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보건곤-1화 (2/61)

제 1 장          자 네 는   누 군 가

1

그 해의 장백산(長白山)은 유달리 추웠다.

*              *               *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기울어 가고 있을 무렵 그는 그

발자국을 발견했다.

'그 놈이다!'

발자국을 보자마자 그는 그것이 자기가 찾고있는 바로

그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눈덮힌 야산(野山)의 커다란 암반위에 선명히 찍혀 있는

발자국은 크기가 거의 한 자에 육박하는 엄청난 것이었다. 그는

아직까지 이렇게 큰 짐승의 발자국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발자국 주위를 조심스레 살피다가 암반의 한쪽 구석에 하나의

작은 털을 집어 들었다.

그것은 노린내가 나는 하얀 털이었다.

'이게 바로 백왕(白王)이구나!'

그는 오 일만에 발견한 백왕의 발자국을 보며 깊은 심호흡을

했다.

백왕은 장백산(長白山)일대에서는 거의 전설처럼 알려진

거대한 호랑이였다. 전신이 잡털 한 오라기 섞이지 않은 순백색

털로 덮혀 있고 그 크기가 다른 호랑이보다 두 배는 더 커서 이

일대의 나뭇꾼이나 사냥꾼들에게는 외경(畏敬)의 대상이 된지

오래였다.

백왕의 발자국을 발견하자 그는 자신의 왼팔에 감긴

가죽붕대가 단단하게 매어져 있는지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그 가죽붕대는 물소의 가죽을 한 달동안 철심목(鐵心木)의

수액(樹液)에 담군 다음 은사(銀絲)를 꼼꼼히 박은 것으로,

질기고 단단하기가 가히 천하제일이었다.

아무리 강한 호랑이의 이빨이라 해도 이 가죽붕대를 뚫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 가죽붕대와 손에 든 죽창(竹槍) 하나, 그리고

옆구리에 차고 있는 열 다섯 자루의 단도가 그의 사냥도구

전부였다.

그는 눈을 빛내며 백왕의 발자국을 따라 조심스럽게 앞으로

전진해갔다.

휘이잉...!

장백산의 매서운 산바람이 한 차례 그의 몸을 휩쓸고

지나갔다. 뼈골이 시릴 정도로 차가운 바람이었으나, 그의 두

눈은 오히려 더욱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는 바람을 좋아했다. 바람소리는 다른 무엇보다도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사냥감은 항상 바람위에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몸이 바람을 등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발자국을

따라갔다. 바람을 등지게 되면 자신의 냄새가 바람을 타고

사냥감에게로 전달된다.

한동안 멈췄던 눈이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장백산은 유달리 겨울이 일찍 찾아온다. 중원(中原)이라면

단풍이 붉게 물든 가을인데도 이곳은 매서운 한풍(寒風)과

눈보라가 몰아치는 계절이었다.

날이 저물어 감에 따라 눈발은 점점 거세어 질 것이다. 그러면

발자국 또한 사라져 버린다. 이런 날에 산에서 밤을 지새운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는 산을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지난 오 일동안 그는 오직 백왕의 발자국을 찾기 위해서

드넓은 장백산의 깊숙한 곳을 샅샅이 뒤지고 다녔다. 이제 그

발자국을 발견한 이상 그는 절대로 추적을 포기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백왕의 발자국은 장백산에서도 가장 험준한

노호령(怒虎嶺)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는 서두르지 않고 신중한 걸음으로 발자국을 따라갔다.

노호령의 계곡은 몹시도 가파랐다. 고개를 들어 보니 어두운

하늘위로 성벽처럼 서 있는 험준한 산령(山嶺)이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끝도 없을 것 같은 고갯마루를 계속 올라가자 멀리

울창한 수림이 나왔다.

노호령의 정상에 올라서자 그의 전신에는 땀이 흐르고 숨이

턱에까지 차 왔다.

눈과 한기(寒氣)로 살갗이 칼에 베인 듯 차갑고 아파왔고

가슴은 터질 듯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그는 쉴 수가 없었다.

백왕의 발자국이 점차로 선명해 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백왕의

발자국은 때때로 끊어졌는데, 그것은 백왕이 숲속안으로 들어가

먹이를 찾고 있기 때문인 것이 분명했다.

그는 백왕의 발자국을 따라 노호령 너머의 수림을 향해

다가가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이곳의 지형은 조금 색달랐다. 좌측에는 울창한 수림이 전개해

있었고 우측에는 험한 바위언덕이 펼쳐져 있었다.

그의 눈이 자신도 모르게 살짝 찌푸려졌다.

이런 지형은 습격을 하기 좋은 곳이었다. 만일 백왕이 그를

알아차리고 숨어서 기다리고 있다면 이 지형에서는 도저히 싸울

수가 없었다.

백왕의 발자국은 수림과 바위언덕의 저 너머편에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하지만 먼 곳에 발자국이 보인다고 해서 안심할

수는 없었다. 백왕같이 노련한 호랑이라면 커다랗게 우회해서

최상의 장소에서 습격해 올 가능성이 있었다.

이런 지형을 만나게 되면 왠만한 사냥꾼이라면 구토가 날

정도로 공포에 떨곤 한다. 추적을 중지하자니 지금까지의 노력이

아깝고, 계속하자니 만약에 있을 지도 모를 사냥감의 역습이

두려운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상하게도 오히려 가슴에 묘한 흥분이 일어났다.

그것은 투지(鬪志)라도 해도 좋았고, 위험을  는 인간 본연의

야성(野性)이라고 해도 좋았다. 아뭏든 이런 기분이 들때면 그는

사냥감을 잡아 배를 갈라 그 뜨거운 피의 내음을 한껏 맡고 싶은

욕망이 치밀어 오르곤 했다.

그는 천천히 수림과 바위언덕 사이로 발을 들여 놓았다.

호랑이의 동작은 인간보다 몇 배나 더 빠르다.

갑자기 독특한 짐승의 냄새가 나고 거대한 그림자가 언뜻

보인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의 머리는 날아갈 것이다. 아니면

목이 물리거나 배의 살점이 도려져 자기의 내장이 쏟아지는 것을

보게 될 지도 몰랐다.

그는 두 눈을 번뜩인 채 온 몸의 신경을 집중시키고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그곳의 길이는 이십 여장에 불과했지만 그는 무려

이각(二刻)이나 허비해서야 그곳을 통과할 수 있었다.

수림과 바위언덕의 경계선을 지났을 때 그의 몸은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머리카락이 내리는 눈과 땀에 젖어 찰싹

달라붙은 채 바싹바싹하게 얼음조각을 만들어냈다.

수림을 지나기 직전, 그는 멀지 않은 곳에 쓰러진 거대한

나무위에 생긴 백왕의 발자국을 발견했다.

윤곽이 선명하여 발톱자국까지도 생생하게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것은 스치기만 해도 얼굴이나 배의 살점을 손쉽게

도려낼 것 같은 무시무시한 발톱이었다.

휘이이이....

바람은 더욱 차갑고 강해졌다.

얼굴 전체가 아팠다.

그는 장갑을 낀 채 죽창을 움켜쥔 양 손의 손가락을 끊임없이

움직였다. 움직임을 멈추면 잠깐사이에 손가락의 감각을 잃게

된다.

몸도 마찬가지였다. 조금이라도 쉬게 되면 흐르는 땀이 식어

이내 얼음으로 변해 버린다. 피부가 얼음으로 뒤덮히게 되면

그것으로 인간의 생명은 끝나는 것이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빨리 움직였다가는 체력이 감당해 내지

못한다.

그는 그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서두르지도 않고,

그렇다고 걸음을 멈추지도 않은 채 조금씩 조금씩 백왕의

발자국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갑자기 그의 전신이 팽팽한 긴장감에 휩싸여 시위를 당긴

활처럼 예민해졌다. 어디선가 짐승 특유의 느끼한 비린내가

풍겨나왔던 것이다.

그는 죽창을 힘주어 움켜쥔 채 조심스럽게 자신의 십 여장

앞에 있는 커다란 바위를 향해 전진해갔다. 바위에 다가갈수록

비린내가 짙어졌다. 눈덮힌 바위는 크기가 무려 이 장에 달하는

엄청난 것이었다. 백왕은 틀림없이 그 바위의 뒤에 있을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쓰--윽!

갑자기 바위가 불쑥 일어났다.

아니 일어난 것처럼 보였다. 새하얀 바위가 꿈틀거리며 일

장쯤 더 커지더니 그 가운데 두 개의 시뻘건 안광이 폭사되어

나오는 것이었다.

그의 몸이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그대로 굳어졌다.

그것은 바위가 아니었다. 눈덮힌 바위인줄로만 알았던 그것은

바로 거대한 백호랑이였던 것이다.

바로 백왕이었다.

실제로 본 백왕은 소문으로만 듣던 것보다 훨씬 더 거대했다.

그것은 거의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몸통의 길이만도 이 장이 훨씬 넘었고, 키는 거의 서 있는

어른에 육박할 정도였다. 우뚝 선 앞발에 달려있는 발톱은 날이

시퍼렇게 선 갈쿠리를 연상시켰다. 전신에 나 있는 털은 거의

순백색(純白色)에 가까웠는데 시력을 잔뜩 돋구어서야 희미한

얼룩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정도였다.

너무도 크고 또 하얗기 때문에 그는 눈속에 웅크리고 있는

백왕을 바위로 착각했던 것이다.

백왕의 두 눈은 그를 정면으로 응시한 채 고정되어 있었다.

그는 그 눈을 마주보지 않았다. 대신 백왕의 거대한 앞발을

노려보고 있었다.

호랑이는 공격을 할 때 항상 제일 먼저 앞발로 목표를

후려친다. 그 다음에 이빨로 물어뜯고 마지막으로 날카로운

발톱을 사용하여 상대의 숨통을 끊어 놓는 것이다.

그는 오랜동안의 경험으로 호랑이를 사냥할 때는 그 앞발의

공격을 잘 피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집채만큼

거대한 백왕을 지척에 둔 채 양 손으로 죽창을 들고 백왕의

앞발을 쏘아보았다.

크르릉....

백왕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나직하면서도 무시무시한

울음소리를 들었으나 그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그의 신경과

시선은 오직 다섯 개의 날카로운 발톱으로 이루어진 백왕의

오른쪽 앞발에만 집중되어 있을 뿐이었다.

백왕 또한 그를 응시한 채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휘이잉...

바람은 더욱 거세어졌고 눈발 또한 한층 더 기승을 부렸다.

그래도 사람과 짐승은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하반신은 이미 눈속에 파묻힌 채 얼어가고 있었고,

죽창을 든 채 쳐들린 두 팔은 감각이 마비될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하나 그는 여전히 백왕의 앞발을 노려본 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하아...하아...

그의 코에서 뿜어나오는 숨결이 새하얀 김이 되어 허공으로

흩어졌다.

크르릉.....

백왕의 입에서도 뜨거운 김이 뿜어나왔다.

미친 듯이 퍼부어지던 눈발조차 정지한 듯한 어느 한 순간,

부르르...

백왕이 숨을 내쉼에 따라 조금씩 흔들리던 백왕의 앞발이 조금

더 심한 경련을 일으켰다.

그의 눈이 화광처럼 빛났다. 순간,

어허헝!

천지를 진동시킬 듯한 포효성과 함께 백왕의 거대한 몸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그를 향해 돌진해 들어왔다.

쉬아악!

백왕의 앞발이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재빠르게 그의

머리통을 후려쳐왔다. 하나 그때 그의 몸은 어느 새 백왕의 발

아래로 뛰어들고 있었다.

파악!

백왕의 앞발이 아슬아슬하게 그의 머리위를 스치고 지나가며

그의 머리카락이 한 웅큼이나 빠져 바람에 날려갔다. 그 순간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죽창으로 백왕의 오른쪽 앞발을 세차게

찍었다.

콱!

죽창이 백왕의 오른쪽 앞발을 관통하여 그대로 얼어붙은

땅바닥에 박혀 버렸다.

쿠아아아앙!

고통에 찬 백왕의 울부짖음이 고막을 터질 듯 울려퍼졌다.

백왕은 앞발이 죽창에 관통당해 땅에 꽂히자 미친 듯 몸부림을

쳤다. 앞발에서 뿜어나오는 선혈이 그의 상반신을 시뻘겋게

물들였으나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번개같이 몸부림치는

백왕을 향해 바짝 다가들었다.

콰지직!

백왕이 거세게 몸부림을 치자 백왕의 오른쪽 발에 박혀 있던

죽창이 부러져 나갔다. 그 순간 백왕은 시뻘건 입을 벌려 그의

머리통을 물어뜯어왔다.

그는 간신히 왼 팔을 올려 막았다.

콰악!

백왕은 사정없이 그의 왼팔을 물어뜯었다. 철심목의 수액에

절인 가죽붕대를 몇 겹이나 칭칭 감았는데도 백왕의 커다란

이빨은 너무도 간단하게 붕대를 뚫고 들어왔다.

그는 하마터면 그대로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 했다. 백왕의

송곳니 두 개가 그의 피부를 뚫고 왼팔에 깊숙히 박혔던 것이다.

그 고통으로 정신이 아득해 졌으나 그는 주저하지 않고

오른팔로 백왕의 목을 끌어 안으며 등으로 올라탔다. 그 동작은

비호보다도 빠른 것이었다.

백왕은 그의 왼 팔을 문 채 머리를 마구 흔들었다. 그 바람에

그의 왼팔은 금시라도 뜯겨 나갈 듯 너덜너덜 거렸다. 그는

왼팔을 떼어낼 생각은 하지 않고 백왕의 목위로 기어오르며

오히려 왼팔을 더욱 백왕의 입안으로 들이밀었다.

"크흐흥!"

백왕은 거친 숨소리를 뿜어내며 세차게 도리질을 했다.

그의 왼팔은 거의 반이상이 백왕의 목안으로 들어가 손가락이

거의 목젖에 닿을 정도가 되었다.

그는 손가락이 백왕의 목젖에 닿자 있는 힘껏 그 목젖을

움켜쥐었다.

마침내 백왕이 고통을 참지 못하고 거의 반이나 집어삼켰던

그의 왼팔을 뱉어내며 그를 떼어내기 위해 마구 몸부림을 쳤다.

그는 이미 피투성이로 변해 걸레조각처럼 찢겨진 왼팔로

백왕의 목을 끌어안으며 왼쪽 허리춤에서 하나의 짤막한 단도를

꺼내들었다. 단도는 길이가 어른의 손바닥보다 조금 더 컸는데

날이 시퍼렇게 서 있어서 보기만 해도 섬뜩한 것이었다.

백왕은 그를 떼어 내기 위해 왼쪽 발을 휘젓기도 하고 바닥에

몸을 부비기도 했으나 그는 양 손으로 백왕의 털가죽을 바짝

움켜쥔 채 단도를 입에 물고 백왕의 이마쪽으로 다가갔다.

파악!

백왕의 무시무시한 왼발이 아슬아슬하게 그의 등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가 입고 있던 옷이 쫘악 갈라지며 네 개의

발톱자국이 생생하게 새겨졌다.

그래도 그가 떨어지지 않자 백왕은 몸을 뒤틀어 그가 매달린

부분을 땅바닥에 마구 부벼댔다. 그 바람에 그의 몸은 얼음같이

차가운 바닥에 부딪힌 채 여기저기가 찢어지고 깨어져 퉁퉁 부어

올랐다.

하나 그는 필사적으로 두 팔과 두 다리를 움직여 백왕의

머리위로 올라갔다.

마침내 백왕의 머리쪽까지 다가간 그는 입에 문 단도를 양

손으로 움켜쥔 다음 백왕의 양 미간사이를 향해 단도를 있는

힘껏 내리꽂았다.

푹!

꾸아아앙!

단도가 두개골의 갈라진 틈사이에 박히자 백왕의 몸부림은

절정에 달했다. 그는 백왕의 미간에 박힌 단도를 양 손으로

깊숙히 꽂은 채 백왕의 몸에 대롱대롱 매어 달렸다.  거대한

백왕의 목에 매어달린 그의 몸은 금시라도 나가떨어질 듯

위태로워 보였으나 끝내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백왕의 몸놀림이 조금씩 둔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마침내 백왕의 몸이 그대로 힘없이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쿵!

주위사방이 온통 뒤흔들릴 정도로 둔탁한 굉음을 내며 백왕은

눈덮힌 장백산의 대지위에 거대한 몸을 드러 누웠다.

그제서야 그는 백왕의 몸에서 떨어져 바닥에 누운 채 가쁜

숨을 헐떡거렸다.

"헉....헉...."

그의 전신은 얼어붙은 땅바닥에 부딪히고 긁혀서 여기저기가

찢어지고 부어올라 몹시 보기 흉했다. 특히 심한 것은 왼쪽 팔의

상처로, 가죽붕대는 이미 갈가리 찢겨졌고 팔뚝에는 두 개의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어 그곳으로 시뻘건 선혈이 쉬지않고

흘러나오고 있었다.

지금의 그에게는 손가락 하나 까닥거릴 힘조차 남아 있지 않은

듯 했다.

주위는 이미 칠흑같이 어두웠고 눈보라를 동반한 추위는

인간의 몸으로는 도저히 견딜 수 없을 정도였다. 더구나 그의

몸은 흐르는 땀이 식어 이미 얼음덩어리로 변해 있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일각(一刻)도 버티지 못하고 얼어죽고 말

것이 분명했다.

한동안 차가운 눈위에 누운 채 헐떡거리던 그는 간신히 몸을

일으켜 백왕에게 다가갔다. 싸늘하게 식어가는 백왕의 몸은

눈으로 직접 보고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했다.

그는 백왕의 미간에 꽂았던 단도를 뽑아서 백왕의 배쪽으로

다가갔다.

손이 얼어서 좀처럼 단도를 힘껏 움켜쥘 수 없었지만 이를

악물고 단도를 백왕의 배로 가져갔다. 손으로 더듬어서

뱃가죽에서 가장 부드러운 부위를 확인하자 단도로 그 부위를

갈랐다.

화악....

뜨거운 선혈이 뿜어나오며 백왕의 내장이 쏟아져 나왔다.

백왕의 뱃속은 손을 델 수 없을 정도로 뜨거웠으나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내장을 갈라나갔다.

왼쪽 팔은 이미 통증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심하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그는 쉬지 않고 백왕의 배를 갈라 안에 있는 내용물을 다

꺼집어 냈다. 어른의 몸통만한 간(肝)을 제외한 나머지 부위는

모두 버리고 배를 비운 다음 그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백왕의 뱃속에서는 아직도 후끈한 열기가 진한 피비린내와

함께 풍겨나왔다. 그는 가지고 들어간 간(肝)을 잘라 그것을

날로 먹었다. 그런다음 옆구리에 차고 있던 술병을 꺼내 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

"쿨룩...쿨룩..."

뜨거운 간에 이어 차가운 술이 들어가자 기침이 나왔으나 그는

다시 한 모금을 들이켰다.

그제서야 떨리던 몸이 진정되며 마음속의 흥분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지독했던 추위가 어느정도 가시자 그는 몸을 웅크린

채 그대로 잠에 골아떨어졌다.

휘이이잉...!

밖에서는 매서운 눈바람이 몰아치고 있었지만 그 살이

얼어붙을 듯한 한기도 백왕의 뱃속을 뚫고 들어오지는 못했다.

다음날 오후가 되어서야 그는 겨우 잠이 깨었다.

그의 몸은 전신이 긁히고 부딪혀 안 아픈 곳이 없었다. 하나

추위는 그럭저럭 견딜 수 있었다.

그는 백왕의 배에서 꿈틀거리며 기어나와 잠시 기지개를 켰다.

그토록 무서웠던 간밤의 추위도 어느 정도 가시고 하늘에는

조금이나마 온기를 느낄 수 있는 태양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는 굳어진 손을 몇 번 쥐었다 폈다하여 풀고는 옷을 찢어

퉁퉁 부풀어오른 왼팔을 칭칭 동여맸다. 그런다음 다시 단도를

잡고 이번에는 백왕의 가죽을 벗기기 시작했다. 그의 손놀림은

무척이나 빠르고 능숙했는데도 백왕의 가죽을 모두 벗긴 것은

그로부터 한 시진이나 지난 후였다.

그동안에 그는 추위와 배고픔을 이기기 위해서 백왕의 간을

반이나 먹었고 술병속의 술도 모두 마셨다. 취기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벗겨진 백왕의 가죽은 도저히 혼자 들고 갈 수 없을 정도로

무거웠으나 그는 그것을 둘둘 말아 묶은 다음 등에 질머졌다.

그리고는 다시 온 길을 따라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처음에

출발했던 마을로 내려오기 까지는 다시 네 시진이라는 시간이

소요되었다.

하늘은 어느 새 어둑어둑해져 다시 눈발이 나릴 기세였다.

그 마을의 이름은 백석촌(白石村)이라 했다.

백석촌 사람들은 그날 평생 잊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백석촌의 사람들은 모두 집밖에 나와 등뒤에 산더미같은

새하얀 호랑이가죽을 질머맨 그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그의

얼굴과 그가 질머맨 백왕의 가죽을 번갈아 쳐다보며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들중 가장 나이많은 사냥꾼 하나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저...저걸 자네가 잡은 것인가?"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늙은 사냥꾼은 주름이 가득진 눈으로 그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의 전신에 나 있는 무수한 상처와 칭칭 동여맨

왼팔, 피로 물든 옷을 자세히 바라보고는 이어서 그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그의 고집스럽게 다물어진 입술과 날카로운 눈을 쳐다본 늙은

사냥꾼은 문득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언젠가 백왕을 잡을 사람이 나타나리라고 생각은 했었지만

설마 ..."

늙은 사냥꾼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내뱉었다.

"설마 그 날이 오늘이라고는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네."

그는 여전히 아무런 말이 없이 앞으로 걸어나갔다.

늙은 사냥꾼은 멍하니 그의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생각난 듯 소리쳐 물었다.

"자네는 대체 누구인가?"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계속 걸어갔다. 그의 몸이 언덕

너머로 사라지기 직전 그의 음성이 나직하게 들려왔다.

"노독행(路獨行)."

2

무공을 배우는 목적은 무엇인가?

누가 만약 나에게 무공을 배우는 목적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오직 한 가지 대답만을 할 것이다.

"무공을 배우는 목적은 반드시 적을 쓰러뜨리는 실력을

양성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그렇다.

적에게 공격을 가해서 명중을 시키고, 적을 쓰러뜨리는 것외에

다른 무슨 목적이 있겠는가?

무공이란 다시 말하면 숙련된 살인술(殺人術)인 것이다.

나는 평생을 이런 믿음하에서 살아왔다. 그리고 무공을 배우기

시작한 이래로 어떻게 하면 상대를 보다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쓰러뜨릴 수 있는가 하는 점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한 번 손을 펼치면 반드시 상대를 쓰러뜨리는 무공!

그것이 바로 나의 무공이었다.

즉, 무쌍류(無雙流)의 '필살무예(必殺武藝)'인 것이다.

- '무쌍류비전총요(無雙流秘傳叢要)' 중에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