이 커져도

엄청나게 커졌는걸.'

엽동은 이리저리 생각을 굴리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돌연

히죽 웃었다.

'그가 왔다는게 알려지면 정말 볼만한 일이 벌어질텐데...

아마 이곳에 모인 놈들중 태반은 꼬리가 빠지게 도망치고

말거야. 킬킬....'

그가 속으로 키득거리고 있을 때 갑자기 그의 눈앞으로

하나의 손이 불쑥 나타났다.

그 손은 그야말로 섬섬옥수(纖纖玉手)라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로 흠 하나 없이 아름다운 손이었다. 손가락은 너무 길지도,

짧지도 않았고 손톱은 가지런히 깍여 있어 첫 눈에 보기에도

단정해 보였다.

손의 모양은 가히 완벽해서 아무리 보고 있어도 싫증이 날 것

같지 않았다.

엽동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손을 보고 있을 때 하나의

영롱한 음성이 그의 귓전을 때렸다.

"이게 어떤 손인지 알겠지요?"

그 음성은 섬섬옥수만큼이나 아름다운 것이었다.

엽동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영롱한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그렇다면 이 손이 화를 내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알겠군요."

엽동은 멍하니 그 손을 바라보고 있다가 돌연 나직하게

탄식했다.

"나는 아직 큰 잘못을 저지른 적이 없는데 왜 내게 화를

내는거요?"

"누가 당신에게 화를 낸다는거에요?"

엽동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쳐들었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이 왜 나를 찾아 왔겠소?"

그의 앞에는 어느 새 나타났는지 하나의 인영이 우뚝 서

있었다.

여인.

눈빛은 티없이 맑았고, 살결은 백옥보다도 고왔다. 흑단같은

머리카락은 머리위로 높게 틀어 올렸고, 늘씬하고 탄력있는 몸을

풍성한 백의로 감싸고 있었다.

백의미녀의 나이는 종잡을 수 없어 보였다.

어찌 보면 이제 갓 십칠팔세의 설익은 소녀로도 보였고, 또

어찌보면 삼십 대의 농염함도 풍겨 나왔다.

하나 엽동은 그녀가 대략 이십대 중반에서 후반 사이의

나이일거라고 짐작했다.

백의미녀는 엽동과 시선이 마주치자 가늘게 웃었다.

심신이 짜릿해질만큼 요염한 미소였으나 엽동의 안색은 오히려

시무룩해졌다.

백의미녀의 얼굴에 한 줄기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표정이 왜 그래요?"

엽동은 이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소수관음(素手觀音)은 좀처럼 남들앞에서 웃는 법이 없다고

했는데 이제 그 미소를 보았으니 아무래도 오늘 일진이 심상치

않을 것 같소."

백의미녀의 눈가에 차가운 기색이 감돌았다.

"뚫린 입이라고 말은 잘 하는군요. 내가 누구인지 안다면 왜

당신을 찾아왔는지도 알겠죠?"

엽동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걱정이오."

"무엇이 걱정이란 말이에요?"

"당신이 나를 찾아온 것은 내게 일을 시키기 위해서요. 그런데

그걸 하지 못하게 될 것이 걱정이란 말이오."

백의미녀의 표정이 굳어졌다.

"당신이 감히 거절하겠단 말이에요?"

엽동은 쓰디쓴 웃음을 머금었다.

"당신같은 미녀의 부탁이라면 나도 거절할 수가 없소. 그런데

아쉽게도...."

백의미녀는 급히 물었다.

"아쉽게도 뭔가요?"

"나는 승락하고 싶지만 남들이 그렇게 내버려 둘 것 같지

않구료."

백의미녀의 고운 아미가 상큼히 찌푸려졌다.

"누가 감히..."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나다."

백의미녀는 재빨리 음성이 들려온 곳으로 몸을 돌렸다.

주루의 입구쪽에 하나의 인영이 우뚝 서 있었다.

그는 푸른 청삼을 입은 날카로운 인상의 중년인이었다.

이목구비는 그런대로 수려했는데 눈꼬리가 옆으로 찢어지고

눈빛이 쉴사이없이 깜박거리고 있어 별로 호감이 가는 얼굴은

아니었다.

백의미녀는 청삼중년인을 보자 낮빛이 약간 바뀌었다.

"이제보니 대복보(大伏堡)의 셋째 총관(總官)이셨군."

청삼중년인은 입꼬리를 묘하게 비틀며 웃었다.

"흐흐...내가 누구인지 안다면 내 손이 얼마나 무섭다는 것도

알겠지? 그러니 화를 당하기 전에 순순히 물러나라."

백의미녀의 입가에 냉랭한 미소가 떠올랐다.

"흥! 설사 대복보의 제일보주(第一堡主)가 직접 나타난다 해도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을텐데  당신 정도로 무얼 어쩌겠다고?"

청삼중년인의 눈빛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지며 스산한 살기가

감돌았다.

"미친 계집. 용모가 좀 반반하다고 하늘 무서운 줄 모르는군."

백의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 한 겹의 얼음장같은 기운이

어렸다.

엽동은 그녀의 얼굴이 빙굴(氷窟)속에서 나온 것처럼 차갑게

변하자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예일청(芮壹淸)은 아직 그녀가 누구인지 모르는군. 알았다면

저런 소리는 하지 못했을텐데...'

백의미녀는 천천히 청삼중년인을 향해서 걸음을 옮겼다.

청삼중년인은 북만주(北滿洲)일대에서 가장 큰 세력중 하나인

대복보의 삼총관인 음양필(陰陽筆) 예일청이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이곳에 방금 전에 왔기 때문에 미처 백의미녀와 엽동의

대화를 제대로 듣지 못했다.

따라서 눈앞의 이 백의미녀가 관외(關外)에서 세 손가락안에

드는 여고수인 소수관음(素手觀音) 매여설(梅如雪)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매여설은 두 눈을 싸늘하게 빛내며 예일청에게로 다가왔다.

그때서야 예일청은 그녀의 기도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낮빛이 약간 굳어졌다.

'만만히 볼 계집이 아니로군...'

예일청은 긴장된 얼굴로 그녀를 주시하다가 문득 그녀의

소맷자락 아래로 늘어뜨려진 손을 보게 되었다.

그의 시야에 백옥보다 희고 고운 새하얀 손 하나가 가득

들어왔다.

그 손을 보자 예일청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제보니 이 여자는...'

매여설은 이미 살심(殺心)이 발동했는지 걸음을 멈추지 않고

계속 다가왔다. 예일청은 바짝 긴장하여 두 손에 가득 공력을

돋구었다.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감도는 순간,

돌연 그림자가 어른거리며 몇 개의 인영이 안으로 날아들었다.

"하하...매소저. 오랜만이외다."

낭랑한 웃음소리가 주루 안을 가득 메웠다.

매여설은 그 음성을 듣자 갑자기 고운 아미를 잔뜩 찌푸렸다.

음성만으로도 상대하기 까다로운 인물이 나타났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예일청의 옆에는 어느 새 세 명의 인물이 우뚝 서 있었다.

앞에 있는 인물은 회색 유삼(儒衫)을 걸친 훤칠한 키의

중년문사(中年文士)였다.

피부가 유난히 하얗고, 얼굴에 봄바람같은 훈훈한 미소가 어려

있어 보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예일청과는 전혀

반대되는 분위기의 인물이었다.

회삼문사의 뒤에는 각각 주판과 장부를 든 두 명의 비쩍 마른

노인이 나란히 서 있었다.

매여설은 회삼문사를 보자 눈빛이 조금 굳어졌으나 이내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떠올렸다.

"천하에 명성이 자자한 대복보의 수석총관께서 이곳까지

오시다니 뜻밖이군요."

회삼문사는 점잖게 웃었다.

"하하...나야말로 이곳에서 매소저의 절색(絶色)을 보게 될

줄은 몰랐소."

이어 그는 슬쩍 예일청을 돌아보았다.

"삼제(三弟)가 미처 매소저를 몰라보고 실수를 한 것 같은데

나를 보아서라도 매소저께서 참아주시면 고맙겠소."

매여설은 요염하게 웃었다.

"이총관(李總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따르도록 하지요."

"고맙소."

회삼문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예일청의 등을 두드렸다.

"삼제. 어서 매소저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게."

예일청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그녀에게 포권을 했다.

"매소저. 내가 소저를 몰라보고..."

그녀는 하마터면 속을 뻔 했다.

그녀가 속지 않은 것은 악명(惡名)이 자자한 음양필 예일청이

너무 쉽게 사과를 한다는 것에 일말의 의혹을 느꼈기 때문이다.

예일청의 몸은 반쯤 숙여진 자세 그대로 그녀의 하체를 향해

쏘아져 왔다.

그와 함께 회삼문사의 뒤에 서 있던 주판과 장부를 든 두

노인이 번개처럼 허공을 날아 그녀의 머리위로 떨어져 내렸다.

하나 더욱 무서운 살수(殺手)는 따로 숨어 있었다.

그녀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나려 할 때 우두커니 서 있던

회삼문사가 그림자처럼 다가오며 한 손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그의 손은 갈쿠리처럼 변한 채 그야말로 빛살같은 속도로

그녀의 목덜미를 찍왔다.

그들의 이 합격술(合擊術)은 절묘하리만치 완벽한 것이었다.

허공으로 몸을 솟구치자니 두 명의 노인들이 기다리고 있고,

아래로 몸을 숙이자니 예일청의 공격이 이미 지척에 도달하고

있었다.

그리고 뒤로 물러나려 해도 그녀의 목덜미를 찍어오는

회삼문사의 손을 피할 수가 없는 것이다.

절대절명의 순간, 매여설의 몸이 선 자세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몸이 바닥과 거의 수평으로 뉘어졌을때 그녀의 두

다리가 번개처럼 교차되며 다섯 번의 발길질을 해댔다.

동시에 그녀는 양 손을 허공으로 쭉 쳐올렸다.

회삼문사의 손이 허공을 움켜잡으며, 그녀의 하체를 노리고

들어오던 예일청이 그녀의 연환각(連環脚)에 격퇴된 것은 거의

같은 시각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리고 허공에서 떨어져 내리던

두 명의 노인은 그녀의 백옥같은 쌍수(雙手)와 정면으로

격돌했다.

쾅!

벼락치는 듯한 폭음과 함께 두 명의 노인은 떨어져 내릴 때

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허공으로 튕겨져 올랐다.

회삼문사가 안색이 변해 다시 몸을 날리려 할 때는 이미

매여설은 바닥에 쓰러질 듯 하던 몸을 회전시켜 일 장 밖으로

날아가 우뚝 선 뒤였다.

글로 설명하기는 길었지만 회삼문사가 예일청의 등을 두드리고

예일청이 포권을 하는 척 하며 그녀의 하체를 공격하면서 부터

그녀가 철판교(鐵板橋)의 신법으로 몸을 뒤로 뉘이며 그들의

합공을 물리치기 까지는 그야말로 눈 한 번 깜박할 시간밖에는

소요되지 않았다.

그만큼 그들의 움직임은 질풍과도 같았다.

회삼문사는 그녀가 완전한 수비자세를 취한 것을 보고 막

그녀를 향해 날리려던 몸을 멈춰 세웠다.

그리고는 이내 빙그레 미소지었다.

"과연 소수관음의 명성은 명불허전이구료. 매소저의 무공은

소문보다 더욱 뛰어난 것 같소이다."

매여설은 간신히 그들의 합공을 피하기는 했으나 아직도

등골에는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예일청의 행동에서

무언가 어색함을 느끼고 경각심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조금전의

일격에 꼼짝없이 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녀는 회삼문사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자약하게 웃자

불같이 노해서 눈꼬리가 절로 파르르 떨렸다.

"이새붕(李賽鵬)! 과연 낭심수사(狼心秀士)라는 외호가 거짓이

아니었군. 하지만 그런 야비한 짓도 오늘로서 끝이다."

회삼문사는 우는 아이도 울음을 멈춘다는  낭심수사

이새붕이었다.

이새붕은 외모와는 달리 수법이 간악하고 독랄해서 북만주

일대에서는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새붕은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하하...오해하지 마시오, 매소저. 매소저의 명성이 하도

자자해서 내가 잠시 시험해 본 것 뿐이외다."

그는 짐짓 온화하게 말했으나 그녀가 다시 또 속을리는

없었다.

그녀는 말없이 양 손을 가슴부위로 끌어올렸다.

우우웅...

그에 따라 그녀의 두 손이 마치 얼음을 씌운 듯 하얗게

변해갔다.

이새붕은 그녀를 향해 조금씩 다가오다가 이 광경을 보자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온화한 웃음은 어느 사이엔가 씻은

듯이 사라져 있었다. 대신에 눈가에 음침한 기운이 떠올랐다.

단순히 그것뿐인데도 그의 인상은 처음과는 전혀 판이하게

달라져 버렸다.

부드럽고 점잖은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음산한 모습의

냉혹한 중년인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것이 바로 북만주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하는 낭심수사

이새붕의 진면목이었다.

이새붕은 악독한 살기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매여설을 바라보며

음산한 미소를 날렸다.

"흐흐...매여설. 소수공(素手功)을 믿고 본 보(本堡)와

맞서보겠다는거냐?"

매여설은 양 손 가득 공력을 돋군 채 냉소를 날렸다.

"흥! 이제야 본색이 나오는군. 네 놈들이 나를 먼저 공격해

놓고 무슨 엉뚱한 소리냐?"

이새붕의 얼굴은 철갑을 씌운 듯 냉막해졌다.

"홍초혜(紅草鞋)는 우리가 데려가겠다. 네가 우리를 막지

않는다면 우리도 네가 가는 것을 막지 않겠다."

매여설은 쌍심지를 돋구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그는 내가 먼저 발견했다. 당연히 내가

그를 데려가야 한다."

"흐흐...주는 술을 마다하고 벌주(罰酒)를 마시겠다면 할 수

없지."

이새붕의 오른손이 슬쩍 흔들렸다.

그 순간 그의 등뒤에 서 있던 주판과 장부를 든 두 노인이

다시 매여설을 향해 날아갔다.

아니 날아가려고 했다.

바로 그때였다.

쿵...쿵...

지축이 흔들리는 음향과 함께 한 사람이 주루의 입구에

나타났다.

2

중인들의 시선이 자신들도 모르게 그쪽으로 향했다.

들어온 사람을 보자 그들의 눈이 부릅떠졌다.

세상에 이렇게 거대한 사람도 있단 말인가?

그는 거의 구척에 육박하는 어마어마한 몸집을 가진

거한(巨漢)이었다.

피부는 청동빛으로 그을렸고, 부릅뜬 고리눈에 덥수룩한

수염이 가득 나 있어서 왠만한 사람은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거한의 오른쪽 허리춤에는 녹이 잔뜩 슬은 커다란 칼 한

자루가 매달려 있었다. 그 녹슨 칼도 주인만큼이나 거대해서 그

칼을 녹인다면 몇 자루의 칼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거한은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오더니 주위를 둘러 보았다.

그의 시선이 매여설과 이새붕을 지나 엽동에게로 향했다.

엽동을 보는 순간 거한의 고리눈에서 무시무시한 신광(神光)이

흘러나왔다.

"이곳에 있었구나."

그의 음성은 마치 종이 울리듯 굉량해서 별로 크게 소리친 것

같지도 않았는데 주위가 온통 쩌렁하게 울렸다.

거한은 엽동을 향해서 일직선으로 다가왔다.

그 순간 하나의 인영이 그의 앞길을 막았다.

거한은 자신의 앞길을 막은 사람이 이새붕임을 알고 고리눈을

부릅떴다.

"네 놈은 누군데 감히 이 어른신의 앞길을 막는거냐?"

이새붕은 화를 내기는 커녕 오히려 부드럽게 웃었다.

"하하...귀하는 혹시 만주제일패도(滿洲第一覇刀)라는

뇌력도(雷靂刀) 형개(邢蓋), 형대협이 아니시오?"

거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놈이 어찌 나를 아느냐?"

그가 말끝마다 이 놈 저 놈 하는데도 이새붕은 조금도 화를

내는 기색이 없이 시종일관 미소지었다.

"만주인(滿洲人)치고 형대협의 태산같은 몸집과 거대한

철뢰보도(鐵雷寶刀)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소?"

형개는 그의 칭찬에 고무된 듯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너는 생긴 것 답게 제법 보는 눈이 날카롭구나.

확실히 나의 철뢰보도는..."

그가 고개를 쳐들고 웃을 때 이새붕의 몸이 번개같이 형개를

향해 날아들었다.

그의 오른손은 갈쿠리처럼 변한 채 고개를 젖히고 웃어대는

형개의 목덜미를 향해 그대로 찍어 갔고, 왼손은 푸르스름한

경기를 뿜어내며 형개의 아랫배를 강타하고 있었다.

이새붕의 이 갑작스런 상하연수(上下連手)는 악독하기

그지없어 낭심수사라는 외호가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님을 여실히

느끼게 해주었다. 갈쿠리같은 오른손은

마응조력(魔鷹爪力)이었고, 푸르게 변한 왼 손은 무섭기로

유명한 청독수(靑毒手)였다.

누가 보기에도 형개는 그의 이 살인적인 두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피를 뿌리며 쓰러지고 말 것 같았다.

하나 그 순간, 형개의 거대한 몸이 거의 눈에 보이지 않을

속도로 빠르게 회전했다.

슈아앙!

동시에 시퍼런 도광(刀光)이 줄기줄기 뻗어나왔다.

그것은 마치 주위 사방을 온통 찢어버릴 듯이 무서운 기세로

퍼져나갔다.

이새붕은 그야말로 대경실색하여 황급히 양 손을 거두고 그

자리에 넙죽 엎드렸다.

파아아...

그의 머리카락 한 줌이 도광에 잘려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이새붕은 모골이 송연해져서 황급히 바닥을 몇 바퀴 구른 후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형개는 언제 뽑아 들었는지 왼손에 녹이 잔뜩 슬은 커다란

칼을 든 채 이새붕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를 보자 이새붕은 자신이 오히려 그에게 농락당했음을

깨달았다.

형개는 조금전처럼 미련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형개는 수중에 철뢰보도를 든 채 차갑게 웃었다.

"남들이 하도 낭심수사라고 떠들기에 얼마나 대단한 작자인가

했더니 겨우 암습이나 일삼는 치졸한 소인배였군."

이새붕의 얼굴이 푸르뎅뎅하게 굳어졌다.

그가 언제 남에게 이런 모욕을 받아 보았겠는가? 그는 그저

외모만으로 형개를 경솔하게 판단하고 살수(殺手)를 쓰려다

오히려 하마터면 그대로 목이 잘려나갈 뻔 했던 것이다.

하나 이새붕의 낭심수사라는 외호는 거저 얻은게 아니었다.

그는 곧 냉정을 되찾고 입꼬리를 가늘게 하여 웃었다.

"과연 귀하의 도법(刀法)은 소문이상이군. 하지만 귀하 혼자로

본 보를 상대하기는 벅찰거요."

형개는 껄껄 웃었다.

"하하...대복보의 이름으로 나를 겁주려 하지 마라. 대복보의

제일보주인 단홍검(斷虹劍) 강대년(姜大年)은 그래도 제법

비범한 사람인데 어떻게 그 밑에 너같은 수하가 있는지

모르겠군."

"직접 겪어보면 그런 소리를 함부로 하지 못할걸."

이새붕은 중얼거리듯 말하며 형개를 향해 번개같은

삼장(三掌)을 내갈겼다.

이새붕이 쳐낸 삼장은 몹시 괴이했다.

일장(一掌)은 아주 빠르게 형개의 가슴을 향해 날아들고, 그

뒤를 두 개의 장력이 느릿느릿하게 좌우로 따라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본 형개의 낮빛이 갑자기 신중하게 굳어졌다.

형개는 긴장한 얼굴로 자신의 가슴을 향해 날아오는 장력을

보고 있다가 수중에 든 철뢰보도를 맹렬하게 휘둘렀다.

팡!

가장 먼저 날아오던 장력이 철뢰보도에 부딛쳐 튕겨졌다. 그

순간 그 뒤를 느리게 날아오던 두 개의 장력이 갑자기 무서운

속도로 형개의 양쪽 옆구리를 향해 폭발치듯 쏘아져 오는 것이

아닌가?

"이얍!"

형개는 주위가 떠나갈 듯한 호통을 내지르며 번개같이 몸을

회전시키며 철뢰보도를 질풍처럼 휘둘렀다.

파파팟!

그의 거대한 몸이 엄밀한 도광에 휩싸여 버렸다.

쾅! 쾅!

두 개의 장력은 도광과 정면으로 격돌했다. 도광이 순간적으로

멈칫거렸다. 하나 멈춰지기는 커녕 오히려 더욱 빠르게 선회하며

이새붕을 향해 날아갔다.

이새붕은 훌쩍 몸을 날려 허공으로 비스듬히 몸을 피하며 다시

연거푸 손을 휘둘렀다.

파파팍!

그의 손에서 줄기줄기 장력이 구슬에 꿰인 듯 뿜어져 나왔다.

그가 펼치는 장력은 약류장(弱柳掌)이라는 것이었다. 얼핏

보기에는 버드나무가지처럼 약해 보이지만 상대의 근처에 가면

무섭도록 빠르고 강력하게 변해 방비하기가 힘든 절정의

무공이었다.

형개는 이새붕의 무공이 소문보다 더욱 뛰어난 것을 알고

주저하지 않고 자신의 성명절기(成名絶技)인

벽력십팔도(霹靂十八刀)를 펼쳤다.

순식간에 주루안은 그들이 펼쳐내는 장력과 도광에 휩싸여

풍지박산이 났다.

그들의 대결이 어찌나 맹렬하게 펼쳐지던지 매여설 조차도

뒤로 훌쩍 물러나 정신없이 그들의 결전을 구경하고 있었다.

하나 그녀는 시선을 장내의 격전에 고정시키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예일청과 두 명의 노인의 움직임도 잊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예일청은 싸움의 여파를 피하는 척 하며 조금씩 그녀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그녀는 모르는 척 장내의 싸움을 주시하며

오른 손에 소수공을 잔뜩 끌어올렸다.

예일청은 슬금슬금 그녀의 옆으로 다가오더니 갑자기 그녀를

향해 번개처럼 덤벼들었다. 예일청의 양 손에는 언제

뽑아들었는지 각기 빨갛고 파란 색으로 물들어 있는 두 개의

철필(鐵筆)이 쥐어져 있었다.

매여설은 그의 공격이 지척에 올 때까지 가만히 있다가 거의

자신의 몸에 닿을 즈음에야 몸을 회전시키며 오른 손을

휘둘렀다.

파아악!

새하얀 손그림자가 허공을 자욱하게 뒤덮었다.

예일청은 막 음양필로 그녀의 옆구리를 찌르려다 돌연 그녀의

몸이 옆으로 움직이며 하나의 백옥같은 손이 자신의 얼굴로

쏘아들어오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하나 쏘아져가던 자신의 몸을 되돌릴 여유가 없어 황급히

음양필로 그 손을 후려쳤다.

까깡!

음양필과 손이 마주쳤는데 어이없게도 쇳소리가 터져나오며

불똥이 튀었다. 그 순간 예일청은 음양필을 쥔 자신의 아구가

찢어지는 듯한 통증에 눈을 찡그리며 뒤로 물러났다.

"음...."

매여설의 소수공력은 그의 상상보다 훨씬 놀라운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예일청이 몸을 채 가누기도 전에 다시 매여설의 소수가

날아들었다.

매여설은 예일청의 거듭되는 암수(暗手)에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그를 죽이기로 작정한 듯 공세가 날카롭기 그지 없었다.

예일청은 음양필을 휘둘러 간신히 그녀의 살인적인 공세를

막았으나 뒤로 정신없이 후퇴하여 금세 곤경에 처했다. 이것을

보자 이새붕을 따라왔던 두 명의 노인이 그를 도와주기 위해

달려들었다.

두 명의 노인중 주판을 든 노인은 다섯 개의 주판알을

그녀에게 던져냈고, 장부를 든 노인은 장부의 종이를 네 장이나

날려보냈다.

그들이 던져낸 주판알과 종이는 무서운 위력을 지닌

살인암기였다.

그들은 무영쌍반산(無影雙班算)이라는 고수들로, 신법과

암기로 상당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파파팟!

그녀의 소수가 몇 번 휘둘러지자 그들이 던져낸 주판알과

종이는 모두 바닥에 떨어졌다. 그것들은 특수한 강철로 제작되어

예리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인데도 그녀의 소수는 너무도

간단하게 그것들을 떨어뜨린 것이다.

엽동은 한쪽에서 이 광경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매여설의 소수공력은 대단하군. 아무래도 오늘 예일청이

그녀에게 호되게 당하겠는데...'

그는 다시 시선을 돌려 형개와 이새붕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격전은 점입가경에 접어 들어 그야말로 용호상박의 결전을

이루고 있었다.

엽동은 한동안 물끄러미 그들의 격전을 구경하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새붕의 실력도 소문보다 대단하군. 하지만 맨손으로 계속

형개의 벽력십팔도를 막을 수는 없을텐데...형개와 매여설이

싸운다면 누가 이길까?'

엽동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왕이면 매여설이 이기면 좋겠는데...이왕 끌려갈 바에는

그래도 미녀의 손에 끌려가는게 더 낫지.'

그가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을 때였다.

한 사람이 천천히 주루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엽동은 무심결에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그대로 몸이 굳어지고 말았다.

장내에 이상한 기운이 감돌았다.

싸움은 어느 새 멈추어져 있었다.

누구도 왜 갑자기 자신들이 손을 멈추었는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없었다.

단지 왠지 모르게 손이 멈추어졌던 것이다.

그들의 시선은 모두 주루로 올라오는 한 사람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 사람을 보자 그들은 그제서야 자신들이 왜 손을

멈추었는지를 깨달았다.

가까운 거리에서 표범을 만난 사슴은 움직이지도 못한다고

한다. 결코 피할 수 없다는 절망감때문에 공포에 빠진다는

것이다.

그가 나타나는 순간 그곳에 있던 사람들의 상태가 바로

그러했던 것이다.

그는 보통의 몸집에 보통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한쪽 눈을 검은 안대로 가렸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는

어디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입고 있는 옷도 시중 어디에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거치른

흑의였다.

그런데 그를 보는 순간 중인들은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손가락 하나만 까닥거려도 그 순간에 내장이 갈라지고

두개골이 파헤쳐져 쓰러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그는 천천히 중인들을 둘러 보았다.

그의 외눈에서 흘러나오는 시선은 아주 독특했다.

그렇게 강렬하지도 않았고, 차갑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그

시선을 받자 중인들은 왠지 모르게 모골이 송연해졌다. 누구도

몸을 움직이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둘러보다가 엽동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엽동은 더욱 더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그의 오른손이 서서히 쳐들려져 엽동을 가리켰다. 엽동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멍하니 그의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손은 그물망사로 된 장갑을 끼고 있는 것 같았다.

한참을 본 후에야 엽동은 그것이 장갑을 낀 것이 아니라 크고

작은 무수한 칼날에 그어진 상처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야말로 손톱끝부터 손목까지 온통 상처로 뒤덮혀 있었다.

확인해 보지는 않았지만 엽동은 그의 반대쪽 손도 그것과

마찬가지일거라고 생각했다.

그의 가운데 손가락이 쭉 펴지더니 반쯤 구부러지며 나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리 와."

그 음성은 마치 고목나무를 삽으로 긁는 듯 거칠고 탁하게

갈라져 있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듣는 사람의 귀에는 아주

똑똑하게 들렸다.

엽동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일으켰다.

그는 입도 벙긋 못하고 자석에 끌려가는 쇳조각처럼 검은

안대의 괴인을 향해 비실비실 걸어갔다.

검은 안대의 괴인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검은 안대의 괴인이 엽동을 데리고 주루를 벗어나려 할때 문득

중인들은 정신이 들었다.

그들중 가장 빠르게 행동한 사람은 이새붕이었다.

이새붕은 왜 자신이 방금전에 그토록 멍한 상태에

빠져있었는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그는 이대로 생면부지의 괴인이 홍초혜 엽동을 데리고 가는

것을 지켜볼 수 없다는 생각에 버럭 소리를 지르며 검은 안대의

괴인앞을 가로막았다.

"넌 대체 누구냐?"

그것이 북만주 일대를 공포에 떨게 했던 낭심수사 이새붕의

마지막 유언이 될 줄은 아무도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검은 안대의 괴인은 고개를 번쩍 쳐들어 자신의 앞으로

가로막은 이새붕을 바라보았다.

이새붕은 괴인의 몸이 한 차례 흔들린다고 느꼈다.

쾅!

순간 굉음과 함께 그의 몸은 그대로 십 여장 밖으로 날아갔다.

비명소리도 없었다.

이새붕의 몸은 주루를 완전히 가로질러 반대쪽 벽을 뚫고

밖으로 나가 떨어지고 말았다.

콰당!

반대쪽 벽이 휑하니 뚫린 가운데 길밖으로 나뒹굴어진

이새붕의 몸은 한 줌의 핏덩이에 지나지 않았다.

중인들은 직접 눈으로 보고도 눈앞에 벌어진 상황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이새붕이 누구인가?

북만주의 패자(覇者)인 대복보의 수석총관일 뿐 아니라 우는

아이도 울음을 그친다는 무시무시한 고수가 아닌가? 그 이새붕이

어찌된 영문인지도 모른채 하나의 피떡이 되어 날아가 버린

것이다.

한 줄기 경악과 공포의 분위기가 장내를 무겁게 짓눌렀다.

중인들이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검은 안대의 괴인은

어느사이엔가 사라져 버린 후였다. 그들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들처럼 서로의 얼굴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었다.

엽동이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괴인의 뒤를 맥없이

따라갔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자신들이 방금 강호무림 역사상 가장 무서운

살성(煞星)을 보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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