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8화
뇌옥의 밖으로 나오는 중에 떠오르는 햇빛 한 줄기가 뇌옥의 입구로 새어 들어왔다.
죄수들이 갇혀있는 곳까진 닿지 못하는 햇빛을 보는 순간 연수는 자신이 꽤 오래도록 무아지경에 빠져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입구까지 다가가니 저 멀리 떠오르는 환한 해가 눈에 들어왔다.
‘일과 월이라···.’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니 마교무공의 원류에 대한 생각이 문득 떠오르는 연수였다.
아마도 깨달음의 여운이 남아 있던 영향 같았다.
잠시 상념에 빠져 있던 연수가 움직이려는데 느껴지는 기척에 밑을 살펴보니 젊은 마인이 양동이에 음식을 가득 담아 제법 가벼운 발재간으로 단애를 오르고 있었다.
얼마 전만 해도 단애에 매어놓은 밧줄을 타고 고생하던 것과 비교해보면 한 손으로 밧줄을 잡고 여유 있게 뛰어오르는 모습이 성취가 제법 나쁘진 않았다.
‘확실히 나쁜 무재는 아니군. 머리만 좀 더 굴릴 줄 알면 큰 무인이 될 텐데.’
잠시 젊은 마인을 바라보던 연수가 바람같이 사라졌다.
* * *
운기를 마치며 눈을 뜨는 강효각.
그의 옆으로 흑의를 입고 검은 수염을 단전까지 곱게 기른 노인이 한 손으로 책을 읽으며 입을 열었다.
“회복은 다 끝난 거 같군.”
하얀 백발 속에 옆머리와 수염만 새카만 건장한 노인의 말에 강효각은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빚을 졌어.”
“설마 그 경지에 오른 무인이 독에 중독될 거란 상상은 해 본 적이 없는데. 광독전마의 원한이라도 샀던가?”
“설마. 겨우 그놈이 날 중독시킬 깜냥이나 되려고.”
“네가 중독된 그 독은 예전 중원에서 제법 이름을 날렸던 독전의 독과 매우 비슷해. 특히나 여러 독을 중독시켜 새로운 중독반응을 이끄는 것은 신기하더군. 아무리 너였더라도 자칫 내공을 크게 잃을 뻔했다. 대체 그 살수는 누구지?”
“패신살성! 그놈이 교내에 잠입해 있어.”
“패신살성? 중원의 꼬맹이에게 그렇게 당했단 말이지?”
“중원에 하나 남은 입신경의 고수야.”
“손자뻘 아이에게 당하고 그렇게 말하면 상한 체면이 조금은 바로 서나?”
강효각은 따끔하게 찔러오는 오랜 친우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교내에서 자신에게 막말하는 몇 안 되는 인물이자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고 지낼 수 있는 인물이었다.
흑살신의 정려천.
일월신교 내에서 의술로는 따를 자가 없다는 의원이자 숙청당하지 않고 남은 마지막 역천의 주인이었다.
아무 말 않고 검지와 엄지를 부지런히 비비고 있는 강효각을 슬쩍 본 정려천이 보고 있던 서책을 덮었다.
“하여튼 여전하군. 교내에 침입자가 들었다. 단순한 사건 아닌가? 찾아 죽이면 그만이지.”
“그럴 수 있었으면 진작에 그랬지. 무엇보다 교주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무력대는 전혀 움직이질 않고 있어.”
정려천이 눈매를 좁히며 강효각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잘 알지 않나?”
“흥! 교주가 미쳤다고 중원의 어린놈을 불러와 자네를 숙청할까? 교주가 원했다면 자네 목은 진작에 떨어졌을 것을.”
“...”
강효각 본인이 생각해도 그 점이 이상했다.
교주가 제재를 가해온다면 지금의 자신으로서는 손쓸 방도가 없었다.
그런데도 교주의 명을 정면으로 어기면서 일을 진행했고, 결국 처참하게 실패했다.
그랬는데 교주가 잠잠하다.
그런 와중에 패신살성의 암습으로 목숨을 잃을뻔했다.
모든 사건의 중심에 교주가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도무지 연결고리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조용한 거냐.’
그런 생각에 빠져 있는 강효각을 바라보며 정려천이 고개를 저었다.
“교주에게 맞설 생각하지 마. 그는 다섯 역천의 주인을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숙청하여 뇌옥에 처박은 자야. 그에게 맞섰던 교인 중 끝이 좋았던 사람은 아무도 없어.”
“...”
강효각은 할 말이 없었다. 자신은 이미 교주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넘었다고 생각했다.
정려천이야 그런 사실을 자세히 모르니 저리 말을 하고 있겠지만 이미 돌이킬 방법 따위 없었다.
“언제까지 여기 머물 건가?”
정려천의 물음에 강효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참 친구끼리 각박하게 굴기는.”
“흑야곡의 주인과 암주가 오래 붙어있는 걸 좋게 보지 않을 교인들이 많아.”
맞는 말이었다. 그래서 각별한 친구임에도 지난 몇십 년간 왕래가 잦지 못했으니.
지금에야 크게 다쳤으니 그걸 명분 삼아 이리 붙어 있었지만, 곧 이상한 말이 돌 수도 있었다.
잠시 정려천을 바라보던 강효각이 몸을 돌려 작은 초가집을 나섰다.
말없이 떠나는 강효각을 가만히 보던 정려천이 그의 등에 대고 결국 한마디 내뱉었다.
“조심하게.”
시선을 돌리지 않고 한 손을 들어 화답하며 움직이는 강효각.
* * *
암주가 지내던 석봉에 올라 기감을 펼치던 연수가 고개를 저었다.
‘역시 없군.’
고민이 되는 연수였다.
찾아 나서자니 너무 큰 이곳에서 어디에 있는 줄 모를 암주를 찾기가 난감했고, 무작정 기다리자니 암주가 돌아온다는 보장이 없었다.
고민하던 연수는 암주의 거처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조심스레 살피며 다가서는 연수.
기암괴석 사이에 절묘하게 지어진 암주의 거처는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했다.
바로 옆으로 깎아지른듯한 단애를 잠시 내려다본 연수는 기감을 넓히며 암주의 거처로 들어갔다.
총 여섯 채의 그리 크지 않은 건물을 品자와 역品자로 지어놓은 내부구조가 눈에 띄었다.
‘아무도 없군.’
하긴 주인이 없는 집에 인기척이 있을 리가 없었다.
첫 번째 집부터 세 번째 집까지는 암주의 호위들이 지내던 곳인지 별반 볼 게 없었고, 그 안쪽으로 지어진 안채들이 암주의 거쳐 같았다.
안으로 들어서기 무섭게 지형이 변하며 뿌옇게 끼는 안개.
‘환진.’
안개 속 살의가 느껴지며 마치 거대한 뱀의 신체 일부 같은 거대한 몸통이 슬쩍슬쩍 보였다.
순간 연수의 눈매가 좁혀지며 주위로 꼬여있는 오행의 기운들이 제자리를 찾아가자 연수를 향해 큰 아가리를 벌리며 달려들던 이무기의 머리가 흐려지며 연수를 스쳐 사라졌다.
오행신공을 완성하며 자연에 흩어져 있는 기운에 간섭하여 수발하는 능력이 놀랍도록 는 연수였다.
전 같으면 이런 진을 힘으로 깨던지 생문을 찾아 나왔어야 했을 텐데 이제는 절로 꼬아놓은 기운의 어긋남이 보였고, 간단하게 그 기운을 제자리로 맞춰 놓을 수 있게 된 연수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고는 걸음을 옮겼다.
-드르륵.
마치 자신의 거처인 양 편하게 문을 열고 들어서는 연수.
많은 서책과 고풍스러운 책상과 의자 그리고 다탁이 놓여 있는 거로 보아선 암주의 서재가 분명했다.
책장을 가득 채운 서책들을 둘러보며 몇몇 책을 꺼내 보는 연수.
‘꼴에 논어는 읽었나 보네.’
중원의 책들부터 글자를 알아볼 수 없는 타국의 책들도 적지 않았다.
‘아랍? 페르시아?’
아마도 페르시아의 글자가 아닐까 생각하고 책을 덮는 연수.
계속해서 책장의 책들을 보던 연수의 눈을 잡아끄는 물체.
마치 무언가의 가죽으로 만든 듯한 두꺼운 양피지에 절로 손이 가는 연수였다.
말려있는 양피지를 꺼내어 보니 안에는 불로 지져 작성한 듯한 글이 가득 적혀 있었다.
-묵살마장 부전 편.
‘부전 편?’
연수는 잘 알지 못했지만 묵살마장은 마교의 일정지위가 되는 인물들은 누구나 익힐 수 있는 무공이었다.
다만 익히기가 난해하여 깊이 익히고 있는 자가 없을 뿐.
일월신교 내에서 그런 묵살마장을 십 성 이상 익히고 있는 것은 암주가 유일했다.
그 이유가 연수의 손에 들려있는 양피지에 있었다.
묵살마장의 연공법을 따로 적어 전하지 않았던 부전 비급.
암주는 기연을 통해 그 비급을 얻을 수 있었고, 자신만이 드나들 수 있는 자신의 거처에 이를 보관하고 있었다.
그런 비급을 쭉 읽어보던 연수는 금방 양피지의 가치를 알아볼 수 있었다.
‘무공비급과 연성비급을 따로 나누어 놓았군.’
생각을 끝낸 연수는 빠르게 책장을 훑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보아도 묵살마장의 비급은 없었다.
포기하지 않고 서재의 구석구석을 뒤져 보는 연수.
하지만 그 어디에도 묵살마장의 비급은 나오지 않았다.
‘별수 없네.’
한참을 서재를 살피던 연수는 남은 두 방을 살펴보기 위해 몸을 돌렸다.
안채의 침실은 화려했지만, 연수에겐 별 볼일이 없었다.
남은 끝방.
-드르륵.
문을 열고는 안으로 들어서는 연수의 눈매가 좁아졌다.
문을 열자마자 한 걸음도 들어서지 못해서 두꺼운 철문이 연수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딱 보아도 열쇠가 없이는 누구의 출입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굳게 닫혀있는 철문.
어느새 연수의 손에 곡월이 쥐어졌다.
그리고는 뻗어 나오는 강기.
이글거리는 강기를 철문에 찔러넣고 비틀며 곡월을 크게 휘두르는 연수.
-크그그극
마찰음과 함께 연수가 철문을 힘껏 밀자 옆으로 부드럽게 밀려나는 철문.
햇빛 한점 안 들어오던 깜깜한 밀실에 두꺼운 철문이 열리자 빛이 들이치며 밀실을 밝게 밝혔다.
‘허, 이거 참. 별걸 다 보게 되네.’
차가운 한기와 함께 밀실 안 공기를 차게 만들고 있는 새하얀 얼음덩어리.
검디검은 묵철 위로 새하얀 자태를 드러낸 빙상은 연수도 익히 알고 있는 물건이었다.
‘만년한옥.’
한기의 결정체라는 만년한옥으로 만든 침상이었다.
연수가 사부에게 듣기로는 그 위에서 운기 하는 것만으로 내력이 쌓이는 것을 빠르게 늘려주며 기맥과 혈맥의 안정을 주어 주화입마의 위협을 막아주고 기맥을 단련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는 보물 이라 했다.
‘마공의 부담을 이것으로 이겨냈나? 누가 훔쳐갈까 철문까지 달아 방비해 놨군.’
연수의 입매가 호선을 그렸다.
만년한옥은 몸에 지닌 것만으로 요상의 효과를 주며 무인들의 내기를 안정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그 위에서 운기 하는 것만큼은 아니더라도 몸에 지닌 채 운기 하게 되면 내력을 쌓는 속도 또한 늘려준다.
이런 보물을 그냥 지나칠 연수가 아니었다.
목생화의 강기를 뽑아낸 연수가 조심스럽게 만년한옥의 귀퉁이를 잘라내기 시작했다.
-치이이이익!
소리와 함께 조금씩 잘리는 만년한옥.
팔뚝만큼 잘라낸 만년한옥을 천에 둘둘 쌓아 허리에 감아 매는 연수.
처음에는 허리를 얼릴 듯 차갑던 한옥의 한기가 잦아들며 마치 연수의 몸을 감싸듯 한옥의 기운이 연수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머리가 시원해지며 가슴에 쌓였던 화가 풀리는 것이 금방 그 효능을 보이는 만년한옥이었다.
연수가 암주의 안채에서 생활한 지 사흘째.
지난 사흘간 만년한옥의 침상 위에서 가부좌를 틀고 명상하며 기감을 최대한 넓히고 있던 연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천천히 다가오는 커다란 기운.
걸음걸음에 당당한 기운이 절로 실려있는 묵직한 걸음이 자신에게 다가옴을 느끼며 연수의 입매가 호선을 그렸다.
근처까지 다가오던 걸음이 멈칫했다.
아마도 발동되지 않는 환진에 잠시 당황하고 있는 듯 보였다.
사흘 만에 몸을 일으킨 연수가 그런 집주인의 마중을 나갔다.
“오래 기다렸어.”
안채에서 걸어 나오는 연수를 확인한 암주의 얼굴이 구겨졌다.
“이 미친놈이 여기가 어디라고!”
금방이라도 출수할 듯 인상을 구기고 기운을 끌어올리는 암주를 보며 연수가 미소지었다.
“그래도 제법 극독을 썼는데 역시 해독은 한 모양이네.”
“그깟 독이 무슨 대수라고.”
“그것보다 재미있는 물건을 가지고 있더군. 만년한옥이라니. 듣기나 해 봤지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인데 과연 그 효능이 대단하더군.”
“감히 내 침상에 그 더러운 몸뚱이를 디밀었다?”
“쯧, 말을 해도 상스럽게 하기는.”
암주의 두 팔 위로 시커먼 기운이 휘감기 시작했다.
“전에는 몰랐는데 그게 묵살마장이라는 무공이라며? 재미있는 장법이더군.”
암주는 목에 작은 가시가 걸린 듯 불편했다.
처음에는 그저 찢어 죽이고 싶던 적을 마주한 느낌이라고 생각했지만, 연수와 대화를 할수록 그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냉정하게 상황을 따져보니 그제야 자신이 놓치고 있던 것이 있음을 깨달았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독까지 쓰며 암습을 하던 적이 너무나 당당했다.
너무나 여유 있게 자신을 대하는 적의 저 태도가 암주의 경각심을 두드렸다.
“그새 회심의 한 수라도 준비했던가? 자신만만하군.”
암주의 말에 연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행신공을 완성했지.”
“흥! 겨우 오행신공 따위로 그런 자신감을 보였던가?”
“아, 옥현인의 반쪽짜리와 같이 생각하면 안 돼. 내 오행신공은 진짜니까.”
“그리 잘났으면 한번 보지.”
순간 사라지는 암주의 신형.
암주가 사라진 허공을 바라보던 연수의 신형 또한 자리에서 꺼지듯 사라져 버렸다.
-꽈깡!
암주의 거처 바로 위에서 굉음이 터져 나오며 엄청난 후폭풍이 몰아쳤다.
그와 동시에 건물의 지붕을 덮던 기왓장들이 깨져 나가기 시작했다.
단 한수의 교환을 마치고 뒤로 물러선 암주와 그런 암주를 가만히 바라보는 연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