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5화
* * *
시선을 모아 형산을 바라보는 육천의 대군.
그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결연한 각오의 빛이 짙게 떠올라 있었다.
그들의 선두에서 아련한 표정으로 서 있던 비영이 돌아서서 사황성의 병력과 마주했다.
-오늘은 많은 사람이 죽고 다칠 것이다.
사황성 성주의 무거운 말에 무사들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오늘의 전쟁은 지난 삼 년 전 채 끝내지 못한 정사 대전의 결판이자, 삼 년 전 허무하게 돌아가신 전 성주님의 넋을 기리는 복수전이다.
모든 무사의 눈에 살기의 빛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지난 삼 년.
사황성의 무사들에게는 어두운 암흑기였으며 사패련 출신의 무사들에게는 지금에 와서는 치욕의 시간으로 기억되고 있었다.
서로 다른 시간을 보내던 무사들에게 공통적으로 존경받고 있는 그 남자를 지금의 성주가 이야기 하고 있었다.
-기억하는 자도 있을 것이다. 패천후 성주님의 말씀을. 죽음을 결사하고 우리의 결기를 보여주자던 그 말씀을. 그분의 말씀을 빌린다. 산화하자. 우리의 목숨으로 사파의 정신을 저들에게 보이는 거다. 우리보다 더 많은 적의 시체를 오늘! 이 형산에 쌓을 것이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
조금은 늦은 하지만 그 어느 때 보다 뜨거운 불길이 사황성의 무사들 가슴속에서 솟아오르고 있었다.
-패천후! 패천후! 패천후!
한동안 전 성주의 이름을 외침과 함께 육천의 대군이 형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화령가주는 직접 화령가의 정예들을 이끌고 선발대를 자청하고 혹시 모를 매복과 지형을 살피며 정찰병의 임무를 맡았다.
“오늘이 지나면 그 오랜 세월 이어지던 무림맹의 맥이 끊어질 겁니다.”
철가군의 말에 진벽가주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정협맹이 새로 들어섰다지만 중원 무림 역사에 무림맹의 맥을 끊는 기록을 남길 수 있다면 이는 첫 정사 대전에서 승리하는 사파의 역사가 될 것입니다.”
주변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사기를 끌어 올리는데 비영만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이 중요한 게 아니요. 무림맹을 지운다? 무림의 역사를 다시 쓴다? 그런 것들은 다 부질없는 것들. 그간 정사 대전의 그 무수한 패배 속에도 우리 사파인은 다시 일어났소. 지난 삼 년. 끝맺지 못했던 정사 대전을 끝낸다는 것. 이로써 오늘 옥현인의 목을 들고 그분의 묘를 찾는다는 것. 이것 외에는 모든 것은 의미가 없지요.”
살기를 줄줄 흘리며 씹어뱉듯 말하는 비영의 말에 주변의 무인들 기세가 사나워졌다.
장내에 무인 중 누구 하나 패천후의 등을 그리워하지 않은 자들이 없었고, 그의 빈자리를 느끼지 못한 자들이 없었다.
그런 그들의 앞으로 앞서 나가는 연수의 등이 묘하게 항상 앞서가며 그들을 이끌던 패천후와 겹쳐 보이는 무인들이었다.
“어서들 갑시다. 중봉에서 개전하려면 먼저 가서 선점하고 있는 것이 유리하니까.”
든든한 연수의 말에 모두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비영은 연수의 등에 대고 물었다.
“옥현인의 모가지 잘라올 수 있겠지?”
“어차피 그러지 못하면 이 전쟁은 지고 마니까요. 있겠지? 가 아니라 잘라오라 명하세요. 그럼 잘라 올 겁니다.”
비영의 얼굴에 살기 어린 미소가 짙어졌다.
“적영대장, 무림맹주 옥현인의 목을 잘라오게.”
“예.”
무덤덤하게 확답하는 연수의 대답에 신뢰가 가는 것은 비단 비영만이 아니었다.
장내의 무인 중 그 누구도 적영대장과 무림맹주의 일전을 걱정하는 이들은 없었다.
석봉이 많고 많은 형산. 그중 중봉을 향해 한참을 움직인 사황성의 무사들.
넓디넓은 중봉에 올라서자 숨을 몰아쉬고 호흡을 조절하며 주변을 살펴보는 무사들이었다.
그들의 호흡이 안정을 되찾을 때쯤 되니 형산의 중봉 위로 불꽃 여러 발이 날아오르며 요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아직 밝은 하늘에 수를 놓았다.
“오는군.”
비영의 말에 진벽가주의 손에 들린 파란 깃이 올라가자 진벽가의 무사 하나가 깃대를 올렸다.
그와 동시에 전투의 대형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사황성의 무사들.
-각 무가와 무력대들은 현 진형을 유지하고 전투에 임한다!
진벽가주의 내력을 담은 외침이 형산에 메아리치며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중봉의 평야로 올라서는 인물들이 사황성의 무사들 시야에 잡히기 시작했다.
저 멀리 작게 보이는 인영들이 하나둘 정렬을 가다듬으며 잔뜩 경계심을 세우고는 적대감을 일으키는 모습이 더 보지 않아도 무림맹의 무사들이 분명했다.
그중 열두 무인이 떠받든 높고 화려한 가마가 중봉의 위로 솟아오르듯 튀어나오자 연수의 눈에 살심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무인들 눈에는 저 멀리 올라서고 있는 인영들이 너무나 작아 그 얼굴을 분간하기 힘들었지만, 일정 경지를 넘어선 자들에게는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특히나 연수의 눈에는 맹주의 지루한 듯 사황성의 무인들을 훑어보는 그 나른한 표정이 너무도 뚜렷하게 보였다.
중봉의 끝과 끝에서 먼 거리를 사이에 두고 무림맹주 옥현인과 연수의 시선이 부딪혔다.
싸늘하게 비틀리는 두 사람의 입매.
놀랍도록 두 사람의 표정은 닮아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눈은 전혀 달랐다.
맹주의 눈이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 같은, 빨리 놀고 싶어 하는 호기심과 흥미를 담고 있었다면 연수의 눈은 지난 세월의 분노와 복수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선명한 그 치욕의 날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연수였다.
맹주의 검도 아닌 일 권에 단전이 깨져 버렸고, 사지 근맥과 허리의 근맥마저 잘렸다. 맹주의 주변 무인들이 무인으로서 연수를 모욕하며 침을 뱉고 돌아서던 그 날의 기억.
그리고 떨어지는 패천후의 목.
그 모든 기억이 바로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연수의 눈 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저, 적영대장.”
점점 진하고 강해지는 연수의 살기와 기세가 부담스러워 지자 진벽가주가 연수를 말리고 나섰다.
“아, 미안합니다.”
특유의 쇠를 가는 듯한 목소리로 웃는 철가군.
“천천히 가자고. 급할 거 뭐 있나?”
비영은 철가군과 마찬가지로 비릿한 미소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진벽가주. 굳이 우리가 기다려줘야 할 이유가 있던가?”
“설마요. 이미 화령가주님이 직접 움직이고 있으니. 조금만 있어 보시지요. 곧 개전의 폭음이 울릴 것입니다.”
진벽가주는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광기 어린 미소를 짓고 있었었다.
다른 봉우리들과 다르게 유독 우거진 중봉이었다.
다른 산도 아니고 중원의 오악 중 형산에서 불놀이할 생각을 하니 주염철의 입가에 미소가 짙어졌다.
“크크크 이런 날이 다 오는구나.”
육십의 화령가 정예와 함께 폭염진을 준비하는 화령가주 주염철의 눈가에 광기가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무림맹의 고수들이 반쯤 중봉에 올라서기 시작했을 무렵 비영이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마교의 주구 무림맹주 옥현인은 들어라.
비영의 외침이 쩌렁쩌렁 형산을 울리자 무림맹의 무사들이 술렁거렸다.
소문이라는 것은 믿는 사람들에게는 확신이 되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거짓이 된다.
-무림맹주가 마교와 결탁했다.- 는 소문을 믿는 이들은 현 무림맹에 얼마 남지 않았다. 맹주의 기행에 그 소문에 확신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무림맹을 이탈했으니.
하지만 아무리 믿을 수 없는 소문 또한 당사자가 부인하지 않으면 의혹과 불신을 낳는다.
지금의 상황이 딱 그랬다.
사황성의 새로운 성주의 입에서 대놓고 마교의 주구라는 말이 나오는데도 현 무림맹주는 전혀 부인하지 않고 지루한 표정으로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중봉 위에 올라선 무사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의혹을 담고 혹은 해명을 바라며 맹주에게 시선을 집중시킬 때쯤 비영의 외침이 이어졌다.
-중원인으로서 새외의 불손한 세력과 손잡고 중원 무림을 혼란에 빠트린 죄! 앞에서는 화해의 손길을 내밀고 바로 뒤에서 함정으로 사황성주 패천후를 죽인 죄! 이 두 죄는 정사를 막론하고 모든 중원인의 지탄 받을 일이며 네놈은 오늘 그 죗값을 모두 치르게 될 것이다. 오늘의 결전은 중원 무림 역사에 두고두고 기억될 일! 중원의 배신자로 기억되기 싫은 자들은 모두 형산을 떠나라!
비영의 한이 서린 외침에 연수의 입매가 뒤틀렸다.
지금 비영의 말은 모두 진벽가주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 분명했다.
지난번 정사 대전에서는 갑작스러운 정세변화에 휩쓸려 진벽가주가 힘 한 번 써보지 못하고 끌려간 부분이 있었다.
그로 인해 사황성은 적잖은 피해와 삼 년의 암흑기를 보내야만 했다.
그 삼 년의 시간 동안 진벽가주가 얼마나 칼을 갈아왔는지 연수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혈투를 앞두고 명분으로 저들을 옭매겠다니···. 어지간히도 분했나 보군.’
어찌 분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만약 정사 대전 중 저들의 의도만 미리 알았더라면 정사 대회에 검은 속셈이 있다는 것을 더 빨리 알았더라면 사황성주 패천후는 절대 그리 쉽게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 책임을 그간 무겁게 가슴에 담고 있던 진벽가주였다.
그의 계획이 제법 무림맹을 상대로 먹혀들어 가고 있다는 것은 술렁이는 무림맹의 무사들과 똥 씹은 표정으로 인상을 굳히고 있는 제갈휘의 얼굴만 보아도 훤히 알 수 있었다.
설마하니 모든 전력을 끌어모아 놓고 한판 붙으며 결판을 지으려는 이 순간에 저쪽에서 그런 명분을 들이밀 거라고는 한 톨도 생각지 못했던 제갈휘였다.
아니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 저들은 사파인이었으니.
혹시 모를 함정과 혹시 모를 암습에는 백번 천번의 준비를 해 놓았지만, 밑도 끝도 없는 명분 전쟁이라니.
“끌끌끌. 별 시답지 않은.”
맹주의 한마디였다.
제갈휘는 그 한마디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시답지 않을 리가 없었다.
아무리 패도를 걷겠다 천명한 무림맹주였지만, 홀로 걷는 패도에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홀로 군림하는 일학은 고고할 뿐. 아무런 실익을 가져가지 못한다.
절대적인 힘 아래 사람을 모으고 그들을 단결시키는 대의명분은 정파인에게는 꼭 필요한 장치였다.
아무리 뒤로는 온갖 입에 담지 못할 더러운 일을 하더라도, 그건 어디까지나 뒷일. 앞에 당당히 떠벌일 수 없는 일이다.
한데 이 많은 무사가 술렁거리고 있다.
이 많은 무사의 믿음과 신뢰가 흔들리고 있다.
지금은 무엇이 되었든 맹주가 반발해야 했다. 저 사황성주의 말을 모두 부인해야만 했다. 아무리 빈약한 논리를 대어서라도 이들에게 믿음의 구실을 주어야만 했다.
하지만 맹주는 그저 개전을 기다리며 마교의 주구라는 상대가 씌우는 올가미를 벗어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이윽고 술렁거림이 퍼져나가며 무림맹 무사들의 얼굴에 떠오르는 의구심이 짙어지자 제갈휘가 앞으로 나섰다.
-과연! 사파놈 답구나! 너희의 허물을 이쪽에 뒤집어씌우다니! 맹주님께서는 하도 기가 차 너희와 말을 섞는 것조차 포기하셨다!
제갈휘의 외침에 진벽가주의 미소가 짙어졌다.
무림맹의 무사들의 술렁거림은 잦아드는 듯했지만 그 안에서 싹튼 의심은 절대 수그러들지 않을 것이란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진벽가주였다.
‘한번 의심이 들면 생각에는 편향이 생기기 마련.’
진벽가주가 신호를 해 보이자 비영은 다시 한번 내기를 담아 목소리를 내었다.
-맹주가 신강에서 모습을 보인 것은 명백한 사실! 이를 본 사람만 해도 그 수를 다 헤아릴 수 없고, 또···.
-시끄럽다.
“크윽!”
듣다 못한 맹주의 입에서 조용히 흘러나온 한마디.
하지만 그 조용한 목소리와는 다르게 맹주의 말은 형산의 중봉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며 퍼져나갔다.
자연히 말을 끊긴 비영은 인상을 찡그리며 입을 다물고는 들끓는 내기를 진정시켰다.
맹주가 웅후한 내력의 일면을 보임과 동시에 무림맹의 술렁이던 무사들 역시 조용해졌다.
비영이 진벽가주를 바라보았다.
미소를 짓는 진벽가주가 품속에 가지고 있던 대롱을 꺼내 하늘 위로 가져다 대자 대롱에서 뻗어 나온 불꽃이 날카로운 장음과 동시에 하늘로 뻗어갔다.
-콰콰콰아앙!
그와 동시에 무림맹의 무사들이 부지런히 올라오던 무림 맹 쪽 후미에서 굉음과 함께 불기둥이 솟아올랐다.
아비규환.
순식간에 일어난 폭발과 불길 속에서 전열이 흐트러지며 난리가 나기 시작한 무림 맹 측.
계속해서 지루한 표정으로 상황을 주시하던 맹주의 눈썹이 씰룩이는 순간 이미 연수를 비롯한 적영대는 맹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고, 그와 동시에 비영이 목청을 높여 외쳤다.
-개전이다!
-와아아아아아아!
함성과 함께 물밀 듯 달려드는 사황성의 무인들.
육천 대군이 달려들기 시작하니 무림맹측의 무사들은 어찌할 줄을 모르며 당황하기 시작했다.
터져 나오는 제갈휘의 목소리.
-당황하지 말고 전열을 유지해라! 격돌을 준비해!
그나마 제갈휘의 목소리에 육천 사황성의 대군과 격돌을 준비하는 무림맹의 무사들.
그들의 눈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겨우 이천의 수밖에 중봉에 오르지 못한 상태에서 육천 대군이 달려들고 있으니 무림맹의 무사들이 흔들리는 것은 당연했다.
-콰화아아아아아
또 한 번 치솟아 오르는 불길.
그와 동시에 이천 무림 맹 무사들의 뒤로 후끈한 열기와 함께 비명이 터져 나왔다.
화령가주와 화령가의 정예들의 활약이었다.
앞에는 육천의 자신들을 압도하는 수의 무사들이 달려들고 있고, 뒤는 불안한 상황에서 무림맹 무사들의 사기는 바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사황성의 무사들과 무림맹의 무사들이 격돌하는 순간 무림맹주 옥현인이 가마를 박차며 뛰어올랐고, 무림맹 무사들을 학살하듯 적영대와 함께 무림맹의 전열을 흩어놓던 연수 또한 맹주를 향해 신형을 뽑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