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둑놈에서 고수까지-160화 (160/202)

# 160화

한참을 팔에 힘을 주고 연수를 붙잡고 있던 도화를 겨우 떼어낸 연수가 입을 열었다.

“앞으로는 정말 이리 두지 않을게. 절대 혼자 무섭게 두지 않을게.”

“아···. 야, 약속···. 이.에.요.”

순간 주위의 천화대의 호위들과 공숙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간 말을 잃고 발작을 하던 도화였다. 그런 그녀가 말을 하자 그들의 눈시울이 절로 붉어졌다.

“그럼. 약속이야. 내 심장을 걸고 하는 약속. 절대 어기지 않을 약속.”

“꼭, 지켜야.해.요.”

떠듬떠듬 말하는 그녀의 맑은 눈동자를 보며 연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을 주변을 잊고 시간을 잊고 이야기하던 연수가 문득 생각이 난 듯 물었다.

“정회는 어디···.”

말을 하던 연수가 아차 싶었는지 뒷말을 흐렸다.

공숙은 그런 연수를 보며 피식 웃었다.

“걱정하지 마. 그녀는 살아있어. 조금 다치기는 했었지만, 지금은 멀쩡해. 성이 지하로 숨어든 이후 수련을 위해 암영대에 섞여들어 수련 중이야. 성주 역시 흔쾌히 허락해 주었고.”

“그랬어요? 절대 도화의 곁을 비우지 않을 것 같더니.”

“앞으로 몇 달만 있으면 그 훈련도 끝날 테니 돌아오겠지. 그녀 또한 충격이 컸어. 그날 도화를 위해 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으니까. 그만큼 망노의 힘은 강했어.”

“그 빌어먹을 노인네의 모가지는 제가 신경 써서 잘랐어요.”

“오라버니, 그, 사람···.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아요.”

“아! 미안. 그보다···. 너희들. 용케 여기까지 쫓아와 주어 고맙다.”

천화대를 바라보며 포권을 올리는 연수.

“저희야말로 적영대장님의 무위를 직접 볼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천영의 말에 연수의 눈썹이 씰룩거렸다.

“못 본 동안 제법 변했구나.”

“이제 저희는 암영이 아니니까요. 저희는 천화대. 도화 아가씨의 호위대이니 아가씨의 부군이신 적영대장님의 호위 또한 책임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엇보다 적영대장님은 아가씨의 말을 되찾아 주신 분. 평생의 은인이십니다.”

말과 동시에 천영을 포함한 천화대의 호위들은 포권을 해 보였다.

공숙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참견을 하고 나섰다.

“사패련을 정벌하고 사천진출을 성사시키고 제갈세가를 멸하고 사파를 위해 공헌한 바가 이루 말할 수 없는데 너희는 도화를 위해 감사만 하냐?”

날카로운 지적에 천화대의 무인들은 먼 산을 바라보았다.

“어쨌든 도화를 지켜준 것에 대한 보답은 어떻게든 꼭 해 주지.”

“괜찮습니다.”

“아니야. 내가 안 괜찮아서 그래. 입신경의 고수가 무공을 보아 준다면 제법 괜찮은 보상이지 않겠어?”

-꿀꺽.

천상 무인은 어쩔 수 없는지 천화대의 호위들은 침을 삼키며 거절의 말을 하지 못했다.

“그, 그럼 염치불구하고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래. 마음 놓고 지도받으라고. 뼛속까지 무공을 때려 박아줄게.”

미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연수를 보는 천영은 왠지 모르게 등골이 오싹했다.

한동안 이야기를 하며 회포를 푼 일행은 마차를 몰고 혈개문으로 향했다.

혈개문의 무사들은 연수와 함께 들어오는 일행들을 보고는 시선을 빼았겼다.

연수의 옆에서 그의 팔을 꽉 붙든 여인을 보는 순간 이미 눈치가 빠른 돌쇠는 모든 상황의 파악이 끝났다.

“다녀오셨습니까? 대장님 부인되실 분이 굉장한 미인이십니다.”

고개를 숙이며 말하는 돌쇠를 보고 피식 웃는 연수.

“차차 소개해 줄게. 일단 좀 쉬어야겠다.”

“목욕물 준비해 놓겠습니다.”

피가 범벅된 연수와 그런 연수를 꼭 붙들고 있느라 여기저기 피가 묻은 여인은 씻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았다.

이미 툭하면 피를 뒤집어쓰고 온 연수의 목욕물을 준비하는 것에 익숙해진 돌쇠였다.

무사들의 눈길을 받으며 안채로 들어가자 일행을 발견한 소개가 한달음에 달려 나왔다.

“공 매!”

“가가! 잘 지내셨어요?”

“나야 잘 지냈지. 공 매는 그간 별일 없었어?”

“오는 길에 습격을 받기는 했지만, 동생을 잘 둔덕에 큰 화는 없었어요.”

그제야 여기저기 피를 묻힌 연수와 도화가 눈에 들어왔다.

소개의 눈에 걱정의 감정이 차오름을 보고 연수의 입이 열렸다.

“걱정 마라. 우리 피는 아니니.”

“아, 당연히 그렇겠지. 누구냐? 어떤 놈들이야?”

“마교인 것 같아.”

마교라는 말에 소개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마교가 왜···.”

마교라는 이름이 중원인들에게 주는 압박감은 적지 않았다. 혈개라 불리는 소개조차도, 마교라는 말에는 주눅이 들었다.

“왜긴 왜야. 맹주를 돕겠다고 노골적으로 나선 거지. 걱정하지 마. 싸그리 죽여버렸으니.”

“그걸로 끝일까?”

“글쎄.”

무거운 침묵이 잠시 일행들 사이에 눌러앉았다.

도화는 애써 웃음을 지으며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뵙는 기분이에요. 소 공자.”

도화의 입에서 말이 나오니 소개의 눈이 커졌다.

“도, 도 소저···.”

그런 소개의 팔짱을 끼는 공숙.

“결국, 병의 원인이 병을 치료한다는 거지요. 이리 쉬이 나을지는 아무도 몰랐을걸요?”

모두가 바랬지만 이렇게 쉽게 도화가 좋아질 거라고, 생각하지는 못했었다.

“일단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자. 씻고 환복부터 해야겠다.”

“그래.”

소개가 보기에도 젊은 남녀가 피투성이의 차림으로 있는 것은 그리 보기 좋진 않았다.

어느새 다가온 돌쇠의 안내로 연수와 도화는 목욕하러 갈 수 있었고, 천화대의 호위들 또한 돌쇠의 안내로 안채에 숙소를 배정받을 수 있었다.

“저는 혈개문의 총관 돌···. 석철이라 합니다. 앞으로는 편하게 석 총관이라 불러주십시오. 의원을 불러놨으니 곧 상처를 봐주러 들를 것입니다.”

“고맙소. 우리는 천패화... 도화 아가씨의 호위인 천화대입니다. 저는 대주인 천영이라 합니다.”

“반갑습니다. 이런 고수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나야말로 환대해 주셔 고맙소.”

천영은 무공실력이라고는 쥐뿔도 없어 보이는 돌쇠를 보며 함부로 하대하지 않았다.

그리 길지 않았지만, 자신이 보아온 패신살성은 이유 없이 사람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능력도 없는 놈을 총관으로 삼았을 리가 없었기에 앞으로 혈개문의 밥을 먹어야 하는 처지인 그로서는 최대한 그와 잘 지내둬야 했다.

“그럼 쉬고 계십시오.”

공손하게 허리를 숙여 보이고는 나가는 돌쇠였다.

돌쇠는 일행이 돌아온 뒤 바쁘게 움직였다.

혈개문의 가솔 들 중 눈치가 빠른 몇몇 여인을 불러 도화의 시중을 들기 위해 도화가 씻고 있는 안채의 목욕탕으로 보냈고, 그녀가 입을 고급옷을 발이 빠른 수화연에게 부탁하여 구해오게 했다.

또한, 일행들의 식사를 신경 써서 차리게 했으며 그밖에도 갑자기 늘어난 식구들을 위해 할 일이 제법 많았다.

“후우. 이제 대충 끝났네.”

“석 총관님!”

“아, 고생하셨습니다. 이런 일을 부탁해서 미안합니다.”

수화연은 그래도 한때 화련파의 두목이자 이류 고수 소리를 듣는 무림고수였다. 그런데 겨우 발이 빠르다는 이

유로 심부름이나 보내야 했으니 돌쇠는 그 점이 미안할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요. 그보다 이번에 들어오신 분들은 어떤 분들이신지..?”

“대장님의 부인되실 분과 그분의 호위. 그리고 문주님의 부인되실 분이 성에서 오신 모양입니다.”

“아! 그 아름다운 두 분이 문주님과 대장님의 부인되실 분들이군요.”

“예.”

“그럼···. 혹시 그 옥안독주라는 별호의···.”

“쉿.”

돌쇠는 수화연의 입에 손가락을 대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듣자 하니 그분은 그 별호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소문입니다.”

“딱히. 그렇지는 않은데?”

“히익!”

“헉!”

갑자기 위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는 돌쇠와 수화연.

지붕에서 떨어져 내린 공숙은 기지개를 켜며 입을 열었다.

“미안. 엿들으려던 건 아니고. 안채주위를 좀 살펴보는데 이야기가 들려서. 내가 싫어하는 별호는 사부님의 옛 별호 중 사목이라는 별호뿐이야. 옥안독주라는 별호는 나를 잘 나타내는 별호라서 딱히 싫어하진 않아.”

“그, 그렇군요.”

수화연은 멍하니 공숙을 바라보다가 뒤늦게 포권을 했다.

“마,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응. 나도 반가워.”

강호에 고수는 많고, 그 고수 중 여자 고수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절정의 경지에 오른 고수들을 꼽자면 이야기가 많이 달라진다. 정파에 아미파를 제외하면 여자 절정고수는 드물고, 사파로 넘어와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그런 와중에 옥안독주 공숙은 당당한 사파의 절정 여 고수로 그 명성이 적지 않았다.

같은 여인의 몸으로 사파에 몸담고 있던 수화연이 그런 공숙을 동경하는 건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아, 앞으로 많은 지도···.”

말을 하다 보니 공숙은 문주의 부인이 될 사람이지 문의 일원이 아니라는 데 생각이 닿은 수화연이 끝말을 흐리자 공숙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 나쁘지 않네. 편법이 배우고 싶다면 언제든지 가르쳐 줄게.”

“가, 감사합니다.”

머리가 땅에 닿을 듯 허리를 숙이는 수화연이었다.

그런 그녀와 돌쇠를 뒤로하고 두리번거리며 사라지는 공숙.

소개는 돌아오는 공숙을 보며 미소지었다.

“공매 어딜 그렇게 다녔어?”

“여기저기 살펴보았어요. 이제 이 혈개문의 안주인이 되었는데 살펴야 할 게 많을 것 같아서요. 저 밖으로는 아직도 뭘 뚝딱뚝딱하던데···.”

“아. 중축 공사가 아직 끝나지 않았어.”

소개와 공숙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옷을 갈아입고 깨끗한 모습으로 나오는 도화와 연수.

“와! 선남선녀가 따로 없네.”

연수는 얼굴을 붉히며 옆에 딱 붙어있는 도화의 어깨를 팔로 감쌌다.

찌릿.

오랜만에 느껴지는 뒤통수에 박히는 살기.

-거 적당히 하자.

연수의 육합전성이 혈개문의 안채에 두루 울렸다.

소개와 공숙은 소리죽여 웃었고, 도화만이 어리둥절했다.

-기분 탓이십니다.

허공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연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느새 본연의 임무로 돌아간 천화대의 무인들은 안채의 곳곳에 은신한 채 호위를 하고 있었다.

안채의 툇마루에 돌쇠가 신경 쓴 상이 차려지자 일행은 일단 식사부터 했다.

긴 상에는 자리가 많았기에 연수는 천화대의 호위들 또한 반 억지로 식사에 동참시켰다.

“이제 니들 암영도 아니라며? 은신 호위도 좋지만, 옆에 붙어서 밀착 호위하는 법도 있는 거야.”

사실 매번 은신하여 몰래 훔쳐보기 바빴던 암영들이었기에 도화와 한자리에 앉아서 밥을 먹는다는 건 생각도 못 해본 그들이었다.

어색한 식사 자리가 끝이 나자 연수는 천화대의 무인들과 세 명의 적영대 무인을 불러 모았다.

“일단, 도산. 앞으로.”

연수의 명에 앞으로 나와서 기수식을 취하는 도산.

그런 도산의 앞으로 연수가 서기 무섭게 선공을 취해오는 도산.

-퍼퍽! 퍼퍼퍼퍼퍼퍼퍼퍼퍼퍼퍼퍼퍼퍽!

발끝이 땅 위로 살짝 떠오른 채 연수의 주먹에 온몸을 골고루 난타당하는 도산.

그런 광경을 보는 천화대의 무인들은 식은땀이 흘렀다.

저 무식하고 유려한 주먹질은 그들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연수의 마지막 타격이 도산의 가슴에 적중하는 순간.

뒤로 날아가 처박히는 듯하던 도산의 신형이 움찔하며 허공에서 휘릭, 돌고는 바닥에 안착했다.

“하아, 하아···.”

비틀대며 몸을 일으키고 기수식을 취하는 도산.

그의 경이로운 맷집을 본 천화대의 무인들은 입이 떡 벌어졌다.

“오늘은 여기까지. 이리 와봐.”

비틀대며 걸어오는 도산의 손목을 붙잡는 연수.

“음···. 앞으로 갈 길이 머네. 하여튼 맞다 보면 다 풀리겠지.”

이미 연수에게 한 차례 설명을 들었던 도산은 비틀대며 툇마루로 가서는 그대로 뻗어 버렸다.

“자 다음은······.”

연수의 시선이 천화대를 훑고 지나가자 천영이 다급히 나서며 입을 열었다.

“저, 저희는 아무래도···.”

“일단 네가 대표로 나서는 게 순서겠다.”

천영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자 마음껏 덤벼봐.”

마음껏 덤비라는 말에 천영은 말문이 막혔다.

상대는 한때 암수일살이라는 별호로 명성을 얻은 입신경의 고수였다.

은신과 암습이라면 아마 현 강호에서 최고라 해도 과언이 아닐 고수를 상대로 은신이 특기인 자신이 무얼 할 수 있단 말인가.

“안 오면 내가 갈까?”

비틀린 입매로 미소짓는 그를 보며 천영은 속으로 욕을 해댔다.

이건 분명 그간의 복수가 틀림없었다.

생각과 동시에 존재감이 옅어지며 공간과 동화되며 모습을 지우는 천영.

-캉! 캉!

천영이 사라지기 무섭게 허공에서 파공음이 들려왔다.

그때마다 허공에 얼핏 나타나는 외날 도.

-은신도 좋은데 공격하는 순간 기세가 강해지며 기척이 진해진다. 그런데도 대놓고 공격하는 것보다는 그 위력이 많이 죽어. 하려면 한 가지만 해. 이러면 이도 저도 아닌 게 되잖아.

연수의 조언에 모습을 드러내는 천영. 그의 맞은편에는 연수의 신형또한 나타났다.

천영은 양손으로 외날 도를 쥐고는 연수를 노려보며 서 있었다.

“기세가 여전히 들쑥날쑥해. 무인의 기세는 의지의 발현이야. 마음은 한없이 가라앉아있고, 의지는 붕 떠 있으니 기세가 들쑥날쑥 이 되지. 아무래도 암영생활을 오래 해서 그런 것 같은데, 그 정도 경지쯤 되었으면 마음을 다스리고 의지와 마음을 갈고 닦는 수련도 중요해.”

연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늘어지듯 다가오는 천영의 신형.

그의 외날 도가 그어지는 순간 마치 그의 검세로 주변 공기가 빨려 들어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깡!

하지만 채 끝까지 휘둘리기도 전에 연수의 곡월에 막혀버리는 천영의 외날도.

“아직 그 양반 흉내 내려면 멀었어. 좋은 무공이고 좋은 초식이었지만 그 기세가 여전히 부족해.”

-카캉!

곡월로 막고 있던 외날 도를 슬쩍 밀자 뒤로 주르륵 밀려나는 천영.

“다음은 누가 나서볼래?”

말을 하며 시선을 옮기는 연수에게 외날도를 역수로 잡고 포권해 보이는 천영이었다.

그렇게 무인들의 무공을 봐 주길 삼일.

한 무인이 혈개문의 정문을 넘어 들어왔다,

돌쇠의 안내를 받으며 들어오는 무인을 본 연수는 순간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

“콜록! 콜록! 켁!”

“대, 대장님 괜찮으십니까?”

“콜록! 콜록! 콜록!”

고개를 갸웃하던 돌쇠의 뒤에 있던 무인이 앞으로 나서며 포권을 해 보였다.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당가에서 온 당 진원이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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