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화 〉 042. 변화일세. 변화.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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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반촌에서 멀지 않은 도시 평량.
그런 평량의 끝자락에 있는 공동산은 오늘도 굽이치는 연지하(胭脂河)를 내려다보며 평화롭기가 그지없었다.
“정문에게 통천패를 보내셨다지요?”
공동에서 장문인보다도 바쁘다는 태청궁주 자명이 웬일로 황성각까지 찾아와 사형인 자정과 차담을 나눈다.
“음. 잘 받았는지 모르겠군.”
“허허, 통천패라니. 생각지도 못한 일을 벌이셨군요.”
“생각대로만 일을 벌이면 어디 사숙들께서 가만히들 계시겠나.”
“이렇게 벌어진 일에는 가만히 계실 분들 같습니까?”
- 씨익.
자명의 입꼬리가 크게 올라간다.
자신의 사형인 자정은.
이런 사람이다.
늘 정도를 지키며 아슬아슬하게 자리를 겨우 지켜내는 사람과 같이 보인다.
겉으로는.
속은 누구보다 복심을 가득 채운 사람이 바로 자정이리라.
“참, 대단하십니다. 뭐. 책임은 사형께서 혼자 지시는 거 아시겠지요?”
“허허, 사람 말하는 것 하고는. 장문인이 제자들을 좀 내보냈기로 무슨 책임을 진단 말인가.”
자정의 말에 어폐는 없다.
그저 일반적인 다른 문파라면 말이다.
다만 그들이 속한 문파는 공동파였고, 공동의 사문 내 권력이라는 것이 그렇지 않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말이다.
“정문이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입에 오르내릴 것입니다. 결국, 저들···, 아니. 사숙들께선 트집을 하나하나 잡으실 테지요.”
“흠. 그런가? 헌데, 그건 정문이 조심해야 할 일이 아닌가. 내가 뭘. 허허.”
- 호르륵.
걱정하는 자명의 말에도 자정은 그저 찻잔만을 들어 올릴 뿐이다.
“되겠습니까?”
갑작스레 눈을 치켜뜬 자명이 조금은 무겁게 물었다.
“허허, 사람. 무섭네. 무얼 말인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되묻는 자정.
“아시지 않습니까? ‘일’의 ‘마무리’ 말입니다.”
“글쎄. 정문이 알아서 할 일이겠지. 그저··· 믿고 맡겨보는 수밖에. 그 아이가 돌아온 후는 늘 놀랄 일들만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사풍을 이긴 것과 산화사괴를 잡은 일 말씀입니까? 그건 사문의 대제자라면 응당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자명은 정문을 분명 아군으로 인식한다.
좋게 보는 것도 사실이다.
이전과는 달리 제법 능글맞아진 모습이 퍽 싫진 않았다.
다만.
자명은 공과 사의 구별이 확실한 사람.
그저 자신의 마음에 드는 사질이라 하여 무조건 옳다 칭찬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걸 말하는 것이 아닐세.”
“허면, 무엇을요?”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몸을 조금 앞으로 내미는 자명.
성격이 느긋하지 않은 그에게는 이런 선문답이 조금은 답답하다.
“사풍.”
짧게만 답하는 자정.
“사풍 말씀입니까? 사풍이 왜요?”
“이번 속가행을 나가는 것에 사풍이 직접 정문의 이름을 써서 제출했다지?”
“그건 맞습니다만···, 모종의 밀약이 아닐지···.”
자명의 말에 고개를 젓는 자정.
“변화일세. 변화. 정문과 가까워진 후 사풍이 점차 변하고 있는 거야. 나는 그 변화가 정문이 이뤄낸 가장 놀라운 것이라 보네.”
“······, 좋은 말씀입니다. 허나. 아직 완전히 변한 것은 아니지요.”
“허허, 자네는 여전히 냉정하군. 여전해. 자네 말이 맞네. 하지만, 제자의 작은 성취에도 스승은 늘 기뻐하는 법이라네.”
“······, 사형께서 그리 생각하신다면야···.”
사풍의 변화라.
아직 자명은 그에 대한 확신을 가지지 못한다. 다만, 녀석이 변하고 녀석의 주변에 있는 아이들마저 변화를 따른다면.
사태는 일거에 해결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 호르륵
차를 들이켜던 자정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왔군.”
덤덤히 한 마디를 뱉는 자정.
그리고는.
- 다다다다다다.
- 드르르륵! 탁!
거침없는 발소리와 함께 집무실의 문이 거칠게 열린다.
감히 누가 장문인의 거처에 저리 무례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자명 역시 이내 나타난 이들을 보더니 한숨만을 푹 내쉬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외까!!!! 장문이이이인!!!!!!!!”
흡사 공격과도 같은 내력이 실린 노성이 터진다.
공동의 태상장로이자 자정과 자명의 사숙인 공명이 찾아온 것이다.
물론, 혼자 온 것은 아니었다.
그의 뒤로 공준, 공산, 공환, 공군의 공동오로(崆峒五老)와 함께 미처 그들을 막지 못한 구천각주 자산이 뒤를 이어 모습을 나타냈다.
“사숙을 뵙습니다.”
동시에 고개를 숙이는 자정과 자명.
“내 분명 무슨 일인지부터 물었소이다!”
아무리 태상장로에 장문인의 사숙이라 해도 기본적인 예법이란 게 있다. 적어도 사문에 소속된 무인이라면 응당 장문인을 뵘에 인사를 건네는 것이 예의.
지금 공명은 그런 예의도 무시한 채 그저 소리만을 질러댈 뿐이다.
“무슨 일을 말씀입니까?”
“검문첩이 이미 공동에 전해졌다는 게 무슨 소리냐 묻는 것이 아니오!!”
평소 공명이 이 정도로 소리를 질러대면 공준이 나서 애써 말리는 척이라도 하는 것이 이들의 관례였다.
다만 오늘은.
공준 역시 그저 눈을 날카롭게 하고 뒤에 서서 자정을 노려볼 뿐 아무런 제지가 없었다.
공준이 앞으로 나선다.
“장문인. 자세히 설명을 좀 해주시지요. 노도들이 귀가 어두워서인지 들은 말이 퍽 의심스러워 이리 발걸음을 했습니다.”
평소처럼 겉으로는 정중함을 품은 말이다.
다만, 평소와는 달리 꾹꾹 감정을 눌러 담아 끊어 말하는 것이 자신이 화났음을 전달하려는 의도 같았다.
“속가행을 떠났던 제자들을 육반촌에 모이게 하여 모두 화산으로 향하게 했습니다. 검문첩이 날아왔기에 논검회에 참가하라 명했지요. 정문이 사제들을 인솔할 것입니다.”
자정은 한 치의 떨림과 당황도 없이 상황을 설명했다. 조금의 눈치도, 조금의 두려움도 없는 말투였다.
“장문인···!”
공준의 볼이 떨린다.
턱이 조금 튀어나온 것이 이를 꽉 깨문 것 같이 보였다.
“속히 귀환령을 내리시지요. 논검회라니요? 이런 일을 어찌 중진들과 상의도 없이 정하셨다는 말씀입니까? 사문에는 정해진 절차가···”
“상의했습니다.”
공준의 말은 다른 곳에서 잘려나갔다.
옆에서 조용히 차를 홀짝이던 자명이 그의 말을 자른 것이다.
부들거리는 눈으로 자명을 노려보는 공준.
“태···청궁주께서 계셨구려···. 상의를 했다는 말씀은?”
“장로 회의를 거쳤으면 된 것이 아닙니까? 전 들었습니다. 자네는 못 들었나?”
자명이 턱으로 구천각주 자산을 가리키며 물었다.
“드, 들었습니다!”
서둘러 답하는 자산.
“······. 정식으로 열린 회를 통해··· 규율과 예법에 맞게···”
“그리 예법을 좋아하시는 분들이 어찌 아직 장문인께 인사조차 하지 않으십니까?”
!!!
“······.”
“뭐···뭐라?”
공준에 의해 뒤로 물러섰던 공명이 다시금 인상을 치며 튀어나왔다.
“예법을 논하기 전에 사숙들 먼저 예법을 익히셔야 하는 것은 아닌가 묻고 있습니다!”
!!
자정은.
늘 이들을 사숙과 태상장로 대우하며 살아왔다. 남들이 보는 곳에서 이들과 반목하지 않았으며 언제나 이들에게 시달리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바로 자정이었다.
자정이 이들에게 그토록 약하게 대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단 한 가지.
바로 사문 내에 이들을 존경하는 이들이 많다는 점이었다.
일대제자에서 이대제자, 그리고 몇몇 장로들 및 속가까지.
공동오로라 불리며 수많은 일화와 협행을 쌓은 그들이 아직 사문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던 이유는 바로 이 ‘존경’이었다.
만약 젊은 장문인인 자정이 이들을 무시하고 이들의 말을 일방적으로 배제하는 일들을 계속해왔다면, 사문 내에 개입한 공동오로가 아닌 자정이 그 비난을 모두 감수했어야 할 것이 뻔했다.
하지만.
자명은 다르다.
자명은 우선 장문인이 아니다.
그저 사문의 업무를 집행하는 장로일 뿐이다. 그것도 공동에서 제일 바쁘고 업무가 많다는 태청궁의 궁주.
그렇기에 자명은.
이들과 반목하고 이들의 말을 무시해도 자정만큼 큰 비난을 듣지 않는다는 말이다.
거기에.
태청궁의 인사를 사풍의 파벌로 모두 도배하며 자명과 이들의 사이는 크게 틀어졌다.
만약 이러한 사실까지 모두 알려진다면, 크게 자명을 욕할 인물은 없을 것이다.
“자명이 네놈이 드디어 미친 게로···”
당장에 삿대질부터 내지르며 소리치려는 공명을 공준이 제지한다.
“공며엉! 물러나 있거라!”
분명 공준은 공명에게 소리를 쳤다.
다만, 그 화가 공명을 향한 것이 아님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예법에 서툴렀던 것은 사죄드리겠습니다. 다만, 사안이 사안인지라 서둘러···”
“사안도 그렇습니다. 사숙들께서는 원로들이 아니십니까? 절차가 문제라면 장로들이 문제 삼으면 될 일. 어찌, 사숙들께서 나서서 이리 소란이신지 소질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크흠.”
자정이나 자산, 자준과 자환, 자공 같은 장로들과 달리 자명은 태상장로들과 직접 부딪힐 일이 적었다.
장로 회의에 잘 참석하지 않는 이유도 있었고 자명이 성격상 이들과 대면하는 것을 원치 않았던 이유도 있었다.
평소 다른 장로들처럼 자신들을 존경과 어려움을 바탕으로 대하는 것이 아닌, 그저 논리와 냉정함으로 대하는 자명을 만나니 공동오로도 감히 맞설 수가 없다.
“원로란, 사문에 조언하며 도움을 주는 이들이 아닙니까? 원로의 입장에서 절차가 어긋났음을 지적하는 것이 어찌 그리 큰일이겠습니까?”
공준이 차분히 화를 가라앉히고 반박에 나선다. 충분히 모욕적일 수 있는 상황이나 사안이 사안인 만큼 공준 역시 물러설 수는 없었다.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장로들은 동의했다고. 장로의 과반수가 문제 삼으면 재차 회의가 열릴 테니 의견을 모아보시던지요.”
자명의 재반박에 공준이 눈을 감는다.
자정이 하필이면 이 시기에.
하필이면 속가행으로 일대제자들이 자리를 비운 틈에 일을 진행한 이유를 이제야 알 것도 같은 공준이다.
태상장로는 명예직.
존경을 받아야 이들의 권력은 강해지는 법이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존경을 주는 자들이 누구인지 살펴봐야 한다.
‘일대제자.’
공동오로의 일화와 무명을 가장 많이 접하고 그들과 가까이서 소통했던 항렬은 단연코 일대제자일 것이다.
사풍을 따르는 대부분의 아이들이 태상장로의 친손자라는 이유만으로 사풍을 따르는 것이라 평할 정도이니 말이다.
반대로 ‘장로’의 항렬은 다르다.
번번이 사문의 일에 개입하며 그들과는 이미 관계가 틀어진 지 오래다.
몇몇이 아직 태상장로들을 지지하고 있긴 하나 그들의 세력은 미약하기 그지없었다.
거기에.
태상장로를 지지하는 일대제자들인 사풍의 파벌은 지난달 속가행을 이유로 모두 공동산을 떠났다.
즉, 지금 공동산 내에는 태상장로를 지지해줄 기반 세력이 없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그야말로 자정이 오랜 기간 노려온 한 수.
자정이 속가행 명단을 정함에 정문을 도와주지 않았던 이유가 여기 있었다. 사풍의 파벌이 사문을 떠나야 결국 태상자로들의 권력이 약해지는 것이니 말이다.
“······. 장문인···!”
공준이 자명에서 시선을 거둬 자정에게 향한다.
“말씀하시지요.”
“이 모든 걸 준비하신 겁니까?”
“무엇을 말입니까?”
“모르는 척하지 마시지요!”
- 호르륵
이미 식어버린 찻잔을 아무렇지 않게 들어 올리는 자정.
“그저 순리대로 일을 처리했을 뿐입니다.”
“···!!”
논리도, 권력도 지금은 밀리는 상태다.
여기서 목소리만 더욱 뽐내봤자 자신들만 우스워진다는 것을 모르는 공준이 아니었다.
“···돌아가자.”
“······.”
“가십니까?”
자정이 일어서 최대한 예의 바른 모습으로 배웅한다.
돌아보는 공준.
“그들을··· 이길 수 있을 거라 믿으십니까?”
그의 입을 타고 의미심장한 말이 터져 나온다. 아무런 힘도, 감정도 담지 않고 뱉은 말에서 더욱 위압감이 뿜어진다.
그거 고개를 젓는 자정.
“그래도···, 제자들을 그리로 보내셨단 말입니까?”
“꼭 이겨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
자정의 입이 떨어지는 순간.
“만용(蠻勇)이다! 자정! 만용이란 말이다!”
공준의 얼굴이 일시에 무너지며 노성을 담은 하대가 뿜어졌다.
“사숙!”
갑작스레 공준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하대에 자명이 서둘러 소리쳤다.
공준은 늘 화를 참지 않으면서도 지킬 것은 지켜가며 자정을 압박했다. 이런 모습은 처음이다.
“괜찮다.”
자명을 앉히는 자정.
그런 자정의 얼굴을 공준이 뚫어지라 노려본다. 자정의 마지막 말에 공준이 이성의 끈을 놓은 것이다.
“사숙께서는···, 아직도 그날이 잊히지 않으시는가 봅니다.”
!!!
“니···니가 감히···! 그날을 들먹이는 것이냐!”
“그저 지나간 날 중 하나일 뿐이 아닙니까.”
“그게 만용이라는 것이다! 너에게는 평생을 추억할 날일지 모르나, 누구에게는 평생의 족쇄가 될 수 있음을 왜 모르느냐!”
“전 이미. 잊었습니다.”
!!
공준의 손이 떨리며 이마로 향한다.
힘을 주어 자신의 눈 위를 연신 주무르는 공준.
“후회할 거요. 족쇄에 묶인 제자들을 보며 절망할 것이고. 명심하십시오. 이는 모두 장문인께서 초래한 일임을.”
공준의 말투가 평소처럼 돌아왔다.
조금은 분을 삭이고 냉정해지려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겠습니다.”
담담히 답하는 자정.
“또한! 이번 일이 끝난 후! 밖에서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 따져 책임자에게 그 책임을 물을 것이니! 이 또한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얼마든지요.”
“정문이··· 나가서 행하는 모든 일이 티끌 하나 없어야 할 터이니···! 기대하십시오.”
“잘 해낼 겁니다. 사숙.”
“······, 돌아가자.”
공준을 위시한 공동오로는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은 채 발을 돌렸다.
“가는 순간까지도 예법에 어긋나는군!”
그들에게 인사조차 건네지 않은 자명이 홀로 소리쳤다. 조금은 소리가 커서 공동오로의 발걸음이 주춤했지만, 무어라 말은 들려오지 않았다.
“사형! 이대로 물러가선 안 되는 것 아닙니까?”
“······라.”
“예?”
“그 입 닥치라 했다!”
뒤에서 공준을 보채던 공명이 공준의 얼굴을 보고 그만 까무러칠 뻔했다.
야차(夜叉).
흡사 야차처럼 일그러진 얼굴의 공준이 입을 비틀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정···, 감히 그날의 일을 꺼내다니···! 두고 보거라. 정문의 행동에 흠이 하나라도 있는 순간! 놈을 내 파문시켜버리고 말 터이니!”
공동산에는 분명 범이 살지 않는다.
다만, 이날만은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공동산에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