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아직은 스승이 아니니.
“그저 인사 드리러 왔습니다.”
접객실에 앉아 찻잔을 들어 올린 오봉학의 첫마디였다.
“개방이 평량에 새로이 분타를 열었으니, 응당 공동에 인사를 올려야지요. 허허.”
“이렇게 먼저 만나길 청해주셔 감사합니다. 본도 또한, 개방과 함께 지낼 수 있게 되어 기쁩니다.”
자정은 겸양하지 않고 오봉학의 인사를 받았다. 공동파의 장문인으로서 당연히 받아야 할 것은 받는 것이다.
“또한, 사죄도 드려야겠지요.”
“무엇을 말씀입니까?”
“이제야 분타를 여는 것에 대해서 말입니다.”
개방은 구파일방이 있는 영역에는 빠짐없이 분타를 가지고 있었다. 오로지 공동이 있는 평량을 제외하고 말이다.
“앞으로가 중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제부터 함께 강호의 풍파를 헤쳐나가길 바랄 뿐입니다.”
이번 대답에도 자정은 공동의 자존심을 지키는 적당한 말을 건넸다. 이는 철저한 계산에 따른 말일 것이다.
‘자정이라는 도인도···, 예사 인물은 아니로다.’
오봉학이 찻잔을 들어 표정을 감춘다.
찻잔의 밖으로 나온 시선은 자정을 슬쩍 가늠하는 눈빛이었다.
정문은.
이런 둘 사이에서 불편해 죽겠다는 표정을 연신 지으며 겨우 버텨내는 중이다.
‘빨리 끝내라···, 빨리.’
그저 시간이 흐르기를 간절히 바라는 정문이다.
“그리말씀해주셔 감사합니다. 해서, 개방이 작은 선물을 드리길 원합니다.”
“선물을요?”
“허허, 거지들의 선물이래야 뭐가 있겠습니까? 그저 강호의 풍문 한 줄 읊고 가겠습니다.”
오봉학의 말을 조금 곱씹어 본 자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는다.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손님 맞을 준비를 하십시오. 화산의 속가가 개파 할 즈음. 남궁과 당문, 소림 등에서 사절이 도착할 것입니다.”
!!
오봉학의 말에 자정과 정문. 두 도인의 눈이 동그래진다.
“남궁과 당문, 소림까지 말씀입니까?”
화산의 속가 개파를 축하하기 위해 몇몇 문파들이 사절을 보낼 것이라고는 자정도 예측했다.
하지만.
오는 이들이 남궁과 당문, 소림이나 되는 그런 거파일 것이라곤 예상하지 못한 자정이다.
물론, 정문도.
소림 정도는 예상했지만 남궁과 당문까지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남궁은 검문이라 그렇다지만, 당문은 왜···?”
접객실에 들고 난 후 처음으로 정문이 입을 열었다.
“허허, 무정검도 모르셨습니까? 당문은 한 문파와 아주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아!”
그제야 정문의 머리에 빛이 스친다.
당문은.
청성과 사이가 좋지 않은 문파로 유명한 곳이었다.
“역시 총명하십니다.”
고개를 연신 끄덕이는 정문을 보며 오봉학이 칭찬하는 말을 뱉자,
“노개, 말씀 낮추십시오.”
자정이 서둘러 말을 편히 하라 전한다.
“어찌 그러겠습니까? 무정검께서 싫어하시진···”
“펴, 편히 하십시오.”
정문은 조금은 굳은 근육을 사용하며 억지웃음으로 말했다.
올라가는 오봉학의 입꼬리.
“그래도 되겠습니까?”
“그, 그럼요.”
“그럼, 편히 하겠네, 무정검.”
“······.”
시간을 보채는 정문의 심정이 더욱 가속화되었다.
“주신 선물을 잘 활용토록 하겠습니다. 개방의 성의에 감사드립니다.”
“아닙니다. 선물인 동시에 간단한 영업이니, 개의치 마십시오.”
“영···업이라면···?”
“혹여 지재(知財)를 거래할 일이 생긴다면, 개방의 평량 분타를 찾아주십사하고···”
오봉학은 자신의 말이 부끄럽다는 듯 말끝을 줄였다. 하지만, 내심은.
자정의 속을 읽어보겠다는 뜻이 분명했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허허, 개방을 당연히 찾아야지요.”
“거래하는 곳이 따로 없으시다면, 찾아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럼요, 자주 소통하며 지내길 바랍니다.”
따뜻한 말들이 서로를 오간다.
그저 옆에 앉은 정문만이 이런 분위기가 따가울 뿐이었다.
“시간이 제법 흘렀군요. 이제는 일어서야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차를 한 번 들이킨 오봉학이 산을 내려갈 준비를 한다.
“벌써 가시는 겁니까?”
“전할 말은 모두 전했고, 들을 말 역시 모두 들었습니다. 이제는 내려가야지요. 자주 뵙게 될 테니, 너무 아쉬워 마십시오, 장문인.”
단호한 오봉학의 말에 자정은 그를 붙잡지 못했다. 그저 조천문까지 나서 그를 배웅할 뿐이었다.
“환대해주셔 감사했습니다. 자주 뵙길 바랍니다.”
고개를 숙이는 오봉학.
자정 역시 같은 자세로 오봉학을 배웅한다.
“발걸음 해주셔 감사했습니다. 자주 뵙겠습니다.”
자정과 시선을 교환한 오봉학이 옆으로 돌아선다.
먼저 인사를 건네는 정문.
“조심히 가시길.”
짧지만 후련한 적절한 대사였다.
“무정검.”
“예.”
“태청궁까지 길을 안내해주겠나?”
“예에?”
“늙으니 길눈이 어두워. 허허.”
“그냥 내려가시면 그만인 길입니다.”
“무정하구만···.”
오봉학이 입맛을 다시며 살짝 시선을 자정에게 보내자.
“정문은 태청궁까지 노개를 모시거라.”
근엄한 장문인의 명이 떨어진다.
“······.”
“가세.”
결국.
독대하게 된 오봉학과 정문.
정문은 아무런 말 없이 조금 앞장서서 계단을 내려갔다. 얼른 계단이 끝나길 바라며 정말 길 안내만 하려는 생각이다.
하지만.
“장문인께서도 보통은 아니시더군.”
오봉학은 아무 거리낌 없이 입을 연다.
“장문인 칭찬하셔도 소용없습니다. 이미 평량 거지들 쪽박 삼분지 일은 깨기로 마음먹었으니까.”
뒤도 돌아보지 않은 정문이 퉁명스레 말을 뱉었다.
“한 수씩 주고받았는데···, 봐줄 생각은 없나?”
분명 화음에서는 개방이 한 수를 당했으니, 동점인 셈이었다.
- 툭.
오봉학의 말에 정문의 발이 멈춘다.
- 스윽.
그저 손바닥이 보이게 한쪽 손을 내미는 정문.
“개인적인 부탁을 할 거면 뭐라도 주시고 그런 말을 하시던가.”
“···?”
오봉학의 얼굴에 당황이 아린다.
살다 살다 거지한테 뭐 내놓으라는 말은 그도 처음 듣는 것이다.
“······줄 게 있긴 있네.”
“쪽박이나 죽봉 주는 거면, 거지들 많이 힘들어집니다.”
“흑시창 지부를 감시하던 방도들을 치우겠네.”
!!
정문의 눈이 커진다.
방금 오봉학이 뱉은 말의 의도를 열심히 곱씹어 보는 것이다.
“영감님, 미쳤습니까?”
“오늘 보아하니, 공동이 흑시창과 결탁한 건 아닌 것 같더군. 자네 개인적인 거래였겠지?”
“······.”
“개인적인 거래까지 개방이 관여할 수는 없는 법이지.”
“······이제야 좀 말이 통하긴 하시네.”
“대신. 다른 제안을 하겠네.”
“제안···?”
“자네 개인적인 용무도 개방에 맡겨주게. 정식으로 입찰하겠다는 뜻일세. 흑시창 보다 더 뛰어난 일 처리를 보여주지.”
!!
이건.
나쁘지 않다.
정문은 그렇게 생각했다.
흑시창이 잘하는 분야가 있고 개방이 더 뛰어난 분야 역시 따로 있을 것이다.
중원에서 지재를 다루는 두 개의 단체와 모두 연을 맺는다면, 이는 정문에게 큰 이득이 될 것이 분명했다.
“···뭐, 생각 정도는···해보겠습니다···.”
“그거면 충분하지.”
- 씨익.
오봉학이 회심의 미소를 짓고는 발을 움직인다. 이 정도면 얻을 것은 모두 얻었다는 표정이 확실했다.
“길을 알려줘서 고맙네.”
“뭐, 독대 비용도 받았으니. 조심히 가십쇼.”
정문은 더는 말을 섞기 싫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또 보세.”
말을 마지막으로 철면노개 오봉학이 태청궁에 들어갔다. 정문은 잠시 그의 등을 보더니 다시 조천문으로 발을 옮긴다.
‘아무래도···, 구렁이를 마당에 둔 모양이네.’
개방과의 동거가 썩, 쉬울 것 같진 않은 정문이었다.
* * *
성모각에서 화산 속가 개파에 대한 자세한 일정이 발표되었다.
정확히 석 달.
석 달 정도의 시간이 필요할 거란 계산이 나온 것이다.
사문 내 소속 기관의 변화로 분주했던 공동파 도관 역시 차츰 안정을 찾아갔다.
이제는.
본연의 임무에 충실해야 할 시기가 다가온 것이다.
- 슈욱!
- 슈욱!
- 슈욱!
계속해서 바람을 가르는 거친 소리가 들린다. 쇠봉에 바위를 묶어 무게를 더한 무언가를 정문이 연달아 휘두르는 것이다.
- 슈욱!
그 무언가는 자신의 무게도 잊은 채 검과 같이 바람을 가를 뿐이다.
“대사형.”
그런 정문의 뒤로 나타나는 하나의 그림자.
정문이 손을 멈추고 땀을 닦는다.
천천히 그림자를 향해 시선을 던지는 정문.
“진명?”
“예, 사형.”
“어쩐 일이냐? 수련이라도 도와주리?”
“······그런 끔찍한 농담은 사양하겠습니다.”
“뭘. 스승님과 수련이 조금 익숙해지면, 다들 긴장하라고 전하거라.”
“······그걸 다시···?”
“해야지.”
- 씨익.
아마도 정문은 논검회를 대비하던 수련을 본산에서 다시 해볼 생각인 것 같았다.
조금은 오싹함이 진명의 등골을 휘감았다.
진명의 시선이 정문이 휘두르던 무언가에 닿는다.
묵직해 보이는 그 무언가.
‘저걸 휘두르는데 그런 소리가···?’
여전히.
사형에게 닿는 길은 멀게만 느껴지는 진명이다.
“사형께서 이제는 맡으셔야 할 사문 내 사무가 늘었습니다.”
“사무? 그냥 성장이라던데···?”
고개를 단호히 흔드는 진명.
“사형께서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홀로 성장해선 안 된다고.”
“그러니까. 너희 수련은 조금 익숙해지면···”
“이대제자들 수련입니다.”
!!
“이대···제자?”
정문의 동공이 조금 움직이며 자리를 못 잡는다. 이내, 아! 하며 생각이 떠오르는 정문.
공동에는 분명 이대제자가 있었다.
분명 정문이 처음 정신을 차리고 약왕당을 빠져나왔을 때. 그때 마주했던 광경은 이대제자들의 수련 현장이었다.
“내가 그 아이들 수련을···?”
“일대제자들이 돌아가며 아이들 수련을 봐주는 것이 원칙입니다. 원래라면, 사형께서도 나서셔야 하는 것이 맞지요.”
하지만.
정문의 기억 속에 이대제자들과 함께한 그런 기억은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원칙이 지켜지는 문파는 아니었습니다만···.”
아.
태상장로.
잊었던 그들의 이름이 다시금 떠오른다.
“영감님들 진짜 별의별 짓 다하셨었네.”
“······만약 아이들이 사문에 남는다면, 모두 사형의 제자가 될 아이들입니다. 그러니 가까이 두고 싶지 않으셨겠지요.”
“그래서, 이제 걔들 수련을 내가 봐주라고?”
“여전히 일대제자들이 돌아가며 보긴 할 겁니다만···, 가끔 마주치는 자리라도 만들라는 것이 자공 사숙의 의견이셨습니다.”
제자들의 무공과 관련된 사항은 모두 복마각에서 관리한다. 복마각주 자공은 권한을 되찾은 정문에게 상징적인 자리를 만들어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뭐, 나쁘진 않네.”
“가시겠습니까?”
“지금?”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간단하게 인사하고···, 수련도 좀 봐줘 볼까?”
- 씨이익.
정문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기겁하는 진명.
“미, 미리 말씀드리지만! 아이들은 거칠게 다루면 안 되는 법입니다!”
“내가 뭘 한다고?”
“사제들에게 시키는 수련! 그건 안 된단 말씀입니다!”
“안 해! 안 해!”
정문은 그저 너털웃음을 지으며 옷을 주워입었다.
대충 털고 매무새를 간단히 정리했을 뿐인데도 헌헌함이 어느새 돌아와 있었다.
진명을 따라나선 정문이 동대의 수련장에 닿는다.
조금은 설렘과 기대감이 가득한, 나이는 열둘에서 열다섯 정도의 아이들이 목검을 손에 쥔 채 정문을 바라본다.
“뭐···, 오랜만이다. 아직은 스승이 아니니··· 그래. 사숙이라 부르거라.”
정문은 아이들을 대하는 게 어색한지 어투나 시선 처리가 조금 어색했다.
“예! 사숙!”
이대제자들의 목소리가 특히나 우렁차다.
이건.
정문이라서 그런 것이 분명했다.
논검회에서 우승한 사숙의 가르침을 받는다니 이들의 눈에도 이채가 서리는 것이다.
“한동안은 내가 직접 너희 수련을 봐줄 것이다. 공동은 한 명의 강함이 아닌 여럿의 만남이 만든 곳. 너희와 나의 만남 역시 공동을 강하게 만들 것이다.”
“예! 사숙!”
사질들의 대답에 정문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사제들보다는. 사질들이 조금 더 귀엽게만 느껴지는 정문이었다.
“간격을 넓히고 검식을 펼치거라. 돌며 검로를 잡아 줄 것이니.”
정문의 말이 떨어지자 이대제자들은 서둘러 검식을 펼칠 공간을 만들어 냈다.
각자 충분히 검을 휘두를 공간을 두고 선 이대제자들.
“소양에서 칠살까지. 복마검결을 배합이 아닌 순서로 풀거라.”
“예! 사숙!”
정문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웅장한 진각 소리가 연무장을 채운다.
그리고.
펼쳐지기 시작하는 수십개의 복마검결들.
- 쉬이이익!
- 샤아아악!
- 쉭!
저마다 다른 소리를 뿜어대지만, 겉모습만큼은 같은 검로임이 분명했다.
“어깨를 더 올리도록.”
“중심을 낮추거라.”
“격(擊)이 아닌 회(回)에 더 집중해야지.”
“비는 검로는 개의치 말거라. 훗날 광진검이 채울 것이다.”
정문은 이대제자들이 휘두르는 검로 사이사이를 다니며 이들의 자세를 잡아준다.
가볍게 던지는 말에도 정확히 빈틈을 알려주는 것이 가르치는 데에 소질이 있어 보였다.
- 쉬이이익!
이대제자들이 내는 파공음이 달라진다.
이제는 통일된 소리가 연무장을 채웠다.
“그만.”
정문의 말이 떨어지자, 목검이 일시에 낙하를 멈춘다.
“앞으로 수련은 이렇게 진행된다. 늘 한 시진씩 검술을 봐줄 테니, 그리들 알거라.”
“예! 사숙!”
우렁차게 답을 뱉는 사질들을 뒤로 정문이 등을 돌린다.
“귀여운 사질들이 아닙니까?”
다가서는 진명.
조금은 단호히 사질들을 대하는 정문에게 애써 귀엽다는 말로 분위기를 풀어보려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정문의 표정은 반원을 그린지 오래다.
“후후후. 아이들이 검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니 공동의 미래가 밝구나.”
정문은 아이들이 제법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맞습니다, 사형.”
“문제는.”
“······?”
“지금이 어둡다는 것이겠지···.”
“예?”
“암, 이대제자들의 무재에 비해 일대제자들이 너무 처짐이야.”
!!!!
“아, 아닐걸요? 저 아이들이 그 정도는···”
격한 반응으로 반박하던 진명의 입이 멈춘다.
그가 바라보는 자신의 사형, 정문의 눈에.
이대제자들을 향한 무언가가 서려 있음이 분명히 보였기 때문이다.
“저 아이들은 하늘이 내린 기재들이 분명하다. 암, 누구의 제자가 될 아이들인데!”
“사, 사형···!”
진명의 부름에도 정문의 말은 멈추지 않는다.
“내 스승 될 사람의 도리로 앞길을 잘 닦아 둬야겠다.”
이미 정문의 눈에는 자신의 제자가 될 아이들을 향한 콩깍지가 단단히 씐 것이 분명했다.
“······.”
“사제들을 부르거라.”
“예? 사제들은 왜···?”
“못난 놈들을 고쳐서! 내 제자들의 앞길을 열겠다!”
사제들의 비명이 벌써 환청으로 들려오는 진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