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화
소림의 산문을 벗어난 연수는 하늘을 올려다보고는 빙글 웃었다.
‘돌아가는구나.’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이 기뻤다.
그러고 보니 이 세계에 온 이후로 돌아갈 곳이 생긴 적이 없었다.
강호의 풍파를 해쳐오며 밖에 있다는 생각조차 해본 적 없이 떠돌던 무인의 삶이었다. 돌아가야 할 곳이 마음이 그리는 곳이 있다는 것 자체가 큰 위안이 되었다.
‘나도 늙는 건가.’
문득 드는 감상에 떠오르는 생각이었다.
전생의 삶까지 친다면 불혹을 훌쩍 넘긴 삶을 살아오기는 했으니 적은 나이라고 하기는 힘들었다.
처음에는 작고 비쩍 마른 아이의 몸이 이제는 훌쩍 크다 못해 이립을 넘은 지도 두 해가 지났다.
잠시 하늘을 바라보며 감상에 젖어있던 연수가 미소를 지으며 무릎을 크게 굽혔다 펴 하늘로 뛰어올랐다. 하늘 위로 훌쩍 날아오르는 연수의 신형.
산문을 지키던 무승들이 그런 연수의 신형을 따라 하늘로 고개를 꺾어 올렸다.
어느새 작은 점이 되어 사라지는 연수.
그런 연수의 신위에 무승들은 입을 떡 벌리고 연수가 사라진 하늘만 바라보았다.
허공을 박차며 신선처럼 날아다니는 것은 어마어마한 내력을 소모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덕창을 향해 쏘아져 나가는 연수.
내력이 달리면 가끔 땅으로 내려와 내력을 보충하고는 바로 하늘길을 달리는 연수였다.
소림 산문을 나온 지 겨우 네시진 만에 덕창현이 든 연수였다.
기분 좋게 덕창에 발을 들인 연수는 혈개문에 다가갈수록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이 시장 거리와는 사대가 안 맞는군. 이 길에서 너무 많은 피를 봤어.”
연수의 말에 사람들의 발길이 끊겨 있던 거리 주변이 일렁거렸다.
흔들리는 기척을 느끼면서도 한숨을 내쉰 연수는 걸음을 옮겼다.
주변에 은신하며 따라붙는 기척들.
그런데도 연수가 손을 쓰지 않고 기다리는 것은 딱 하나의 이유였다.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기척이 매우 익숙하다는 것.
혈개문 앞에 도착한 연수의 표정이 싸늘하다 못해 얼어붙은 얼음장같이 차갑게 변했다.
혈개문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오백은 가볍게 넘어 보이는 관군.
그들의 앞에는 그들을 이끄는 장수와 익숙한 기세를 뿜어내는 내관이 있었다.
‘동창.’
연수를 발견하기 무섭게 다가오는 동창의 내관과 장수.
무거워 보이는 갑옷을 입고 긴 창을 든 장수가 거만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네가 고연수란 놈이 맞느냐?”
연수는 그 무관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내관을 바라보았다.
“피를 보았느냐?”
마치 만년한설같은 냉기를 풍기는 연수의 눈빛과 그 분위기에서 무언가 잘못됨을 느낀 내관이 다급히 입을 열었다.
“아직은 아무도 다치지 않았고, 자네의 선택에 따라 계속해서 모두가 다치지 않는 길이 있네.”
불혹을 넘어 보이는 내관의 말에 연수의 표정이 조금이나마 풀렸다.
“들어갔다 오지.”
연수가 내관을 지나쳐 혈개문을 향해 걸음을 옮기자 젊은 무장의 눈썹이 씰룩이며 연수를 향해 창을 겨눴다.
“이놈! 감히 이 분과 내가 누군 줄···.”
오싹.
무장은 짧은 평생을 살아오며 이런 압박감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뱀 앞에 개구리가 된 기분.
포식자 앞에서 상대의 의사에 목숨이 걸린 느낌은 너무나 무서운 것이었다.
내 목숨이 내 것이 아닌 감각에 무장의 어깨가 점차 떨려왔다.
연수는 딱히 그를 압박하지 않았다. 그저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불쾌감을 담아.
살기를 끌어 올리지도 않았다. 새로운 경지에 오른 이후 깨달은 것이 순리였다.
죽이지 않을 것이면 살기를 피어 올려 심신을 어지럽힐 필요가 없었다.
선천적으로 연수에게 붙어 있던 살심은 백회에 상단전이 열리며 그 찌꺼기마저 완전하게 사라졌다.
그렇기에 연수는 그저 젊은 무장을 바라볼 뿐이었다. 불쾌하기에 불쾌한 눈으로 불쾌한 마음을 담아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젊은 무장은 덜덜 떨리는 몸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무섭다는 공포심이 아니었다.
다른 종을 처음 만난 것 같은 느낌.
호랑이를 마주하고 호랑이를 깨닫게 된 하룻강아지가 된 느낌이었다. 아무리 커진들 아무리 이가 날카로워진들 뛰어넘을 수 없는 종의 차이를 깨닫는 순간 무장의 손에 들려있던 창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잠시 그런 무장을 바라보던 연수가 걸음을 옮겼다.
무장의 뒤로 사열해 있던 관병들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길을 열었다.
“푸하!”
혈개문 안으로 들어가는 연수를 보며 겨우 숨을 몰아 내쉬는 무장.
중년의 내관은 생각보다 일이 꼬인 것 같은 느낌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괜찮은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패기만만하던 젊은 무장을 바라보는 내관.
“괘, 괜찮습니다.”
말을 마치며 무거운 투구를 벗는 그의 머리가 땀으로 절어있었다.
괜찮다고 말하는 그의 손이 아직도 떨리고 있는 것을 보는 내관은 고개를 저었다.
유명 무가의 자제인 그가 상대가 바라보는 것만으로 무기를 떨어트렸다.
괜찮을 리가 없다는 것은 누구보다 내관 본인이 잘 알고 있었다.
동창의 삼인자라 불리는 이형백호이자 무공으로는 황궁 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고 자부하는 자신이었다.
그런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입신경이니 하는 강호의 하찮은 평을 들었을 때만 해도 자신과 관군 오백 그리고 동창의 당두 오십이면 충분히 제어가 가능할 것이라 느꼈다.
하나 착각이었다. 양이 떼로 몰려와 자고 있던 범을 깨운 느낌이었다.
혈개문 안으로 들어오자 잔뜩 긴장한 채 만반의 준비를 하는 문 내의 무사들과 지인들이 눈에 들어왔다.
비장한 표정으로 모여있는 그들을 본 연수가 피식 웃었다.
“연수야!”
두보가 제일 먼저 연수를 부르며 달려왔다.
그 뒤를 우르르 따라 몰려드는 지인들.
“표정들 좀 푸세요. 여차하면 관병과 싸움이라도 할 기세입니다.”
연수의 손을 꽉 쥐는 주두보.
“고생 많았다. 고생 많았어.”
“일단 이야기는 나중에 해요. 대체 무슨 일입니까? 왜 관병이 여기까지 온 거예요?”
연수의 물음에 소개는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도 모른다. 보름 전 갑작스레 저리 우리를 둘러싸고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어. 마치 말려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듯 누구도 나가지 못하고 들이지 못하게 했다.”
“물어보진 않았고?”
“우리와는 할 말이 없다는 말만 반복했어.”
“그랬군···.”
뒷말을 흐리는 연수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도화가 들어왔다.
차마 안부의 말도 내밀지 못하고 뒤로 빠져 있는 도화의 모습에 가슴이 아려오는 연수는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를 안아 주었다.
갑작스레 넓은 가슴으로 자신을 와락 끼어 안는 연수의 행동에 당황하는 도화.
이처럼 문 내의 사람들이 온통 모여있는 자리에서의 돌발 행동에 말문마저 막히는 그녀였다.
“오, 오라버니···.”
“걱정 많았지? 약조는 지켰어. 앞으로도 지킬 거고.”
연수의 말에 끝내 맺혀있던 눈물이 또르르 떨어지는 도화.
그런 도화의 팔이 다신 놓지 않을 것처럼 연수의 허리를 마주 안았다.
잠시 그녀를 달래며 등을 토닥인 연수는 그녀가 진정이 되는 듯 보이자 그녀를 놓아주었다.
그런 연수를 무섭게 노려보는 천화대.
“너희들도 여전하구나. 보기 좋아. 너는···. 오랜만이구나.”
연수의 시선을 받은 정회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보는 그녀의 기세가 날카롭게 서 있는 것을 보던 연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이리 긴장하고 있을 필요 없어요. 다들 평소처럼 지내. 밖에 저치들은 나한테 볼일이 있는 것 같은데 내가 해결할게요. 남은 이야기는 돌아와서 다시 하죠.”
지인들을 쭉 돌아보고는 등을 돌리는데 도화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라버니! 약조는 꼭 지키셔야 해요.”
뒤로 돌아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지은 채 고개를 끄덕이는 연수.
다시 등을 돌리고 혈개문을 나서는 연수의 표정이 차갑게 변해 있었다.
정문을 활짝 열기 무섭게 한 걸음씩 물러서며 길을 여는 관병들.
거침없는 발걸음을 내뻗어 내관을 향해 걸어가는 연수.
그런 연수에게 한발 다가오며 막 뭐라 입을 열려는 내관의 말을 끊어버리는 연수.
“너와는 할 말이 없다. 가자. 네 상관이 있는 곳으로.”
연수의 말에 눈썹을 씰룩이는 내관.
“나는 이형백호 도필호라 하오!”
“너랑은 할 말이 없대도. 네 상관에게 안내해라.”
도필호는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무림고수라도 야인이었다. 자신의 상관이라면 딱 한 명밖엔 없다. 제독동창 흠차총독동엄관교판사태감.
창위들의 정점이자 동창 전체를 한 손에 쥐고 있는 이 명나라의 절대권력자 중 황제 다음으로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경진해.
“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나?”
자신을 둘러싸고는 은신해 있던 창위들의 기세가 날카롭게 날이 서며 적의를 품자 연수의 눈빛이 변했다.
“커헉!”
-후아악!
연수를 주변으로 혈개문의 코앞까지 퍼져 나가며 주변을 짓누르는 기운.
엄청난 기운에 연수 주변으로 땅이 짓눌리다 못해 파일 정도였다.
땅이 그런 정도인데 그 위를 밟고 선 자들은 어떠했을까?
당연히 오체투지를 한 채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새 은신이 풀려 땅 위에 엎드려 있는 오십 명의 창위들.
그 안에는 내관과 무장도 포함되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말하지. 너희와는 할 말이 없다. 너희 상관을 불러오든 안내를 하든. 아니면 이곳에서 모두 뼈를 묻게 해 줄 수도 있어. 명예로운 죽음이겠군. 아무도 모르겠지만.”
-쿵!
가까스로 고개를 들어 올리던 도필호의 고개가 짓누르는 중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땅에 머리를 처박히며 묵직한 소성이 울렸다.
“아, 안내···. 하겠소···. 이, 이것···. 좀······.”
-휘이이잉!
날카로운 바람 소리와 동시에 밖으로 밀려나 있던 공기와 바람이 몰려 들어오며 무거운 압박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숨을 몰아쉬며 몸을 겨우 일으키는 관병들.
그리고 벌떡 일어서서는 연수에게서 빠르게 거리를 두는 창위들과 도필호.
연수에게 순식간에 오장 이상 떨어지며 연수를 공포에 질린 눈으로 바라보는 도필호의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뭐해? 가지.”
“헉!”
귀신을 본 표정이 그러할까?
뒤를 돌아 연수를 확인한 도필호는 다리가 풀려 주저앉아 버렸다.
분명 허상이 아니었다. 어찌 눈으로 보고 있던 자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리고 고개를 돌리니 그가 그곳에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마치 귀신에 홀린 듯한 표정으로 주저앉아 연수를 올려다보는 도필호.
“나 바쁜 사람이야. 내가 혼자 가면 퍽이나 난감한 일이 벌어질 텐데? 그리 해도 나는 괜찮은데···. 어쩔까?”
“아, 안내합니다. 지, 지금 합니다.”
어느새 존댓말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도필호였다.
거인. 도필호가 느끼는 연수에 대한 감상이었다.
그 어떤 직위와 이름을 들이댄다 해도 저 거인 앞에서는 모두 작은 것. 그저 발 한번 들어 지르밟으면 사라질 것들에 불과한 듯 느껴졌다.
-해산하게. 돌아가란 말이야! 더, 덕창에는 모습을 보이지 말게.
갑자기 들려오는 전음에 넋을 놓고 있던 무장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신위를 목격한 무장은 서둘러 관병들을 이끌고 돌아가기 시작했다. 돌아서는 그의 얼굴에는 수치심이 가득하였다.
같은 모욕을 당한 이형백호와 자신은 처지가 달랐다. 수많은 부하가 보는 앞에서 그런 모욕을 당하니 밀려오는 모욕감이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며 그의 이를 갈리게 했다.
“어디지? 북경?”
“아, 아닙니다. 주, 중경에···.”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도필호를 옆구리에 끼고 달리는 연수.
순식간에 변해버리는 주변 회색 풍경을 보며 그제야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인지 인지한 도필호는 내력을 끌어올렸다.
그러지 않고는 도저히 호흡을 이어갈 수 없는 속도였다.
공기와의 마찰에 상할까 귀를 보호하며 연수의 얼굴을 올려다보는 도필호.
만약 자신이 암습이라도 하면 이 거리에서는 당하지 않을 재간이 없어 보였다.
품에 지닌 단도가 떠오른 도필호는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이내 저어지는 고개.
이 거인을 상대로 자신의 단도는 도무지 믿음을 주질 못했다.
겨우 한 시진도 안되어 먼 거리를 주파한 연수가 도필호를 내려놓았다.
한 걸음도 떼지 않고 덕창에서 남녕으로 왔다는 말을 세상 누구도 믿어주지 않을 것은 겪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 생각에 씁쓸한 표정으로 연수를 안내하는 도필호.
멀리 보이는 사 층 전각으로 연수를 안내하는 도필호였다.
사 층 전각으로 올라가는 내내 주변 어디에서도 지나다니는 사람을 보지 못한 연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권력.
연수로서는 아직 제대로 겪어 보지 못한 힘이었다.
무인은 무로서 자신의 힘을 확인하고 증명한다.
하지만 권력이라는 힘은 무와는 전혀 달랐다.
전각의 사 층으로 도필호를 따라 올라서자 젊은 미남자가 차를 마시며 연수를 달고 오는 도필호를 보며 혀를 찼다.
옆에서 음을 연주하는 악사 둘을 손을 들며 제지하는 젊은 미남자.
제독동창 경진해였다.
“그를 앞세워 날 찾아오다니. 생각한 것과는 그림이 다르군.”
“결과만 같으면 되었지. 따질 필요 있나?”
연수의 대꾸에 경진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결과는 같아. 결국, 자네와 이야기 하는 것이 목표였으니.”
차를 마시며 말하는 경진해의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앉는 연수.
“보자고 한 이유는?”
“젊은 청년이 예를 모르는군. 나는 제독동창 경진해라 하네. 내 이리 젊어 보여도 나이가 육십이 넘었네. 설사 내 나이가 자네보다 어리다 해도 짊어지고 있는 이름이 달라.”
“나는 지금껏 살아오며 무엇이든 받은 대로 돌려주었어. 예로 다가오는 자에게는 예로 대했고, 무례로 다가오는 자에게는 불손으로 대했지. 내게 칼을 들이대는 자는 그 목을 갈라 피를 보아왔고, 내 지인을 상하게 하는 자는 그들의 지인을 몰살시켜 갚아주었지.”
거친 연수의 말에 경진해의 시선이 연수의 눈으로 다가 왔다.
“야인이군. 너무 거칠어. 사람이든 짐승이든 물건이든 거친 것은 귀히 대접받지 못해.”
“신소리는 그만하지. 본론이 뭐야?”
한숨을 내쉰 경진해가 무미건조하게 입을 열었다.
시선마저 창밖으로 두며 말하는 경진해.
“폐하께서 걱정이 많으시다. 명교와 관련이 깊은 이들이 신강에 숨어들어 불손한 생각을 가지고 호시탐탐 명의 반역을 꾀하고 있고, 그런 와중에 중원의 무림인들은 주제를 모르고 날뛰니 나라가 뒤숭숭하고 백성들이 동요하고 있어. 중원 무림의 시끄러운 사건들 중심에는 네가 있더군. 두말하지 않겠다. 폐하의 검이 되어라. 그로써 네 충심을 증명하고 대명의 백성임을 떳떳이···.”
“개소리.”
떨리는 경진해의 입꼬리와 함께 끊어진 그의 말.
“지금 뭐라···.”
“개소리라고.”
경진해의 두 눈에 살기가 차오르며 경진해의 옷자락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