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그저 스쳐 가기를.
돈황(敦煌)은 서역과 중원을 나누는 경계에 해당하는 도시였다.
옥문관(玉門關)과 양관(陽關)이라는 두 개의 커다란 관문을 중심으로 녹주(綠州)를 따라 형성된 사막 속의 녹주 도시. 서역의 문화와 중원의 문화가 적절히 섞인 교역 도시.
이런 의미를 모두 품은 것이 바로 돈황이었다.
한때는 불랑기(佛朗機)와 천축(天竺)으로 향하는 유일한 길목이었기에 번성을 누렸던 시기도 있었지만, 송(宋)대에 바닷길이 개척되고는 이내 돈황은 쇠퇴의 길을 걸어야만 했다.
천축과 불랑기를 빼면.
서역은 그다지 교역으로 무언가를 얻을 만큼, 풍요로운 땅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서역과 면을 맞대고 있으니, 이곳은 감숙성에 해당하는 곳이다.
중원을 지배하는 황실의 영향력이 닿는 마지막 도시.
서역이 새외라 불리는 이유를 만들어준 도시 역시 돈황 일 것이다.
정문의 걱정과 미안함의 근원 역시 여기서 비롯된다.
어떻게든 감숙 밖을 보여주고 싶었던 이전의 바람과는 달리 결국 강호행을 감숙 안으로 떠나게 된 것이 못내 미안한 것이다.
그래도 사제들은.
이런 정문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일 년 전까지만 해도 공동산을 벗어나지 못하던 자신들에게 그저 감숙 안에 도시라도 돌아볼 수만 있다면 아무런 불만이 없다는 것이 사제들의 말이었다.
‘귀여운 녀석들…’
어쩌면.
어쩌면 보살핌과 배려는 자신이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이 많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정문을 스쳤다.
정문이 사제들에게 강호행을 고하고 사흘 뒤.
공동의 도인 다섯이 짐을 챙겨 산문을 나섰다.
가슴에는 새로이 만든 공동의 상징이 이들의 소속을 알려주고 있었다.
자랑스레 가슴팍을 내밀며 당당히 관도로 발을 옮기는 이들. 이제는 공동의 이름이 가지는 무게가 제법 남다르기에 거리에서도 이들을 알아보는 이들이 많았다.
보는 눈이 늘어난만큼.
이전처럼 행동에 자유가 넘치는 그런 여행은 아니게 될 것이 분명했다.
평량에서 돈황까지는 적어도 한 달을 걸어야 하는 거리.
이전에 보름을 걸어서 갔던 무위에서도 보름을 더 가야 한다.
조금은 오래 걸릴 여정이.
이제 막 시작되었다.
* * *
너무 오래 걸렸다.
작은 봇짐과 삿갓, 그리고 고급스러운 보검을 차고 있는 무인의 머리에 스친 생각이었다.
삿갓으로 가렸음에도 전부 가려지지 않는 외모의 수려함이 사내의 얼굴에서 뿜어진다.
이미 열흘을 넘게 걸은 게 분명한데도 사내의 의복은 조금의 구겨짐과 흙먼지 묻음조차 없는 모양새였다.
비질 땀을 흘리며 나루터에 들어서는 사내.
평범한 차림새에도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한다.
‘삼문협(三門峽)만 지나면 섬서인가. 보름이면 감숙이겠군.’
홀로 앉아 목을 축이는 사내의 가슴으로 ‘창천(蒼天)’이라는 글자가 햇빛을 머금어 살짝 빛을 내었다.
사내의 이름은 수룡.
안휘에 자리 잡은 제법 큰 세가, 남궁세가(南宮世家)의 소가주이자 신뇌검(新雷劍)이라는 이명으로 불리는 무인이 바로 그였다.
다섯 달 전 난주와 서녕에서 있었던 혈사(血事)를 겪고 안휘로 귀환한 그는 장장 넉 달에 걸쳐 가주이자 아버지인 남궁걸을 설득해야만 했다.
공동으로 수련을 떠나게 해달라고 말이다.
당연하게도.
남궁세가의 가주, 남궁걸은 대노(大怒)하며 이를 반대했다.
대(大) 남궁세가의 차기 가주가 다른 곳도 아니고 공동파에 가서 수련하겠다니. 이게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란 말인가.
아마 화산이나 무당이었다면, 화는 나도 이해는 했을 것이다. 그들 역시 쌓아 놓은 명성이 있지 않나.
이제야 공동이 빠르게 자신들의 명성을 올리고 있다고는 하나, 오래도록 쌓아 놓은 남궁과 화산, 무당의 명성에 비견할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남궁수룡은.
끈질기게 아버지 남궁걸을 설득했다.
처참하게 깨지더라도.
무심하게 패하더라도.
무정검에게 도전하지 않는다면, 자신은 더는 성취가 없을 거라는 말을 하면서 말이다.
이는 절대 과장이나 허풍 같은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서녕에서 그가 느꼈던 상실감과 허탈감은 실제로 자신의 성취를 방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인이라는 자들이 자신보다 월등히 뛰어난 무인을 만나면 느낀다던 그 ‘벽’이라는 것을 남궁수룡은 무정검에게서 느낀 것이다.
‘깨지더라도 한 번은 검을 섞었어야 했다.’
벽에 부딪혀 머리가 깨져본 자만이 그 벽을 부술 궁리를 하는 법이다.
남궁수룡은.
무정검이라는 거대한 벽을 만났어도 감히 그 벽에 부딪혀 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수룡의 성취를 막은 것은.
어쩌면 그러한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수룡 자신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나는 무엇이 그리도…’
두려웠나.
이미 자신보다 못하지 않은 서영삼흉(西影三凶)과 혈수살검(血手殺劍)을 물리친 무인이었다.
수룡이 감히 무정검보다 하수라 자청해도 그 누구도 반대할 사람이 없었다는 뜻이다.
허나, 수룡은.
스스로는 그 미련을 마지막까지 뿌리치지 못한 것만 같다.
뒤늦게 드는 큰 후회.
그 후회가 안휘로 돌아온 후에도 계속해서 수룡의 성취를 막아섰다. 자신의 모습이. 스스로의 모습이. 부끄러운 것이다.
한참을 후회하고 반성하던 남궁수룡.
지성이면 감천인가.
그런 후회가 드디어 결실을 맞이했다.
넉 달을 간청하고 나서야 가주의 허락이 떨어진 것이다.
남궁이라는 이름도 어쩌면 아비라는 이름을 가리진 못하는 모양이다. 평생을 수련에 몰두하던 아들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허송세월하는 모습을 남궁걸은 차마 두 눈으로 지켜보지 못했다.
천하제일의 후기지수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 아들을.
다른 이의 손에 맡기기로 그가 결심을 굳힌 것이다.
수룡은 다른 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바로 짐을 쌌다.
공동파가 있는 곳, 평량을 향해서 말이다.
마치 그곳에만 닿으면 당연히 무정검이 있고 당연히 무정검과 검을 섞을 수 있을 거라 믿는 사람처럼 보이는 행동이었다.
이제 보름이면.
그간 자신을 옥죄이던 그런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수룡은 그렇게 낙관했다.
어쩌면, 무정검과의 대련을 통해 무언가를 또 깨닫게 될지도 모르지 않는가.
이미 자신이 무정검과 동렬에 드는 그런 무인이라는 자각은 지운 남궁수룡이다. 그저 하수로서. 하수로서 고수에게 가르침을 받겠노라, 그런 생각만이 수룡의 머리에 가득했다.
건너편으로 향할 나룻배가 다가온다.
부푼 기대를 품고 수룡이 살포시 나룻배에 올라탔다.
승선하는 그의 곁으로 회색 도복을 입은 도인 셋이 스쳐 갔으나 삿갓을 눌러쓴 그는 보지 못했다.
* * *
풍경이 울린다.
아직 찬바람이 여전한 계절임에도 수도승들의 어깨 위에는 그저 얇디얇은 황포만이 하나 걸쳐져 있을 뿐이다.
“아미타불-.”
풍경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자그마한 진언.
중원 만민의 마음을 평안히 만들고도 남을 그런 불기 가득한 소리가 숭산의 풍취를 더했다.
“고암아.”
당금 강호에서 한 문파의 장문인에 준하는 대우를 받는 철견권승(鐵肩拳僧) 고암을 저리 부를 수 있는 자가 중원 전역에 몇이나 될까.
조금 더 범위를 좁혀 소림사 내부에서만 본다면.
백미권존(白眉拳尊) 공초.
강호에서 오로지 셋에게만 주어진다는 존(尊)자 배분의 그만이 고암을 그리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예, 방장.”
“일은 어찌 되어 가느냐?”
하얀 눈썹이 기다랗게 내려와 감은 눈을 숨긴 노승, 공초가 고암에게 말을 묻는다. 무언가 진행 중인 일의 진척을 묻는 것이다.
“고상 사제가 이미 감숙으로 향했습니다.”
“아미타불-. 결국 고상이 갔더냐?”
고상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조금은 떨리는 공초의 눈썹.
이 떨림은 무언가 작은 불안함이 있는 이의 떨림이 분명했다.
“예, 방장. 다른 이들보다 얼굴이 덜 알려진 고상이 나을 듯하여…”
“아미타불-. 장경각(藏經閣)을 맡아 평생을 서책에 묻힌 그 아이가 거친 길을 나섰구나.”
공초는 평생 장경각에서 서책만을 관리하던 고상이 먼 길을 떠났다는 말을 듣자, 조금은 걱정이 앞선 모양이다.
“나한오승(羅漢五僧)을 함께 보냈으니 너무 걱정마소서, 방장. 아이들의 얼굴 역시 많이 알려지지 않았으니, 괜찮을 겁니다.”
“무거운 짐을 아이들에게만 맡기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구나.”
고상은 나이가 지천명이고 나한오승도 모두 이립을 넘었다.
감히 어리다 평할 나이는 아니지만, 공초의 눈에는 다들 아이로 보일 뿐이다.
“서응사(瑞應寺)도 조력할 것이니, 천수만 지난다면 걱정이 없을 겁니다. 연통도 천수가 마지막일 겁니다.”
“흠…, 서응사라…. 천축의 연이 중원에 다시 닿는구나.”
“소승이 일전에 난주에 들렀을 때 이미 말을 전해두었습니다. 또, 소승이 보기에는 감숙의 분위기가 크게 나쁘지 않았으니 별일 없을 겁니다.”
논검회의 소식이 닿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고암은 공초에게 논검회 소식을 고하며 준비하는 일이 있다는 말을 남겼었다.
아마도.
지금은 그 일이 끝을 향해 달리는 모양이다.
“공동은 어떠한고? 같은 무림인에게는 더더욱이 눈에 띄지 않아야 할 터인데.”
“그들은 고상을 알아보지 못할 겁니다, 방장. 또한, 공동의 제자들이 감숙을 벗어나 강호행을 떠났다는 말이 있습니다. 개방을 통하지 않아 확신할 순 없으나, 무정검 역시 감숙을 벗어날 것입니다.”
그저 공동이라 묻는 공초의 물음에도 고암은 무정검을 꺼내며 답을 뱉었다. 그에게는 공동이라는 이름보다도.
무정검이라는 이름이 더욱 무게를 가지는 것이다.
“흠…. 크게 문제가 되지 않겠다만은, 마주치지 않는 것이 최선이겠지.”
“옳습니다, 방장. 특히 조심하라 말해뒀으니, 눈을 잘 피할 것입니다.”
“허허. 무정검이 제법 신경 쓰이는 모양이구나.”
“예사 인물이 아니었기에….”
후하다.
고암은 소림의 제자에게도 이렇게 후한 평을 잘 내리지 않는 무인이었다. 그런 고암의 입에서 저런 말까지 나오게 했으니, 새삼 무정검이라는 자가 얼마나 대단한 지 다시 느끼는 공초였다.
“그저 마주하지 않기를…, 그저 스쳐 가기를 바랄 뿐입니다.”
고암이 조금은 불안한 눈빛을 머금는다.
이번 일이 딱히 감숙이나 공동에 해가 되는 일은 아니다.
부딪혀도 크게 문제 될 것은 없는 일.
허나, 소림의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이번 일을 조용히 처리하고 싶은 것도 사실이다.
일을 떠들썩하게 처리하는 공동과 그런 공동의 무정검에게는 더더욱 조용히 말이다.
“그리될 것이다. 그들과 딱히 관련이 있는 일도 아니지 않더냐?”
“맞습니다. 또한, 공동이 있는 평량과 사제가 향할 돈황은 거리도 매우 먼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미타불-. 모든 일은 순리에 따라 흐를지니…”
이미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손을 떠난 지 오래다.
소림을 떠난 고상은 이미 감숙에 닿았고, 나머지는 그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
그저 고암과 공초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도하는 일뿐일 것이다.
공초와 고암의 눈이 감긴다.
살짝 바람이 불어와 휘날리는 공초의 백미.
그런 경건한 풍경 속에서 두 노승이 그저 진언만을 조용히 읊조렸다.
“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