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화
고개를 올려 연수를 바라보는 노인의 두 눈에는 정심한 기운이 가득했다.
그런 노인의 눈을 보니 연수는 더욱 머리가 복잡해졌다.
-대체 누구십니까?
연수의 전성에 잠시 고개를 갸웃하던 노인이 전성을 보내왔다.
-원목이라는 이름이 내 시작이네.
-진정 원자 배 대사님이 맞으십니까?
-굳이 자네를 붙들고 거짓을 고할 이유가 있겠는가?
-그런데 어찌···. 그럼 혈승마불과 혈괴불은 누구입니까?
-그 이름들은 나의 과오지.
-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연수의 물음에 길게 한숨을 내쉬며 두 눈을 감는 원목.
한동안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키던 원목의 두 눈이 떠졌다.
-소림의 원자 배는 소위 말하는 사승 관계가 많이 꼬여있다네. 알고 있는가?
-그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원공 사제는 나보다 나이가 한참이나 많은 사제라네. 그 곡절에 대해서는 길게 이야기하지 않겠네. 사제의 명예와도 관련된 일이니.
원목의 전성에 연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원목을 마주하고 앉았다.
그런 연수를 보며 전성으로 긴 이야기를 시작하는 원목.
-스승 같고, 때로는 사형 같으며 어떨 때는 아비 같던 사제가 원공 사제였다네. 그런 원공 사제가 신승이란 별호를 얻으며 강호에 명예를 드높이던 때에 내 나이 겨우 약관이었다네. 그쯤이었네. 혜천이란 아이를 만난 것이.
“혜천!”
연수는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소리를 내었다.
-그를 알고 있는가?
“원공 대사님께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랬군. 그 아이가 소림에 들어왔을 때 나이가 겨우 네 살쯤 되었다네. 그 아이를 데려왔던 원공 사제는 그때부터 강호행을 하지 않았네. 그리고 그 아이를 내 밑의 제자로 들여 소림의 제자로 받아들이게 했지. 개인적 아픔으로 인해 공식적인 제자를 두지 않았던 원공 사제가 강호에 명예를 떨치던 그 시점에 어린 혜천은 내 제자라기보다는 원공 사제의 제자였네. 그리고 자네도 들었다시피 그 아이는 소림에 씻을 수 없는 멍에를 안겨주었지.
“그와 관계된 두 번의 혈겁은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그 아이를 참회동에 가뒀을 때 항상 불경을 외주던 것이 나였다네. 그런데 그 아이가 금제를 풀기 일 년 전부터 나에게 자주 물어오던 것이 있었네.
-사부님. 모든 정심과 불심에 무공은 반하는 행위이자 모순입니다. 소림은 어째서 사람을 해하는 무공을 중원에 전파하고 불심과 불살을 떠드는 것입니까?-
-항상 그리 묻던 그 아이의 질문에 나는 자주 말문이 막혀 불공만 외던 나날이 반복되었다네. 그러던 어느 날 그 아이가 직접 창안하였다며 무공구결을 외기 시작했어. 나는 듣지 않는 척했지만 항상 듣던 그 구결은 어느새 내 머릿속에 각인되었다네.
연수는 그 구결이 무척이나 궁금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원목의 다음 전성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 일이 벌어졌지. 혜천 그 아이가 금제를 풀고 날뛰기 시작한 그 날 나는 그 아이를 막지 못했네. 그 아이는 내게도 특별했으니까. 결국, 원공 사제가 그 아이의 목숨을 끊었고···. 그 아이는 마지막 숨을 내뱉기 전 이런 이야기를 했다네.
-모든 씨앗은 뿌렸으니. 나는 죽어도 그들의 무에 살아남아 기억될 것이오.-
-처음에는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무서운 마라가 나를 휘감기 시작했지. 신승이라 불리는 나이 많은 사제의 등쌀에 질투가 생겼던 것일까? 나도 모르게 혜천 그 아이가 남긴 구결에 빠져들기 시작했고, 무섭게 무공이 늘기 시작했네. 그리고 초절정을 넘기는 순간 주체할 수 없는 살심에 사로잡히며 인성이 흔들리고 변하기 시작했네. 그 이후로 숭산을 떠나 강호를 떠돌며 수많은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고, 이곳까지 와서도 문제를 일으켜 이런 꼴을 당하게 되었지. 그 와중에 나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혜천의 무공을 몇몇 사람들에게 전하게 되었다네. 그중 하나가 만사영천이었다네.
“만사영천이라면···. 만사천우의 스승이 아닙니까?”
-내 이곳에 온 지 오래되어 만사천우라는 자는 잘 모르겠네.
“그, 그렇군요. 그럼 또 혜천의 무공을 전한 적이 있으십니까?”
-그 외에 세상에 불만이 가득하던 한 산적에게 세상에 존재하지 말아야 할 무공을 전한 것이 있네. 혈정취연공이란 인간이 익혀서는 안 될 마라의 무공을···.
“뭐요?! 그럼 혈정취연공이 혜천의 머리에서 나온 무공이란 말이에요?”
-...그 무공이 지금도?
“예···. 지금도 그 무공이 돌고 있습니다.”
-아미타불. 모두 나의 죄네. 이 죄를 다 갚을 길이 도무지 보이지 않는군. 나는 돌아가야 하네. 이 모든 것은 나의 원죄. 내가 끝내야 하네.
“잠시만요. 그런데 어떻게···. 제정신을 찾으신 겁니까?”
연수는 눈매를 좁히며 원목을 살폈다.
-단전이 깨어지면서부터 내 정신은 찾았다네. 그로부터 지금껏 매일을 속죄하는 마음으로 이곳에서 참회하며 명이 다할 날을 기다렸지.
“혹시 또···.”
-자네가 만들어준 정심한 단전이 있는 한 다시는 그 사악한 마공에 빠질 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말게.
“하아.”
긴 한숨을 내쉰 연수는 몸을 일으키며 팔을 흔들었다.
그와 동시에 소리 없이 두꺼운 창살이 잘려나갔다.
“일단 가시죠. 잘 하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또한 다 부처님 뜻이겠죠.”
원목은 그런 연수를 보며 몸을 일으켰다.
연수와 원목이 천산을 벗어나는 것은 생각보다 수월했다.
그 사이 교주의 밀명이 있었는지 원목과 연수를 발견하는 이들도 마치 소 닭 보듯 둘을 모른 척했다.
심지어 분지로 통하는 굴을 막아서던 마인들 또한 모른 척 길을 터줄 정도였다.
깊은 굴을 빠져나오는 연수의 머릿속에 교주의 전성이 울렸다.
-자네와는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아.
-글쎄. 당신은 아직 나에게 빚을 다 갚지 않았어.
-부디 그 빚을 받으러 다시 오지 않길 바라네.
-마교가 중원을 위협하지 않는다면. 기억해둬. 당신에게 대가를 받아내지 않은 것은 어디까지나 당신의 생각이 내 생각과 일치했기 때문이야. 마교가 중원을 향해 검을 들이댄다면 나는 다시금 천산으로 올 거야.
-적어도 내가 죽기 전까진 그럴 일은 없겠다 장담하지.
-그럼 우리가 다시 만날 일은 없겠지.
잠시 서서 전성을 주고받은 연수는 원목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경공을 발휘하며 빠르게 천산을 빠져나가는 두 사람의 신형.
원목의 속도에 맞춰 움직이는 연수는 조금 답답한 생각이 들었지만 별수가 없었다.
자신은 원목의 신변을 소림에 제대로 인계해야 할 책임이 있었다.
며칠을 넘게 걸려 청해의 공화현에 들어선 연수와 원목.
연수는 제일 먼저 하오문의 지부를 찾아 전서를 날렸다.
한 통은 덕창에서 애를 태우고 있을 지인들에게 무탈함을 알리는 전서였고, 한 통은 지난번과 같이 소림에 전서를 띄웠다.
-원목대사와 소림으로 갑니다.
원목과 최소한의 시간을 빼고는 경공을 전개해 청해, 감숙, 섬서를 가로질러 하남을 향해 달린 지 한 달 남짓. 하남에 도착한 두 사람.
숭산의 앞에서 숭산을 올려다보는 원목의 두 눈에 회한이 가득 차올랐다.
두 눈을 감은 그는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떼어내며 숭산을 올랐다.
느릿느릿 한 걸음 한 걸음 숭산을 오르는 원목을 따르는 연수는 그를 재촉할 수가 없었다.
그의 마음속 가득 찬 후회가 얼마나 클지 얼마나 마음이 불편할지 연수로서는 예상조차 되질 않았다.
그저 묵묵히 원목을 따르는 연수.
저 멀리 소림의 산문이 보이자 원목의 걸음이 멈춰섰다.
그 옛날 저 산문에서 나한 여덟을 향해 살수를 뿌리고 그들의 피로 난 길을 걸어 나왔던 기억이 너무나 선명하게 떠오르는 그였다.
그 이후 걸었던 혈로가 하나하나 빠짐없이 선명해 그를 더욱 괴롭게 만들었다.
겨우겨우 걸음을 떼어내는데 산문 밖으로 열여덟 명의 나한승과 사대금강 그리고 방장을 포함한 소림의 모든 장로가 나오고 있었다.
그 선두에는 허리 굽은 불목하니가 제일 먼저 걷고 있었다.
그들을 향해 마주 걸어가는 원목.
그들과 한 장 거리를 두고 멈춘 원목을 향해 공손히 허리를 숙이는 원공.
그런 원공을 향해 마주 깊숙이 허리를 숙이는 원목.
이윽고 많은 무승들에 둘러싸여 소림의 산문을 넘는 원목.
연수는 천천히 그들의 뒤를 따랐다.
참회동까지 그대로 소림 최고위 무승들에게 둘러싸여 들어서는 원목이었다.
창살 없는 감옥 참회동의 벽을 보고 앉은 원목은 그대로 눈을 감았다.
아마도 죽는 날까지 저대로 지내야 할 원목의 등을 보는 연수의 마음은 썩 좋지 못했다.
-원목대사님. 대사님이 전한 혜천의 씨앗은 걱정하지 마세요.
원목은 면벽하며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
그런 원목을 등지고 돌아서는데 머릿속에 울리는 전성.
-들어야 할 말이 많다.
원공의 재촉에 연수는 소림의 방장과 장로들과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원공의 뒤를 따랐다.
예전 연수가 원공에게 살심을 누를 스무 글자의 기연을 받았던 초옥.
자리에 앉기 무섭게 묻는 원공.
“대체 원목 사형을 어디서 데려온 것이냐?”
“이야기가 너무 길어요. 먼 길 다녀왔는데 숨 좀 돌리게 해 주세요. 차라도 한잔하면서 이야기하면 누가 잡아먹는 것도 아니···.”
“이놈아!”
혜천과 원목은 원공에게는 후회와 아픔이었다.
제자 같은 사형 원목. 사손 같던 소림의 제자 혜천.
그로 인한 비화는 소림에 명예에 큰 먹칠이 될 절대 강호에 알려져선 안 될 이야기들이었다.
원공으로서는 눈앞에 앉은 능글맞은 중원 최고수가 대체 무엇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도대체 원목을 어디서 찾아온 것인지 너무나 중요했다.
그런 마음도 모르고 연수가 능글거리기 시작하자 원공은 마음이 다급해져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아이고, 귀청 떨어지겠어요. 상을 주진 못할망정 이리 죄인 대하듯 하십니까?”
“...”
말없이 눈매를 좁히고 연수를 노려보기 시작하는 원공.
“거참, 그러다 저도 만사천우처럼 잡아다 가두는 것 아닙니까?”
연수의 입에서 나온 소리에 눈을 부릅뜨고 입을 떡 벌리는 원공.
“어, 어찌···.”
“뭐 여러 가지 우연이 겹쳐서 말씀해 주지 않으셨던 비화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 어디까지···.”
“전부일 거예요.”
잠시 입을 다물고 천장을 올려다 보던 원공의 입이 열렸다.
“알고 있느냐? 네가 알고 있는 그 일이 소림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강호에 알려지면 난리가 나겠죠. 제 전서는 받으셨죠?”
“화산의 살아남은 제자들이 마공을 익히고 있다고···. 설마!”
“예. 그 또한 혜천의 씨앗입니다.”
“허···.”
“그러니까 시작은 제가 어린 시절 점소이를 할 때···.”
연수는 그 이후 만사천우를 처음 본 일부터 사대금강이 그를 잡아간 경위와 그 일을 개방이 알게 된 곡절에 관해 이야기해 주었다.
“그럼! 네놈 때문에 개방이 그 사실을 알게 되었구나!”
“뭐, 그렇죠. 덕분에 제 둘도 없는 친구가 개방의 승개가 되었죠.”
“당시 소림이 본 손해가 적지 않았다.”
연수는 두 손을 합장하며 입을 열었다.
“다 부처님의 뜻인 게죠. 아미타불.”
“끄응.”
연수의 능청에 원공은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리고 얼마 전 덕창의 혈개문으로 마교의 교주가 찾아왔었죠···.”
연수는 그 이후 마교에 숨어든 계기와 그 안에서 오행신공을 완성하게 되었던 이야기. 그리고 원목과의 만남과 그에게서 듣게 된 비화들을 모두 이야기해 주었다. 물론 암주를 죽인 일과 교주와의 담판 또한 모두 가감 없이 전해 주었다.
한꺼번에 너무나 많은 정보가 머릿속을 채운 원공은 놀람의 연속이었다.
너무나 놀라운 일들의 연속에 순간 머릿속이 잘 정리되지 않는 원공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네놈은 여벌로 목숨을 쟁여 놓기라도 했단 말이냐? 어쩌자고 그런 금수 같은 놈 말만 믿고 그 흉한 곳에 발을 디딘단 말이냐?”
“그럼 어찌합니까? 자칫 그가 정말 중원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면 중원 무림이 그를 막을 힘이 있겠습니까?”
“하아, 그래서 마공을 통해 토기를 녹여내고 오행신공을 완성했다?”
“예.”
“그리고 세 번의 순행 만에 오행신공의 기운이 하나로 합쳐졌다?”
“예.”
“...역시 오행신공은 누군가에게 전해 받아서는 완성할 수 없었구나.”
“그게 궁금했습니다. 어째서 옥현인과 대사님은 오행신공이 완성되지 않는 것인지요.”
“나 또한 기연으로 오행신공을 전수 받았을 뿐. 정확히는 세 기운을 전수 받았지. 그 이후 두 기운을 내 힘으로 녹여내었다. 그때가 내가 신승이란 과분한 별호를 받았을 때지.”
“그러면 남에게 전수 받은 기운이기에 하나로 합쳐져 완성되지 않는다는 겁니까?”
“아마도. 그럴 것이야. 온전히 내 기운이 아니니. 옥현인의 경우는 다섯 가지 기운 모두가 내게서 받은 기운이니···.”
“그렇군요.”
“너는 내게 소림이 위기에 처했을 때 돕겠다 약조를 했지.”
갑자기 정색하며 말하는 원공을 보며 연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그리 약조했습니다.”
“지금이 소림의 최대 위기다. 절대 밖으로 새어나가선 안 될 비화가 외인에게 새어나갔다. 이 일은 결코 외인이 알아선 안 될 일이다.”
“뭐 소림의 명예에 치명적이긴 하겠죠.”
“비밀을 평생 지켜 줄 수 있겠느냐?”
“대사님께 받은 것이 적지 않은데 그 정도야 해 드려야죠.”
“그 누구에게도, 어떤 지인에게도. 절대! 발설하지 않는다. 맹세 할 수 있겠느냐?”
“예. 맹세하겠습니다. 제 사부님의 이름과 제 이름을 걸고 맹세해요.”
“후우···.”
한숨을 내쉬는 원공의 얼굴이 한참 더 늙어 보였다.
“그럼 본론으로 돌아와서 말입니다. 화산의 잔재는 어쩌실 겁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힘없는 민초들이 그들에게 목숨을 빼앗기고 있을 겁니다. 이건 오로지 소림의 원죄에요.”
“애초에 화산파를 멸문시킨···.”
원공은 뒷말을 흐렸다. 어떤 일이 있었든 마공을 익히고 민초를 해치는 선택을 한 것은 그들의 잘못이었고, 그 마공은 소림에서 나왔다.
“하아, 정말이지 부처님께서 고된 시련을 소림에 주시는구나.”
“그놈들은 그 마공을 완성하기 전엔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겁니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는 겨우 둘이었습니다만 몇이나 더 있을지 알 수도 없어요.”
“어쩌자고 그런 마공을 연성하는 것인지···.”
“화산을 다시 일으키려고 그러겠지요.”
“마지막 남은 화산의 정기를 훼손하는 그 순간 화산은 완전히 끝이 났어. 이제 중원에 화산파의 맥은 발붙일 곳을 잃었다.”
“뭐 다들 본인의 선택에 어떤 형태로든 책임을 지게 되겠죠. 화산파의 잔재는 전서로 전했듯 정협맹에서 잘 협의해 주세요. 당문의 가주에게는 따로 말을 전하겠습니다.”
“그래.”
“하아, 긴 여정이었네요. 그럼 저는 갑니다. 방장님께는 다음에 인사드린다고 전해 주세요.”
“그 전에 하나만 묻자.”
원공을 돌아보는 연수.
“입신경을 넘은 것이냐?”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연수의 신형이 초옥에서 사라졌다.
연수가 사라지고 난 빈방에는 원공의 허허로운 목소리가 맴돌았다.
“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