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무림맹(武林盟).
공동산 혼원애에 자리한 혼원루.
공동에서 큰 회의가 열릴 때면 늘 사용되는 이 누각을 향해 각 문파의 수장들이 발을 움직인다.
빨간색, 파란색, 녹색, 그리고 황색. 형형색색의 무복이 혼원루를 둘러싸고 무인들은 저마다 절도 있는 자세로 등을 돌려 이를 지키는 대형을 갖춘다.
전형적인 정파의 회의, 그 자체다.
“장관이군요.”
“흠.”
“살아생전 이 모습을 다시 보다니요. 그것도 공동에서.”
“······.”
그리고 그런 모습을 혼원애보다 조금 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그림자 다섯이 있었으니, 그들의 모습이 제법 늙어 보였다.
“소림은···, 권존이 직접 왔는가?”
“···정확히는 모릅니다. 이제 그런 말을 전해주는 이도 없지 않습니까? 그저 눈썹이 하얀 노승을 봤다는 말만 얼핏 들었습니다.”
공동오로라 불렸던 다섯 도인은 그저 가라앉는 목소리로 잘 알지 못하는 도관의 상황을 최대한 추려 본다.
한때는 장문인보다도 더 큰 권력을 행사하며 도관을 주물렀던 이들의 모습이, 생각보다 처량하다.
“그만들 하거라. 폐관하며 다짐했던 일들을 벌써 잊은 것이냐?”
“사형···, 그런 게 아니라···.”
정문에 의해 용퇴당한 이들은 얼마간 두문불출한 생활을 하더니 이내 폐관하겠다며 동혈에 들었다.
그렇게 폐관하다 밖으로 나온 것이 고작 두 달 전.
이들은 무공을 수련한 것이 아닌, 자신들의 지난날을 돌아보며 생각을 정리하고 나온 듯 보였다.
“신경들 끄거라···, 그래. 우린 공동의 태상장로니라. 그리고 도인이며···, 무인이지. 승패에 승복할 줄도 알아야 하느니.”
공동오로의 첫째 공준은 사제들을 자중시키며 그저 낮은 눈으로 혼원루 주변의 풍경을 돌아본다.
보기 좋다.
왜 아니겠나.
공동의 중원 진출을 늘 막아왔던 것이 자신이지만, 좋은 게 좋아 보이는 건 사실이다.
그리고 자신이 늘 공동의 중원 진출을 막았던 이유도. 이런 풍경을 제 눈으로 보지 못했을 때 아이들이 느낄 그 상실감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 아니었나.
‘이토록 빠르게 해낼 줄은···’
고작.
정말 고작이란 말로 수식이 가능한 짧은 시간 만에 자정과 정문은 공동이라는 문파의 위상을 이곳까지 올려놨다.
과연 자신이 일선에서 활동하던 때에 중원에 이런 발안을 띄웠다면 몇이나 이에 응했을까. 공준은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이내 고개를 숙이고 만다.
“보이지 않았던 게야, 암, 그렇고말고···”
“사형···. 어찌 그러십니까? 그때는 맞았고 지금은 틀린 게 아니겠습니까?”
“정녕···, 정녕 그리 생각하느냐?”
“······.”
공준의 사제 공명은 그렇다고 답하고 싶었다. 허나, 그렇게 답할 수는 없다. 저런 말을 적용하기에 공동의 변화는 너무도 빠르게 진행되었으니까.
공준의 시선이 무언가를 나르는 한 일대제자의 얼굴에 닿는다. 밝은 표정. 비지땀을 흘리면서도 밝은 표정의 일대제자가 자기 품 가득 짐을 안고 혼원루로 걸어간다.
지나가는 다른 문파의 무인들에게 한마디씩 던지는 그의 모습이 제법 다정하다.
“좋아 보이는구나.”
“사형···.”
“중원을 바라만 보는 것만으로 공동에게는 위협이 되리라 생각했다. 그래···, 논검회···. 우린 처절하게 밟혔었지···.”
“저도···, 또 장문 사형도 그랬지 않았습니까? 거기가 시작이었지요.”
“그래, 그랬지. 해서, 후대에는 그런 감정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느껴선 안 된다고 생각했지. 나 역시 그런 감정을 겨우 털어 냈으니. 아이들이 계속되는 그 패배감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게 분명하다고 여겼던 게야.”
“···거친 길을 후대가 가지 않도록 막는 것도 선대의 일입니다, 사형.”
애써 자신을 위로하는 말에, 공준은 고개를 절레 저으며 절벽 아래 혼원루 쪽을 가리킨다.
“방금 지나간 아이가 누군지 알겠더냐?”
“청익이 아닙니까?”
“그래, 사풍의 옆에 착 붙어 다니던 그 아이지. 저 아이가 논검회에서 거둔 성적이 예선 탈락이라더구나. 화산에 패해서. ···저 아이의 얼굴에 패배감이 보이더냐?”
“······.”
“이상적인 무인의 자세로다. 패배하고, 또 일어서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사형은 지난 과오를 반성했으니 다시 돌아가자는 말을 하려는 걸까.
어쩌면 적기일지도 모른다. 공동에는 여러 중요한 손님들이 모여있고, 또 그런 손님들 앞에서 원로를 박대하진 못할 테니까.
알음알음 저들도 공동의 내부 소식을 접했을 수는 있지만, 이에 입을 보태며 참견하진 못할 것이다.
얼굴에 두꺼운 철판만 하나 놓는다면. 사문 내 실권에 다시 돌아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란 뜻이다.
하지만.
“손에 꽉 쥐고 있을 때는 모르는 법이네. 그 안에 든 것이 무엇인지, 또. 처음에 내가 잡았던 것이 어떻게 변했는지.”
공준은 꽉 쥔 손을 앞으로 내밀며 장황설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그게 무슨···?”
“놓아야 보이더구나···. 놓고 난 후에야. 자신이 무엇을 쥐고 있었는지···, 또 쥐고 있던 것이 어떻게 변했는지가···. 너무 오래 쥐고 있었어.”
“사형···. 지금이라도 이를 전하고 빈도들이 할 수 있는 일로 사문을 돕는 것이···?”
다시금 사문 내 사무에 복귀하자는 공명의 말에, 공준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린다. 누가 보아도 부정하는, 그런 모습이다.
“너무 늦었네···. 일찍 놓은 후 지켜봤어야 했는데···. 날아갈지, 아니면 그대로 손안으로 다시 숨을지. 결국에는 손안에 있었던 저 아이들이 선택했어야 할 문제였거늘.”
공준의 입에서 선택이라는 말이 나온다. 공준과 대립하며 마지막에는 공준을 밀어냈던 정문이 늘 사제들에게 던지던, 그 선택이라는 말이.
“돌아가자. 구경은 충분하니.”
“···이대로 가셔도 되는 겁니까? 무언가 사문에 도움을···”
“도움은···. 청할 때 줘야 도움이라 하지 않더냐? 이제 와 먼저 나선들···, 그저 간섭이 될 뿐이야.”
공준을 비롯한 태상장로들은 권력에 욕심을 내는 그런 이들이 아니다. 다른 이들이 보기에 어떨지는 몰라도, 적어도 자신들은 그렇게 믿고 있을 것이다.
그들의 일생이.
오로지 공동을 위한 삶이었으니까.
“마음만으로 되는 일이 아닌 것을. 허허. 늙었지. 늙은 게야.”
“어디로 가시렵니까?”
“어디긴 어디더냐? 뒷방으로 가야지.”
“···뒷방···.”
뒷방이라는 말에 사제들의 표정이 조금 구겨진다. 마치 밀려나 억지로 들어가는 그런 곳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뒷방이라는 말이 싫더냐?”
“그건 아니지만···.”
“허면, 이리 말하자꾸나.”
“···?”
“원래 있어야 하는 곳으로 가자고. 허허허.”
뒷짐을 진 공준이 재밌다는 고개를 들고 호탕하게 웃는다. 이게 농담인지 아닌지 사제들은 알 수 없다.
공준의 뒤를 따르는 사제들.
공동은 어쩌면.
이제 원로란 이름이 어울리는 이들이 생긴 건지도 모르겠다.
* * *
서로 다른 무복을 입고 도열한 각 문파의 무인들. 저마다 늠름한 표정에 굳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사실 이들은 별다른 경계를 서고 있는 것은 아니다.
명분이야 경계고 호위지만, 누가 구파일방의 안방까지 찾아와 이들을 노리겠나. 그저 늘 해오던 관습이기에, 이렇게 도열해 보여주기식의 자세를 잡은 이들이다.
젊은 무인들이 지키는 혼원루 안.
각 문파의 장문인들이 모인 회의실의 안은 어색한 분위기만이 감돌고 있다.
이들이 서로 교류가 없던 이들이라서 이런 것은 아니다. 각각의 문파를 따로 떼고 본다면, 오히려 그간 교류가 깊은 문파들이 더 많을지도 모르는 것이 사실.
허나, 지금은.
각자의 바람과 사정, 그리고 시기 등과 같은 여러 감정으로 인해, 조금은 어색한 분위기다.
“다들 모이신 것 같으니, 회의를 시작할까 합니다.”
평소 이렇게 나서는 걸 좋아하는 자정은 아니지만, 이들이 모인 곳이 공동파의 도관인 만큼 진행은 자정이 자처한다. 자정의 옆에 앉은 정문은 의외라는 표정으로 자정의 진행을 지켜본다.
자정이 목을 가다듬고 개회를 선언하려 할 때.
“잠깐-.”
정문의 귀에 조금은 불결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청성의 좌장문.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개회를 막은 사람은 청성의 장문인 좌세경. 공동과 좋지 못한 감정이 많은 그가, 무언가 불만이 있어 보인다.
“흠-. 이 좌모, 듣기로는 이번 대회가 각 문파의 대표자가 모여 회의를 나누는 자리라 들었습니다. 아닙니까, 자정 장문?”
“맞습니다. 미리 보여드린 자료처럼 중원에 큰일이 있고 또 이를 함께 대비하자는···”
“그런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좌세경은 구구절절 설명하려는 자정의 말을 거칠게 끊어 버린다.
‘저 새끼가···’
제자가 맞은 거로는 아직 정신을 못 차렸나. 정문은 그런 생각을 하며 좌세경의 입이 무슨 말을 뱉는지 지켜본다.
“허면, 무슨···?”
“참여 자격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겁니다. 자격.”
좌세경은 건방진 태도로 말을 뱉으며 시선을 정문에게 향한다. 아직 어린 네가. 왜 여기 있냐는 그런 눈빛이다.
“좌 장문. 정문은 이번 일을 처음부터 겪은 아이로···”
“예, 좋지요, 좋아. 이번 일을 직접 겪은 이. 좋습니다. 증언도 들어야겠지요. 허나, 증인은 이곳의 결의를 통해 정하는 법. 아직 개회도 하지 않은 시점에 무정검이 여기 있는 것은 좋게 보이지가 않습니다! 장문인께서도 아이라는 말을 쓰시지 않았습니까? 이런 대사에! 배분에도 맞지 않는 이를 이곳에 들이다니요! 허어-!”
좌세경은 마치 정문이 이곳에 있는 일이 하늘이 무너질 일이라도 되는 듯 통탄한 어투로 말을 뱉어간다. 다른 이들은 언급도 없는 그런 일을 말이다.
정문은 속으로 화를 누르며 주변 장문인들의 반응을 살펴본다. 대처를 보겠다는 도끼 눈의 팽가와 눈치만 살피는 종남, 결과를 살피려는 듯 가늠하는 무당과 속을 알 수 없는 소림까지.
저마다 다른 속내를 가지고 있지만, 입을 다문 것은 모두 같다.
‘이놈들 봐라···?’
정문은 좌세경의 말을 백번은 반박할 수 있다. 해주고 싶은 말도, 면전에 주고 싶은 모욕도 있고.
허나, 이번 회의의 무사한 진행을 위해서.
정문은 참을 수밖에 없다.
대신에.
정문을 대변해 줄 인물이 다른 곳에서 나온다.
“거-, 적당히 좀 합시다, 좌 장문.”
호탕하지만 거칠진 않은 목소리. 짧게 뱉는 말에도 온갖 짜증이 묻은 목소리가 회의실에 울린다. 일어서서 목청을 높이던 좌세경의 고개가 돌아간다.
그와 눈이 마주친 이는.
“당가주?”
“무정검이면 여기 어울리기에 부족하지도 않거늘, 어찌 그러시오?”
사천당문의 가주, 당천정이다.
“허어, 당가주. 말씀이 이상합니다? 어찌 부족하지 않다는 겁니까?”
“쯧. 이번 일을 모두 겪었고 묵룡자를 처리해 일단락까지 지은 무인이오. 강함이나 연관성이나 부족함이 없거늘, 어찌 그리 억지를 부리시는 거요?”
“당가주! 정도 대회입니다, 정도 대회!”
“귀먹지 않았으니, 작게 좀 합시다. 체통이 없소, 체통이.”
당천정은 짜증이 가득한 표정으로 귀를 후비며 좌세경의 약을 올린다. 그의 태도가 가벼워, 화를 낸 좌세경의 모습이 더욱 우습게 보인다.
“배분은 중한 일입니다! 어찌 무공이 강하다고 배분을 따지지 않고 일을 처리한다는 말입니까? 그런 건 사파에서나 하는 일이지요!”
“배분, 배분, 배분! 거참, 좌 장문은 배분을 참 좋아하시는 모양이외다? 좋소, 그럼 그리합시다. 무정검 나가시게!”
정문은 잘 옹호하다 갑자기 자신을 두드리는 당천정을 향해 눈을 크게 뜬다. 뭐 하는 짓이냐는 그런 눈빛으로.
“아, 그리고. 운양 도장.”
“···예?”
당천정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정문에게 도움이 될 말을 고민하던 화산의 장문 대리, 운양을 불러본다. 얼이 나간 채 고개를 드는 운양.
“나가쇼.”
!!!!!!
“좌 장문께서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장문인과 장로 배분이 대화를 나누는데 어디 감히 일대제자가 끼어드냐고. 허니, 좀 나가주셔야겠습니다.”
배분으로만 본다면, 운양은 아직 화산의 장문인이 아니다. 모든 실무를 그가 보는 것은 사실이지만, 장문인으로부터 승계를 받지 못한 일대제자라는 말이다.
눈을 껌뻑거리며 주변을 살피는 운양. 이내 맥락을 파악한 운양이 최대한 불편한 기색으로 입을 연다.
“크흡-! 좌 장문과 청성의 뜻이 그렇다면···, 화산은 따를 수밖에요. 빈도는 고작 ‘일대제자’이니 말입니다.”
- 끄르르륵.
자리를 일으키려 자세를 잡는 운양. 좌세경은 경악하며 운양의 몸을 막는다.
“그, 그게 아니라! 자, 잠시···!”
“왜 또 그러시오? 아니면, 나이가 문제요? 공초 노사···, 또. 노개. 중년인들의 자리니, 눈치껏 피합시다.”
“아미타불···, 빈승이 눈치도 없이···”
“에헴. 원래 늙은 거지는 눈치가 없는 법입니다만···, 청성의 뜻이라면!”
억지다. 분명한 억지. 지금 맞장구를 치는 화산과 소림, 개방의 인물들 역시 이를 모르진 않는다.
단지 이들은.
아무런 의미 없는 시비를 거는 좌세경의 행태가 눈꼴시려, 이리 당천정에게 장단을 맞춰주는 중이다.
최근 공동과 부쩍 가깝기도 했고.
“······.”
부들거리는 좌세경.
그의 눈이 당천정을 노려본다.
무정검이라는 인물이 등장하기 이전까지. 정도 무림에서 기행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럽던 이가 당천정이다.
그런 당천정이. 기량을 마음껏 펼쳐본다.
정문은 그저.
‘와···, 나도 안 부릴 억지를···’
자신보다 당천정이 더한 놈이라. 그런 생각에 고개를 저었다.
“좀 앉읍시다, 좌 장문. 별것도 아닌 거로 어찌 개회 전부터 그러시오? 나 역시 이번 회의에는 할 말이 많은 사람이외다. 기왕에 걸음까지 한 거, 개회나 하고 말을 하려 했더니. 어찌 이리 추태를 부리외까?”
사태를 관망하던 하북팽가의 가주까지 말을 보탠다. 그 역시 불만 가득한 표정은 마찬가지. 그래도 좌세경처럼 추태는 보이지 않는 팽가주다.
“······.”
좌세경이 자리에 앉는다. 억지도 지지를 받아야 먹히는 것이 이런 자리. 지지를 얻지 못한 좌세경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자정 장문. 시작합시다.”
“예, 그럼.”
자정은 도와준 이들에게 빠르게 눈으로 인사하고 개회를 선언한다. 그저 형식적인 인사들이 가득한 그런 개회사를.
“자정 장문. 내가 말한 개회는 그런 형식적인 인사가 아니오. 안건. 이렇게 우릴 불렀을 때는 안건이 있을 게 아니오? 그저 서역에서 세력이 생겼으니, 으쌰으쌰해서 자알 단합하자! 그런 말을 하려 부른 건 아니지 않소이까?”
추태는 아니다. 좌세경처럼 억지를 부리고 소리치는 모습은 아니니. 허나, 무언가 불만이 가득한, 팽가혁의 말이다.
자정이 고개를 돌려 정문과 눈을 맞춘다. 고개를 끄덕이는 정문. 둘 사이에 이미 오간 말이 있는 걸까.
“예, 안건. 좋은 말씀입니다. 당연히 있습니다.”
!
안건이 있다는 말에 집중하는 각 문파의 수장들. 모두가 숨을 죽이며 자정의 입에 시선을 집중한다.
“이번 서역 세력 발호에 대비하기 위해 공동은···”
- 꿀꺽.
“무림맹(武林盟)의 부활을 제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