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둑놈에서 고수까지-179화 (179/202)

# 179화

무림맹의 전멸.

무림 맹주를 포함한 팔천의 무인 중 생존자 전무.

이 사건이 주는 파문은 중원 무림에 절대 작지 않았다.

정예의 무사들을 잃은 각 군소방파들은 어떻게 해서든 정협맹에 연줄을 대어 보려 난리가 났고, 무림맹에 적을 뒀던 명문들을 상대로 도움을 청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을 선도하던 명문들이야말로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그 전멸한 팔천의 무인들 속에는 문파의 미래를 책임질 동량들이 적지 않았다.

정예 무인들을 모조리 잃은 명문들이 절망하고 있을 때 연수는 도평과 공숙 그리고 소개와 함께 호북에 들어서고 있었다.

그간 역대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무당의 위기감은 보통이 아니었다. 일대 제자 대다수와 무당의 장로들 대부분이 객사하였고, 무당의 속가 대부분이 정예를 잃었다.

그리고 패신살성이 온다.

무당파로서는 절체절명의 위기가 아닐 수 없었다.

해검지에 들어서는 네 인영.

그 네 인영을 막아서는 삼십인.

무당파에 처음 발을 들인 삼십 인은 한 마디의 말 대신 검을 뽑아 들었다.

태허모검진.

오래전 무당의 무맥을 이은 도사 중 진 씨 성을 쓰는 파문된 도사가 속세에 나가 무당을 그리워하며 만들었다는 검진으로 백오십 년 만에 세상에 드러나는 검진이었다.

검을 뽑아 든 삼십 인의 주위로 회전하며 뭉치는 기세에 의연히 맞서며 다가서는 네 인영.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 네 명의 인영이 신형을 날리는 순간 고고히 흐르며 기운을 모으던 진세가 일변하며 소용돌이처럼 중앙을 향해 맹렬히 회전하며 흡인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텅텅텅!

갑작스러운 흡인력에 외팔이 인영이 일 검을 휘둘렀다가 진세의 반발력에 거칠게 뒤로 날아가며 흙바닥을 굴렀다.

-스아아아

기형 단검에서 뻗어 나온 강기가 진세를 가르며 들어가는 순간 진세의 모든 기운을 중앙에서 받던 자의 눈이 빛나며 그의 검 끝에서 모아진 진의 기운이 쏘아졌다.

-수화악!

흡인력에 저항하지 않으며 진세에 빨려들 듯 다가서던 인영의 두 단검에서 뻗어 나오는 빛줄기.

-쉬익.

어마어마한 진세의 기운을 받아 쏘아졌던 기운이 맥없이 소멸하며 진세의 중앙에 있던 무인의 가슴에 구멍이 뚫렸다.

줄 끊어진 연처럼 바닥으로 힘없이 처박히는 무인.

순간 태허모검진의 진세가 사납게 흔들렸다.

-퍼석! 퍼석! 퍼석!

채찍이 흔들릴 때마다 무인들의 머리가 터져 나갔고, 외눈의 사내 손이 휘둘리며 장력이 뻗어 나올 때마다 가슴이 함몰되며 죽어 나가는 무인들이 늘었다.

외팔이 무인이 다시금 달려들어 검을 휘두를 때는 수많은 신체가 절단되어 바닥에 후두두 떨어졌다.

태허무검진이 순식간에 와해 되었고, 삼십의 무인은 너무나 허무하게 해검지에 온전치 못한 시체를 남기게 되었다.

그들을 막는 방해물이 사라지자 계속해서 걸음을 옮기는 네 명의 무인.

이제 한 번의 격돌을 마쳤을 뿐인데 벌써 옷 곳곳에 피가 튀어있는 모습이 그들이 뿜어내는 살기와 미묘하게 어울려 살벌한 분위기를 이루었다.

그동안 무당의 전성기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지어진 지 얼마 안 돼 보이는 전각들과 잘 닦인 길.

그곳에 발을 들인 네 명의 인영이 지나가는 곳곳에는 피바람이 불었다.

무당의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는 단 한 명도 놓치지 않고 보이는 족족 시체가 되어 바닥에 누워야만 했다.

공중으로 신형을 뽑아 올린 무인의 몸에서 뜨거운 양강의 기운이 뿜어져 나오며 사방으로 장력을 토해내자 마치 봉황을 닮은 장력이 주변 전각으로 날아들어 불바다를 만들기 시작했다.

무당산에서 피어오른 검은 연기에 균현의 백성들은 두 손을 모아 무당파가 멀쩡하기를 하늘에 기도했다.

무당파의 초입부터 네 인영이 지나가는 곳곳에 멀쩡히 남는 것이 하나도 없었고, 그들이 주변을 모두 불태우며 나아가다 보니 커다란 대전의 앞에 모여있는 도사들이 보였다.

대략 사십 명도 채 안 되는 도사 중에는 머리가 너무나 곱게 희어 완연한 백발을 자랑하는 노인들이 꽤 있었다.

이미 오래전에 은거에 들었던 이제는 속세에 나올 생각이 전혀 없던 전전대 고수들.

무당파 존폐의 갈림길에 속세를 떠난 그들조차 발 벗고 나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처음으로 기형단검을 쓰는 인영의 입이 열렸다.

“죗값을 물으러 왔다.”

그 한마디가 무당파 장문인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아무 말 없이 네 명의 무인을 바라보던 장문인의 입에서 끝내 한숨이 터져 나왔다.

“어떤 죗값이오?”

“옥현인을 세상에 보내 중원 무림의 정기를 해친 죄.”

“그걸···. 당신이 묻겠다?”

“그에 대한 피해는 여기 우리가 모두 입었으니.”

“...”

무당파의 장문인은 한숨만 내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하늘 위로 시커먼 연기가 치솟는 모습이 마치 악독한 흑룡이 하늘을 승천하며 무당산의 정기를 해치는 것처럼 보였다.

말이 없는 장문을 대신해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여는 노인.

언제든 눈만 감으면 죽은 자라 확신할 정도로 기력이 느껴지지 않는 왜소한 노인이었다.

“그 죗값 여기 우리의 목숨으로 되겠소?”

“...”

이번엔 사내의 입이 다물어졌다.

한동안 왜소한 노인을 바라보던 사내의 시선이 외눈의 사내에게 돌아갔다.

“글쎄.”

외눈 사내의 말에 앞에 나섰던 사내가 말을 보탰다.

“그렇다는군.”

하늘을 올려다본 장문인의 입에서 긴 한숨이 다시 한번 터져 나왔다.

이윽고 장내의 무인들 기세가 사나워졌다.

서로를 향해 달려드는 무인들.

정확히 서른여덟의 늙은 도사들과 아직은 젊은 네 명의 무인들이 부딪히는 순간 튀어 오르는 피가 정순해 보이는 도사들의 깨끗한 도복을 적셨다.

너무나 왜소해 툭 하고 치면 금방이라도 쓰러져 죽을 것 같은 노도사의 몸에서 믿기 힘든 기세가 뿜어져 나오며 단검을 쓰는 젊은 무인에게 날아들었고, 이어지는 강기공의 공방이 서로의 목숨을 노리며 부딪혔다.

-콰콰쾅!

한차례의 험한 공방 끝에 노도사의 눈에서 피눈물이 흐르며 그 목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채찍에 다리를 붙잡히고 독장에 맞아 중독되어 쉴 새 없이 피를 토해내던 무당파 장문인의 목을 파고드는 손끝.

외눈 가득 담긴 살기를 쏟아내며 뻗은 취룡조가 끝내 눈을 부릅뜬 무당파 장문인의 목을 꿰뚫었다.

손에 느껴지는 뜨거운 피의 온기와 목을 뚫는 순간 느껴졌던 물컹한 감각이 사내를 자극했다.

그간 오래도록 기다려 왔던 사부의 복수.

그 대상이 되었던 무당파, 불가능할 것 같던 그 복수를 마치는 순간 사내의 가슴속 응어리가 울컥하며 사내의 가슴을 울렸다.

-아아아아아아!

괴성을 지르며 주변으로 피에 젖은 혈수를 휘두르는 사내.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장내에 있던 모든 도사가 차가운 바닥에 몸을 뉘었다.

겨우 가는 숨을 몰아쉬며 생명을 이어가는 노도사는 간절한 눈으로 입을 열었다.

“부, 부디···. 여기서 끝내주시오.”

너무나 간절한 그의 눈빛이 네 무인의 한 줌 남아있는 감정을 자극했다.

하지만 단검을 든 사내는 매몰차게 고개를 저었다.

끝내 눈을 감지 못하고 그런 사내를 바라보던 노도사가 숨을 거뒀다.

네 무인의 발걸음이 거대한 대전으로 옮겨졌다.

피로 물든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붉은 발자국이 대전으로 이어지는 돌계단에 찍혔다.

“오랜만이군,”

대전에 들어서는 순간 너무나 반갑게 말하는 백발의 노인.

풀어헤친 머리와 부리부리한 눈. 그리고 씁쓸한 표정.

양손에 피가 뚝뚝 떨어지는 단검을 감춘 사내는 포권을 해 보였다.

“오랜만입니다.”

“이게 몇 년 만이더라? 정사 대회 때 보았으니···. 벌써 사 년이 넘었군.”

“예.”

피를 뒤집어쓴 살기등등한 네 무인을 보고도 평온하게 말을 하는 노인.

그 피의 주인들은 분명 가족처럼 함께 지내던 그들의 피일 것이 분명했거늘 노인은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있었다.

“그 사 년의 시간 동안 정말이지 어마어마한 성취를 이루었군. 축하하네.”

“뭐, 덕분에요.”

뼈가 담긴 사내의 말에 노인은 허탈하게 웃었다.

“허허, 그런가? 어떻게 듣자 하니 죗값을 받으러 왔다고?”

“예.”

“그 죗값 아직 모자라는가?”

노인의 물음에 사내는 두 눈을 감았다.

두 눈을 감자 노인의 뒤로 있는 수십 명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떤 아이는 이를 악물고 죽음을 각오하며 분한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고, 어떤 아이는 지옥에 잡혀 온 듯 공포심에 물든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을 두 눈을 감고 갈등하는 사내의 어깨를 짚는 손.

눈을 뜨고 자신의 어깨를 짚고 있는 외눈의 사내를 돌아보니 천천히 고개를 가로 짓고 있는 사내.

그 옆으로 채찍을 쥔 여인 또한 비슷한 표정으로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외팔의 사내 또한 크게 다르지 않은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사내의 고민이 깊어졌다.

깊은 고민 속에 기어코 사내의 입이 열렸다.

“모자라오.”

사내의 말에 노인의 두 눈이 깊어졌다.

그다지 감정변화를 잘 드러내지 않던 노인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고, 자신의 뒤에 서 있는 아이들의 얼굴을 보는 순간 기어코 노인의 눈에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런 노인의 등으로 사내의 말이 이어졌다.

“아직은 어린 저 이대 제자들이 가슴속에 검을 품고 자라나 또 다른 옥현인이 되어 내 등에 내 가족에게 검을 들이밀 날이 오겠죠. 강호의 은원이란 그런 것이니.”

노인은 아니라고 잊겠다고 말하고 싶었다. 모든 은원 잊고 도가의 가르침으로 아이들의 가슴에 뭉친 그 모든 화를 정화하겠다고 약속하고 싶었다. 그러니 제발 아이들의 목숨만큼은 살려달라고 구걸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무인의 자존심이. 남아있는 무당의 무인이라는 그 자존심이 적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걸 허락지 않았기에.

“백 년. 봉문하시오.”

순간 노인의 눈이 커졌다.

자신의 귀가 사내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은 것인지 의심이 들었다.

한 줄기 희망의 빛에, 노인의 턱을 타고 떨어지던 눈물을 사내에게 그대로 드러내며 사내를 바라보는 노인.

그런 노인에게 확인시켜주듯 재촉하여 묻는 사내.

“약조할 수 있겠소? 백 년. 무당의 이름을 걸고 봉문할수 있겠소?”

노인은 말을 잊고 맹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노인을 보며 사내는 다시 한번 노인의 뒤에 있는 아이들을 눈에 담았다.

“그 약조 꼭 지키시는 게 좋을 겁니다. 내가 돌아서는 것은 한 번뿐 일 테니. 다시 내가 무당산을 오를 때는···.”

“걱정 말게. 내 혼을 걸고 약조할 테니. 무당은 그 어떤 일이 있어도 백 년을 산문 밖으로 나가지 않을 것이네.”

무가의 봉문은 실로 무서운 것이다.

봉문하는 순간 모든 속세의 영향력을 잃는 것은 물론이고, 제자 또한 받아들일 수 없다.

십 년의 봉문이면 아무리 강성한 세를 자랑하는 무가라도 큰 타격을 입게 된다.

그런데 백 년이다. 잃었던 힘을 키울 수도 없고, 새로운 세대를 길러낼 수도 없다.

백 년의 봉문은 무당파에는 사형선고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도 노인은 감사의 눈빛을 가득 담고 사내를 바라보며 혼을 걸고 약조하고 있었다.

사내는 더 말을 하지 않고, 등을 돌리고 대전을 등지며 걸었다.

사내를 따라 세 무인도 걸음을 옮겼다.

그런 사내의 등을 향해 포권해 보이는 노인.

두 번째였다. 무당파의 백산웅이 사파인인 고연수에게 포권해 보이는 것은.

일행은 아수라장을 방불케 하는 무당파를 지나 무당산을 내려오는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각자의 여운에 빠져 있었다.

무당산을 내려오자 소개의 입이 열렸다.

“사부님에게 가야겠어.”

“그래. 가자.”

연수는 담백하게 답했다.

굳은 피가 갈라지며 붙어있는 손을 내려다본 소개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평. 너는 호남에 남겨둔 무사들을 데리고 사천으로 돌아가.”

“옛.”

도평과 헤어진 일행은 소개의 사부의 묘로 떠나기 전 균현에서 객잔에 들러 목욕을 하고 새로운 옷을 구해 입었다.

균현의 백성들은 그런 연수의 일행을 두렵게 바라보았다.

아무도 이야기를 꺼내진 않았지만, 그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무당에 변고가 생겼음을. 그리고 그 일과 피 칠갑을 한 채 무당산에서 내려온 이 일행이 깊은 연관이 있음을.

연수의 일행이 균현을 떠날 때쯤 무당산을 올라가 사태를 확인하려던 한 남자가 균현으로 돌아와 놀라운 이야기를 꺼냈다.

백 년 봉문.

어떠한 설명도 없이 해검지에 큰 바위를 세워 길을 막아두고는 그 앞에 새겨진 네 글자였다.

무당파의 봉문에 대한 소문이 중원에 퍼져나갈 때쯤 곳곳에서 비슷한 소문이 퍼져 나왔다.

황보세가와 팽가의 멸문 소식. 그리고 공동과 점창파가 무기한 봉문을 선언했다는 소문.

중원의 모든 사람들은 사황성의 행보에 집중했다.

무림맹을 멸하고 몇백 년 동안 강성한 세를 이어오며 명문이란 이름 아래 군림했던 문파들을 뿌리째 뽑아놓은 사황성과 패신살성.

하지만 정작 사황성과 패신살성은 그 이후 잠잠했다.

금방이라도 중원 무림을 피로 물들일 것 같던 그들이 너무도 잠잠하자 오히려 폭풍전야의 고요를 느끼듯 불안해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런 불안감을 제일 강하게 느끼고 있는 이들이 무림맹에 동조하며 정예들을 파견했던 군소방파들이었다.

언제 사황성의 무사들이 자신들에게 달려들지 모를 공포에 떠는 나날이 계속 이어졌다.

*     *     *

연수의 일행이 소개의 사부가 잠든 묘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 신강의 암주는 믿을 수 없는 소식에 탁자를 후려쳤다.

-꽝!

폭음과 동시에 돌을 깎아 만든 탁자가 박살이 났다.

“지금 뭐라고 했지?”

“들으신 대로입니다. 무림맹은 흔적조차 남지 않고 모든 무사가 전멸했고, 싸움에서 승리한 사황성의 기세가 대단하다 합니다. 그리고 무림맹에서 떨어져 나온 정협맹의 눈은 저희 신강을 예의주시하고 있습니다.”

“이···. 이···.”

분노로 부들부들 떨던 암주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지금 이 소식을 자신이 들었다면 필히 교주에게도 알려졌을 것이 분명했다.

“교, 교주는? 교주는 어쩌고 있느냐?”

“거처에서 두문불출하고 있습니다.”

“아직 소식을 듣지 못한 눈치더냐?”

“그럴 리가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어리석은 질문이었다.

강효각은 그런 질문을 할 만큼 흔들리고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자신보다도 이 소식을 빨리 전해 들었을 교주였다.

그의 경고를 무시하고 일을 벌였고, 그 결과는 참담했다.

그런데 경고를 했던 교주가 조용히 있다는 것 자체가 그를 불안에 떨게 만들었다.

‘무슨 꿍꿍이지?’

엄지와 검지를 비비며 서성이는 강효각.

소식을 전한 사내는 무덤덤하게 그런 암주를 지켜 보고 있었다.

저 행동은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 자주 암주가 하던 행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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