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7화
뇌옥에서의 생활은 생각보다 연수에게 지낼만했다.
한때는 상승 무공에 대한 열망이라면 누구 못지않았던 연수였다.
무공욕심만 놓고 본다면 사문 자체가 가지는 개념이 다른 무인들과는 비할 수 없을 만큼 진취적이었다.
물론 그 도덕성에 관해 이야기하자면 끝이 없겠지만.
그런 연수에게 최근 열흘 남짓은 참으로 재미있는 날이었다.
딱히 노력을 하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은신만 하고 있으면 마교의 손에 꼽히는 상승무공들을 가만히 앉아서 얻을 수 있었다.
물론 역천의 심공은 지금의 연수에게는 익힐 필요가 단 일 푼도 없는 그런 무공들이었다.
이미 전설의 무공이라 전해지는 오행신공을 익히고 있는 연수였으니 딱히 위험한 역천의 마공을 익혀야 할 필요는 없었다.
그럼에도 재미있었다.
단순한 무공에 대한 흥미.
특히나 무공에 대한 잊었던 욕심이 되살아나기 시작하니 더 많은 마교의 무공들을 알고 싶었다.
“그게 아니래도. 사왕혈도법의 정수는 강맹한 초식들을 끊어지지 않게 이어가는 것에 있다 하지 않았느냐? 일 초부터 이십팔 초까지 모든 초식이 이어지며 어떤 초식들의 순서를 섞어도 모두 이어지게 구사하는 것이 그 묘리다.”
젊은 마인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어르신. 그게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분명 전에 배운 열 초식만 해도 삼 초와 육 초는 초식의 길이 시작하는 지점이 완전히 반대되지 않습니까? 삼 초는 위에서 밑으로 떨어지는 초식이고 육 초는 반대로 아래에서 위로 올라오는 길인데 그 두 초식이 가지는 묘리와 기운이 정반대인데···.”
“이익 멍청한 놈!”
‘멍청한 놈.’
연수와 사수왕군은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다.
다만 사수왕군은 입 밖으로 소리를 내며 말을 뱉었고, 연수는 속으로 삼켰다는 점만 다를 뿐이었다.
“제가 어디 가서 멍청하다는 말은 들어본 기억이 없습니다.”
“하아, 이놈아, 누가 두 초식을 동시에 펼치는 신기를 보이라 하더냐? 요점은 연결이라 하지 않느냐? 도가 떨어졌으면 올라가면 될 것이고 올라갔으면 떨어지면 되는 것을!”
“아···! 아니, 잠시만요. 그럼 도가 중단에서 시작하는 첫 초식이 후식으로 붙으면···.”
“하아”
한숨을 내쉬는 사수왕군에 의해 뒷말을 조심스레 흐리는 젊은 마인 이였다.
“떨어진 검을 올리며 첫 초식을 펼치면 그 팔이 떨어지기라도 한다더냐? 그러니까 몇 번을 말하지 않느냐? 사왕혈도법은 모든 초식의 흐름을 거스른다 해도 그 기운의 반발이 전혀 없는 신공이라고! 그러기에 한없이 자유롭게 공세를 이어가며 방어를 도외시한 공격적인 초식이 끝도 없이 반복되는 것이라고.. 이 자유로운 도법을 배우는데 어째서 스스로 초식에 갇혀 답답하게 구냔 말이다.”
“아, 알 것도 같습니다.”
“알면 아는 것이고, 모르면 모르는 것이지. 알 것도 같은 것은 뭐냐?”
“그게···. 머리로는 이해가 가는 것 같은데, 막상 펼쳐보려면 어르신의 말처럼 전혀 자연스럽게 초식이 연결되질 않아요.”
“네놈이 며칠 동안 각 초식만 죽어라 외우느라 벌써 몸에 익어버렸으니 단번에 고쳐지겠느냐! 앞으로는 이 초식들을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연습만 하거라.”
“그, 그럼 다음 초식은···.”
“쓰지도 못할 백 초식을 배우느니 쓸 수 있는 한 초식을 배우는 것이 더 나은 법.”
말을 마치고는 옥사 안에서 드러누워 버리는 사수왕군.
“예···.”
풀이 죽은 젊은 마인을 보며 크게 웃던 마랑살장이 입을 열었다.
“그러기에 내 장법을 먼저 배우라 하지 않았느냐? 내 무공은 그런 복잡한 무공과는 질적으로 추구하는 바가 다르다. 어차피 상대를 죽이기만 하면 그만인 것을 뭐 그리 복잡하게 접근한단 말이냐. 결국, 강하고 빠른 힘으로 찍어 누르면 그만인 것을. 어떻게 내 장법도 배워 가겠느냐?”
젊은 마인은 사수왕군의 눈치를 살폈다.
하나 사수왕군은 그저 눈을 감고 드러누워 입을 닫고 있을 뿐이었다.
“그, 그럼 조금 배워 놓는 것도···.”
‘능력도 없는 놈이 욕심만 많아서는.’
연수가 가장 싫어하는 부류였다. 능력이 안될 때는 소화 가능한 정도의 무공을 익히며 기본을 쌓는 것이 먼저다.
그것은 이곳이 역천의 무공을 익힌다는 마교라 할지라도 다를 것 없이 통용되는 진리였다.
아무리 마인이 마공을 연성하는 기간이 빠르다 할지라도 기본 없이 쌓이는 모래성이 공고하고 높이 올라갈 리 없는 법이다.
무공을 전수하길 극도로 꺼리던 죄수들이 서둘러 서로의 무공을 전하지 못해 안달 난 이유는 너무나 뻔히 보였다.
젊은 마인의 습득 속도를 더디게 하고 그 집중력을 빼앗기 위함이었다.
아무리 대단한 무재라도 한 번에 여러 무공을 동시에 붙잡고 수련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저 멍청한 옥수 놈은 그런 뻔한 꾀도 보지 못하고 한 수라도 더 배우지 못해 안달하고 있었다.
물론 겨우 보름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젊은 마인의 실력이 눈에 띄게 성장한 것은 놀랄만한 일이었다.
거기에는 복마공이라는 역천의 심공의 역할이 컸을 것이다.
게다가 월주편의 열두 발재간을 제법 익혀 그 운신의 재주가 꽤 늘었다.
하지만 그뿐. 딱 보이는 그 정도의 성취뿐 없던 기본기가 생기거나 하루아침에 대단한 내력을 쌓은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과연 마공은 내력을 쌓는 속도가 무시무시하네.’
단 보름도 안 되게 익혔다고 하기에는 젊은 마인의 느껴지는 내력이 처음 보았을 때와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나름 숨긴다고 숨기고 있었지만, 연수의 기감을 피하기에는 어림도 없었던 젊은 마인의 몸을 휘돌고 있는 내기가 연수에게는 훤히 보였다.
연수가 지금껏 강호를 떠돌며 보아왔던 무인 중 내력이 느는 속도는 저 젊은 마인이 두 번째로 빨랐다.
‘그래도 흡성신공만큼은 안되는군.’
어쩌면 당연했다. 남들이 죽어라, 고생해서 쌓아놓은 내력을 홀랑 빨아가는 흡성신공에 비한다면 아무리 마공이라 할지라도 대기에 존재하는 기운을 호흡을 통해 쌓는 토납법에 불과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재미있군. 저 다섯 심공은 모두 그 궤가 같아. 늙은 마인 말대로 한뿌리에서 나온 심공임에는 틀림이 없구나. 제각각 모두 다른 심공 같지만, 출발이 같으니.’
연수의 말을 빌리자면 무공욕심만 많은 멍청한 젊은 마인 덕에 다섯 죄수의 심공을 모두 외워버린 연수가 보기에 마교의 심공은 재미있는 점이 많았다. 특히 괴이할 만큼 독특하고 개성 있던 그 심공들의 시작의 궤가 모두 같았다.
‘해와 달이 교차하나 그 시작이 무엇일지 모른 다라···. 역천의 발상은 여기서 시작했겠군.’
그럼에도 익혀볼 생각은 눈곱만치도 들지 않는 역천의 심공들이었다.
모든 것에는 이치가 있기 마련.
인간의 몸에 혈맥이 있고, 혈맥에는 피가 흐르는 방향이 있다.
그 혈류를 따라 기맥과 혈에 기가 흐르는 것은 이치이고 순응해야 할 진리였다.
그런데 그를 뒤집어 반대로 기를 돌리는 행위는 중원의 무공을 익힌 연수에게는 미친 짓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음이 당연했다.
‘이제 내일쯤이면 회복이 끝나겠어.’
천천히 흐르는 내기와 혈을 살펴보니 웬만큼 치유가 끝나가고 있었다.
아직 견식 하지 못한 마공이 많은 것에 아쉬움이 드는 연수는 잠시 갈피를 잡지 못하고 꼬이는 초식에 애먹으며 수련하고 있는 젊은 마인을 바라보았다.
‘아쉽네.’
가능하다면 저 다섯 마인의 절초들을 전부 훔쳐보고 싶던 연수였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시간도 시간이지만 무엇보다 암주라는 커다란 벽이 남아 있었다.
어디 숨어있을지 모를 그를 찾는 일부터 다시 암습 계획을 짜 그를 죽이는 것까지 무엇하나 쉬운 난간이 없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연수가 원목의 등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내일이면 회복을 마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마치지 못한 일을 끝내러 내일이면 떠나야 합니다.
-보전. 병불염사
-이미 적을 속이는 것에는 이골이 났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보전하세요.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원목.
한참 무공을 배우던 젊은 마인이 돌아가고 평소와 같이 하나둘 쓰러져 잠들기 시작하는 죄수들.
“어째 저놈을 가르치면서부터 부쩍 피곤한가 잠이 많아지는 기분이야.”
흑살편복은 중얼거리기 무섭게 드러누워 곯아떨어졌다.
이윽고 연수를 중심으로 잔잔한 기세가 흘러나왔다.
내상의 치유를 끝내가다 보니 연수의 요상이 제법 대담해지기 시작했다.
‘오늘이 마지막이다.’
이제 뇌옥에서의 마지막이 끝나면 다시 한번 암주를 암살하기 위한 건곤일척의 살행이 시작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요상을 시작하는 연수.
수생목의 기운이 남아 있던 내상의 흔적들을 치유하며 기맥을 돌았다.
평소와 다르게 내상의 치유가 거의 끝나서인지 연수의 의식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내기를 최소화한 요상이라 해도 운기행공. 운기 중 잡념이 떠오른다는 것은 무인에게는 한없이 위험한 일이자 제일 경계해야만 할 일이었다.
익히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연수의 의식 속에서 떠오른 화두가 너무도 매혹적이어서였을까? 연수는 그 유혹을 이겨내지 못했다.
그 속에는 여러 번의 깨달음의 경험과 입신경에 오른 후의 내기 수발에 대한 자신감도 한몫했다.
명상이나 운공 중 의식과 무의식의 사이에서 떠오르는 깨달음이나 무리는 보통 이런 갑작스러운 화두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았고, 연수는 경험을 통해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명상 중 깨달음을 얻는 순간에는 자신도 모르게 활발한 운공이 이루어지며 새로운 길이 신체에 새겨지는 예도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을 방해받거나 미뤄두려 의식적으로 생각을 막아두면 그걸로 끝이다.
그 순간을 놓치면 한번 오던 화두는 잊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조심스럽게 화두를 끌어올려 생각의 중심에 두는 연수.
-다섯 마공의 궤가 같다. 역천의 심공. 역의 역은 정도인가?
재미있는 화두였다.
정해진 정도를 부정하고 반대로 역행하는 역천의 마공.
그렇다면 그 역천을 다시 역행하게 된다면 그것은 정공이 되는 것일까?
그 화두에 빠져들수록 연수의 의식이 무의식에 먹혀들기 시작했다.
의식이 점차 흐려지며 무아지경으로 빠져드는 연수.
그의 흐름 속에서 연수는 수많은 길을 보았다.
자신이 그동안 익혔던 심법들과 익히지는 않았지만 외우고 있는 많은 심법들.
그 안에는 잘은 몰라도 간접적으로 느꼈던 공숙의 내력 흐름의 길과, 강진후의 흡성신공의 길도 있었다.
그 모든 길이 떠오르고 사라지더니 이번에는 차례차례 뇌옥의 다섯 마인이 풀어 놓았던 역천의 심공들이 떠올랐다.
제각각 다른 지향점을 향해 뻗어가는 역천의 길.
점차 복잡한 다섯 가지 심공이 모두 떠오르는 순간.
그 다섯 심공이 하나로 합쳐지며 새로운 길이 보이는 듯했다.
처음에는 흐리던 그 길이 점차 뚜렷하게 보이며 하나의 원류의 길로 변해버렸다.
‘아! 이것이 시작의 길이었구나. 이것이 나뉘고 나아가며 다섯 개의 마공이 탄생하게 되었어.’
그 적잖은 세월의 흐름이 손에 잡힐 듯 느껴지는 듯한 감각에 연수의 몸이 잠시 부르르 떨렸다.
그 순간 아주 잠시 잠깐 느껴졌던 연수의 기척에 깜짝 놀란 원공이 옥 안의 구석을 바라보았다.
평소 기척이라고는 느낄 수가 없었던 연수의 기척이 무공을 잃은 자신에게 느껴지니 결코 순탄한 일이 아니었다.
걱정스러운 눈으로 구석을 바라보던 원목이 두 손을 합장한 채 속으로 불경을 외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연수의 무아지경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역천이라. 역천이라. 역천이라. 참으로 재미있구나.’
그랬다. 연수는 너무나 재미있었다.
마치 아이가 전혀 처음 보는 새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것처럼, 너무나 신비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것 마냥 신기하고 재미있어 어찌할 줄을 모를 정도였다.
‘누가 정한 것이지? 역천이라는 것은. 어떻게 이런 길을 만들어 냈을까? 역천은 꼭 마인가? 마란 무엇이지?’
점차 의문이 많아질수록 연수의 내기가 불안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원목의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연수는 심마에 빠져들고 있었다.
‘마도, 정도, 사도, 결국은 무인의 길이지. 아닌가? 수단을 위한 길이 아니던가?’
이제는 원목의 눈에 훤히 보일 정도로 은신이 풀려버린 연수.
그를 확인한 원목의 속이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정심한 정도의 경이나 자신이 깨달은 정도의 무리를 외워서라도 도움을 주고 싶었지만, 혀가 잘린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운기 중인 무인의 몸에 손을 대 글씨를 적어 줄 수도 없었다.
원목으로서는 걱정하며 연수가 부디 심마에서 빠져나오기를 바라고 또 바라는 수밖에는 없었다.
한참 심마의 속으로 빠져들던 연수의 머릿속에 불현듯 떠오르는 글자.
-순리.-
‘아아. 그래 순리를 벗어나면 역이다. 순리를 벗어나 인성을 지우면 마다. 나는 그래서 싸웠구나. 내 살성의 운명과. 그랬지···.’
-역의 역.-
다시 떠오르는 화두.
연수의 눈앞에 그려져 있는 다섯 마공이 합쳐져 나온 하나의 길. 그 길을 연수는 또다시 역으로 짚어 보였다.
점차 뒤집히는 전혀 새로운 길로 변하는 미로 같은 복잡한 길이 점차 단순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완성되는 역의 역.
-쿵!
머릿속을 울리는 굉음.
그와 동시에 연수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주르륵.
연수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핏물.
울렁.
가슴이 울렁인다 싶은 순간 중단전에 남아 있던 마지막 기운이 연수의 몸을 휘돌기 시작했다.
역의 역. 새롭게 보았던 그 길을 따라 순행하는 기운.
주천을 반복할수록 성질이 변하는 기운.
그리고 그 순행을 모두 마치는 순간 완전한 토의 성질로 바뀐 그 기운이 연수의 단전에 다른 네 기운과 함께 자리를 잡았다.
번쩍.
떠지는 연수의 두 눈에서 원목의 눈에도 훤히 보이는 정광이 쏟아져 나왔다.
아주 잠시간 찬란하게 쏟아지던 정광이 마치 갈무리 되듯 연수의 깊고 검은 두 눈동자에 숨어들었다.
그 정광을 확인한 원목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미소지었다.
얼굴의 대부분을 덮고 있는 원목의 수염이 위로 올라가는 것이 연수가 보기에도 분명 원목이 웃고 있는 것 같았다.
-파사현정. 일양내복. 축대성.
원목이 보기 드물게 열 글자가 넘게 바닥에 적는 글을 보며 연수는 두 손을 모아 포권을 올렸다.
-모두 대자대비한 부처님의 도움이 아니겠습니까? 부처님의 도움을 빌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의 바른 연수의 말에 원목의 수염이 더 올라가는 것이 크게 기쁜 감정을 표현하는 것 같았다.
반장을 하며 마주 고개를 숙이는 원목.
그 모습에 마치 연수는 원목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아미타불. 하는 목소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