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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놈에서 고수까지-197화 (197/202)

# 197화

진수상은 냉철하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자기 자신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약관의 나이에 집안을 떠맡던 아버지를 비롯해 많은 사람이 죽었고, 고수를 모두 잃은 허울만 남은 가문을 책임져야 하는 위치에 올라섰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수모와 한순간에 변하는 사람들의 낯을 보아와야 했다.

어려서부터 친하게 지냈던 여러 무가의 자제들은 한순간에 등을 돌렸고, 형제처럼 대했던 벗들이 그의 곁을 떠났다.

그때부터였다. 힘을 갈구한 것은.

그로부터 이 십여 년이다. 겨우 이립도 되기 전 절정에 올랐던 그는 자신의 무재를 믿었고, 단 하루도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

그 과정이 험난했고, 아버지 형제들의 피를 보아야 했었지만 진수상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본가 없는 분가라니 어불성설이라 생각했다.

절강의 다 쓰러져 가던 곧 멸문할 거라 평가받던 가문을 겨우 십 년 남짓 세월 만에 다시 일으켜 세웠다.

아버지가 이끌던 때 보다 더 강하고 힘 있는 가문으로.

친구처럼 지내던 종남의 제자들에게 머리를 조아리길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고, 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술자리에서는 바보 취급을 받으면서도 항상 웃었다.

무공을 수련하며 피를 토하는 인내를 했던 것보다 만 배는 더 힘든 심적 고통이었지만 모두 감내해 내었다. 그리하여 종남속가라는 현판을 겨우 유지할 수 있었다.

무림맹에서 정사 대전을 선포했을 때도 그 어느 때 보다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물론 많은 돈을 내고 인적지원을 최소화했지만. 그렇게 가문의 실익을 지켜낸다 생각했다.

무림맹이 갈라질 때는 어떠했던가? 정세를 미리 읽고 그간 엄청난 투자를 했던 무림맹을 단번에 버리고 빠르게 정협맹을 지원하며 정협맹에 줄을 대었다.

그 와중에 초절정이란 경지를 밟게 되었을 때 그는 만족하지 않았다.

호검문은 이제 시작이라 생각했다.

지각변동으로 뒤바뀐 강호 정세는 그에게 매우 유리했다. 여기저기 힘의 공백이 생기고 있었으니까.

자신의 경지를 철저히 숨겼다.

현 중원에는 입신경의 고수가 단 한 명뿐.

자신이 정파 안에서 입지를 다지며 그 지고한 경지를 밟고 선다면 호검문의 입지는 완전한 것이 된다.

그렇기에 숨겼다. 견제받지 않기 위하여. 계속 자신을 얕잡아 보는 인물들이 그 속내를 유지할 수 있도록.

그깟 강호의 평판과 초절정고수가 얻는 명예 따위 아무런 실익도 없다고 생각했기에 내릴 수 있는 판단이었다.

그랬을진대.

그토록 조심하며 칼을 갈고 살아왔는데, 딱 한 번 실수를 한 날이 오늘이었다.

혈개문의 문주와는 불편한 상대였기에, 조심했다.

혈개문의 태상문주와는 원한이 적지 않기에 더 조심했다.

그의 사부와는 큰 원한의 고리가 있었다.

다만 정사 대전에서 그 원한을 정리했다기에 그것 하나만 믿고 이 먼 사천 땅에 왔다.

그럼에도 마음을 놓지 않았다.

그의 철두철미한 성격은 십수 년도 훨씬 지난 그 날의 일을 세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은 혈개문의 문주가 된 혈개 소개. 그를 처음 본 날 똑똑히 들었다. 친한 친구를 대신해 왔다는 그 말.

장수무투를 놓친 지 며칠 되지 않은 날이었다.

그 후 조사해 본 바로는 그 친한 친구라는 점소이는 서호를 떠났다고 했다.

소개와 장수무투 그리고 지금의 패신살성. 이 세 사람의 연결고리를 영민한 그의 머리로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래서 있는 듯 없는 듯 자신을 조금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 그였는데 오랜 치부의 증거인 정회를 만나고 말았다.

그래서 흥분했는지도 몰랐다.

그 엉터리 무공을 가지고 절정의 반열에 든 정회의 그간 세월이 보이는 듯했다.

자신이 그래왔듯, 그녀 또한 험한 세월을 이겨냈으리라.

그래서 꺾고 싶었다. 자신이 가능한 일이 그녀인들 불가능할 리가 없었으니까.

불안한 검을 등 뒤에 남겨두고 싶지 않았다. 아직은 뭉툭한 저 비수가 언제고 날카롭게 갈려 자신의 등을 찌를지 모른다 생각했다.

그래서 답지 않게 도발했다.

마음이 급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입이 열려서는 곤란한 일이 많을 것 같아서, 이 자리에서 꼭 담판을 짓고 넘어가고 싶었다.

‘젠장!’

속마음과는 전혀 다르게 익숙하게 미소를 짓는 진수상.

“아 패신살성님이셨군요. 이리 얼굴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먼발치에서 그저 축하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는데 이리 존안까지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연수는 자연스럽게 혀를 놀리며 안면을 바꾸는 그의 처세에 말문이 막혔다.

“대단하군. 인제 보니 아직 호검문이 살아남은 이유를 정확히 알겠어. 인물 났군.”

“과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포권을 하며 깊게 허리를 숙이는 진수상.

정회는 갑작스레 난입한 연수를 보며 이제야 상황을 파악했다.

강렬한 기세와 함께 어찌할 방도가 없는 투로로 일장이 뻗어져 나올 때는 생의 마감을 직감했던 그녀였다.

“그런데 그 처세만으로 이 자리를 넘길 수 있을까?”

연수의 말에도 진수상의 표정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부끄럽습니다. 집안의 치부를 드러내는 듯하여···.”

“집안일이니 신경 꺼라? 그런데 그녀는 우리 사황성의 사람이라서. 아무리 집안일이라지만 절연한 거로 알고 있는데? 사황성의 무인을 일장에 때려죽이려 했다. 이거 쉽지 않을걸?”

“설마요. 죽이다니 말도 안 됩니다. 그저 선공을 받아 경고해 주려고 했을 뿐입니다.”

연수의 눈매가 좁아지기 시작했다.

“내가 막지 않았으면 분명 그녀는 죽었을 텐데. 설마 내 판단이 틀렸다고 말하고 싶은가?”

차가운 연수의 말에 멋쩍게 웃으며 허리를 숙이는 진수상.

“그럴 리가요. 저도 기습을 당해 놀라고 흥분한 바람에 손속이 과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때마침 패신살성님께서 이를 말려주었으니 뭐라 감사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만만치 않군.’

연수의 감상이었다.

이 이상 그를 추궁할 수도 그렇다고 정회를 대신하여 그를 죽일 수도 없는 연수였다.

“그렇다고 치지. 호검문이 아직 서호에 자리하고 있을지는 몰랐는데, 그래. 앞으로 지켜보는 재미가 있겠어.”

처음으로 진수상의 눈꼬리가 씰룩였다.

“영광입니다. 저는 바쁜 일정이 있어서 그럼 이만.”

끝까지 허리를 숙이며 공손히 떠나는 진수상.

“쯧쯧. 네게는 안되었지만 강적이다.”

“알고 있습니다.”

이를 악물며 대답하는 정회의 눈에 분심의 눈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꾹꾹 참는 정회.

“보통 인물이 아니야. 이대로 간다면 저자는 십 년 안에 정파에 건들 수 없는 인물로 우뚝 설걸?”

정회가 연수를 바라봤다.

“무슨···.”

“입신경. 저놈한테는 그리 허황한 경지가 아니라고.”

“그럼!”

“초절정. 그것도 하루 이틀 된 것 같지는 않아. 그리고 그 무재도 보통이 아니야. 그런 놈이 소리소문없이 그 경지를 철저히 숨기고 있었어···. 너 자신 있냐?”

“... 불구대천을 앞두고 제 생각은 상관없습니다. 그저 제가 죽든 저놈이 죽든 운명이 정해둔 바가 있겠지요.”

“글쎄, 너도 그간 독심을 품고 살아온 건 알겠다만, 상대가 너무 나빠. 네가 원한다면···.”

“제가 원하는 것은 제 손으로 원수를 갚는 것입니다.”

“그렇겠지. 하아 정말 세상에 쉬운 일이 없군.”

말을 마치며 돌아서는 연수.

정회는 그런 연수의 등을 바라보며 참아왔던 눈물을 흘렸다.

그녀의 볼을 타고 눈물이 떨어지기 무섭게 사라지는 연수의 신형.

하루 한 시진 반. 지난 몇 년 동안 그녀가 하루에 잠을 잔 시간이다.

하루 두 시진 이상 잔적이 없다는 연수의 말에 충격을 받고 그날부터 줄여왔던 잠이었다.

목숨을 건 살아남기 위한 투쟁의 나날 속에서도 그녀는 실전 수련이라 생각하며 이 악물고 검을 휘둘렀고, 사황

성이 지하로 숨어든 치욕의 나날 속에서도 하루도 빠짐없이 수련에 매진했다.

연수에게 받은 무공을 미친 듯 익혀 겨우 절정의 경지에 올라섰다.

그리고 감사했다. 연수에게 자신을 일깨워주고 길을 열어준 그에게 감사했다. 이제는 되었다 생각했다. 충분히 가능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초절정이라니.

혼신을 다한 일 검이 너무나 쉽게 막혀 버리는 순간 알았다. 자신의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연수 또한 강적이며 쉽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다.

눈물을 닦은 정회는 고개를 흔들었다.

괜찮다고 생각했다.

상대가 그렇다면 자신도 그 위에 올라서면 그만이었다. 이미 한번 성취를 이루어 봤다. 똑같은 길을 더 길게 가다 보면 언젠가 길이 열릴 것이다. 군자의 복수는 십 년을 간다는데 여인의 복수가 그보다 길게 가지 말란 법도 없지 않은가?

연무장으로 발길을 돌리는 그녀의 발걸음이 당당했다.

지붕 위에 신형을 드러낸 연수는 멀어지는 그녀를 보며 씩 미소지었다.

혼례식이 끝나자 혈개문을 가득 채웠던 많은 무인이 떠나가기 시작했다.

잠시간 바글거리며 혈개문을 시끄럽게 만들던 무인들이 떠나가며 혈개문이 비워가자 허전하게 느껴지는 장원을 보며 두보가 입을 열었다.

“사람 난 자리는 표가 난다더니.”

밝게 웃으며 대꾸하는 무황.

“원 사람 참. 오랜 산중생활로 복잡한 게 싫다더니. 장원이 조용해지니 아쉬운가?”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누가 떠나는 것이 아쉽고, 헛헛하네.”

“조금만 기다려 보게. 이제 내년쯤이면 사손 재롱 보는 재미가 쏠쏠할 테니.”

말을 마치며 잠자코 있는 연수를 바라보는 무황.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무황과 두보의 시선에 얼굴이 점점 붉게 물드는 연수였다.

그 옆에는 고개를 푹 숙인 도화가 어찌할 줄을 모르고 있었다.

“그만 놀리세요들. 두 분 나이 드시더니 점점 싱거워지시는 것 같습니다.”

“하하하, 놀리기는 누가 놀렸다는 말이냐? 효가 별거인 줄 알아? 네놈 키우느라 허리가 휜 네 사부한테는 그런 것이 다 효도야.”

“큼큼! 누가 안 낳는다고 했나요? 다 하늘에서 점지해 주셔야 하는 거죠. 안사람 불편하게 자꾸 이러시면 매일 이렇게 문안 올 수 있겠어요?”

두보는 점잖게 미소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건 안 되지. 그러잖아도, 네놈과 도화보는 낙에 두 늙은이가 사는 것인데.”

“그건 그렇고, 노야께서는 어째 점점 회춘하십니다?”

괜히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이제는 흰머리보다 검은 머리가 더 많은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글쎄, 네놈이 준 비급 덕택인지 요즘 꾸준히 무공이 늘고 있다.”

“특이하네요. 보통 그럴 때는 한 번에 경지에 드는 게 아니던가요?”

고개를 젓는 무황.

“에끼! 이놈아! 세상 무인들이 다 너 같은 줄 아느냐? 그리 한 번에 턱턱 될 것 같으면 세상에 입신경의 무인들이 넘쳐나지.”

“그런가요? 사부님은 좀 어떠세요?”

연수를 보며 피식 웃는 두보.

“뭘 물어? 척 보면 아는 녀석이.”

“큼큼! 제가 느끼는 게 본인이 느끼시는 것만큼 정확하겠습니까?”

“끌끌 걱정하지 마라. 사손들이 시집·장가가는 것까지는 보고 죽을 테니. 나도 네놈 덕분에 꾸준히 늘고 있다.”

“그럼 다행이고요.”

“도화야, 너는 어떠니? 이놈에게 시집왔는데, 불편한 건 없고? 혹여 이놈이 속썩이지는 않고?”

“예? 아니요. 상공께서 잘 해주세요.”

무황은 두보를 나무라듯 말하고 나섰다.

“이 친구야, 이제 혼례 치룬지 이틀이네. 겨우 이틀 만에 무슨 속을 썩이려고.”

“그런가? 낸들 장가를 가봤어야 알지.”

두보의 말에 무황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멀리 던졌다.

연수는 그 후로도 잠시 두 사람과 대화를 하다가 두보의 거처를 나섰다.

두보의 거처를 나서는 와중에 전성을 보내는 연수.

연수의 전성에 무황과 두보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날 저녁 장원에 식자재를 공급하는 이들이 혈개문의 문턱을 넘었다.

그중 쌀가마니를 수레에서 내려 곳간에 쌓아두던 짐꾼이 허리를 펴며 이마에 땀을 닦았다.

-아직 그 지하방에 숨어있는 듯합니다.

-움직일 기미는?

-마두들은 잠잠하고 현령의 사가에 있는 내시 놈들은 엉덩이가 들썩이는 듯합니다.

-그래? 역시 움직임을 같이 하는 것 같지?

-우연이라 치기에는 덕창에 들어온 시기와 행동이 공교롭습니다.

-그치? 내 잘 아는 사람도 우연을 싫어했거든.

-그리 판단하는 게 옳을 듯싶습니다.

-그럼 언제쯤 움직일까?

-내시 놈들 하는 꼴을 보니 만발의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며칠 안에는 움직이지 않겠습니까? 이르면 내일이나 오늘 밤이라도.

-그래? 그럼 오늘 밤 먼저 움직여야겠구나.

-오늘 밤 말입니까?

-그래. 후환거리를 오래 곁에 둬서 좋은 꼴 본 경험이 없어. 어쨌든 이리 도움을 주었으니 문주에게는 내가 큰 신세 졌다고 전해줘.

-문주님께서는 아직 하오문의 숙원을 풀어주신 은혜를 반도 갚지 못했다고 하셨습니다.

-그 양반 보면 볼수록 괜찮은 사람이야.

-그리고 이번에 혹시 모를 만약을 대비해 내상 약을 백인분 정도 준비해 드려 놓았습니다.

-참 고맙게도···. 자 이건 문주에게 전해줘.

연수의 품에서 나온 검은 비급이 짐꾼에게 날아갔다.

-이건···.

-별건 아니고, 문주에게 도움이 꽤 될 거야. 함부로 보지 않는 게 좋아. 문주가 별로 안 좋아할걸? 감당할 자신 있으면 몰래 봐도 나는 상관없고.

-꼭 탈 없이 전하겠습니다.

짐꾼들이 혈개문을 떠나고, 그날 밤 자정이 지나자 곤히 잠든 도화의 옆에서 연수가 눈을 번쩍 떴다.

소리 없이 안채를 나서는 연수의 주변으로 떨어지는 다섯 명의 인영.

“너희는 만약을 대비해 도화를 잘 지켜.”

“예. 만약의 사태가 일어나면 청, 녹, 적 순으로 신호하겠습니다.”

“그래.”

말을 마치기 무섭게 사라지는 연수의 신형.

혈개문에서 사라졌던 연수의 신형이 덕창에서 제일 큰 덕창 현령의 사가 지붕 위에서 나타났다.

‘많이도 모아왔네.’

눈에 불을 켠 듯 살벌한 표정으로 돌아다니는 내관들.

연수의 기감에 걸리는 백여 명의 고수들.

하나같이 똑같은 기운을 품은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기세가 만만치가 않았다.

‘용케도 이만큼 키워냈어. 과연 동창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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