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3화
한동안의 침묵을 깨고 입을 여는 무황.
“쉽진 않겠지. 하나 필패라고 정해진 것도 아니다. 중원의 무림인들이 모두 똘똘 뭉친다면 제아무리 마교의 마인들 이라도 그리 쉽게 중원에 덤벼들 수 없을 것이다.”
“어제 들은 이야기를 살펴보면 교주는 그다지 중원 무림을 신경 쓰지 않고 있었어요. 그가 신경 쓰는 것은 오로지 황궁의 시선이었어요. 황군을 경계하는 것 같더라고요.”
“그의 말을 모두 믿을 수는 없다. 그 속을 알 수 없는 놈들이야.”
무황의 단언에 연수는 잠시 지인들을 쭉 둘러 보았다.
“마교의 절대 고수 하나를 죽일 기회에요. 만약 절 죽이고자 했다면 이런 함정을 만드느니 어제 교주가 직접 손을 썼으면 됐을 거예요. 대면해 보고 알았어요. 그는 저보다 윗줄에 있는 고수였어요.”
연수가 그나마 교주의 말에 일말의 신뢰를 하는 이유였다.
홀로 나선 그가 어젯밤 손을 썼다면 아마 십중팔구 자신은 죽었으리라.
“결국, 너는 천산으로 가려는 것이구나.”
두보의 말에 연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듣고만 있던 도화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어깨를 가늘게 떨고 있는 그녀를 본 연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도화야···.”
“오라버니···. 전···.”
이미 연수가 죽었다는 소식에 의해 정신까지 놓은 경험이 있던 그녀였다.
그런 그녀의 손을 꼭 잡는 연수.
“걱정 하지 말라는 말은 않을게. 날 믿어. 나는 언제나 네가 있는 곳으로 돌아올 거니까.”
떨림이 멎는 도화.
연수의 말에는 자신의 불안을 날려주는 신뢰감이 있었다.
그 이후로도 한동안 이야기를 계속한 끝에 연수는 결국 고집을 꺾지 않았다.
특히나 무황과 주두보는 연수의 천산행을 몸으로라도 막을 기세였으나 끝내 연수에게 설득되고 만 그들이었다.
야심한 밤에 몇몇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혈개문을 떠나는 연수.
그런 연수의 등 뒤로 사부 주두보의 말이 들려왔다.
“이놈아! 약속 잊으면 안 돼!”
그 말에 연수는 얼굴이 붉어졌다.
어제 모인 자리에서 이야기를 이어가다 화제가 엉뚱한 방향으로 돌아가 천산에서의 일을 끝내고 돌아오면 도화와 혼인을 치르기로 조건을 내걸었던 두보였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그런 결론이 나오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던 연수였지만 무황도 가세한 그 기적의 논리에 연수는 결국 손을 들 수밖엔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 자신을 보내주지 않을 것 같았기에.
신강을 향해 청해를 가로지르는 관도를 따라 걷던 연수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부르셨다 들었습니다.”
“아, 별건 아니고, 앞으로 보름 후에 이 편지를 당문에 전해줘.”
연수의 은밀한 부름에 관도에 나귀를 끌고 허름한 차림으로 찾아온 하오문의 무인.
“그것뿐 입니까?”
“그래. 혹 문주를 보거든 지난번 영약은 잘 받았다고 전해주고.”
“예.”
슬쩍 고개를 숙인 무인은 나귀의 엉덩이를 때리며 연수를 지나쳐갔다.
그와 동시에 혈개문이 있는 멀어진 덕창현을 잠시 돌아보던 연수의 신형이 사라졌다.
공중으로 솟구쳐서는 무서운 속도로 쏘아져 나가는 연수.
연수가 신강을 향해 이동하기 시작한 지 삼일.
청해의 감덕현을 지나 이름 모를 산을 넘던 연수의 발걸음이 멈춰섰다.
눈앞에 있는 제법 규모가 커 보이는 화전민의 마을을 보고 있는 연수.
‘생기가 하나도 느껴지질 않는군.’
저리 큰 화전마을에 어째서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지 짚이는 구석이 있는 연수의 고개가 절레절레 저어졌다.
‘혈정취연공.’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화전마을을 살펴보는 연수.
마을의 상태로 보아 사람들이 사라진 지 제법 오래돼 보였다.
감덕현으로 되 돌아온 연수는 감덕의 하오문을 찾아 소림으로 한 장의 전서를 보냈다.
그러고는 다시금 길을 재촉하는 연수.
덕창을 떠난 지 열하루 만에 신강의 천산 근처에 도착한 연수.
멀리서 수많은 봉우리를 바라보는 연수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과연 어마어마한 산맥과 한눈에 담기지 않는 그 거대한 규모의 산봉우리들은 천혜의 요새라 불릴 만했다.
어째서 일월신교가 이 척박한 곳에 터를 잡았는지 연수는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아무리 황군이라도 이 산맥을 다 뒤지는 건 쉽지 않겠지.’
생각을 마친 연수의 신형이 허공에 녹아들었다.
백만의 대군에게는 힘든 일일지 모르지만, 연수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며칠만 돌아다녀 보면 분명 마인의 흉흉한 기운이 느껴질 테니.
천산의 높고 방대한 산맥을 은신한 채 돌아다니는 연수.
미리 챙겨왔던 벽곡단을 씹으며 천산을 돌아다닌 지 오 일. 산맥 깊은 곳에서 드디어 무인의 기세가 느껴졌다.
대단치는 않지만 제법 묵직하고, 무엇보다 중원 무림에서는 마기라고 하는 정심하지 못한 역천의 기운이 본능적인 거부감을 주는 것이 마인이 분명했다.
느껴지는 기운을 쫓아 가다 보니 산의 초입에서 중간까지 보초를 서는 듯 보이는 마인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그들을 지나치며 산 중턱의 뒤로 돌다 보니 산 한가운데에 동굴이 보였다.
그리 크지 않은 입구를 다섯 명이나 되는 마인들이 막아서고 경계하고 있었다.
그들의 이목을 속이고 숨어드는 연수.
긴 동굴을 따라 이동하니 나타나는 분지.
그 엄청난 규모의 분지로 펼쳐지는 어마어마한 마교의 규모에 연수는 절로 입이 벌어졌다.
‘딱 봐도 일만이 넘는 사람들이 생활할 규모인데···.’
기껏해야 보초나 서는 하급 마인들 조차 그 기세가 만만치가 않았다.
그런데 그런 마인들이 일만의 규모로 키워놓았다면 이는 보통 일이 아니었다.
분지의 주위 석봉 또한 많은 건축물이 지어져 있었고, 그 뒤로도 펼쳐져 있을 규모를 생각하니 연수는 두통이 다 느껴졌다.
분지를 눈앞에 둔 것만으로 수많은 마인들의 마기가 느껴져 왔다.
엄청난 군중의 기세가 뭉쳐져 마기로 다가오니 절로 짜증이 치솟았다.
‘빌어먹을.’
은신한 채 주변을 분지로 들어가는 연수.
그 중 특히나 연수의 시선을 잡아끈 것은 분지를 둘러싼 높은 단애의 석벽을 맨몸으로 올라서는 수많은 마인들이었다.
족히 수백은 되어 보이는 마인들이 맨몸으로 단애에 올라서는 모습은 마치 개미 떼가 벽을 기어오르는 듯 보였다.
‘징그러운 새끼들. 무식하게도 수련하네.’
괜히 마인들을 욕해보았지만 사실 저만한 근력 수련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연수였다. 다만 목숨을 담보로 하는 수련이라는 것이 문제일 뿐.
육체의 최대의 힘을 쥐어짜고 단련하는 데에는 절벽을 오르는 것만 한 것도 없었다.
그 외에도 서로 다른 색 무복을 입은 천여 명의 마인들이 서로 섞이며 대형훈련을 하는 모습도 보였는데 근처만 가도 그들이 내뿜는 마기가 후끈하게 느껴졌다.
대략 사흘이 넘도록 마교의 곳곳을 다니며 암주를 찾아보는 연수. 하지만 웬만한 곳은 다 찾아보았지만 암주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저 봉우리 중 하나에 있다는 건데···.’
스물아홉 개의 분지를 둘러싼 높고 낮은 석봉들을 둘러보는 연수의 얼굴이 구겨졌다.
석봉 곳곳에 위태롭게 지어진 건물들을 바라보며 검은 건물이 꼭대기에 지어진 봉우리를 올려다보는 연수.
일단은 첫 목표를 그 봉우리로 정한 연수의 신형이 천천히 석봉을 오르기 시작했다.
마음을 먹고 오르면 몇 번 석벽을 박차는 것만으로 꼭대기까지 오르겠지만 은신을 들켜선 안 되는 연수로서는 천천히 벽에 붙어 조심스럽게 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한 시진이 넘도록 삼 분의 이쯤 올랐을 때쯤 연수의 얼굴에 잔뜩 긴장한 표정이 어렸다.
단애의 꼭대기에서 미친 듯이 달리며 밑으로 내려오는 다섯 명의 마인.
연수가 은신하고 숨은 지척을 스치듯 뛰어 내려가는 마인들의 기세가 보통이 아니었다.
‘이 정도 무인이 흔한 편인가?’
딱 봐도 절정의 경지에 오른 마인들이었다. 게다가 엄청난 내력이 느껴지는 것이 보통 내가의 고수가 아니었다.
잠시 한숨을 내쉬고 단애를 오르는 연수.
연수가 꼭대기에 오르는 순간이었다.
-파아아아.
느껴지는 기파가 심상치가 않았다.
엄청난 압박감과 동시에 주변으로 퍼지는 기세의 파문이 보통의 고수가 뿜어낼 수 없는 기세였다.
‘제대로 찾은 건가?’
마치 생선을 훔치는 고양이처럼 조심스럽게 커다란 검은 건물 내로 들어서는 연수.
“황연단! 그놈이 감히 내 자리를 노려?!”
호통과 함께 다시 한번 퍼져나오는 기세의 파문.
건물 안쪽 마당에서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화를 내는 중년인이 발을 구르자 그의 진각에 마치 건물 전체가 잘게 떠는 듯 느껴졌다.
‘아니군. 대체 뭐 하는 놈이길래 기세가 이리도 험해?’
연수는 잠시 햇빛이 닿지 않는 음지에 은신한 채 사내와 그 앞에 서 있는 여인을 지켜 보고 있었다.
“진정하세요. 지금은 이렇게 흥분하시기보다 황부대주를 불러 사실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흥! 이미 암주님이 확인한 사안이야! 그분께서 확인한 일에 따로 사실확인이 뭐가 중요하단 거냐!”
“그렇다고 그의 이야기도 들어보지 않고, 그를 내칠 수는 없습니다. 그는 저희 가문에 적잖은 공로가 있어요.”
“젠장!”
한동안 씩씩대는 그를 보며 연수는 조용히 발걸음을 돌렸다.
아무래도 마교의 가신 중 하나인 것 같았다. 아쉽게도 암주가 머무는 곳은 아니었다.
봉우리 위쪽은 그 뒤로도 드문드문 지어진 집들이 있었다.
‘느껴지는 기운들이 대단치는 않은데···. 그러고 보니 그 양반은 달랑 용모파기 한 장 줘놓고 이런 일을 시켜?’
한숨을 내쉬며 움직이는 연수.
마음 같아서는 허공을 가르며 옆 봉우리로 뛰어넘고 싶었지만 마인들이 득실거리는 이곳에서 그럴 수는 없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 단애를 내려가는 연수.
단애를 내려가다 보니 단애의 중간에 허리를 숙이고 들어갈 만한 좁은 굴이 보였다.
그냥 지나치지 않고 살피기 위해 굴로 들어가는 연수,
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는 좁은 굴은 깊이가 상당히 깊었다.
‘뭐 하는 곳이야?’
굴 안쪽으로 깊이 들어가다 보니 굴이 제법 넓어지며 코를 찌르는 오물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크윽! 배수 시설이라도 만들어 놓은 건가?’
하지만 연수의 생각과는 다르게 안으로 들어가 보니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창살 안으로 갇힌 폐인들이 보였다.
무슨 잘못을 해서 잡혀 온 사람들인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그중 연수의 눈을 잡아끄는 인물이 하나 있었다.
다른 죄수들과 다르게 가부좌를 틀고 앉아 정심한 느낌을 주는 비쩍 마른 죄수.
그는 해지고 더럽혀졌지만 분명 한쪽 어깨를 밖으로 뺀 승복을 입고 있었다.
‘소림사의 중이 왜?’
죄수들은 분명 단전을 파괴되었는지 그 어떤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그들이 한때는 무인이었다는 흔적과 느낌은 제법 풍겼다.
연수의 눈에 든 중을 빼면 대부분이 마인이 틀림이 없었다.
하지만 산발한 머리 사이로 정광을 뿜어내는 듯한 저 승려는 분명 정신한 정공을 익힌 소림의 제자가 분명해 보였다.
연수는 순간적으로 갈등이 생겼다.
그냥 못 본 척 지나치자니 소림에서 받은 은혜가 적지 않았고, 그렇다고 상관하고 나서자니 그와 마교사이의 곡절을 알지 못했다.
자칫 해야 할 일을 그르칠 수도 있었기에 고민은 깊어졌다.
잠시 은신한 채로 정체를 짐작할 수 없는 중을 지켜보고 있는데 마인의 기척이 느껴졌다.
어두운 굴로 횃불을 들고 들어오는 젊은 마인 한 명.
그는 말없이 나무양동이에 넣어온 음식을 창살 안으로 던져넣었다.
다른 마인들은 모두 던져준 음식들을 게걸스럽게 먹기 시작하는데 그 중만이 여전히 정심한 눈빛으로 마인을 올려다보고는 고개를 떨구고 눈을 감았다.
“빌어먹을 새끼.”
마인은 그 중의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욕을 내뱉고는 몸을 돌렸다.
그런 마인을 붙잡는 죄수들.
“오늘은 배설물 좀 치워줘. 넘친 지 오래되었어.”
“음식 남는 것 좀 더 줘!”
“물이 모자라.”
젊은 마인은 그런 죄수들의 말에 걸음을 멈추며 난색을 보였다.
“청소 날은 정해져 있는 것 아시잖아요. 배식은 정해진 양 이상을 할 수가 없어요.”
“그래도 좀 해줘. 한때는 역천의 주인이라 불리던 우리인데.”
“그래. 인제 와서 이리되었다고 너무 야박하게 굴지 말라고. 저런 재수 없는 땡중이랑 같이 갇혀 있는 것도 비참한데 말이야.”
“하아.”
젊은 마인은 그래도 인정이 있는 인물인지 창살을 열고 들어가 배설 통을 가지고 나와 옮기기 시작했다.
한 손에는 횃불을 들고 배설 통을 가지고 나가 한참 있다 돌아오는 것을 다섯 번이나 반복한 끝에 죄수들의 모든 배설 통을 비워낸 마인.
그는 새로운 양동이에 물을 가득 담아와 죄수들의 통을 가득 채워주고는 땀을 닦는 시늉을 했다.
“이거 들키면 저 치도곤을 당하는 거 아시죠?”
“클클, 걱정 마.”
마인은 일을 끝내고도 우물쭈물하며 냄새나는 굴을 나가지 않고 뻗댔다.
“큼큼! 저 어르신들, 이번엔 뭔가 없습니까? 지난번 알려주신 흑지단수는 제법 쓸 만하던데···.”
“아직 그것도 다 못 익혔을 텐데?”
“다 익혔어요. 덕분에 이번에 뇌옥 관리장이 될지도 몰라요. 제가 관리장이 되면···.”
“그렇다면 얼른 알려줘야지? 뭐가 좋을까?”
“단애광도법을 가르쳐 주는 게 어떨까?”
“그건 저놈이 익히기에 공력이 모자라서 안 돼.”
“그럼 흑살장을?”
“그것도 공력이 모자라지.”
한동안 떠들던 죄수들을 향해 젊은 마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르신들 그러지 마시고 심공을 좀 알려 주시면 안 됩니까? 항상 공력이 모자라서 뭔들 제대로 된 건 배울 수가 없잖아요.”
“클클클 이놈아. 욕심부리지 마라. 우리의 심공을 재가 없이 함부로 익혔다가 무슨 꼴을 당하려고?”
“저 영감탱이 말이 맞지. 괜히 쓸데없는 욕심 부리다간 명줄만 짧아져.”
젊은 마인의 두 눈에 깃든 욕심은 노인들의 충고에도 사그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마인은 제법 노련하게 재촉하지 않고 다섯 초식 짜리 짧은 도법을 주워듣고는 물러갔다.
젊은 마인이 물러가자 죄수들은 마인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갈수록 저놈 욕심이 커지는 것 같은데?”
“조만간 심법을 전수해 달라 고집을 부리겠군.”
“크크크, 심법을 전수한 놈들은 하나같이 반년을 가지 못해 그 목이 떨어졌어.”
“그릇도 안 되는 놈들이 욕심만 많아서는.”
“또 아나? 저놈은 제법 그릇이 될지? 다른 놈들보다야 우리를 대하는 본새가 되어있는데.”
“어딜! 그래 봤자 잔머리나 굴리는 거지. 우리 무공을 빨아먹어 커보겠다는 것이 빤히 보이는데.”
한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죄수들은 기력이 떨어졌는지 입을 다물고 잠을 자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이제 밖은 해가 지고 달이 떠오른 지 한참이 지났을 시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