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2화
한동안 피바람이 몰아치는 시간이 지나가고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며 사천에서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던 연수였다.
매일 비슷한 생활방식과 모든 은원의 빚을 갚아낸 그에게 찾아온 평화의 시간은 매우 안락했다.
귀엽고 영특한 미여의 재롱을 보는 재미도 쏠쏠했고, 무엇보다 무인의 삶을 시작하고 그다지 여유가 있는 삶을 살아본 기억이 없던 그였기에 지금의 여유가 더 안락하게 다가왔다.
그 날도 평소와 같이 미여의 볼멘 변명에 넘어가 주며 놀아주고 도화와 시간을 보내고 잠자리에 들기 전 명상을 하기 위해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았다.
그러던 그의 신형이 벼락을 맞은 듯 순식간에 튀어 올라갔다.
-콰차창!
그대로 천장을 뚫고 솟구쳐 지붕에 큰 구멍을 내며 올라선 연수.
잔뜩 긴장한 채 양손에 들고 있는 곡월을 교차하고는 앞을 바라보는 연수의 주변 삼 장으로 위화감이 느껴졌다.
“반응 한 번 예민하군. 싸우러 온 게 아니야. 그러니까 긴장하지 말라고.”
지붕 위에 여유 있게 앉아 달빛을 받으며 시선을 멀리 던지고 있는 의문의 사내에게서 긴장하지 말라는 말이 나오자 연수는 이를 악물었다.
사내의 말대로 연수는 분명 긴장을 하고 있었다.
잊고 있던 목숨을 위협받는 감각.
무림이라는 생태계의 최고 포식자로서 지냈던 짧지 않은 최근의 시간 속에서 잊었던 감각.
언제 어디서 튀어나오는 맹수에게 잡아 먹힐지 모른다는 이 감각은 잊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너무나 낯설게 느껴졌다.
“누구지?”
연수의 말에 덕창의 밤거리를 눈에 담고 있던 사내의 입이 열렸다.
“일월신교 교주.”
“...날 찾아온 이유는?”
“글쎄, 한번 보고는 싶었어. 얼마나 대단하길래 암주가 그리 집착을 하는 인물일지. 소문으로는 놀랍게 어린 무인이라길래 궁금했지. 대체 사파의 어떤 인물이 이토록 어린 나이에 그 경지에 올라섰는지.”
여전히 곡월을 앞세운 연수의 등 뒤로 차가운 땀이 흘러내렸다.
“그래서. 그냥 호기심이다?”
“뭐 겸사겸사.”
꿀꺽 침을 삼키는 연수.
“걱정 마. 싸우러 온 건 아니니까. 어쩌면 우린 서로의 이해관계가 교차하는 부분이 있을지도 몰라.”
“...”
대답 대신 강렬한 눈빛으로 사내를 바라보는 연수.
사내는 그제야 시선을 돌려 연수를 바라보았다.
서로의 눈을 마주 보며 서로 다른 감상을 느끼는 두 무인이었다.
사내는 연수의 눈빛 속에 떠오른 긴장과 호승심 그리고 흥분을 읽어냈다.
반면 연수는 칠흑같이 어두운 사내의 눈빛 속 깊게 숨어있는 광기의 꿈틀거림을 보았다.
잘 제어되어 감춰져 있지만 한번 터져 나오면 세상을 쓸어버릴 듯한 그 광기의 일면에 절로 몸서리가 쳐지는 연수였다.
“넌 천상 무인이구나. 날 보고도 무인으로서 흥분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은데.”
“글쎄, 마음 같아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가고 싶은 심정인데.”
“큭큭큭. 농담도 잘 하는군.”
“그래서. 본론은?”
사내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쯧쯧, 뭐 그리 급한가? 이만한 무인 둘이 만났는데. 더 할 말이 많아도 괜찮잖아? 쉽게 볼 수 있는 사이도 거리도 아닌데 말이야.”
“당신 말대로 긴장이 되어서 말이야. 무엇보다 우리 사이가 굉장히 긴장되는 관계는 맞잖아?”
“그 부분 말이지. 나는 굳이 그 긴장을 원하질 않는단 말이지. 중원에 대해 별 관심이 없어.”
“그 거짓말을 진심으로 믿고 싶군. 실제로 당신을 보니 당신과 적으로 마주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너무나 잘 알겠어.”
“솔직하달까. 음흉하달까? 어쨌든 칭찬으로 듣지. 내 말은 믿어도 돼.”
“곧이곧대로 믿기에는 당신들 덕분에 고생을 많이 해서 말이야.”
“암주의 손길에 중원이 제법 흔들린 것 같더군. 그 녀석은 항상 뒤에서 일을 꾸미는 것을 좋아해서 말이야.”
“...”
“못 믿는 눈치 같은데. 뭐 나로서도 믿어달라고 밖에는 따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믿지 않겠지만 그 녀석에게는 중원에 손대지 말라며 경고도 했었으니까.”
연수는 여전히 곡월을 든 채로 언제든 출수할 수 있는 만발의 준비를 하고 입을 열었다.
“굳이 내게 와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적의 적은 친구라지 않나?”
“암주가 당신의 적이라고? 날 꽤 멍청하게 보는 모양인데···.”
“그럴 리가. 멍청했다면 진작 암주가 손을 쓰려 했겠지. 그 녀석이 그런 쪽으로는 타고났거든.”
불신을 가득 담은 눈빛으로 사내의 심기를 읽어내려 살피는 연수. 그런 연수를 보며 사내는 숨기는 게 없다는 듯 양손을 펼쳐 보였다.
“의심이 많군.”
“그 누구라도 의심할 만한 상황 아닌가?”
“뭐 그렇기는 하지.”
“암주가 그리 방해가 된다면 직접 손을 쓰면 그만일 텐데? 굳이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사내는 잠시 하늘에 걸린 반달을 가만히 바라보고는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나도 마음 같아서는 직접 손을 쓰고 싶지. 하지만 신교의 교주라고 모든 걸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야.”
더 설명을 바라는 눈빛을 보내는 연수.
사내는 잠시 망설이더니 입을 열었다.
“외인에게 말하기는 뭐하지만, 신교의 정치는 복잡해. 교의 주인인 나와 그런 나의 그림자로서 살아가야 하는 암주, 그리고 교인들의 교리와 정신적 지주가 되는 신녀. 우리 셋이 교를 이끄는 진정한 신교의 핵심이야. 하지만 언제부턴가 강효각 그놈이 중원으로 눈을 돌렸다. 정말이지 겁도 없는 놈이지.”
잠시 말을 끊으며 고개를 젓는 사내.
“겁도 없다? 당신들이라면 이 중원 위험한 것이 아닌가?”
“어림없는 소리. 너희 중원의 무림인 따위야···. 큼큼 뭐 별 대단치 않지. 하지만 북경에서 눈을 벌겋게 뜨고 호시탐탐 신강을 보고 있는 황제의 말 한마디면 일월신교는 백련교의 뒤를 따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것이야.”
그제야 연수의 얼굴에 의문이 풀렸다.
“일월신교와 백련교는 관계가 깊었군.”
“부정할 수 없지. 백련교가 탄압받고 사라지는 과정에서 당시의 신녀는 위험에 처한 백련교의 많은 사람을 품어주었고, 그 결과 현재의 일월신교가 태어났으니.”
연수는 한숨을 내쉬며 차가운 눈빛으로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직접 손을 쓸 수 없으니 사냥개가 되어달라···. 그건가?”
“사냥개라···. 어감이 좋지 않군. 굳이 그리 표현할 필요가 있나? 서로의 손을 빌린다는 표현이 있는데.”
“내 손은 빌려주는 것 같은데 손을 빌릴 일은 없을 것 같으니. 손해 보는 장사를 할 이유가 있을까?”
“내게 빚을 지워놓는 것도 나쁘지 않은 장사 아닌가?”
연수의 표정에 아주 잠시 싸늘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래서, 방법은?”
“듣자 하니 자네가 우리가 지원하던 살야림을 암살로 지웠다던데? 한때 암수일살이라는 별호가 붙기도 하고.”
“하! 신강의 천산에서 살행을 해라?”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는 사내.
“그러니까 당신 말을 종합해 보면 중원의 하나 남은 입신경 고수인 나에게 당신네 앞마당에 와서 당신이 손을 쓰기 곤란한 입신경의 고수를 암살해 달라?”
“이거 참···. 그리 말을 하니 참 얼토당토않게 들리는군.”
“본인이 얼토당토않은 말을 한다고는 생각되지 않고?”
“어쩌면. 그렇지만 그 녀석이 살아있는 한 언젠가 신교와 중원 무림은 격돌하게 될 거야. 내 말도 듣지 않는 놈이니. 또 새로운 뒷공작을 해 중원을 들쑤셔 놓겠지.”
사내의 말에 연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무림맹주마저 감아낸 그의 수완은 적아를 떠나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나참 별 더러운 강요를 다 당하는군.”
결국, 연수의 입에서 거친 말이 튀어나왔다.
그도 그럴 만한 것이 이 경지에 오르고 이렇게 수동적으로 누군가에게 휘둘리는 일이 있을 것이라고는 별로 생각 해 본 적이 없었다.
멋쩍게 그런 연수를 바라보는 사내.
그 사내를 향해 묻는 연수.
“그래서? 내가 그 암주 놈을 죽이면?”
“그럼 내가 아주 고마워하겠지.”
“만약 거절한다면?”
“체면은 좀 상하겠지만 그놈의 놀음에 끌려가 주어야겠고. 그 결과 중원과 검을 겨누게 된다면 결코 살살할 생각은 없네. 목숨 걸고 중원을 치고 황궁을 쳐야겠지.”
“하! 당신 지금 당신이 무슨 소릴 하는 줄 알고 있나?”
“역모를 이야기 하고 있지.”
너무나 담담한 그의 말투에 연수는 그가 허언하고 있지 않다는 확신이 들었다.
“자신의 힘을 과대평가하는 것이 아닌가?”
“분명 신교의 힘으로는 명나라를 뒤집을 순 없지. 하지만 황제의 모가지만 따는 것과 명나라를 뒤엎는 건 매우 다른 이야기지. 만약 내가 중원을 도모해야 한다면···. 신교의 뒤를 봐줄 황족하나 쯤 구워삶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지 않을까?”
맹점이었다. 그의 말에 연수의 전신에 소름이 쫙 돋아올랐다.
황제가 죽으면 새로운 황제가 즉위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수순. 지금의 자신이라도 황제의 암살은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자신도 긴장하게 만드는 저 사내라면 더 가능성이 큰 이야기였다.
게다가 중원 무림의 전력은 사상 최악이라 할 만큼 약화되어 있었다.
수많은 명문이 망했고, 그 과정에는 자신 또한 큰 역할을 했다.
그런 상황에서 신교와의 전면전은 중원 무림의 멸망으로 이어진다는 것은 그리 힘든 예측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연수의 입에서는 그런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말이 나왔다.
“자신 있소? 중원 무림이 그리 쉽게 무너질까?”
투기를 끌어 올리는 연수를 보며 사내는 피식 웃었다.
“무인의 자존심이란 신강이나 중원이나 크게 다르질 않군. 자네정도 되면 잘 알고 있을 텐데? 우리 신강의 전력은 그 어느 때보다 막강해. 자네들이 중원에서 치고받을 때 우리는 얌전히 힘을 키웠거든. 솔직히 말해 중원 무림은 우리 신강의 철인들을 막을 여력이 없어.”
물론 머리로는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어느덧 중원인의 정신이 깃든 중원의 무인으로 자각 하는 연수의 자존심은 이를 인정하기 쉽지가 않았다.
“궁금해. 지금의 당신과 내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
“진정하지. 싸우러 온 게 아니라니까. 그리고 그런 우문은 하는 게 아니야. 여기서 자네와 내가 싸우면 이 큰 장원이 멀쩡할 수 있겠나?”
“쳇!”
사실 묻지 않아도 상대가 자신을 웃도는 고수라는 것은 진즉에 알고 있었다.
“그나저나 참으로 배짱 하나는 높이 살 만하군?”
“배짱이랄 게 뭐 있을까? 나는 항상 강자에게 도전하며 그들을 꺾고 이 자리까지 왔어. 그간 잊고 있었지만, 당신을 보니 그간 잊고 있었던 사파인의 정신이 번쩍드는군.”
“크크크, 훌륭해. 훌륭한 무인의 자세야. 가능하다면 신강으로 영입하고 싶군.”
“마인이 될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어서.”
딱 끊는 연수의 말에 사내의 눈에 욕심의 미련이 머물렀다.
“쩝, 그렇다면야. 그럼 이제 대답을 해 주면 좋겠군. 내 제안 어떤가?”
“받아들이는 수밖엔. 다만 잊지 말라고. 난 장난질은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
“걱정 말게. 뱉은 말은 지키지. 자네가 내 우환거리를 덜어주면 난 자네에게 빚을 진 거야.”
말을 마치며 품속에서 종이를 한 장 내미는 사내.
사내의 손을 떠난 종이가 연수에게 두둥실 떠내려왔다.
-강효각 암주.
이름과 함께 그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는 종이였다.
-될 수 있는 한 빨리 부탁하지.
신형을 감춘 사내의 목소리가 초상화를 보고 있는 연수의 주위로 울려퍼졌다.
“하아. 더럽게 걸렸군.”
다음 날 아침이 되자 돌쇠는 연수의 안채 안방 지붕에 뚫린 구멍을 보고는 보수를 명하며 연수에게 물어왔다.
“무슨 일입니까?”
평소와 다른 연수의 미묘한 차이를 읽어내고는 진지하게 묻는 돌쇠였다.
“내 고민 좀 들어볼래?”
“제가 하는 일이 그런 거죠.”
평소 한량처럼 멍하니 있기를 좋아하는 돌쇠의 말에 피식 웃음 짓던 연수가 어젯밤 있었던 일을 풀어놓았다.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여는 돌쇠.
“당장 정협맹에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그들이 뭘 해줄 수 있다고?”
“제 짧은 생각으로는 태상문주님을 중심으로 중원 무림이 똘똘 뭉쳐 당장이라도 신강을 쳐들어가는 것이 상책입니다.”
“마교를 친다?”
“예.”
“그랬다가 밀리면?”
“어차피 태상가주님이 신강에서 함정에 빠져 비명횡사하면 절대 고수가 하나도 없는 중원에 미래는 없습니다. 중원을 전장으로 싸우기보다 신강을 전장으로 천산에 적을 묶어놓고 싸우는 것이 상책 아니겠습니까?”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연수였다.
“그렇기는 하지. 하지만 날 함정에 빠트리기 위해 홀로 날 찾아왔다고 생각하기는 힘들지.”
연수의 말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는 돌쇠.
“어디가?”
“이 사안은 모두와 함께 상의해야 할 사안입니다.”
말을 마치고는 연수의 말은 듣지도 않고 나가는 돌쇠.
그리고 머지않아 혈개문의 문주인 소개와 혼인식 날짜를 잡고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공숙 그리고 연수에게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도화와 주두보, 무황, 도평이 안채로 모여들었다.
구멍 난 안방을 대신해 서재에 모인 사람들.
“대충의 상황은 오면서 제가 모두 말씀드렸습니다.”
“하아.”
막상 지인들이 시름을 안은 표정으로 자리를 하니 절로 한숨이 나오는 연수였다.
“석 총관에게 들은 말이 사실이란 말이냐?”
두보의 말에 연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바로 어젯밤 마교의 교주가 찾아왔었어요.”
무황은 현 상황에 가장 큰 충격을 받았다.
일월신교와 가장 큰 마찰을 일으켰던 중원 문파 중 하나가 곤륜파다. 그런 곤륜에서 오랜 세월을 보내며 그들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던 무황으로서는 당연히 마교의 교주가 연수를 찾아와 은밀한 제안을 했다는 말에 걱정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절대 상종할 종자들이 못 된다. 그의 헛소리는 일언지하에 거절하는 것이 맞아.”
고개를 젓는 연수.
“중원 무림에 또 한 번 피바람이 불 거에요.”
“그렇다고 네가 홀로 신강을 간단 말이냐?”
“노야의 말이 옳아. 그를 뭘 믿고 그 위험천만한 곳에 네가 간다는 거야?”
무황의 말에 동조하며 보태는 소개였다.
“그가 홀로 찾아왔을 정도니 믿어봐야죠. 그만한 무인이 혼자 그 먼 거리를 찾아왔잖아요.”
“흥! 패천후 성주님의 최후를 기억해.”
공숙의 말에 연수는 할 말이 없었다.
옥현인이라는 남자를 무인으로서 믿었던 패천후의 최후는 좋지 못했으니.
“만약 마교와 전면전을 벌이면 중원에 승산이 있다고 보십니까?”
“...”
순간 장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장내에 있는 인물 중 마교와의 싸움을 경험한 사람은 없었다.
그나마 무황만이 그들과 싸웠던 사문의 어른들 이야기를 어려서부터 들어보았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