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열린 상자.
“끌끌끌. 오랜만이외다, 궁주.”
노인의 목소리가 기분 나쁘게 방안을 채운다. 마치 쇠라도 갈아 마신 듯 목을 긁는 노인의 목소리.
제법 고급스러운 비단으로 옷을 맞췄음에도 태가 나지 않는 노인이 폴짝이며 낮은 의자에 겨우 몸을 올렸다.
“오랜만입니다, 대인.”
그런 노인을 맞이하는 이는 노인의 의복보다 더 값져 보이는 비단으로 옷을 맞춰 입은, 미공자의 모습이다.
그의 피부가, 조금.
새하얗다.
“여전히 안색이 좋으시구려.”
“칭찬이시겠지요. 시비가 아니라면.”
“끌끌끌. 당연한 말씀을.”
“주인이 집 밖으로 나갈 일이 없으니···, 안색이 좋아질 수밖에요.”
노인은 적당한 어투로 궁주라 불린 이를 상대하고 있지만, 묘하게 그를 아래로 보는 듯한 태도가 노인에게 역력하다.
노인과 궁주라 불린 자의 앞으로 찻잔이 놓인다. 중원의 양식과는 다른 조금은 화려한 다기들. 찻잎 역시 중원에서 쉬이 볼 수 없는 특이한 찻잎이다.
“늘 그렇지만. 서역의 차 맛은 참으로 별로요.”
“그렇습니까? 전 중원의 차가 입에 맞지 않더군요.”
“보통 이렇게 말하면 중원의 차로 바꿔주는 것이 예의오만.”
“집 떠나면 이런저런 대우를 받는 법입니다. 가끔은···, 천대도 받지요.”
살벌한 말들이 오가진 않는다. 그럼에도 무언가 불꽃이 튀는 것만 같은, 두 사람의 대화다.
- 호르륵.
노인은 바뀌지 않은 서역의 차를 들이켠다. 줄 사람이 바꿔줄 마음이 없다는데, 어쩌겠나.
당장에 트집은 잡았지만.
맛은 나쁘지 않다.
“서장과 교전은 어찌 되어 가고 있소?”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교착 상태지요. 저들도 그리고 우리도. 크게 맞붙을 생각은 없으니.”
“흠···. 길어봐야 좋지 않을 거 같은데.”
“길진 않겠지만, 짧지도 않을 겁니다.”
“총력전으로 바꿔보는 건 어떻소? 신궁의 힘에···, 내가 조금 보태주면 못할 것도 없을 것 같소만.”
“이곳에 오신 이유 때문에 그건 힘들지 않겠습니까?”
“내가 여기까지 온 이유를 안다?”
“그저 차담이나 나누려고 오신 건 아닐 테지요.”
궁주는 가볍게 소매를 털고 찻잔을 들어 올린다. 그의 손과 팔이. 제법 가늘다.
“무림맹 때문이 아닙니까.”
“제법 중원 소식에 빠르시오.”
“그들 역시 우리 소식에 빠르기에.”
조용히.
그저 아무런 연쇄도 일어나지 않게 조용히 움직이려 심혈을 기울였던 신궁이다.
그런 신궁의 움직임이 알게 모르게, 요즘.
중원의 누군가에 의해, 계속 읽히고만 있다.
“무림맹을 내건 기치 역시 새외에 대한 견제라더군요. 뭐···, 억울한 건 없지만, 직접 지목당하니 기분이 좋진 않습니다.”
“그리 가볍게 말할 문제가 아니오, 궁주. 대비해야 하지 않겠소이까.”
- 탁.
“무엇을.”
궁주는 조금 신경질적인 태도로 찻잔을 내려놓으며 노인에게 말을 뱉는다. 눈을 마주치지 않는 그의 태도가. 오히려 위협적으로 느껴지고 있다.
“···그리 두려워하십니까? 무림맹의 부활 정도는 이미 예상한 바가 아닙니까? 시기야 조금 당겨졌다지만···, 중원에 본궁이 발을 들이는 순간. 저들이 뭉칠 걸 모르셨습니까?”
“궁주. 난 지금 시기를 말하고 있는 거요, 시기! 신궁이 중원에 발을 넣기도 전에 저들이 뭉쳤소. 이게 실책이 아니라 피하는 것이오?”
“실책은. 아니라고 봅니다만.”
궁주는 높아지는 노인의 언성에도 표정의 변화가 없다. 처음에는 높아만 보였던 노인 쪽의 기세가. 어느새 궁주라는 인물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
노인은 화를 내지 않는다. 눈으로만 뜻을 전할 뿐.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노인 역시 생각은 있는 모양이다.
“슬슬 움직이셔야 할 거요.”
“아직은 힘들다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서장과의 충돌. 앞으로 반년을 더 주겠소. 그 안에 마무리하시오.”
“···반년이라···”
“못 하시겠소?”
“확답을 드려야 합니까?”
노인과 궁주의 두 눈빛이 가운데서 격렬하게 부딪힌다. 노인은 이런 상황이 계속되는 것이 불편하고 궁주는 노인의 말을 수락하려는 것이 불편하다.
서로의 불편함이 공존하던 그때.
“궁주.”
“예, 대인.”
“본인은 궁주와 협상을 하러 온 것이 아니외다.”
“본주 역시 대인과 협상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반년.”
노인은 차가운 목소리로 찻잔을 내리며 궁주의 눈을 바라본다. 높은 언성도, 저릿한 눈빛도 없는 응시. 그게 궁주를 향한다.
“반년이오. 그 안에 마무리가 되지 않을 시. 황군의 군화가···, 고창을 짓밟을 것이오.”
!
노인은 제법 건방진 말을 뱉으며 자세를 편하게 고쳐 앉는다. 여유로움. 우위를 점했다고 확신할 수 있는 자의 여유로움이 노인의 몸을 타고 나온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 우우웅.
무언가 울리는 소리가 들리며, 궁주라 불리는 자의 뒤에서 매서운 기운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무인이 아닌 노인의 살갗에도. 충분히 저릿함이 느껴지는 그런 살기가.
그리고.
- 파파팟!
이번에는 노인의 뒤에서 뿌려지는 또 다른 기운. 그 다른 기운은 노인을 향하는 살기를 일시에 몰아내며 이내 차담을 위해 모인 방안을 자신만의 공간으로 만들어버리고 만다.
- 스윽.
궁주의 뒤, 그림자에서 모습을 나타내는 무인. 손을 허릿춤에 올리며 중원의 것과 다른, 굽이진 곡도(曲刀)에 손을 올리는 한 중년인이 살벌하게 노인의 뒤를 노려본다.
당장에 발검할 준비를 하는 그에게.
- 처억.
궁주가 손을 들어 올려, 그를 만류한다.
“그만.”
“궁주님···.”
“물러가거라. 더 이상의 무례는 용서치 않을 터이니.”
“······.”
수하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는 다시 그림자 속으로 몸을 숨긴다. 원래 있었던, 그곳으로.
“수하의 무례를 용서하시지요.”
노인을 향해 포권하며 사과하는 궁주.
고개는 숙이지 않았음에도, 제법 굴욕적인 모습이다.
“그대도 물러서게.”
노인은 자신의 뒤에서 살기를 몰아낸 덩치 좋은 무인을 뒤로 물린다. 한 걸음 뒷걸음질 치는 그의 가슴에 ‘호천(護天)’이라 적힌 글자가 아무런 꾸밈도 없이 웅장함을 자랑한다.
“···반년. 그 안에 전쟁을 마무리 짓겠습니다. 걱정은 거두시지요.”
“믿겠소, 궁주. 우리가 바라는 것이 같다는 사실을 잊지 않길 바라오. 부디···, 기분도 나쁘지 마시고.”
“설마요. 본궁을 물심양면 지원해 주신 분임을 모르지 않습니다.”
팽팽하던 대세가 한쪽으로 기울자, 이내 두 인물의 태도 역시 조금은 변하기 시작한다. 궁주라는 이의 기세가. 한풀 꺾인 모습이다.
노인은 그저 까딱이는 눈썹으로 심정을 대변했다. 마치 그걸 아는 놈이 이리 나왔냐는 그런 표정이다.
“기다리겠소. 궁주를 믿고. 믿음에는 응당 보상이 있어야 할 터이니. 기대하리다.”
“바라마지 않는 염원이 같은 곳을 향하지 않습니까? 최선을 다할 겁니다.”
“그럼.”
노인은 아무런 인사도 없이 말만 던져 놓고는 등을 돌려 방을 나선다. 온 길이 멀기에 서둘러 떠나는 그의 모습.
궁주는 그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서야, 자리에 몸을 앉혔다.
“저런 무도한 놈이···! 궁주, 명만 내려주시면 서역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그제야 그림자에서 모습을 나타내는 조금 전의 수하. 나름 높아 보이는 복색을 한 서역인이 화가 잔뜩 오른 듯 언성을 높인다.
“구자 성주.”
“예, 궁주님.”
“그래, 한 번쯤은 봐줘야겠지.”
“과한 자비는···”
“자네의 그 무지함도 말이네.”
!!!
구자 성주는 자신을 향해 떨어지는 질책에 이게 무슨 날벼락이냐는 표정을 지어본다. 자신의 죄라면, 충심을 내보인 죄가 전부가 아닌가.
“허나, 경솔함은 이번이 마지막임을. 잊지 마시게.”
궁주는 하얗고 얇은 손가락을 까딱이며 수하에게 질책을 내린다. 가늘고 하얀 손가락이 까딱이며 만드는 선이, 위엄이 넘치진 않는다.
“···구자성주(龜玆城主), 교홍. 부디 못난 점을 직접 알려주시면, 수신하여 이를 꼭···”
수하는 자신의 잘못을 여전히 모르겠는 듯, 궁주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다시 생각해도. 자신이 잘못한 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쯧.”
궁주는 귀찮다는 듯 혀를 한 번 차고는 수하에게서 시선을 거둔다. 옆에 수하를 두고 노인이 앉았던 자리를, 아니 그 너머의 호위무사가 서 있던 자리를 바라보는 궁주.
“조금 전 그 무인이 누군지. 정말 모르겠다는 말인가?”
“그게 무슨···?”
“천검(天劍).”
!!!!
“처, 천검이라면···?”
“그래, 중원 대륙의 천자를 지키는 유일한 검. 중원제일검(中原第一劍)이라 칭해도 모자라지 않을 자가 바로 저자겠지.”
“그런 이가 왜···?”
황제를 지키지 않고 여기에 있느냐, 구자 성주는 그걸 묻고 싶었다.
“재미난 이야기를 하는구나. 호호호.”
궁주는 그런 수하의 물음에 입을 가리고 미친 듯한 대소를 터트린다.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백치를 처음 마주한 자의 그런 웃음이다.
“지금의 황상이. 하늘로 보이더냐?”
“······.”
“누구보다 역할에 충실한 무인이야. 암, 그렇지. 저자는 그저 자신의 본분에 맞게 하늘을 지키고 있지 않으냐? 지금의 하늘은···”
궁주는 눈을 한 번 교차하고는 수하에게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열리는 그의 입.
“저 수보, 조숭이니.”
“······.”
구자 성주는 마지막 말에 고개를 더 깊게 숙이고 만다. 천검이라는 말과 수보라는 말이 가지는 무게가. 그의 고개를 눌렀기 때문이다.
“너무 상심 말거라. 일시적 동맹일 뿐. 조숭부터 황궁의 천검과 그 천자까지. 결국에는 고창의 이름 앞에 무릎 꿇고 말 것이니.”
“그날만을 기다리겠습니다, 궁주님.”
궁주는 말을 마지막으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성큼성큼 걸어가는 그의 걸음. 조금은 꽉 쥐어져 붉어진 그의 손이, 평소의 새하얌과 대비되어 유독 눈에 띄는 날이다.
* * *
“해사파(海沙派)는 밀염(密鹽)에 관계된 놈들입니다. 간판만 정파지, 사파나 다름없는 놈들입니다. 처 내십시오. 조흥문(朝馫門)? 거긴 일인전승(一人傳承)이 아닙니까? 온다면 막지는 말고, 굳이 힘을 들여 영입할 이유는 없습니다.”
정문은 새로 맹에 합류할 문파를 검토하는 자정의 앞에서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들을 풀어 놓는다.
해사파가 밀염이라니.
나름 정파인데 정말 그럴까.
다른 이가 하는 말이라면, 한 번 의심해볼 만도 한 말에.
“음, 밀염이라? 나쁜 놈들이구나.”
자정은 그저 믿음으로 답한다.
자정이 정문을 그저 제자라서 믿는 것은 아니다. 맹으로 이주하고 한동안. 정문이 각 문파에 대해 알려줬던 숨겨진 이야기들이.
전부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이 새끼들이 누구를 속이려고···’
황궁에서 무림의 모든 정보를 다뤘던 정문이다. 그런 정문의 머리에는. 각 문파의 비위와 무인들의 비리. 그리고 숨겨진 비사와 희사, 또 치부까지. 모든 것이 온전하게 남아있다.
“후. 정문이 네 도움이 정말 크구나.”
자정은 한숨을 돌리며 마지막으로 읽은 서류에 서명하고 옆으로 이를 치워버린다.
조금은 벅찼지만.
오늘 해야 할 사무를 끝낸 것이다.
무림맹 맹주의 사무는 예상처럼 녹록한 것이 아니었다. 읽어야 할 무림의 동향도 많았고, 또 이제 막 만들어진 무림맹에 쏟아지는 민원까지.
혼자였다면 버틸 수가 없었던 자정. 그런 자정을 도와준 것이 그의 제자, 무정검 이정문이다.
정문이야 이미 사무에 도가 튼 사람이 아닌가. 황궁에서 일할 적에 처리하던 사무에 비하면, 이 정도는.
‘반나절이면 끝이지.’
별것도 아닐 것이다.
“한숨 돌리셨으면,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 그래. 어서 가서 쉬거라. 나보다 더 고생했으니.”
“설마요. 스승님께서 제일 고되심을 압니다.”
“허허, 기특한 녀석. 늘 이런 모습이면 얼마나 좋을까.”
마지막 말을 듣기 전에 갔어야 했다. 정문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숙이고 몸을 돌렸다.
새로 개축한 무림맹의 본부는 제법 넓었다. 주변의 장원 열 곳을 넘게 텄다는 말이 과장은 아닌 모양이다.
그리고 맹주의 제자라는 위치와 무정검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정문은 제법 넓은 전각을 숙소로 배정받았다.
방으로 들어서는 정문.
아직은 짐이 전부 정리되지 않은 방이 정문을 맞이한다.
‘언제 다 치우냐.’
그나마 오늘은 여유가 조금 있는 날.
정문은 고개를 끄덕이며 휴식을 취하기 전에 방을 조금 치우려 한다.
하나둘.
커다랗게 천으로 쌓인 짐들이 자리를 찾아간다.
도사의 짐이기에 대부분 도복과 무복, 그리고 서책이 전부지만, 정문이 모르는 짐들도 다수 있다.
이건.
이 몸의 원래 주인.
진짜 이정문의 짐일 것이다.
두고 오고 싶었다. 굳이 건드리고 싶은 마음은 없으니까. 하지만, 이를 두고 오는 것조차. 이상하게 보일까, 억지로 챙겨온 정문이다.
대부분의 짐이 자리를 찾아간다. 서책은 책장으로 향했고 옷은 옷장으로. 이부자리 역시 새로 마련한 침상을 덮었고 개인적인 물건들 역시 모두 정리했다.
그리고 이제 방 안에는.
작은 상자 하나만이 정문을 마주하고 있다.
‘이건···’
뭘까.
정말 처음 보는 상자.
명화가 정문의 것이라며 챙겨주긴 했지만, 자신의 기억에는 없는 상자였다.
묘하게 익숙한 기운이 감도는 상자를 정문이 열어본다.
열린 상자에는.
까만 무복 한 벌과 부러진 보검.
그리고 작은 흑옥(黑玉) 목걸이 하나가.
아름드리 놓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