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화 〉 031. 너무 정직하면, 부러지고 맙니다.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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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오셨습니다. 대공무관의 관주, 한수량입니다.”
멋들어진 눈썹과 수염이 잘 어울리는 중년인이 진사풍의 손을 부여잡는다.
대문 밖까지 나와있던 한수량은 서둘러 본산의 제자들을 무관 안으로 안내했다.
그들이 넘는 대문의 위에는 ‘공동속가(崆峒俗家) 무위제일(武威第一) 대공무관(大崆武館).’이라는 글자가 자랑스레 걸려있다.
다른 문파의 인물이 봤다면 건방지다며 핀잔을 줄 수도 있는 이름이다.
반대로 공동의 제자들 눈에는 자랑스럽기 그지없는 현판이었다.
“하아압!”
“합!”
“타아압!”
무관의 문턱을 넘자, 우렁찬 기합이 이들을 반겼다.
“소양검(少陽劍)이군요.”
잠시 멈춰 이를 바라보던 진명이 활짝 미소를 짓는다. 사문 밖에서 만난 사문의 검술이 반가운 것이다.
“허허, 정확하십니다.”
“모를 수가 없지요. 대공에서는 어디까지 가르치시는지요?”
“소양(少陽)과 혼원(混元), 그리고 천운(天雲)까지 가르치고 있습니다. 비봉수(飛鳳手)와 추운권(追雲拳)도 가르치지요.”
속가는 본산의 모든 무공을 가르칠 순 없다. ‘속가 제자’가 익힌 무공이 무엇이든지 말이다. 그저 사문 내 규율로 정해둔 사항에 맞춰 가르침을 행할 뿐이다.
“좋은 검술들입니다. 특히 천운이 중하지요.”
잔뜩 신이 난 진명이 한수량과 담소를 나눈다.
“관주는 어디까지 수련하셨습니까?”
“복마검결(伏魔劍訣)을 겨우 수련했습니다. 허허.”
복마검결이라면 칠살검(七殺劍)까지는 익혔다는 말이 된다.
속가 제자치고는 제법 많이 배운 축에 속한다. 어쩌면 속가 제자가 배울 수 있는 모든 것을 배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기재셨군요. 대단하십니다.”
진명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투로 인사를 전한다.
재능이 없었다면, 현천검(玄天劍) 정도에서 하산해야 하는 것이 속가 제자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허허, 본산의 제자분들만 하겠습니까?”
한수량의 겸양이 과하지 않게 들려왔다.
무관을 둘러본 이들은 어느새 관주 집무실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본격적으로 이번 속가행에 대해 대화를 나누려는 것이다.
“우선은, 이리도 유명한 분들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한수량이 다시금 본산의 제자들을 향해 고개 숙였다.
본디 무림에 관련된 일로는 별다른 소식이 없는 감숙이다.
그런 감숙에서 벌어진 산화사괴와의 혈전은 아직도 감숙성 전역을 돌며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는 중이다.
“······, 그 이야기는···.”
사풍을 비롯한 진명, 명화, 묵환 모두 그날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별로 반가워하지 않는다.
이들이 겪은 일과는 너무 동떨어진 말들이 풍문으로 떠돌았기 때문이다.
아직도 광풍참절도법이며 멸사쌍륜참이란 소리가 들려오면 얼굴이 붉어지는 이들이었다.
정문만이 끼룩끼룩 소리를 내며 웃어넘길 뿐이다.
인사를 마친 한수량은 그간 금마세가와 있었던 일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들이 서서히 대공무관을 압박하기 시작한 일과 이유에 대해서.
“그러니까, ‘도관’을 지은 일 때문에 이리 분쟁이 생겼단 말씀입니까?”
진명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습니다. 작년에 ‘뇌대(雷台)’에 지은 도관과 땅을 올해에 와서야 넘기라며 요구해오더군요. 도관이 들어서면 자연스레 공동의 영향력이 커질까 두려워하는 거겠지요.”
“허어.”
탄식만이 세어나온다.
그러면서도 따뜻한 눈빛들이 한수량의 얼굴에 꽂힌다.
본디 속가는 본산의 믿음을 따를 필요는 없다.
본산을 방문했을 때, 예법에 맞춰 향화(香火) 정도는 하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속가가 왜 속가인가. 도교니, 불교니 하는 것에 얽매이지 않기에 속가가 아닌가.
중원 무림에 가장 많은 속가를 둔 문파는 소림(少林)이다.
만약 속가가 본산의 믿음을 따라야 했다면, 중원 무림의 절반은 중이었을 거란 말이 된다.
그런 무림 정서에도 불구하고 도관을 지어 운영한다는 대공의 말은 참으로 감사한 것이다.
“대공의 헌신에 감사드립니다.”
정문이 대제자 다운 자세로 인사를 건넨다.
‘크, 돈 많은 속가는 소중하지!’
정문이 이채가 가득한 눈으로 한수량을 바라봤다. 도관 하나를 운영하는 데에는 돈이 많이 든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 정문이다.
이어서 한수량은 이제는 중재가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계속했다.
자신들이 본산에 서신을 보내자, 저들이 놀라며 도전장을 접수했다는 말과 함께.
“비무로 이권을 가리자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허허. 저들도 공동의 이름이 무섭긴 무서운가 봅니다. 허허허.”
장난스레 뱉는 한수량의 말에서 공동의 속가라는 자부심이 느껴진다.
“불리한 조건입니다. 우리만 잃고 저들은 잃는 게 없지 않습니까?”
진명이 날카롭게 지적했다.
“그건 아닐 거다. 저들도 거는 것이 있으니 관주께서 도전장을 접수하시지 않았겠느냐?”
진명의 지적에 정문이 답해줬다.
맞는 말이다.
무언갈 얻기 위해서는 자신의 것도 걸어야 하는 것이 무림이다.
“정확하십니다. 저들에게 저도 요구한 것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호기심 어린 정문의 질문에 한수량이 차를 들어 올리며 숨을 고른다.
찻잔 너머로 보이는 그의 안광이 평범하진 않다.
- 툭.
찻잔을 내려놓는 한수량.
그의 입이 조심히 열린다.
“현판을 달라했습니다.”
!!!!!
“혀, 현판을요?”
“딸꾹-!”
“어······.”
각양각색의 반응이 터져 나온다.
본산 제자들의 반응과 별개로 차분히 차를 들이켜는 한수량.
한수량 역시 보통의 인물은 아니다.
현판이란 한 문파를 상징하는 것으로 어떤 때에는 문파 그 자체로 보기도 하는 것이다.
특히 무림에서 현판을 내린다는 말은 곧, 멸문을 뜻하기도 한다.
“와! 관주님 화통하시네!”
잠시간에 가라앉는 침묵을 정문의 목소리가 깨버린다.
“야, 이거 어떻게 본산으로 못 모시나? 느슨해진 공동에 긴장감을 주실 분인데? 이게 패도지!”
정문의 입이 터진다.
주변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털어대는 입.
“본산은 느슨하지도 않고 이미 긴장감을 주는 괴이한 도사가 있답니다.”
명화가 조심히 다가서 정문의 목덜미를 잡고 끌어당긴다.
이제 정문을 제압하는 데에는 명화가 도사다. 아, 원래도 도사고.
“크흡! 뭐···, 어쨌든 공···정한 비무가 되겠군요.”
사풍이 살짝 기침하며 말을 이어붙인다.
정문이 한 말은 잊자는 암묵적인 표현이었다.
“허허, 걱정은 없습니다. 금마세가는 인원수가 많고 재력에 있어서는 우리보다 앞서갑니다. 허나! 개개인의 무력은 감히 대공에 비할 것이 못 됩니다!”
- 탕!
한수량이 말하며 흥분했는지 살짝 탁상을 내리쳤다.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보니 걱정할 것은 없어 보였다.
“본도들이 딱히 할 일이 없겠군요.”
속가행의 책임자답게 사풍이 상황을 정리한다.
도울 것이 있으면 얼른 말하라는 뜻이다.
“대공이 저들과의 전면전을 피하며 중재를 요청한 건 무관의 제자들 때문입니다. 저들의 세가 워낙 크기에 소모전으로 간다면 피를 볼 것이 뻔했지요.”
“과감한 용단이셨습니다.”
“비무는 제자들이 피를 흘릴 필요가 없습니다. 부담도 덜하지요. 그저 무관에 머무시며 비무에 나설 이들의 검술을 조금 봐주시지요.”
한수량의 부탁이 소박하다.
어느 속가든 본산의 제자가 오면 해봄 직한 부탁이며, 중재보다는 가벼운 부탁임이 확실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사풍이 웃으며 대답했다.
안에서야 모난 돌이지만, 밖에선 그 역시 공동을 대표하는 헌헌한 일대제자 그 자체였다.
이후 하하호호 하는 소리가 조금 더 들리고는 자리가 파했다.
먼 길을 온 이들이 고단할 거라는 한수량의 배려였다.
사실 고단하기는 이들을 모시고 온 마적들이 더 고단하겠지만, 그들이야 뭐, 옥에서 푹 쉬고 있을 테니 걱정은 없다.
다음 날이 밝자, 관주 한수량과 소관주 한강, 검술 사범 백오의 검술을 차례로 견식한 본산의 제자들은 각자 맡을 이를 정해 개별 수련을 시작하려 했다.
“그냥 광진검 가르쳐 드리고 끝내자.”
한마디를 했을 뿐이다.
그저 한마디.
그리고 정문은 철저하게 수련에서 제외당했다.
사제들도 정문에게 누구를 맡겼다가 나올 결과물이 상상이 안 되었기 때문이다.
“진짜 가르칠까 봐 겁이 납니다.”
“말도 안 되는 짓 할 생각 마요!”
“마, 막으랬습니다.”
“사문으로 날아가는 전서구를 보고 싶은 거요?”
넷이서 손가락질하며 소리를 질러대니 정문도 어찌할 방법이 없다.
“쳇.”
하는 소리를 몇 번 내더니 입술을 삐죽이던 정문이 이내 무관을 나서 저자로 향해버렸다.
“허허, 이거 복마검법을 배울 기회를 놓친 것 같습니다?”
한수량이 이들의 투닥거림을 보고는 크게 웃는다.
그래.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인 법이다.
명화는 소관주를 맡아 소양검과 혼원검을 중점으로 수련시켰다.
“소양검은 가장 기본 검술이에요! 하지만 그 말이 가장 쉬운 검술이란 뜻은 아니죠. 검 끝에 더욱 집중해봐요. 그래야 양의 검로가 보일 거예요!”
진명은 검술 사범 백오를 맡아 소양과 혼원, 천운을 혼합하는 법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천운을 따로 떼어서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천운의 변화는 소양과 혼원의 검로에서 틀어져야 비로소 의미가 있는 것. 개별적인 검술이 아닌 하나의 검결로 파악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사흘이란 시간밖에 주어지지 않았으나, 이미 틀이 잡힌 검이라면 충분히 성장할 가능성이 있었다.
- 하나라도 더 얻어 내야 하느니라!
무관주 한수량이 아들 한강과 사범 백오에게 밤부터 내내 강조했던 말이다.
본산의 제자에게.
그것도 요즘 가장 유명한 제자들에게 검술을 지도받는 경험은, 속가에게 흔한 것이 아니었다.
이는 물론 한수량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목검을 역수로 말아쥔 한수량이 사풍을 향해 포권했다.
하수가 고수에게 보내는 예의.
한수량은 자신의 아들뻘인 사풍을 향해 거침없이 고개를 숙였다.
본산과 속가의 관계를 떠나, 공동이라는 대문파의 일대제자에게 보내는 존경의 표시였다.
“복마검결을 익히셨다면, 따로 검술 지도는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혹, 광진검은···?”
사풍이 너무 진지하여지자 이를 조금 풀어주려 한수량이 농담을 던져본다.
“잊으십시오.”
“하하하.”
긴장감이 조금은 풀리고 이내 다시금 분위기가 잡힌다.
“지금 필요한 것은 실전이겠지요.”
“감히 부탁드립니다.”
“저 역시 복마검결만 사용하겠습니다.”
“그럼, 감사히.”
목검을 올려 드는 한수량.
사풍 역시 고개를 꾸벅하며 예를 표한다.
“가겠습니다.”
사풍이 검을 털 듯 아래로 뻗는다.
오라는 뜻이다.
가볍게 검을 갈무리한 한수량이 사풍을 향해 뛰어든다.
- 쉬이익!
- 후욱!
혼원검과 현천검을 적절히 배합한 복마검결이 사풍을 덮쳐온다.
- 따악!
- 딱!
사풍의 검이 무심하게 관주의 검을 쳐낸다.
“패도적인 기운은 좋습니다. 공동의 본질이기도 하지요. 허나, 너무 정직하면, 부러지고 맙니다.”
조금 물러선 한수량이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다시 뻗는다.
칠살검에 천운검을 섞은 기발한 검로가 펼쳐졌다.
사풍의 어깨를 향하는 한수량의 검.
칠살검의 검식이 분명했다.
“좋습니다. 잘 속였구요. 다만···”
사풍의 어깨를 후벼파듯 찔러오던 한수량의 검이 직전에야 검로를 틀어 허리로 향한다.
검이 지나간 자리가 마치 곡선과 같은 모양이다.
- 딱!
사풍의 검이 단호하게 한수량의 검을 옆으로 쳐낸다. 중심을 잃어버리는 한수량.
사풍이 이를 놓치지 않고 허리에 목검을 살짝 가져다 대었다.
- 퍽!
“변화에 너무 집중하면, 이렇게 균형이 무너지는 법이지요.”
“그, 그렇군요. 허억. 헉.”
한수량의 얼굴이 땀으로 가득하다.
숨도 쉬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기쁘다.
자신이 본산에서 검을 배운 것은 이미 20년도 더 지난 일.
홀로 복마검결을 수련하며 벽을 만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닌 한수량이다.
그런 그에게 사풍이 일러주는 것들은 모두 자신이 보지 못했던 것들.
어쩌면 금마세가가 시비를 걸어 온 것이 대공무관에는 큰 홍복일지도 모르겠다.
한수량의 눈이 밝게 빛난다.
“한 번 더 가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요.”
사풍이 가볍게 웃으며 검을 턴다.
그렇게 땀을 흘리는 사이 사흘이 빠르게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