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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놈에서 고수까지-184화 (184/202)

# 184화

가만히 가부좌를 틀고 있던 중이 그제야 음식에 손을 뻗었다.

밥 조금과 청경채 조금.

중은 그나마 양도 얼마 되지 않는 밥의 반을 덜어내 조금씩 뭉쳐 구석에 던졌다.

구석에 조그마한 구멍에서 나온 쥐 몇 마리가 익숙한 듯 중이 던져 놓은 밥 덩어리를 파먹기 시작했다.

그걸 보고는 천천히 식사를 시작하는 중.

천천히 식사하던 중의 몸이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하지만 잠시 움찔했던 중은 이어 식사를 계속했다.

식사를 끝낸 중은 오른손을 슬쩍 늘어트리고 바닥에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놀려 글씨를 적었다.

-원목.

그 순간 연수는 너무 놀라 은신이 풀릴 뻔했다.

얼마 전 흉흉한 기세를 내뿜던 고수가 근처에 있었다면 단박에 연수의 기세를 읽어냈을지도 모를 만큼 크게 흔들린 연수였다.

정리되지 않은 장발에 거칠고 길게 자라난 수염이 얼굴의 대부분을 가리는 모습이었기에 얼추 나이가 젊지 않다는 것은 예상했다.

또한, 한쪽 팔을 내놓은 승복은 소림 특유의 복장이니 소림의 승려일 거라 예상했지만 원자배라고는 상상도 할 수가 없었다.

한동안 마음을 진정시킨 연수의 전성이 다시 노승의 머릿속에 울렸다.

-원목 대사님이셨군요. 한데 어째서 마교의 뇌옥에 붙잡혀 계신 겁니까?

천천히 손가락으로 바닥에 글씨를 적는 노승.

-하악이상달. 망양지탄.

노승은 기력이 쇠했는지 움직임을 최소한으로 하며 글자를 풀어냈다.

연수는 아리송한 노승의 글자를 읽고는 전성을 보냈다.

-무학을 공부하다 마공에 관심이 생겨 이곳까지 오셨다가 붙잡혔다는 말씀입니까?

아주 미세하게 끄덕이는 노승의 고개.

‘하, 무슨 이런···.’

소림의 무승이 홀로 마공을 견식 하기 위해 마교에 들어왔다니 연수는 도무지 노승의 심경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망양지탄이란 말이 절로 수긍이 되는 연수.

-아니 대사님. 대체 어떤 마라의 유혹에 빠지셨기에 이리 어리석은 행동을 하신단 말입니까?

잠시 허공을 응시하던 노승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패가망신.

-...

연수는 할 말을 잃었다.

아무리 남의 일이라지만 패가망신이라는 네 글자로 자신의 상황을 표현한 노승의 말에 웃음이 터져 나올뻔했다.

‘농을 하시는 건가?’

-길게 이야기를 할 여유가 없습니다. 일단 저는 제 할 일이 급하니 일을 마치고 여유가 된다면 어찌 모시고 빠져나갈 길을 찾아보겠습니다. 만약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 이 일을 소림에 알려 드릴 테니 보전하고 계세요.

-백골난망.

‘이 노친네도 정상은 아니구나.’

생각을 마친 연수는 뇌옥의 굴을 빠져나왔다.

굴을 빠져나오니 신선한 공기와 함께 호흡이 편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지독한 냄새였네.’

굴을 빠져나와 여러 날 석봉을 올라다니며 살피던 연수.

정확히 열두 개의 석봉을 올라서 살핀 후 열세 개째의 석봉에 올라섰는데 그곳에서 그토록 찾던 이를 찾은 연수였다.

강효각.

잔뜩 미간을 구긴 채 풍경 좋은 봉우리 끝에 지어진 정자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 화려한 옷차림의 그를 보는 순간 연수는 인상을 찌푸리고는 조심스럽게 거리를 벌렸다.

그와의 거리를 스무 장까지 벌인 후에야 겨우 한숨을 내쉬는 연수였다.

‘빌어먹을 괴물이잖아! 교주 이 염병할 인간이···.’

상대는 연수의 생각만큼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암습의 이점을 살릴 수만 있다면 비슷한 상대라 할지라도 자신이 있었지만 암주는 이미 연수의 생각을 벗어나는 고수였다.

‘교주 말고도 저 정도의 고수가 있었다니.’

아무리 기인이 많은 무림이고 상대가 마교의 고수라지만 설마하니 저렇게나 윗줄에 있는 고수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하던 연수였기에 시름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암습을 한다고 해도 주변 열 장 안으로는 들어가기가 힘든데.’

결국, 상대가 가장 취약할 때를 노려야만 했다.

문득 구룡산에 올라 사부와 이야기하던 때가 떠오르는 연수였다.

-상대가 너보다 강하다고 한들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아무리 고수라 쳐도 지도 밥도 먹을 것이고 잠도 잘 것이고 측간도 가야 할 것인데. 언젠가 기회가 생기겠지.’

그날 이후로 암주를 멀리서 살피는 연수와 이를 모르는 암주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연수는 주로 암주가 머무는 석봉의 중간에 파인 좁은 굴에서 잠을 자며 거의 하루의 대부분을 암주를 살피는 데 시간을 보냈다.

암주의 곁에는 서른여섯 명의 은신하고 암주를 보호하는 그림자들이 있었고, 간혹 암주의 명을 받기도 하고 바깥소식을 전해주는 몇 명의 심복들이 오가기도 했다.

하루 중 거의 대부분을 정자 안에서 시간을 보내는 암주.

그런 암주를 보며 연수는 고개를 갸웃했다.

‘거의 수련하는 꼬락서니를 안 보이는군.’

저 정도 고수라면 적어도 명상을 통한 수련 내지는 운공이라도 시간 맞춰서 하는 것이 일반적일 텐데 희한하게도 수련을 하는 꼴을 보이지 않는 암주였다.

그렇게 보름을 넘게 암주를 지켜보던 연수는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이제 준비를 해야겠군.’

그동안 암주의 행동을 놓치지 않고 감시하던 연수에게는 이젠 얼추 그의 일상이 손에 잡힐 듯 보이기 시작했다.

석봉 가운데에 좁은 굴로 들어온 연수는 품에서 몇 가지 병을 꺼내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혈독의 종류인 이놈과···. 이놈을 섞고···. 산공종류의 독도 섞고···. 또···.’

조그마한 다섯 개의 병에서 가루와 액체를 모아 섞은 후 조심스럽게 곡월과 지니고 다니던 침에 바르는 연수.

평소와 다르게 극독에 가깝게 합독한 독을 준비한 연수는 해가 떠오르기 전 새벽이 되자 조심스럽게 정자로 올라섰다.

정자의 구석 곳곳에 작은 독침을 놓아둔 연수는 천장으로 숨어 은신한 채로 두 눈을 감고 내기와 혈맥의 흐름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점차 의식이 멀어지며 수마에 빠지기 시작하는 연수.

귀식대법까지는 아니지만, 의도적으로 혼수상태에 가깝게 만드는 이 수법은 예전 땅속에서 삼 년 동안 깨어나지 못했던 기억을 되살려 나름 구축한 방식이었다.

은신하는 최소한의 내력의 흐름을 제외한 모든 기맥과 혈맥을 막아가며 몸의 대사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방식.

‘... 이제 두 시진 후···.’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 마지막 연수의 생각이었다.

연수의 승부를 던진 이번 수는 만약 암주가 평소와 달리 이 정자를 찾지 않으면 전혀 쓸모가 없었다. 하지만 연수는 시도해야만 했다. 언제까지고 기다린다 해도 특별한 때나 수가 떠오르진 않았다.

연수의 계산대로라면 암주는 분명 진시에는 이 정자에서 인상을 잔뜩 구긴 채 생각에 잠겨있을 것이었다.

그 순간을 노리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 외에는 경호하고 있는 그림자들의 거리가 너무도 가까워 함부로 다가서기가 쉽지가 않았다.

평소와 같이 정자에서 뜨는 해를 바라보며 차를 들이켜는 강효각.

최근 그의 골머리를 아프게 하는 일 중 교주의 침묵은 정말이지 미칠 것 같았다.

차라리 자신을 불러 벌을 내리던가 찾아와서 난리를 치고 간다면 속이라도 편하겠는데 이건 감감무소식에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심지어 교전회의나 신녀의 교설연에도 그 모습을 보이질 않으니 도무지 평상심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다.

전 같으면 아예 무시라도 하겠지만 천일공의 위력과 호법원의 신위를 몸소 경험한 이후로는 그 또한 불가능했다.

‘교주의 강함이야 어느 정도 예상했었지만 호법원에 그런 고수들이 숨죽이고 있었을 줄은···.’

“하아.”

매일 보는 일출의 장관도 이제는 암주의 시름을 잊게 해 주기가 힘들었다.

“그 빌어먹을 패신살성이란 어린 새끼만 아니었···.”

혼잣말하던 암주의 말이 끊겼다.

갑작스레 느껴지는 이질적인 기척에 반사적으로 위를 올려다본 암주는 세상에 태어나 그토록 놀라본 적이 없었다.

떨어져 내리며 곡월을 손에 쥔 연수는 고개를 올려 자신을 확인한 암주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는 것을 보며 기세를 폭발시키듯 끌어올려 개방했다.

정자를 중심으로 순간 폭발적인 기세가 뿜어져 나오자, 정자를 둘러싸고 있던 서른여섯 명의 암주 호위들이 허공을 찢고 나와 정자를 향해 달려나갔다.

이상해서 고개를 올려보았더니 괴상한 칼을 쥔 놈이 천장에서 떨어지며 자신을 향해 검을 들이대는 상황은 암주의 평생을 살며 겪어 보지 못했던 일이었다.

수많은 암습을 당해도 보았고, 실제로 암습을 한 적도 적지 않았다.

신교의 철인들과 생활하며 암주의 자리까지 올라오는 길이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았으니 이는 당연히 겪어야 할 일이었다.

심지어 측간에서 볼일을 보다가 암습을 당해 비명횡사하는 무인들을 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접근하여 암습을 가하는 적을 뒤늦게 알아차린 적은 없었다.

그것도 지금과 같은 경지에 오른 이후로는 더더욱.

그렇기에 반응이 늦었다.

평소 같으면 적의를 느끼는 순간 몸이 반응했을 텐데 이 상황 자체를 인지하는데 너무나 많은 시간이 흘러가 버렸다.

적의 기세를 느끼고 호위들이 달려드는 순간에야 월야공을 끌어 올리기 시작했으니 더 말해 무엇할까.

암주가 월야공을 끌어 올리며 그 손을 뻗을 때는 이미 연수의 곡월이 암주의 승모근을 파고들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마교의 고수라 소문이 자자한 강효각은 재빨리 손을 뻗어 무서운 장력을 뿜어내며 연수의 머리를 노려왔다.

-후웅! 스악!

연수는 자신의 머리로 근접거리에서 날아오는 강효각의 일장을 반대 손에 쥐어진 곡월로 그어버렸다.

곡월에서 튀어나온 강기가 강효각의 장력을 갈라버리자 손을 거둬들이며 뒤로 물러서는 강효각.

애초에 그의 정수리를 반으로 쪼갤 생각이었지만 몸을 틀어 피한 암주의 반응에 연수는 아쉬움이 커졌다. 하지만 이제 시작이었다.

연수의 몸에서 희미하고 얇은 기사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강효각은 상대의 몸에서 느껴지는 기이한 기감에 고개를 갸웃했다.

한 손으로는 깊게 베인 승모근을 지혈하며 만반의 대비를 하려는데 종아리에 따끔한 느낌에 호신강기를 두르는 강효각.

-따따따땅!

하지만 반응이 늦어 종아리에 하나의 바늘을 허용한 강효각이었다.

여기까지 공수가 이뤄지고 나서야 정자로 몰려드는 삼십육인.

“쳇!”

혀를 차며 몸을 회전시키는 연수.

회련쾌참격의 초식이 풀려나오며 좁은 정자 안에서 강기 다발이 사방으로 쏟아졌다.

달려들던 삼십육인 중 제일 먼저 연수에게 다가서던 오인이 그대로 강기에 휩쓸려 두 동강 나 죽었고, 나머지 삼십일 인은 날아오는 강기들을 빗겨내거나 피하며 주춤거렸다.

강효각 역시 월야공을 끌어올려 묵살마장을 펼쳐내며 다가오는 강기를 찢어버리고는 연수를 노려보았다.

-까캉!

순식간에 자신을 노려보던 암주에게 다가가 곡월을 휘두른 연수.

강효각은 강기가 어린 곡월을 시커멓게 변한 손으로 쳐내며 뒤로 물러섰고, 연수는 놓아줄 생각이 없는 듯 그런 강효각을 향해 따라붙었다.

“빌어먹을 새끼가!”

자신을 먹잇감으로 보는 듯한 상대의 눈빛을 확인한 강효각의 노성이 터져 나오며 그의 신형이 연수를 향해 마주 날아갔다.

-카카캉! 꽝!

연수를 향해 몸을 날리던 삼십일 인의 호위들은 연수와 강효각이 격돌하며 사방으로 퍼지는 경기와 기세에 주춤하며 함부로 둘의 격전에 참견하지 못하고 있었다.

흥분하여 장력을 쏟아내는 강효각.

하지만 냉정함을 유지하며 그런 강효각의 장력을 착실히 소멸시키고 거리를 좁히는 연수.

‘지금이 기회다. 앞으로 두 호흡.’

연수는 일부러 도발하듯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마치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강효각의 마지막 장력을 강기로 갈라버리는 연수.

강효각은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그 표정을 보고는 더 흥분했다.

묵살마장.

그가 이립 이후 가장 심혈을 기울이며 수련한 장법이다.

암주만이 익힐 수 있는 월야공과 가장 상성이 좋으면서도 일월신교 내에서 가장 심오한 묵살마장은 수많은 신교의 신공 중 장법으로는 첫손가락에 뽑히는 장법이었다.

다만 난해하고 심오한 특성이 있어 아무나 익힌다고 대성하는 것도 아닐뿐더러 다른 장법에 비해 성과를 내기 힘들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강효각은 자신의 타고난 무재를 믿고 지금까지 묵살마장을 깊이 수련해 왔다.

그런 강효각의 양팔이 시커멓게 물들며 마치 뱀이 팔을 휘감듯 검고 짙은 마기가 강효각의 팔을 휘감고 돌기 시작했다.

“찢어 죽여주마.”

강효각의 양손에서 좀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장력이 뻗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 장력을 곡월을 휘두르며 막아내는 연수.

좌우 위아래에서 치고 들어오는 장력은 날카롭고 빠르며 그 기세가 음유해서 상대하기 보통 까다로운 것이 아니었다.

쉴 새 없이 양팔을 휘두르는 강효각과 그와의 거리를 좁히며 장력을 막아내는 연수.

-캉! 솩! 솩! 콰콰쾅!

기어코 거리를 좁힌 연수의 곡월과 마기가 휘감고 있는 시커먼 강효각의 팔이 부딪혔다.

승모근을 깊게 베인 강효각의 팔이 조금씩 늦게 움직이며 아주 조금씩 그의 장법이 흔들리고 있음을 눈치챈 연수는 노골적으로 강효각의 왼쪽으로 돌며 왼팔을 노려 왔다.

‘이제 한 호흡.’

순간 곡월을 둘러싼 강기가 날카로운 기세를 띄며 강효각의 팔을 찍어 갔다.

-캉! 캉! 캉! 깡!

네 번이나 같은 곳을 찍어오는 연수의 파병초에 인상을 찡그린 강효각이 뒤로 물러서려는 순간 강효각은 태어나서 두 번째로 놀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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