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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놈에서 고수까지-189화 (189/202)

# 189화

암주는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며 여유 있게 서 있는 연수를 경계하며 슬며시 팔을 내려다보았다.

오른팔을 휘감고 있던 검은 묵살기가 사라지고 없었다.

묵살마장은 십 성 이상 익히게 되면 유형화된 기운이 팔과 손을 보호하며 장력의 살상력을 높이는 공능이 있었다.

경지에 오른 이후로는 강기와 부딪혀도 손을 보호하며 깨어지지 않던 묵살기가 가벼운 한 수에 깨져 버리자 암주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위기감.

암주라는 직위를 쟁취한 이후로 몇십 년 동안 거의 느껴본 적이 없던 감각.

그나마 최근 교주와 호법원에 짓눌리며 잠시 느껴본 감각이었다.

암주의 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하며 하루하루가 살아남기 위한 나날이던 그 시절 이후 잊고 있던 감각이 살아나자 암주의 눈빛이 변했다.

상대를 밑으로 깔아보며 상대의 행동을 기다려 반응하려던 고수의 여유 있던 눈빛이 살아남기 위해 무슨 짓이든 서슴지 않을 것 같은 짐승의 눈빛으로.

연수의 일 권에 깨져 날아갔던 묵살기가 다시 암주의 오른손에 휘감겼다.

조금 전만 해도 연수의 오만해 보이는 눈빛을 보는 것만으로 역정을 냈을 암주는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상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을 서로를 살피던 두 무인의 시선이 허공에서 불꽃을 일으키듯 격하게 충돌하는 순간, 사라지는 두 무인의 신형.

-쾅! 쾅! 쾅! 콰장차창!

허공의 곳곳에서 불꽃이 튄다 싶은 순간 굉음과 함께 경기가 날아들었고, 첫 번째 경기가 암주의 거처로 날아들기도 전에 두 번의 격돌이 빈 허공에서 일어났다.

결국, 세 번의 격돌로 인해 파생된 경기에 암주의 거처가 휩쓸리며 건물 하나가 무너질 듯 반파되어버렸다.

세 번의 가벼운 격돌로 연수는 암주를 경시하고만 있을 순 없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내기의 수발과 그로 인한 힘은 확실히 자신이 우세했다.

가볍게 부딪혀 보았던 첫 번째의 초식에서 곡월도 쓰지 않고 장괘구권을 통해 깨닫게 된 일 권을 내뻗어 보았던 연수였다.

목생화, 화생토, 토생금 세 번의 순행을 마친 금의 기를 머금은 연수의 일 권은 단박에 암주를 밀어내며 그의 묵살마장을 한 수만에 깨버리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기세와 그 눈빛이 변한 암주는 점차 힘을 끌어 올리며 기괴한 묵살마장의 초식들을 풀어냈다.

단 세 수를 보았지만, 예측을 할 수 없이 뻗어지는 암주의 장력이 상대하기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어도 상대를 맞추지 못하면 쓸모가 없었다.

설마 강기공을 자유롭게 펼치는 이 경지에 와서 초식의 중요함을 다시 한번 깨닫는 상대를 만날 줄 연수로서도 예상할 수 없었다.

‘운신공이 상대하기 보통 까다로운 것이 아니군.’

그랬다. 연수의 움직임은 애초에 종남의 영향을 크게 받아 직선적이었다. 익히고 있던 경공도 천리견보를 나름 뜯어고친 직쾌의 움직임으로 상대를 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암주는 그런 연수와는 전혀 다른 운신공을 보여주고 있었다.

주로 전후좌우 네 방향을 편향됨 없이 움직이며 공격을 회피하거나 예상치 못한 투로를 찔러 일장을 뻗어 왔다.

어찌 보면 연수와는 상극인 움직임이라 할 수 있었다.

서로가 상극이라면 결국 더 강한 쪽이 상대를 깨기 마련이다.

하지만 경공이라면 모를까 목숨을 걸고 싸우는 와중의 운신 능력은 미묘하게 암주가 연수보다 앞서고 있었다.

그럼에도 힘은 연수가 암주를 앞서다 보니 미묘하게 균형을 이루는 두 무인.

서로의 실력을 가늠하기 위해 가볍게 공수를 주고 받아본 두 무인의 감상은 비슷했다.

'필승.'

두 사람은 서로를 상대로 승리를 자신하며 기세를 끌어 올렸다.

무인으로서의 호승심과 두 사람이 무인으로서 살아온 방식은 이런 점에서는 무서우리 만치 닮아 있었다.

위기상황이 오면 최선을 다해 돌파하고 싸운다. 그리고 그 위기를 넘어 성장의 발판으로 삼아 강해진다.

아무리 새 외의 사마외도니 마교의 마인이니 하지만 결국 무인.

강자로서 살아남아 온 고수들끼리의 사고방식은 일맥상통하고 있을 수밖엔 없었다.

그런 점에서 옥현인과 암주 강효각은 달랐다.

암주의 온몸을 휘감듯 범위를 넓혀나가는 묵살기.

어깨와 몸 그리고 다리까지 휘감은 묵살기가 두꺼워지며 암주의 모습을 가린다 싶은 순간 연수가 먼저 움직였다.

-꽈콰콰쾅!

순식간에 곡월을 휘두르며 암주를 몰아치는 연수.

그런 연수의 강공에 물러서지 않고 마주 장력을 몰아치며 연수를 막아서는 암주.

서로 방어 따위 도외시하고 공격 일변도로 서로의 공격을 상쇄시키는 두 무인의 공방에 주변으로 어마어마한 경기가 몰아쳤고, 사방으로 안개 같은 먼지구름이 일어났다.

하지만 서로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공격을 계속 이어가는 두 무인.

연수는 한 걸음이라도 밀고 들어가려 공격에 집중했고, 본능적으로 한 번 밀리면 끝이 없다는 걸 느낀 암주는 신형을 빠르게 좌우로 움직이면서도 한 걸음도 뒤로 밀리지 않고 위치를 사수했다.

가만히 서서 공격을 몰아치는 연수는 마치 팔이 여덟 개로 늘어난 듯 보였고, 그 앞에서 무수한 공격을 공격으로 받아치고 흘려내는 암주는 분신술을 쓴 듯 신형이 세 개로 늘어난 것처럼 보였다.

좌측 우측 정면에 세 명의 암주를 상대로 팔이 여덟 개 달린 연수가 강기에 휩싸인 곡월을 휘둘렀다.

두 무인의 주변 사방에서 일어나던 먼지구름이 두 사람을 중심으로 회전하며 두 사람을 감싸기 시작했다.

마치 회오리처럼 하늘로 뻗어 올라가며 두 사람을 중심으로 뭉쳐 회전하는 먼지구름들.

두 사람의 싸움으로 생긴 인력에 일어나는 믿기 힘든 장면이었다.

-콰콰쾅!

이따금 두 사람의 공격의 반발력으로 파생되는 경기가 암주의 거처와 주변 기암괴석을 때릴 때마다 벽이 허물어지고 집이 주저앉으며 먼지구름의 회오리가 더 덩치를 불려 나갔다.

‘오행의 순행을 마쳐야 한다.’

이대로 한 걸음도 더 밀어내지 못하고 교착한 상태로 싸움이 지속 되면 결국 오랜 세월 내력을 쌓아온 암주가 자신보다 장기전에 강할 수밖에 없었다.

내력의 양은 결국 세월을 이겨내기 쉽지 않았다. 특히나 입신경에 오른 세월의 차이가 자신과 암주는 너무나 컸다.

하지만 연수의 의도를 모를 정도로 암주는 어설픈 무인이 아니었다.

정확한 속내를 읽지는 못해도 연수의 기운이 변하려는 기색을 읽기 무섭게 남은 힘을 쏟아내는 암주.

-까까까까까깡!

점점 빨라지는 공방.

그 속에서 연수는 세 번 이상의 순행을 할 수가 없었다.

점점 빨라지는 공방 속에서 좀처럼 오행의 순행을 완성하기가 쉽지 않았다.

단 한 순간의 집중력을 놓치는 순간 목이 떨어진다.

본능적으로 두 사람은 알 수 있었다.

점차 거칠어지는 공방 속에서 한 걸음이라도 물러서면 그 반발력으로 큰 손해를 볼 것이고, 그 손해는 목숨과 직결될 것이 분명했다.

서로를 향해 모든 힘을 개방시켜 쏟아내며 강공으로 나아가는 둘이었다.

특히 암주로서는 패신살성의 무공에 대해 잘은 몰라도 한가지 확실히 아는 것은 있었다.

상대가 물러설수록 패신살성의 공격은 강해진다.

반대로 말하면 물러서지만 않으면 패신살성의 공격이 더 강해질 일은 없다는 것이고, 반대로 그를 뒤로 물리게 되면 그 반발을 모조리 감당하게 될 패신살성도 멀쩡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꽈아아앙!그그그그극!

선 자리에서 백 초식을 훌쩍 넘게 주고받던 두 사람의 손과 신형이 처음으로 멈췄다.

연수의 늘어난 팔의 잔상과 암주의 분신 같던 잔상이 사라지며 부딪힌 채 서로 한 치도 밀리지 않고 있는 연수의 곡월과 암주의 팔.

두 자루의 곡월을 두꺼운 묵살기로 감싼 양팔로 막고 있는 암주.

쉴 새 없이 튀어 오르는 불꽃과 경기의 폭풍.

두 사람을 감싸고 있던 회오리의 인력이 점차 강해짐에 따라 두 사람으로 인해 주변으로 뻗어 나가던 경기들이 회오리를 뚫고 나가지 못하고 회오리 안에 갇혀 회전하며 마치 먼지구름 안에서 천둥이 치듯 번쩍이며 굉음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힘겨루기를 하는 두 사람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흐르는 순간 두 사람의 눈매가 좁아졌다.

‘젠장!’

연수는 속으로 욕설이 절로 튀어나왔다.

다가오고 있는 여섯 개의 작지 않은 기운들.

저들을 끼고 암주와 싸우기가 부담스러워지는 연수였다.

그런데도 이 자리를 피하고 싶은 생각은 한치도 들지 않았다.

무인의 고집이라 해도 좋았고, 미련한 호승심이라 해도 좋았다.

호적수를 상대로 모든 걸 쏟아부으며 자신의 무를 증명하려 몸부림치는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 찬란했다.

어째서 암주와 싸우는지는 지금 이 순간 연수에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아주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건곤일척의 목숨 건 이 싸움을 피하고 싶지 않았다.

무인만이 아는 흥분.

이성을 마비시키고 마치 무아지경으로 이끄는 듯한 지금의 순간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그 순간 암주의 입이 열렸다.

-다가오지 마라! 나의 싸움이다!

쩌렁쩌렁 울려 퍼져 나가는 암주의 목소리에 주변을 감싸며 기세를 올리던 여섯 기운이 멈칫하며 뒤로 물러났다.

이심전심.

호선을 그리는 두 무인의 입매.

-꽈꽝!

굉음과 함께 뒤로 반보씩 밀려나는 두 사람의 신형.

누가더라고 할 수 없을 만큼 똑같이 뒤로 밀려난 두 사람의 입매에서 한 줄기의 핏물이 흘러나왔다.

동시에 반보씩 다가오며 다시 붙는 두 사람의 움직임이 바빠졌다.

그런 두 사람의 움직임이 전과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암주의 기괴한 장법이 점점 초식을 벗어나며 자유롭게 뻗어 나왔고, 직설적이던 연수의 초식 또한 특유의 색을 벗겨내며 변화해갔다.

기어코 두 무인의 눈이 깊게 잠기기 시작했다.

무아지경.

무인에게는 언제나 바라마지않는 순간이었다.

주변을 잊고 시간을 잊고 자신마저 잊고 오로지 한가지의 생각 속으로 빠져드는 순간.

하지만 이런 무아지경에 빠져들기 굉장히 위험한 순간들이 있다.

비무를 하고 있거나 초식을 수련 중일 때가 그랬다.

하여 명문에서는 제자들이 비무 중 혹은 초식을 수련할 때 무아지경에 빠져드는 경우가 있다면 상대를 물리거나 오히려 사문의 고수들이 직접 검을 맞대며 제자들을 이끌어 주기도 한다.

하지만 적과의 목숨을 건 치열한 싸움 중에 무아지경에 빠진다는 가정은 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진귀한 경우라 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입신경에 오른 두 무인이 거의 동시에 무아지경에 빠지는 경우는 우연이란 말로도 설명되지 않을 고금 최초의 일이라 해도 좋을 정도였다.

점차 변화하는 두 사람의 초식이 어느 순간 비슷해지기 시작하더니 거의 같은 궤를 보이는 순간이 찾아왔다.

두 자루의 단검을 사용하는 연수와 장법을 사용하는 암주의 초식이 같아진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다루는 무기가 다르다는 것은 거리가 다르다는 것이고, 투로가 다르다는 것이며 초식이 추구하는 방향이 다르다는 것인데, 그런데도 믿을 수 없도록 비슷하게 뻗어가던 두 사람의 초식이 거울을 들이민 것처럼 놀랍도록 똑같아지는 순간이 찾아왔다.

서로를 향해 좌수를 내뻗고 우수로 날아오는 좌수를 쳐낸다.

-꽝!

피를 토해내면서도 팔꿈치를 밀어 넣는다.

-꽝!

날카로운 두 팔꿈치가 부딪히는 순간 반대 손을 뻗는 두 사람.

-퍼어엉!

굉음과 함께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뒤로 물러서는 두 사람.

그런 두 무인의 눈에 생기가 다시 차오르기 시작했다.

“신교의 무공도 알고 있던가?”

“우연히. 몇 자락 얻어 배웠지.”

무아지경 속에서 서로의 영향을 받는 와중에 연수가 눈과 귀로 배웠던 뇌옥 죄수들의 무공이 녹아서 발현되었다.

그 결과가 두 무인의 놀랍도록 닮아 있는 초식의 방향을 끌고 간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무투라 하더니 설마 신교의 신공마저 훔쳤을 줄은 상상도 못 했군.”

“딱히 훔칠 생각은 아니었지만.”

“아주 재미있는 경험이었어. 이런 황홀한 싸움이 있을 줄 상상도 해본 적이 없는데.”

“나 역시.”

“이제 끝을 볼 때가 된 것 같군.”

“그래.”

서로가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한치도 패배는 염두에 두지 않는 두 무인이 말을 마치기 무섭게 내력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쿠르르릉!

서로가 끌어올린 기운의 반발만으로 천둥이 울리는 소리가 퍼져 나왔다.

암주는 전에 연수와 싸울 때 마지막에 썼던 회심의 장법을 준비했고, 연수는 아직 정리되지 않은 깨달음 속 흐릿하게 보이는 줄을 애써 붙잡으며 곡월을 움켜쥐었다.

서로를 향해 격돌하는 순간.

-쿠아아아아.

기이한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을 감싸고 있던 회오리가 찢어지듯 사방으로 흔들리며 흩어졌다.

주변에서 지켜보고 있던 여섯 마인이 뒤로 멀찍이 물러서며 폭풍처럼 몰아쳐 나오는 경기들을 쳐냈다.

그것만으로 이를 악물며 자신들의 절기를 쏟아내야 했던 여섯 마인.

-한 가지만 물어보지.

머릿속을 울리는 전성에 연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교주의 영향이었나? 나를 암살하러 움직인 것은.

잠시 암주를 바라보던 연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암주.

먼지구름이 걷힌 하늘은 어느새 어두 컴컴하게 변해 있었다.

반짝이는 별들을 보던 암주의 가슴에서 시작된 회의 무리가 담긴 파문. 그 파문이 점차 온몸으로 퍼져 나가며 폭발하듯 암주의 몸을 수백 조각으로 찢어버렸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여섯 명의 마인들은 눈을 부릅뜨며 그대로 굳어버렸다.

신교의 암주가 죽었다.

교주 외에는 신교 내에 상대가 없다던 암주가 이리 허망이 죽을 거라고는 상상도 해 본 적이 없던 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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