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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놈에서 고수까지-180화 (180/202)

# 180화

*     *     *

무림맹과의 싸움이 끝 난지 두 달이 지났다.

장마가 시작되는지 무더운 여름을 식히는 비가 쏟아지는데도 혈개문의 무사들은 훈련을 쉬지 않고 있었다.

방에 앉아 문을 열어 놓고 시원하게 떨어지는 장대비의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고 명상 중인 연수.

그의 방으로 조용히 기척을 숨기며 숨어드는 이가 있었다.

제법 그 본새가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닌지 축축하게 젖은 발로 바닥에 닿는 발끝을 잔뜩 새우고는 조심히 숨어들어 연수의 뒤로 몸을 숨기는 여자아이는 미여였다.

“또 땡땡이치는 거냐?”

두 눈을 감고 말하는 연수의 음성에 흠칫 어깨를 떠는 미여.

“쉿!”

검지를 입에 갖다 대며 짐짓 진지한 그녀의 행동에 절로 웃음이 나오는 연수였다.

“이게 다 아저씨 때문이야.”

목소리를 죽이며 속삭이는 미여의 말에 연수의 눈이 커졌다.

“나 때문? 어째서? 네가 무공을 배우고 싶다고 했잖아?”

“그게 아니고. 아저씨가 맨날 명상만 하니까 사부님이 나한테도 명상을 시킨단 말이야. 가만히 눈감고 한 시진씩 명상하는 게 얼마나 힘든데? 어제도 명상을 시키셔서 운기를 했더니 들켜서 얼마나 혼이 났는데.”

“그게 어째서 내 탓이냐? 녀석, 지한테 유리 한 말만 하는 건 누구한테 배운 건지. 네 녀석이 명상하는 걸 우습게 봤다가 그런 거면서.”

“아이그! 어쨌든! 이번에 잡히면 사부님이 벌로 무슨 수련을 시키실지 몰라. 저번에는 글쎄 물구나무를 서고 팔굽혀 펴는 걸 열 개나 하라고 했다니까?”

“그게 어째서 벌이냐?”

“아이고 답답하네.”

조용히 하라 하던 아이가 제 가슴을 두드리며 인상을 구겼다.

연수는 그 모습이 귀여워 미여를 더 놀리기 시작했다.

“답답하기는 내가 더 답답하지. 네 사부가 너 잘되라고 그러는 거지. 그 정도 수련에 힘들면 나중에는 큰일 나겠구나.”

“나중? 나중엔 뭘 해야 하는데?”

“움직이기도 힘든 무거운 주머니를 팔다리에 달아야 하지.”

“히익!”

“그뿐인 줄 아느냐? 사흘 밤낮을 쉬지 않고 마보를 해야 하고.”

“그건 안돼! 그러다가는 지쳐서 쓰러지고 말걸?”

“어딜! 쓰러지고 싶어도 쓰러질 수가 없지. 주변에 날카로운 칼날을 박아놓아서 쓰러지면 죽는다.”

“히에에엑! 그게 무슨 수련이야!”

“원래 수련을 열심히 하지 않는 제자들은 그렇게 해서라도 수련을 시켜야 하는 거지. 예전에 이 아저씨는 물구나무선 채 열흘을 넘게 있었던 적도 있다.”

“에이 거짓말!”

“거짓말은! 그 당시 절벽 끝에 거꾸로 매달 듯 그리 해 놓아서 어쩔 수 없이 열흘이 넘게 그러고 있었다. 미여는 큰일 났구나. 이번에 공숙 누이가 미여 때문에 칼날과 밧줄을 사 온다고 하던데···.”

“흑! 흐흑! 그러면 안 돼···. 미이는 팔다리도 가는데 그렇게 하면 큰일이란 말이야···. 흐흐흑!”

결국 미여의 큰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져 내리자 연수의 표정에 난처함이 서렸다.

“또 아이에게 못된 장난을 하셨군요.”

한숨을 지으며 들어와 미여를 안아 드는 도화.

연수는 당황해서 손사래를 치며 부인하려 했지만, 옷이 젖은 도화의 품에 안긴 미여가 너무도 서럽게 울어 말문이 막혀 버렸다.

“못써요. 정말. 아이에게 매번 심한 농이나 하고.”

할 말이 없어진 연수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흐엉 아, 아저씨가, 아저씨가 흐아앙! 막 절벽에 거꾸로 매단다고 그랬어 으앙!”

연수는 황당한 표정으로 미여를 바라보았다.

“아니 내가 언제?”

“흐엉 아저씨가 그랬잖아!”

소리를 빽 지르는 미여를 보며 연수는 입을 떡 벌렸다.

“이 녀석! 또 여기에 있었구나!”

깜짝.

놀라며 울음을 뚝 그치는 미여.

공숙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미여는 도화의 옷깃을 꼬옥 잡으며 그 품에 파고들었다.

도화는 그런 미여를 안은 팔에 힘을 주며 난처한 표정으로 공숙을 바라보았다.

“어휴, 그 녀석 어리광을 자꾸 받아주면 안 된다니까.”

“언니 미여가 너무 서럽게 울길래요. 이번 만요.”

“안돼. 그 녀석 해 뜨자마자 수련은 하나도 않고, 도망쳐서는 찾느라 애를 얼마나 먹었는데.”

도화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미여를 내려놓았다.

막 공숙이 미여의 뒷덜미를 잡으려는데 눈을 찡긋하며 미여에게 팔을 내미는 연수.

미여는 날다람쥐마냥 연수의 팔을 붙들고 올라타며 연수의 등에 매달렸다.

험한 표정으로 그런 미여를 노려보는 공숙.

“그런 표정 마세요. 그 사부의 그 제자라 하잖아요.”

순간 공숙의 표정에 당황의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무, 무슨 소리를···.”

“에이, 왜요. 누이가 절 만난 것도다···.”

“알았어! 그만해. 미여 이놈! 딱 오늘만이다. 괜히 아저씨 수련 방해하지 말고 조용히 놀아.”

말을 마치며 경공을 발휘해 장대비 속을 날아가는 공숙.

도화는 연수의 등에 매달려 있는 미여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매번 놀림당하고 울음을 터트리면서도 미여는 연수를 너무 잘 따랐다.

“이 녀석아. 오늘만이라는 말 들었지? 내일부터는 수련 열심히 해야 해.”

“알아, 나도 다 알아. 그래야 훌륭한 무인이 된다고.”

조금 전까지 그리 서럽게 울던 아이가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

아직 눈에 눈물도 채 마르지 않은 채로 신이 난 미여는 연수를 조르기 시작했다.

“아저씨, 시장가자!”

“시장?”

“응! 오늘 장이 서나 봐.”

“이리 비가 오는데 무슨 장이 서?”

“아이참 비 오는 날이 더 재미난 구경 할 게 많다니까.”

마치 노련한 장사치의 말투를 흉내 내는 미여가 귀여웠던 연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도화에게 눈짓을 했다.

미여를 업은 채 도화와 딱 붙어 밖으로 나가는 연수.

장대비는 그런 일행에게 닿지 못하고 투명한 막에 튕겨 나가고 있었다.

“아저씨 나는 언제 이런 거 할 수 있어?”

볼 때마다 신기한 그 광경에 매번 묻는 미여였다.

“지금은 어림도 없지.”

“쳇.”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자 혀를 차는 미여.

항상 곧 할 수 있다는 말을 기다리는 미여에게 연수는 한 번도 그런 희망적인 말을 해 주지 않았다.

미여도 잘 알고 있었다. 무공에 관해서는 자신의 사부보다 더 엄격한 것이 연수였다.

“그럼 휘야휘야는 언제 할 수 있는데?”

“그것도 어림도 없지. 한 십오 년 땡땡이 안치고 수련하면 흉내는 낼 수 있겠지.”

“그렇게 오래?”

“그럼. 무에 있어서···.”

“하루아침에 되는 것은 없다! 아저씨는 맨날 사부님이랑 똑같은 소리만 해.”

“그게 사실이니까.”

“근데 사부님께서 말씀하시길 아저씨는 다르다고 했는데?”

“뭐가 달라?”

“다른 사람들이 수십 년을 해도 안 되는 것을 아저씨는 너무 빠르게 해낸다고 했어.”

“그건 남들이 잘 때 놀 때 구경 다닐 때 수련만 했으니까.”

한참을 곰곰이 생각에 잠겨있던 미여의 입이 열렸다.

“그럼 나도 그렇게 하면? 그럼 휘야휘야 얼마나 걸려?”

“그럼···. 한 칠 년 안에 되지 않을까?”

“정말?”

“그럼.”

“그럼 나 수련 열심히 해야지.”

“거짓말.”

코웃음을 치는 연수의 말에 미여가 발끈했다.

“아냐! 정말이야.”

“그럼 시장 가지 말고 수련하러 갈까?”

발길을 돌리려는 연수의 등에 매달려 있던 미여가 급해졌다.

“아아니! 일단 오늘은 쉬어야지. 사부님이 오늘은 푹 쉬고 재미있게 놀라고 명하셨잖아.”

“크크크 언제 네 사부가 그런 말을 했다고.”

“아이고! 답답하기는! 다 그런 뜻으로 하신 말씀이야. 잔말 말고 빨리 가자. 오늘 꼬치 장수 아저씨 오는 날이야.”

“인제 보니 꼬치가 먹고 싶었네. 그치?”

“뭐 그런 것도 있고. 일단 가자.”

연수가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니 조용히 한숨을 몰아쉬는 미여.

그런 아이의 행동이 귀여운 연수와 도화였다.

제법 큰 충격을 받았을 미여가 구김 없이 밝게 자라는 모습은 언제 봐도 대견스러웠다.

혈개문의 정문을 나서려는데 입구에서 사부와 무황이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빗물을 내력으로 퉁겨내는 두 사람의 신기로 인해 두 사람 주위로 작은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사부! 노야! 어딜 다녀오시는 길이에요?”

“연수야. 아니 이 친구와 날도 이러니 밖에서 술 한잔하고 오는 길이다.”

연수의 등에 매달려 있는 미여를 보며 무황이 미소지었다.

“요 꼬맹이. 또 수련 않고, 놀러 나가는구나?”

“할아버지, 오늘은 이리 비가 오니 사부님이 편히 푹 쉬고 놀다 오라 한 거예요.”

“하하, 거짓말 말아라. 욘석아. 네 사부가 퍽이나 그랬으려고.”

연수의 사부는 무황을 따라 웃음 지으며 미여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녀석, 말본새와 행동거지가 연수와 똑 닮았구나.”

그 말에 입술을 삐죽이며 툴툴거리는 연수.

“저는 수련 않고 게으름 피운 적 없습니다.”

“그건 그랬지.”

미여는 이때가 기회다 싶었는지 두보에게 물었다.

“사부 할아버지. 그런데 진짜 아저씨 어릴 적에 막 절벽에 물구나무 세워놓고 칼날 밭에서 기마자세 시켰어요?”

잠시 미여의 눈치를 살핀 두보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럼. 그랬지. 그래야 훌륭한 무인이 되니.”

“히잉. 나는 다리도 얇고 팔도 얇아서 힘이 없는데.”

“힘이 없으니까 그렇게 해서 힘을 키워야 하지 않겠느냐?”

두보의 반문에 말문이 막힌 미여가 무황에게 도움을 청했다.

“할아버지, 다른 방법도 있는 거지?”

“힘을 키우기 싫으면 기술을 키워야 하지. 초식연마를 게을리 않는 수밖에.”

항상 무공이 주제가 되면 제 편을 찾을 수가 없는 미여였다.

“미여는 외로워. 맨날 어른들이 구박만 하고.”

“하하핫, 언제 네가 구박을 받았다고.”

“매번 수련을 열심히 않는다고 구박받고 있잖아.”

“그게 어딜 남을 위해서 하는 말일까? 다 네 녀석 잘되라고 하는 말이지.”

“그래도 거꾸로 매달고 칼 밭에 마보시키면 안 되는데···.”

금세 풀이 죽는 미여.

그런 미여의 머리를 무황의 거친 손이 쓰다듬었다.

“걱정하지 마라. 그럴 일은 없을 테니.”

한참을 미여를 달래고 배웅하는 두보와 무황.

그런 두 사람을 등지고 장대비 속을 뚫고 시장으로 향하는 일행.

“아저씨. 빨리 가자.”

“네 식탐은 못 말리겠어. 정말.”

시장으로 들어서는 연수의 발걸음이 순간 멈칫했다.

느껴지는 시선들.

벌써 시장에서 아이와 함께하는 데 시선이 느껴지는 것이 세 번째였다.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내력을 끌어 올리는 연수.

미여와 도화는 무언가 몸이 무거워진다 싶은 순간 주변 삼 장내로 떨어지던 장대비가 솟아오르며 공간이 뒤집히는 것처럼 보이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랐다.

미여는 신이 나서 그 광경에 시선을 빼앗겼고, 도화는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읽고는 연수의 팔을 더 꼭 붙들었다.

시장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은 그 광경을 보고는 바로 장사를 접기 시작했다.

“이, 이거 괜히 우리 때문에 오해하신 듯합니다.”

빗물을 튕겨내며 앞으로 나서는 늙은 무인.

연수의 표정에 담긴 짜증이 짙어졌다.

“우리가 서로 이리 만날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싸늘한 연수의 말에 앞으로 나섰던 노인의 표정에 당혹감이 서렸다.

“뭔가 단단히 오해한 것 같은데 우리는 혈개문에 어떤 악감정을 갖고 있지 않소.”

“글쎄, 당신 뒤에 있는 놈들 생각은 조금 다른 것 같은데?”

노인의 뒤에 서 있던 여덟 명의 젊은 무인들은 자신들의 어른을 상대로 존대하지 않는 연수에게 상당한 반감을 품고 기세를 등등하게 올리고 있었다.

“그, 그게 아니고···.”

당황한 표정으로 손사래를 치는 노인.

종남파의 장로인 자신이 어디 가서 이런 꼴을 당해 봤던가?

생소한 경험에 당황스럽다 못해 치욕적이던 그였다.

하지만 그는 그런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낼 정도로 생각이 모자란 무인이 아니었다.

자신들의 제자처럼.

슬쩍 제자들에게 눈을 부라리며 눈치를 주는 노인.

“아무래도 아이들이 혈기가 왕성하다 보니 결례를 한 것 같소. 나는 다만 부곡으로 인해 오해가 있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어 오해를 풀고자 이리 들른 것뿐오.”

“하필 이곳에서 마주쳤다?”

“그것이 아니고 선뜻 찾아가기가 발걸음이 무거워져서 차나 한잔하면서 마음을 가다듬다가 그대를 발견한 것뿐이오.”

이 시장에서 무인의 시선을 받고 좋았던 기억이 하나도 없던 연수였다.

특히 부곡을 보았을 때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

주변 삼 장으로 펼쳐낸 기운을 거둬들이지 않고 종남의 장로를 가만히 노려보는 연수.

노인은 연수가 보이는 신기에 절로 침이 삼켜졌다.

자신의 뒤에 있는 제자들은 개뿔도 상황이 파악되지 않는 모양이지만 저 삼 장의 공간이 보여주는 것은 보통의 무위가 아니었다.

한걸음이라도 발을 들였다가는 반드시 죽는 사자의 공간이나 다름이 없었다.

더 놀라운 것은 그런 공간에 어린아이와 기세가 일반인에 가까운 여인이 아무렇지 않게 있다는 것이었다.

‘명불허전이라 하더니. 저런 놈을 상대로 무슨 짓을···.’

한때는 종남신권이라며 명성을 얻으며 기대를 받던 최고의 후기지수 부곡을 속으로 욕하는 노인.

“일단 밖에서 이럴 것이 아니라 차라도 한잔하면서 이야기하는 것이 어떻겠소?”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는 연수.

그와 동시에 그의 주변으로 공중에 떠 있던 빗줄기가 떨어져 내리며 위화감이 사라졌다.

무서운 살기도 기세도 크게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의 공간이 사라지는 것만으로 절로 안도의 한숨이 나오는 노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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