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서신
공동이 보낸 서신이 중원 각지로 퍼져간다. 서역 세력에 관한 짧은 언질과 정도 대회에 관한 내용이 남긴 서신이.
그리고 그런 서신이 각 문파에 전해지고 이레 뒤. 아직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은 문파들은 또 다른 서신을 받게 되는데, 이는 소림과 화산, 남궁과 당문은 이번 대회를 지지한다는 그런 서신이었다.
“젠장, 가지 않을 수가 없지 않느냐!”
“자, 장문인!”
“이게 협박이 아니면 뭐란 말이더냐? 공동···! 이 건방진!”
사람의 눈이 비뚤어지면, 모든 현상이 그 비뚤어진 시선에 맞춰지게 된다. 지금 말을 뱉는 청성의 장문인 좌세경은. 조금 비뚤어진 눈으로 공동을 바라보고 있다.
그 시각 청성산에서 멀지 않은 사천의 다른 사찰. 여승들이 가득한 이곳에서도 같은 주제를 놓고 토론이 격화된다.
“대리라도 보내는 것이···”
“허나, 다른 곳에서 장문인이 온다면···”
“역시 그 방법밖에는 없겠군요.”
“또 그리해야 하는가···”
“사고, 방법이 없습니다.”
“흠···, 아미는 불참한다. 허나, 대회에서 결정되는 내용은 무조건 지지한다는 의사를 밝히는 거로···. 지금은 방법이 없구나.”
“예, 사고.”
반응은 바람을 타고 더 먼 곳을 향해간다. 저기 사천의 남쪽, 운남을 향해.
- 다다다다다!
- 슈우우우욱!
거칠게 미끄러지며 몸을 가누는 도인. 붉은 무복에 검은색 테두리, 안에는 흰색 무복을 받쳐 입은 도인이 서둘러 장문인의 방으로 들어선다.
그의 피부가, 조금은 진한 색이다.
“스, 스승님!”
“일도 네 이놈! 도관에서는 경거망동하지 말라, 몇 번을 이르느냐!”
젊은 도인은 스승의 그런 꾸짖음에도 개의치 않고 자신의 용무만을 먼저 살피려 한다. 마치, 기다리던 소식인 듯 말이다.
“분명, 정문 형님의 소식이!”
“그게 그리도 좋더냐? 허어.”
몇 년 전 점창산을 덮친 병마라는 비사에 주일도는 모든 사형을 잃고 말았다. 본산을 떠나 속가로 내려갔던 그가 본산으로 다시 돌아온 것 역시 그 일 때문.
사형들에 대한 감정이 그리워서일까. 주일도는 논검회에서 만난 정문에게 깊은 유대감을 느끼고 있다.
“쯧. 서신을 보거라.”
점창의 장문인 단목경은 그런 주일도에게 자신이 받은 서신을 보여준다. 정문의 소식과 앞으로 있을 일이 담긴 그런 서신을.
주일도의 눈이 빠르게 내려간다. 그와 동시에 밝게 펴지는 그의 얼굴.
“스승님!”
“장문인이라 부르거라! 이제는 사제들도 있는 놈이!”
일대제자를 잃고 세를 잃었던 점창은 최근 이 년간 빠르게 그 세를 회복했다. 본산을 떠났던 제자들이 하나둘, 다시 산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이는.
주일도라는 대제자가 논검회에서 명성을 크게 날린 덕분이었다.
“가고 싶으냐?”
“예! 꼭이요!”
“이놈, 한 치도 망설이지를 않는구나.”
“이제는 본산을 지킬 사제들도 있지 않습니까? 저도 조금···”
“놈. 산중 생활이 지겨웠던 모양이구나.”
“헤헤, 굳이 그런 것보다는···”
“그렇지 않아도 갈 생각이었느니라. 허나, 쉬러 가는 것은 아니다. 이 역시 사문 내 사무의 일부. 이를 명심한다면, 내 네놈을 데려갈 것이다.”
!!!!
“무, 물론입니다! 대제자로서 단정한 마음으로! 열심히!”
“열심히는 빼도 되느니라. 새외(塞外)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구나. 비록 우리 운남과는 거리가 있다 해도···, 점창 역시 새외와 면을 맞댄 곳. 남 일 같지가 않구나.”
“마, 맞습니다! 사해가 동도가 아닙니까!”
“지금 쓸 말은 아니니라! 이놈!”
크게 소리치는 스승의 말에도, 공동산에 갈 생각이 가득한 주일도의 표정은 밝기만 하다.
서신은 운남에서 강을 건너 저 멀리 호북으로 향한다. 도기가 가장 크게 내려있다는 깊은 산으로.
“장문인···, 어찌 보십니까?”
“태을무극···, 명분이 나쁘지 않구나.”
“···해도 주최하는 곳이 공동입니다.”
주최하는 곳이 공동이라.
어쩌면 누구나 뱉음직하면서도 조금은 불손한 그런 말이다.
도관(道冠)에 태극이 그려진 풍채 좋은 장문인이 깊은 눈을 가진다. 공동이 이렇게 큰 행사를 주최하는 걸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다른 이들처럼 건방지다고 말하며 거절해야 할까. 그러기에는 뒤이어 날아온 지지 선언의 무게가 너무도 무겁다.
소림과 화산, 남궁과 당문이라니. 이건 참여하지 않는 순간. 중원 무림의 중심에서 저 멀리 멀어지게 된다는 일종의 협박이 아닌가.
누가 짠 판인지는 몰라도.
참, 잘 짜여진 판에 얽혀 버린 것 같다.
“허륜은 어디 있느냐?”
무당의 장문인, 충산의 입이 열린다.
“허륜···, 말씀이십니까?”
대제자가 아닌 허륜을 찾는 목소리에 조금 의함을 표하는 장로들. 그들이 고개를 갸웃해도, 충산은 그저 허륜을 불러오라는 말뿐이다.
잠시 후. 무당의 일대제자 허륜이 급하게 장문인의 앞에 대령한다. 도포를 휘날리며 무릎을 꿇는 허륜.
“륜아, 네가 무정검과 친분이 있다고 했지, 그렇더냐?”
“···정문 형님···, 말씀이십니까?”
“그래, 공동의 대제자, 이정문 말이다.”
“제 의형되십니다.”
“흠···”
의형이라는 말이 나오고 나서야 장로들의 고개가 떨어진다. 충산은, 공동산으로 향할 모양이다.
“준비를 하거라. 공동산으로 갈 것이니.”
!!
“제가···, 가는 겁니까?”
“그래, 나와 함께 가자꾸나.”
허륜은 장문인의 말에 눈을 크게 뜨며 동공을 이리저리 움직인다.
보통 장문인을 수행하며 타문을 방문하는 건 대제자가 할 일. 허륜은 일대제자 중에서도 높지 않은 배분이기에 조금 당황하는 중이다.
“싫으냐?”
“아, 아닙니다! 제가 어찌···! 정문 형님을 간만에 뵙는 게 너무도 좋아···”
“허허허, 의가 좋은 의형제로다. 이만 물러가서 준비를 해두거라. 내 따로 명을 내릴 터이니.”
“예! 장문인!”
허륜이 문을 나서자, 몇몇 장로의 표정이 일그러져 간다. 충산이 허륜을 부른 이유를 예상하는 장로들. 충산은. 무정검과 연이 있는 제자를 부러 부른 것이다.
“어쩔 수 없지만···, 무정검이 당금 강호에 중심에 있는 것은 사실이 아니겠나?”
“···아무 말, 올리지 않았습니다···.”
“자존심들은 내려두게. 모든 건 변하는 것이니···”
혈영문을 쓸었고 묵룡자를 죽였다. 당장에 구파일방의 장문인이나 할 법한 그런 무공(武功)을 이립도 되지 않은 일대제자가 이룬 것이다.
아무도 불평하지 않는다. 하지만, 조금은.
서러운 기운이 타고 나오는 무당산이다.
- 타앙!
거칠게 탁상을 내려치는 소리가 하북을 울린다. 거친 장비 수염에 눈매까지 삐죽한 중년인이 무언가 잔뜩 화가 난 듯 씩씩거리며 가신들을 바라본다.
“이게! 이게! 말이나 되냐는 말이다!”
“가, 가주···, 우선은 진정하시고···”
“남궁걸과 당천정! 그 두 친구가 나를 빼고 일을 꾸미는 것이 아닌가!”
“최, 최초의 발안은 분명 공동이라고···”
어떻게든 가주를 진정시키려 무리수를 둔 것일까. 장로는 자신이 말을 뱉다가 그만 입을 닫고 만다. 자신의 말이 가주의 심기를 푸는 데 부족한 걸 알아차린 것이다.
“그러니 말하는 게 아니냐! 공동과 입을 맞춘 게 아니라면! 어찌 이런 서신이 이레를 두고 동시에 날아든단 말이더냐!”
“······.”
“소림과 화산! 이 둘은 이해할 수 있다! 또, 서신을 전해온 것이 개방이 아니냐? 개방 역시 미리 알고 있었겠지! 허나···, 남궁과 당문이! 어찌 이리 나올 수 있다는 말인가!”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불참으로 의사를 표명하는게···”
다른 장로 역시 나서며 하북팽가의 가주, 팽가혁의 기분을 풀어보려 한다.
하지만.
“가겠다!”
!
“가, 가주···?”
“가야지! 암! 내 가서 두 놈이 무얼 꾸미는지! 직접 눈으로 보아야겠다! 그리고 대체 무정검이 뭐 하는 놈이기에 다들 이리 관심을 주는지도 내가!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올 것이야!”
“···혹,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장로들은 불같은 가주의 성격을 알기에 혹여 공동산에서 큰 충돌이 일어날까 걱정을 보태본다.
다른 때라면 공동에 가는 것쯤은 걱정할 장로들이 아니다. 공동이 비록 구파일방이라고는 하나, 어디 하북팽가가 거기에 밀리는 가문인가.
허나, 지금은 다르다.
당금의 공동에는 무정검이라는 걸출한 고수가 자리하고 있다. 가주의 무위를 믿지 못하는 장로들은 아니나, 구태여 젊은 절정의 고수와 가주가 부딪쳐 무엇이 좋겠나.
“흥! 날 뭐로 보시는가? 나 팽가혁일세! 팽가혁! 시퍼런 애송이와 날붙이를 마주할 이는 아니란 말이네!”
무정검이 시퍼런 애송이는 아니다. 그가 걸어온 행보만 보아도 강호에 누가 그를 애송이라 칭하겠나.
그래도 우선은 자신보다 어린 무인으로 취급하는 걸 보니, 당장에 드잡이질하진 않을 것 같아 안심하는 장로들이다.
“허면, 사절단을 준비하겠습니다. 공동과는 첫 만남이니 부디···, 자중해주시길.”
끝까지 걱정하는 장로들에게 팽가주는 손을 털며 알겠다는 의사를 표시한다.
무언가 그의 모습이.
화난 것보다는 뾰루퉁한, 그런 모습이다.
서신은 돌고 돌아 평량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닿는다. 평량에서 멀지 않은, 서안 종남산에.
“장문인···, 이제는 결단을···.”
“조금 더. 조금 더 기다려보세.”
“너무 늦으면 좋지 않을 겁니다.”
“허어, 종남산은 공동산에서 엎어지면 닿을 거리. 굳이 서두를 필요가 없지 않은가!”
“······.”
우유부단하고 주변의 눈치를 많이 보기로 유명한 종남의 장문인 위일도. 그는 슬쩍. 어떤 문파들이 참여하려 하는지, 또 누가 당당히 불참하는지를 지켜보려 한다.
대세를 따지자면, 당연히 참석하는 것이 맞다. 명분 역시 그러하고. 하지만, 공동이 주최하는 자리라니.
소림과 화산, 무당의 바로 아래에서 상좌의 마지막을 지켜오던 종남으로서는 지금 상황이 불편하기만 하다.
“두고 보자는 말일세···, 두고···.”
종남파 장문인의 눈이 조금은 떨리고 있다.
* * *
“정녕 저분께서···?”
화산의 속가이자, 일전에 중원을 배신한 무인들의 신병을 인수한 난화무관의 관주 호엽이 조금은 의아한 표정으로 한 여인을 바라본다.
“흠···, 당문에서 최고의 실력을 갖춘 분입니다. 특히···, 이쪽 방면에서는···”
호엽의 옆에 선 녹색 장포의 노인은 그런 호엽의 반응을 이해한다는 듯 그에게 자세한 설명을 풀어준다.
분명 이곳은 난주고 화산의 속가다. 헌데 어찌. 당문의 인물들이 함께하고 있을까.
정문은 일전에 당가타를 떠나며 당천정에게 난주로 ‘기술자’를 보내 줄 것을 청했다. 둘은 어떤 기술자인지 아무런 대화를 나누지 않았지만, 서로 뜻이 통했던 것은 사실.
지금 호엽의 곁과 눈앞에 서 있는 이들은 모두.
당가의 기술자들이다.
당연히 저 여인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 짜악, 탁!
노인에게서 최고라는 극찬을 들은 여인이 얇은 장갑을 손에 착용한다. 짝 달라붙는 특이한 모양의 장갑. 여인은 가볍게 씨익 웃더니 이내 눈앞에 놓인 살벌한 도구들을 정비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가져온 건 이게 전부인가요?”
“아닙니다, 아가씨. 수하들이 더 들고 올 것이니, 잠시만 기다리시지요.”
“시간이 없어요. 이제 정도 대회는 한 달 뒤. 알찬 정보를 빼내려면 한창 노력해야 할 텐데···”
분명 주변의 풍경과 도구들은 살벌하다. 그럼에도 여인은 이런 일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해맑은 표정으로 노인과 대화를 나눌 뿐이다.
‘아가씨라고?’
아가씨라는 말 자체는 그리 높이는 말은 아니다. 허나, 뒤이어 나오는 노인의 모든 말들이 존대하는 말이기에, 호엽은 조금 고개를 갸웃거리며 여인과 노인을 번갈아 바라본다.
여인이.
너무도 젊었기 때문이다.
“그럼 시작할게요. 두 시진 뒤에는 교대해줘요.”
“예, 그러겠습니다.”
“얼마나 알아냈는지, 내가 다 검사할 테니까! 다들 열심히 해야 해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허허허. 밑에 아이들이 고생 좀 해야겠군요. 아가씨의 솜씨가 워낙 좋으시니.”
“피이-. 장로님은 맨날 아부셔요.”
“틀린 말도 아니지 않습니까? 허허허.”
“뭐, 그건 그렇죠. 간만에 실력 발휘 좀 해볼까요?”
“자알, 감상하겠습니다. 중요한 정보를 빼내신다면, 가주께서도 기뻐하실 겁니다.”
“그럴까요? 아버지만?”
“모르죠, 또 다른 이들 역시 기뻐할 수도.”
“히히, 어쩌면 그 유명한 내 예비 신랑?”
“······.”
“농담이에요. 전 결혼 안 해요. 도사랑은 더더욱.”
“뭐···, 도사님 마음도 들어봐야겠지만, 그런 거로 하시지요.”
“뭐에요?”
“저 역시 농담입니다.”
이런 일이 익숙한 듯 농담을 주고받는 둘을 보며 호엽은 혀를 내두른다. 지금 자신들이 준비하는 모든 과정이. 얼마나 살벌한지를 아는지 궁금한, 호엽이다.
“그럼 시작할게요. 호 관주. 보기 힘들면 물러서 계셔도 괜찮아요.”
“보기··· 힘들 정도입니까?”
“사람에 따라 다르긴 하죠. 과정은 늘 똑같으니까요.”
“같다면···?”
- 씨익.
과정을 묻는 호엽의 말에 여인이 크게 입꼬리를 올리며 비릿한 웃음을 보여준다. 조금은. 여인의 웃음이 평량의 누군가와 닮아있다.
“늘 하던 방식대로 하는 거죠! 당문의 방식으로!”
여인은 당문의 방식이란 말만 남기고 도구를 챙겨 뇌옥의 신문실로 들어간다.
그리고.
- 치지지지지직!
“끄아아아아악!”
하는 소리와.
- 꿀럭, 꿀럭.
“우우우우욱! 크확!”
같은 살벌한 소리가, 난화무관을 채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