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장 그 는 갔 습 니 다
1
"손의 임자는 아직 살아 있다. 그를 살리고 싶으면
노가살수문의 식솔들 전원을 데리고 오늘밤 삼경(三更)까지
적석평(赤石坪)으로 와라. 단 한 명이라도 오지 않는다면 그는
죽을 것이다."
임빙은 무표정한 얼굴로 이렇게 내뱉었다.
두 형제는 그가 한 말은 들리지도 않은 것 같았다. 심지어는
임빙이 유유히 밖으로 사라질 때도 그를 막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들의 두 눈과 신경은 오직 상자속의 손에 고정되어 있었다.
손!
너무도 익숙한 손.
이 손은 어린 시절 그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손이었다.
잠을 자지 못하고 보챌때면 그들의 뺨을 어루만지던 손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잘못을 했을때는 그들을 때려주던
손이기도했다.
그 손의 마디마디, 손금 하나하나에 추억이 담기지 않은
부분이 없었다.
두툼한 가운데 손가락에 끼여진 누렇고 볼품없는 금가락지는
돌아가신 어머니가 남기신 유일한 물건이라고 했다. 가끔 그
반지를 빙빙 돌릴때 아버지의 두 눈은 유달리 깊게 가라앉고는
했었다.
이제 아버지는 두 번 다시 그 금가락지를 돌릴 수 없을
것이다.
이상하게도 눈물은 흘러내리지 않았다.
대신 노독행은 풀어 놓았던 단도집을 다시 허리에 둘러 맸다.
벗어 놓았던 가죽붕대도 다시 양쪽 팔목에 단단히 감았고,
각반을 매었다.
그리고 한쪽에 세워 놓았던 죽창을 움켜 잡았다.
그가 몸을 돌렸을 때 하나의 손이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안된다. 독행아."
노독행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앞으로 걸어나갈 뿐이었다.
그의 어깨를 붙잡았던 손이 더욱 바싹 다가들며 그의 몸을
부둥켜 안았다.
"가면 안된다."
형은 억지로 그의 몸을 돌렸다.
"나를 봐라."
노독행은 고개를 들어 형을 쳐다 보았다.
형의 얼굴에는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니,
그것은 눈물이 아니었다.
눈꼬리가 양쪽으로 찢겨져 가느다란 핏줄기가 흘러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형은 그런 채로 노독행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
"아직은 가면 안돼. 그건 그들이 바라는거야."
형의 얼굴은 피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는데도 형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형은 목소리를 떨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이 지금 제일 두려워 하는 것은 우리다. 우리가 살아남아
복수할 것을 제일 두려워 할거야. 그런데 이대로 그들에게
달려간다면 그들의 걱정거리를 해소시켜주는 일이 될거야."
노독행은 여전히 아무 말없이 우뚝 서 있었다.
형은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는 먼저 계획을 세워야 돼. 절대로 성급한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
성급한 행동?
글쎄...이게 성급한 행동일까?
노독행은 이성(理性)보다는 본능(本能)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그의 본능은 지금 복수를 하라고 외치고 있다.
노독행의 눈동자는 잔뜩 핏발이 깔려 있어 보기에 한 마리의
부상을 입은 야수와 같았다.
형은 그의 몸을 있는 힘껏 부둥켜 안았다.
"네가 죽는다면 아버지의 복수는 영원히 할 수 없게 된다."
노독행의 관자놀이에 푸른 힘줄이 팽팽하게 솟아났다. 그의
몸이 세차게 떨리며 입가로는 가느다란 실핏줄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당한만큼 갚아준다! 그렇지 않고서는 살아있는 의미가 없지
않겠는가?
그는 이를 악다물며 형을 밀치고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 순간 형은 손을 뻗어 그의 혈도를 짚었다.
노독행이 깨어났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형의
얼굴이었다.
형의 얼굴은 초췌해 있었으나 그를 보자 입가에 엷은 미소를
떠올렸다.
"깨어났구나."
형의 음성은 지치고 피곤해 보였다.
노독행은 아직도 속에서 기혈(氣血)이 들끓어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가 일어나려고 바둥거리자 형은 그의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억지로 일어날 필요는 없다. 가만히 누워서 내 이야기를
듣거라."
노독행은 일어서기를 포기하고 침상에 길게 누웠다.
형의 눈가에 어딘지 쓸쓸한 기색이 떠올랐다.
"네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 나도 네
생각을 무조건 반대하려는건 아니다. 나도 역시 너와 똑같은
행동을 하고 싶다."
노독행은 묵묵히 허공을 올려다 보았다.
형은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침울하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그러나 너는 지금은 절대 갈 수 없다. 난 너를 무덤으로 보낼
수는 없다."
형은 속삭이듯 말했다.
"죽은 자는 복수를 할 수 없지. 하지만 살아 있는한 언제고
반드시 복수를 할 수 있다. 우선은 살아남는게 중요해."
노독행의 몸속에 끓어오르던 기혈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아마 형이 옳을지 모른다.
아니,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형은 어떤 상황하에서도 냉정을 잃은 적이 없었다. 냉철한
이성만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게 형과 노독행의 가장 큰 차이점이었다.
"임빙이 왔다는 것은 그 자들도 이미 와 있다는 뜻이다.
그들은 틀림없이 이 근처를 에워싼 채 우리들이 뛰쳐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대로 나간다면 그건 화약을 지고
불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
"그들은 아마도 아직 아버지를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야지만 우리들을 오늘 밤 적석평으로 불러낼 수 있기
때문이지."
처음으로 노독행은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그곳에 가면 우린 모두 죽을 겁니다."
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지만 가지 않을 수도 없다. 우리가 만약 가지
않는다면 그들은 정말로 아버지를 살해할 것이다."
물론 그럴 수는 없다.
아버지를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설사 죽는 한이 있어도
아버지를 내버려두고 도망갈 수는 없다.
가도 죽고 가지 않아도 죽는다!
과연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형은 침착한 음성으로 말을 계속했다.
"그들이 이런 수를 쓰는 것은 우리가 두렵기 때문이다. 우리중
하나라도 살아남아서 복수를 할 가능성을 없애려는 것이지. 풀을
벨 때 뿌리까지 뽑아 두 번 다시 자라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형의 눈에는 이상한 광채가 번쩍거리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 중 한 사람은 반드시 살아 남아야 한다."
노독행은 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잘라 말했다.
"제가 적석평으로 가겠습니다. 형님은 이곳에 계십시오."
형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그렇지 않다."
형은 노독행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복수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강인한 정신력과 처절한 결심이 필요하다. 그리고 어떠한 위험도
헤쳐나갈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어림도
없지."
"......."
"우리 둘 중에서 아버님을 보필하고 세가의 식솔들을 잘
다스려서 집안을 융성시킬 수 있는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노독행은 주저없이 대답했다.
"형님입니다."
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렇다면 순간의 굴욕을 참고 어떠한
어려움이라도 뚫고 나가 마침내 복수를 성취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노독행은 대답할 수가 없었다.
형은 느릿하나 진중(眞重)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누가 그 일에 더 적합한지는 너도 알고 나도 안다. 복수의
길은 너무도 고되고 어렵다. 나는 그런 일에는 자신이 없다.
하지만 너라면..."
형은 노독행을 보면서 웃었다.
"너라면 가능할 것이다. 너라면 안심하고 맡길 수 있지."
"형님...."
형은 노독행의 손을 힘주어 움켜 잡았다.
"독행아. 나는 아버님에게로 가겠다. 너는 살아 남아서 복수를
해다오."
"......."
노독행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형의 말이 옳았다.
형은 언제나 옳았다. 노독행도 그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가 어찌 형을 두고 갈 수가 있단 말인가?
그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형님... 같이 갑시다."
형은 고개를 저었다.
"자식된 도리로서 아버님의 죽음을 보고 피할 수는 없다. 또
내가 같이 간다면 네게는 짐이 될 뿐이다. 나는 나대로의 길이
있고 너는 너대로의 길이 있는 것이다."
형은 노독행의 눈을 빤히 들여다 보았다.
노독행은 눈을 부릅뜨고 형을 올려다보았다.
이상하게도 형의 눈은 붉게 충혈되었다. 다시 자세히 보니
그것은 형의 눈에 비친 자신의 눈동자였다.
눈물따위는 흘리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형을 말리겠다는 생각도 없다.
다만 마음속으로 부르짖을 뿐이었다.
나는 살아날테다!
살아서 반드시 이 복수를 하고야 말테다!
두 형제는 서로의 눈을 하염없이 들여다 보고 있었다.
한참 후, 노독행은 간신히 소리를 죽여 입을 열었다.
"적석평으로 갈때...저것을 가지고 가십시오."
노독행은 백왕가죽으로 된 의자를 가리켰다.
"아버님을 의자에 앉혀 주세요."
형은 그 의자를 돌아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눈이 부신 듯 형은 몇 번이나 눈을 깜박거렸다.
오늘은 아버님의 마흔 다섯 번째 생일날이었다.
* * *
"후원의 뒷쪽을 돌아가면 하나의 절벽이 나온다. 절벽밑에
뚫어 놓은 통로를 지나면 이곳에서 십 리쯤 떨어진
귀면암(鬼面岩)부근으로 나갈 수 있다."
형은 지도의 한쪽을 가리켰다.
"귀면암에서 금계령(金鷄嶺)을 지나면 이곳을 벗어나게 되지.
그 다음에는 길이 두 갈래인데 남쪽으로 가면 항산(恒山)이
나오고 북쪽은 관외(關外)다. 너는 어느 쪽으로 가겠느냐?"
노독행은 주저없이 말했다.
"북쪽."
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게 좋을거라고 생각했다. 북쪽은 네가 사냥을 자주
다녔기 때문에 그들의 추격을 뿌리치기 수월할 것이다."
형은 노독행에게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너의 목적은 절대로 그들과 싸우는 것이 아니다. 우선은
탈출하는게 급선무다. 그 점을 명심해라."
노독행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형은 노독행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그의 눈과 코, 입 등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으려는 듯 자세히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노독행은 자신을 바라보는 형의 눈길이 영원히 지속되었으면
하고 바랬다.
형은 한참동안이나 그의 얼굴을 주시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가 화를 내면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한다. 너도 알고
있겠지?"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 자들은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형의 음성은 침침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 자들은 화를 내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 자들이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것은 네가 화를 내지 않는 것이다."
".......!"
"내 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네가 진정으로 복수를 하고
싶다면 어떤 일이 있어도 냉정을 잃지 말아야 한다.
냉정이야말로 사람을 가장 무섭게 만드는 것이다."
"......"
"내 말을 잊지 않겠느냐?"
노독행은 이를 악물었다.
깊은 숨을 들이내쉰 다음 그는 한 자 한 자 천천히 내뱉었다.
"잊지...않겠습니다."
형은 언제나처럼 담담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말없이 노독행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 * *
형은 하얀 소복(素服)으로 갈아 입었다.
형 뿐만 아니라 세가의 일흔 다섯 명의 식구 전원이 하얀
백의를 입었다.
이경 무렵.
노독행을 제외한 일흔 여섯 명의 노가살수문 식솔들은 백의를
입고 백색 두건을 한 채 대청앞에 나란히 섰다.
노독행은 대청의 한쪽에 우두커니 서서 그들을 내려다 보았다.
그들중에는 그의 삼촌도 있었고, 사촌 형도, 외숙모도 있었다.
그를 좋게 생각한 사람도, 그에게 별로 좋은 생각을 갖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모두 노독행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를 좋아한 사람이건 싫어한 사람이건, 그들의 눈은 똑같은
말을 외치고 있었다.
- 부탁한다!
아마 노독행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 시선들을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다. 이 시선들 속에 담긴 무게를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노독행은 말없이 서 있었다.
그는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고, 표정 또한 변함이 없었다.
어찌보면 하나의 감정없는 목상(木像)과도 같았다.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형이었다.
형은 하나의 그릇을 들고 있었다. 형은 품속에서 작은 칼을
하나 꺼내어 자신의 왼쪽 새끼손가락을 베었다.
피가 나오자 그릇에 떨어 뜨렸다.
똑...똑...
떨어지는 몇 방울의 선열한 핏물들...
형의 옆에 서 있는 사람이 형의 앞으로 다가와 칼을 건네
받았다.
그는 노독행의 막내삼촌이었다. 막내삼촌은 노독행을 힐끗
보더니 주저없이 자신의 왼쪽 새끼손가락을 베었다. 그런다음
형과 마찬가지로 그릇속에 자신의 피를 담았다.
세 번째로 나선 사람은 사촌 당숙이었다.
네 번째로 새끼 손가락을 자른 사람은 노독행을 친아들처럼
귀여워해주던 둘째 숙모였고, 다섯 번째 인물은 노독행과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던 오촌 형이었다.
그리고 여섯 번째는....
노독행은 고개를 돌려 허공을 올려다 보았다.
검은 하늘에 박혀있는 수많은 별들이 한 눈에 들어왔다.
그 별들 하나 하나가 자신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별들의
숫자는 일흔 여섯개였다.
일흔 여섯 개의 별...
일흔 여섯 개의 목숨....
그들은 모두 자신을 향해 말하고 있다.
- 노독행이라면 안심할 수 있다!
- 그라면 안심하고 죽을 수 있다! 그가 우리의 복수를 해
줄테니까...!
이제 그는 혼자의 몸이 아니었다.
그가 어디에 가든, 무슨 일을 하든 일흔 여섯 명의 혼백이
그와 함께 할 것이다.
죽음조차 마음대로 할 수는 없다.
복수를 하는 그 날까지는 그는 절대로 죽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아무 소리도 없었다.
누구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그저 차례를 기다리고 서
있다가 노독행을 한 번 쳐다보고는 주저없이 자신들의 손가락을
베어 핏방울을 그릇에 떨어뜨릴 뿐이었다.
그릇은 금새 핏물로 가득찼다.
일흔 여섯 번째로 세가의 오랜 충복이었던 하노이(何老二)가
자신의 피를 떨어뜨리자 형은 그 그릇을 들고 노독행에게로
다가왔다.
그때까지도 노독행은 허공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형은 말없이 그릇을 내밀었다.
노독행은 천천히 고개를 떨구어 형을 바라보았다. 형은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을 보자 노독행은 하마터면 눈물을 떨어뜨릴 뻔 했다.
그는 급히 형의 뒤로 시선을 돌렸다.
일흔 다섯 명의 얼굴이 두 눈에 가득 들어왔다. 노독행은 그
얼굴들을 하나하나씩 차례로 마주 보았다.
마지막으로 그의 시선은 다시 형에게로 돌아왔다.
한동안 두 형제는 서로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노독행은 형의 손에서 그릇을 받아들고 단숨에
그안에 든 핏물을 들이켰다.
피를 모두 마시자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몸을 돌려
어둠속으로 달려갔다. 달려가는 그의 손에는 하나의 장미꽃이
쥐어져 있었다.
피처럼 붉은 장미 꽃 하나...
은은한 향기가 풍기는 장미꽃 하나가...
노독행은 그 장미꽃을 보면서 형의 마지막 말을 되새겼다.
-내 무덤에 이 장미꽃을 꽂아 주어라.
* * *
임빙은 어둠속에 잠겨 있는 노가살수문을 바라보았다.
삼경 무렵.
노가살수문의 정문이 열리며 하얀 소복을 입은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임빙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은 정말로 싸우기를 포기했군. 총호법(總護法)의 지략은
정말 무섭구나.'
그는 노가살수문을 빠져나오는 사람들의 숫자를 헤아리기
시작했다.
'하나...둘....셋....열둘....스물 다섯....'
소복을 입은 무리들은 끊임없이 나오는 것 같았다.
그들은 아무런 무기도 휴대하지 않고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걸어나오고 있었다. 임빙은 그들의 얼굴이 너무도
평온한 것을 보고 그들이 마치 유람을 나온 사람들처럼
생각되었다.
죽음을 향한 유람....
'예순 일곱...예순 여덟...일흔 넷...일흔 다섯...일흔 여섯!'
막 마지막으로 나온 인물을 세던 임빙의 얼굴이 가볍게
굳어졌다.
'일흔 여섯! 분명히 일흔 일곱 명이어야 할텐데...'
그는 아직 나오지 않은 인물이 있는지 다시 한 번 확인을
했다. 하나 일흔 여섯 명을 끝으로 더 이상 나오는 사람은
없었다.
임빙의 눈빛이 부르르 떨렸다.
'한 놈이 도망쳤군. 틀림없이 그 독종(毒種)중의 독종이라는
노독행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어둠속에서 허공을 올려다 보며 잔인한 웃음을 떠올렸다.
'네 놈은 절대로 살아서 이곳을 벗어나지 못한다. 설사 날개가
달렸다 해도 네 놈은 우리의 천라지망(天羅地網)을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다. 흐흐...'
그는 괴이한 미소를 흘리다가 어둠속으로 사라져갔다.
휘잉!
한줄기 밤바람이 텅빈 허공을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갔다.
2
"독행은?"
"그는 갔습니다."
그 순간 노일환(路一環)은 희미하게 웃었다.
노군행은 아버지의 미소짓는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의 두 팔과 다리는 이미 잘려진 채 였다.
아랫배에는 시뻘건 구멍이 뻥 뚫려 있었고, 가슴은 쩌억
갈라진 채 금시라도 내장이 흘러나올 것만 같았다. 두 귀도
잘려졌고, 양쪽 눈알은 움푹 파여져 검은 구멍만이 공허하게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웃고 있었다.
웃으면서 말했다.
"이제 그 자들은 두 번 다시 두 발을 뻗고 잠을 자지 못할
것이다."
노군행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눈이 조금 붉게 충혈된 것 외에는 그는 조금도 냉정을 잃지
않은 것 같았다.
그는 아버지에게로 다가가 그의 잘려진 몸뚱아리를 부둥켜
안아서 의자에 앉혔다.
백왕의 가죽이 덮힌 의자....
새하얀 백왕의 가죽이 아버지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핏물로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생신을 축하드립니다. 아버님..."
노군행은 자신의 목소리가 떨려나오지 않기를 바랬다.
아버지는 보이지 않는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의자가 정말 편안하군. 사실 그동안 의자가 조금 작아
답답했었다."
"그러실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제는 편하게 쉬십시오."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정말 편안한 자세로 등을 의자에
기댄 채 비스듬히 몸을 눕혔다.
구멍뚫린 두 눈에서 흘러나오는 선혈이 아버지의 얼굴을 온통
시뻘겋게 물들였다. 그 붉게 물든 아버지의 얼굴을 보면서
노군행은 가슴 깊숙한 곳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아버지의 나이는 올해로 마흔 다섯.
대대로 이곳 철각령에 뿌리를 내려온 노가살수문의 열 두번째
후손이며 열 아홉살에 무림에 발을 내딛었다. 그로부터 이십
여년동안 아버지는 수 백번의 크고 작은 싸움에서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고 강북에서 세 손가락안에 드는 절정의
도객(刀客)이 되었다.
'염라도(閻羅刀) 노일환'이라고 하면 적어도
화북(華北)일대에서는 지옥의 염라대왕보다도 무서운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그토록 강하고 굳건했던 아버지의 이런 모습을 보게
되리라고는 전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버지를 이렇게 만든 것은 당연히 천상회일 것이다.
그들이 대체 왜 이런 짓을 했단 말인가?
당대의 천상회주인 사마일련과 아버지는 절친한 사이였다.
그와 사마표향의 혼사가 거론된 것도 그때문이었다.
두 사람의 친분관계는 이미 십 여년전부터 지속되었으며 두
사람의 성격상 상대의 신의(信義)를 저버리는 일은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런 일이 벌어졌다.
이것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노군행은 숨을 깊숙이 들이마셨다. 그런다음 천천히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 보았다.
세가의 일흔 다섯 명은 그들의 주위를 둘러싼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리고 어둠속 저편...
희끄레한 수림속에서 번뜩이는 수 백개의 눈동자가 있었다.
그들은 세가의 인물들을 두 겹, 세 겹으로 에워싼 채 조금씩
다가서고 있었다. 그에 따라 일찌기 보지 못했던 가공할
살기들이 주위를 질식시킬 듯 눌러오고 있었다.
그들의 수는 노가살수문의 전체 인원보다 다섯 배는 많아
보였다.
어둠속에서 번쩍거리는 그들의 안광으로 보아 그들 하나하나는
일기당천(一騎當千)의 고수들임이 분명했다.
그런데도 노군행은 조금도 두렵거나 움츠려드는 마음이
없었다.
오히려 그의 마음은 한없이 평온하면서도 고요했다.
그는 오늘 이곳에서 죽을 것이다. 아니, 노가살수문 전체가
오늘로서 강호무림에서는 영원히 사라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언제고 반드시 한 사람이 이 혈채(血債)를 갚아줄 것이다.
동생의 얼굴을 뇌리에 떠올리자 노군행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죽음이 두려운 것은 아니다. 진정으로 두려운 것은 아무 것도
해보지 못하고 죽는다는 것이다.
하나 노독행이 있는 한 그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그때였다.
그들을 향해 다가오던 천상회의 무리들중에서 한 사람이 불쑥
앞으로 나섰다. 휘엉청한 월광(月光)아래 그 자의 얼굴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순간 노군행의 안색이 홱 변했다.
"다...당신은....?"
생전 떨릴 줄 몰랐던 그의 목소리가 자신도 모르게 떨려
나왔다.
달빛 아래 나타난 인물은 노군행을 바라보며 차갑게 웃었다.
"흐흐...놀랐나? 설마 이곳에서 나를 보게 될 줄은 몰랐겠지."
그는 훤칠한 키에 청삼을 걸친 준수한 용모의 중년인이었다.
그런데 청삼중년인의 신형은 어딘지 모르게 이상해 보였다.
안광이 날카로운 사람이라면 청삼중년인의 왼쪽 팔이 다른
사람과는 달리 움직여지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청삼중년인을 보는 노군행의 얼굴이 여러 차례 변했다.
청삼중년인은 입가에 싸늘한 미소를 띄운 채 느릿느릿 그의
앞으로 걸어왔다.
"지난 팔 년동안 이런 날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드디어 당시의 원한을 설욕할 수 있게 되었구나."
노군행의 뒤에서 분노에 찬 음성이 흘러나왔다.
"조양홍(曹陽虹)! 이게 무슨 짓인가? 자네가 어찌 그런
말을...."
버럭 소리치며 앞으로 나오는 인물은 막내삼촌이었다.
막내삼촌은 청삼중년인을 바라보며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경악어린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자네가 설마 아직도 그때의 일을 가슴에 묻어 두고 있었단
말인가?"
조양홍은 그를 보며 냉소를 날렸다.
"흥. 쉽게 말하지 마라, 진환(進環). 자기가 직접 당해보지
않고서는 당한 사람의 고통을 느낄 수 없는 법이다."
막내삼촌은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 표정이었다.
"하지만...그때 그 아이는 겨우 아홉 살이었다. 아홉 살짜리
소년이 한 일을 그토록 오랫동안이나 벼르고 있었다니...내가
너를 잘못 보았구나."
조양홍의 눈가에 흉흉한 빛이 감돌았다.
"겨우라고? 자, 이걸 봐라! 이걸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는지..."
조양홍은 이를 부드득갈며 자신의 왼쪽 소매를 잡아 뜯었다.
부욱!
옷이 찢겨지며 그의 왼쪽 팔이 거의 어깨까지 드러났다.
"그 놈이 내게 한 짓을 봐라. 이 팔을 보란 말이야. 난
그놈때문에 병신이 되었다. 평생 병신이란 소릴 들으면서
살아가게 되었단 말이다!"
그의 팔꿈치 중앙은 마치 뱀이 지나간 듯 끔찍한 흉터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조양홍은 그 흉터를 가리키며
소리질렀다.
"그 악마같은 놈이 내게 한 짓을 보라구...너라면 이걸 잊을
수 있겠느냐? 섬서(陝西)에서 제일가는 기재(奇才)로 불리우며
장래가 촉망받던 내가 불구자가 되어 남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신세가 되었는데 그 처절한 원한을 잊을 수 있겠느냐?"
조양홍의 눈에서는 줄기줄기 섬뜩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난 그 놈을 잡아 갈기갈기 찢어 죽이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 그 놈을 잡아서 그 뼈를 가루로 만들고 살을
짓이겨서 내가 당한 고통을 수 백배로 갚아 주고야 말테다!"
막내삼촌은 우두커니 조양홍의 드러난 팔을 보고 있었다.
몇 년전까지만 해도 막내삼촌과 조양홍은 세상에서 둘도 없는
친한 사이였다.
노가살수문의 젊은 고수인 전궁도(電穹刀) 노진환(路進環)과
섬서성에서 첫 손가락에 꼽히는 후기지수인 창응검객(蒼鷹劍客)
조양홍은 누가 보기에도 서로 잘 어울리는 단짝이었다.
적어도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그 일...
노진환은 아직도 팔 년전의 그날에 벌어진 일을 어제 일처럼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 이런 망나니같은 꼬마 놈...!
무심결에 내뱉은 한 마듸가 조양홍의 인생에 지울 수 없는
낙인(烙印)을 찍어 주었다.
아홉살짜리 꼬마는 힐끗 그를 올려보다가 말없이 밖으로
나갔다.
조양홍은 껄껄 웃었다.
- 하하... 그 놈 눈빛 한 번 매섭군.
그는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자신을 올려보던 어린 소년의
쏘아보는 듯한 눈빛에 순간적으로 움찔했으나 곧 그 일을 잊고
말았다. 그래서 그 꼬마가 잠시 후 자신의 옆으로 슬금슬금
다가왔을 때도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
곧이어 왼쪽 팔꿈치 안쪽에 엄청난 통증을 느끼고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있는 힘껏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 아악!
그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자신의 팔꿈치 안쪽에 날이 시퍼렇게
선 고기써는 칼이 박혀 있는 끔찍한 광경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들고 있는 무서운 눈빛의 꼬마 하나...
조양홍이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자신의 인생이 변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피는 그렇게 많이 흘러내리지 않았다. 다만 팔의 신경이
완전히 끊어졌을 뿐이다.
조양홍은 자신이 두 번 다시 왼팔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되자 반 광란상태에 빠졌다. 그는 자신을 불구로 만든 그
어린 꼬마놈을 당장에라도 때려 죽이고 싶었으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 꼬마는 노가살수문의 문주인 염라도 노일환의
둘째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너희들은 그 놈이 단순히 문주의 아들이라고 해서
아무런 징계도 가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그 순간 나는
결심했지. 언제고 반드시 그 꼬마놈과 너희들에게 내가 당한
고통을 몇 배로 되돌려 주겠다고."
조양홍은 두 눈에 악독한 광망을 뿌리며 노가살수문의
고수들을 둘러 보았다.
"과연 내 짐작대로 노독행, 그 독종놈은 혼자서 내뺐구나.
틀림없이 후원뒤쪽에 있는 암도로 도망쳤겠지.
하지만...흐흐..."
노진환과 노군행을 비롯한 노가살수문의 모든 고수들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노진환은 자신도 모르게 음성이 떨려 나왔다.
"아....암도라니...그게 무슨 말이냐?"
조양홍의 입가에 냉랭한 미소가 떠올랐다.
"흐흐...내가 모를줄 알았느냐? 너희들은 그 독종놈이 지금쯤
암도를 빠져나가 무사히 도망쳤다고 생각했겠지만 그건 천만의
말씀이다. 아마 그 놈은 지금 차라리 죽는게 낫다고 여길만큼
혹독한 꼴을 당하고 있을 것이다."
노군행의 신형이 경련을 일으키듯 크게 흔들렸다.
노가살수문 후원의 뒷쪽 절벽에 뚫려 있는 암도(暗道)는
은밀하기 그지없어 노가살수문에서도 몇몇 수뇌급 인물들외에는
아는 사람이 없었다.
노군행이 노독행에 대해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은 것도 그
암도를 통해 탈출한다면 이들의 마수(魔手)에서 그리 어렵지
않게 빠져나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이 이미 암도의 존재를 알고 있다면...?
노독행은 그야말로 화약을 지고 불속으로 뛰어든 나방 신세가
되는 것이 아닌가?
만에 하나 노독행이 그들의 손에 쓰러지게 된다면 자신들의
죽음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 순간 노군행은 분노에 찬 고함을 지르며 조양홍을 향해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