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7화
청화패성의 검이 그의 목을 자르기 전까지 피를 토하듯 외치는 그의 말은 장내의 무인들 귀에 쏙쏙 박혔다.
-모두 똑똑히 들었는가? 사패련은 사파의 치욕이고 오욕이다. 사패련에 몸을 담았다는 과거는 너희들에게 치욕의 꼬리표로 남을 것이고, 두고두고 사파 인들의 원망을 들어야 할 것이다.
몇몇 남아 있던 필사의 각오를 다졌던 무인들은 끝내 무기를 놓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것은 사패련의 수뇌들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장내가 정리되자 연수의 손이 한쪽으로 뻗어졌고, 혈도가 제압된 적의를 입은 무인이 둥실 떠오르며 연수의 손으로 빨려 들어왔다.
-턱!
그의 목줄기를 쥔 연수의 입이 열렸다.
-여기 또 다른 증인이 있다.
혈도가 풀리자 적의를 입은 무인의 입이 열렸다.
“나, 나는···. 무림맹주를 도우라 일월신교에서 파견된 무사요. 소속은 일월신교의 외원 무사이고... 무림맹의 비익대대원입니다.”
그의 말에 장내에 사패련의 무인들은 충격으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망노가 성주를 배신하고 모함한 것만으로도 충격이 가시질 않았거늘 오히려 무림맹주가 마교의 주구이고 자신들은 그에 가담했다 하니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일 수밖에는 없었다.
-사파를 둘로 쪼개고 맹주의 개로 전락시킨 죄인들은 그 죄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휩쓸리고 선동당해 판단을 흐린 무사들에게는 어떤 죄도 묻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 오욕을 잊지 말고 무림맹주를 찢어 죽이고, 전 성주님의 명예를 회복하여 그분의 혈채를 받아야 한다.
말을 마친 연수는 청화패성을 바라보았다.
-뒤처리 맡겨두겠습니다.
청화패성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살기로 번들거리는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뿌리를 뽑겠소!
전의를 상실한 무인들을 독려하여 정리하며 전 청화련의 무인들을 보는 족족 베어 죽이는 청화패성.
철가군과 주염철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청화패성을 바라보며 연수의 옆으로 다가왔다.
“괜찮겠나? 저 치에게 맡겨두어도?”
“단 한 번의 만남만으로 그분에 대한 의리를 지키느라 일가족을 모두 잃은 자입니다. 만 명의 사패련출신의 무인들보다 저자 하나가 더 귀합니다.”
연수의 말에 두 가주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성적으로는 이제는 하나로 통합하여 큰 적을 상대해야 할 때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들도 인간이었고, 감정이 있었다.
특히나 사황성을 위해 그 지고한 경지에 패천후가 산화하였다고 생각하면 더러운 사패련의 무인들을 모두 찢어 죽이고 싶은 감정은 지우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기에 청화패성같은 무인에 대한 고마움 또한 더욱 각별했다.
강서의 태화현 사패련에서 흐른 피가 바다를 이루었다는 소문이 전 중원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사패련이 망했다는 소문의 뒤에는 무림맹주가 마교의 주구였다는 소문과 죽은 패천후의 비화가 속속들이 따라붙어 빠르게 퍼지고 있었다.
사패련의 무인 중 청화패성이 홀로 숙청한 무인만 오백이 넘어가자 그의 별호가 바뀌었다.
살화패성 수일지.
항복한 무사 중 오백 명의 목을 베어낸 그는 현 사파인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특히나 사패련에 투신했었던 무인들은 그와는 눈도 마주칠 수가 없었다.
그 무공과 지위가 어떻든 그에게 찍혔다가는 사파에서는 살아갈 수가 없었다.
그런 살화패성 수일지를 마주하고 차를 마시고 있는 연수와 철가군, 주염철.
차를 마시는 네 무인의 몸에서는 아직도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것 같았다.
“혈채는 모두 받았습니까?”
연수의 물음에 수일지는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적영대장님의 도움으로 원한을 모두 풀었습니다.”
“이천의 무인들 전부를 죽일지 알았는데, 겨우 오백에서 끝내다니. 과연 아량이 넓으시군요.”
“휩쓸린 자들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주염철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오백의 저항 못 하는 무인들을 겨우 삼 일만에 죽였다.
자신 또한 그 성정이 불같기로는 어디 가서 밀리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설마하니 그 많은 무인을 몰살시킬 줄 상상도 못 했었다.
그런데 아량이라니.
주염철은 적영대장 고연수를 다시 보았다.
그저 그 무위와 빠른 머리 회전, 사람 속을 뒤집는 세 치 혀가 그의 전부인 줄 알았지만 인제 보니 원한을 맺은 사람들에게는 한치의 아량을 베풀지 않는 그의 모습에 혀를 내두를 수밖엔 없었다.
“앞으로는 어떻게 할 예정인가?”
“이쪽 사패련의 무사들은 여기 청화패성이 정리하여 귀주로 데려오는 것으로 하고, 두 분 가주님들은 서둘러 죄인들을 데리고 성주님에게 돌아가세요. 귀주에 다시 사황성을 세우고 앞일을 도모해야죠. 이제 한 명 남았습니다. 무림맹주!”
무림맹주라는 말을 입에 담는 순간 연수에게서 싸늘한 살기가 새어 나왔다.
“그리고 수 형은 성주님의 칼이 되어 주십시오. 혹여 몸이 불편한 그분께 감히 불경한 자가 있다면 수 형이 성주님의 권위를 세워주셔야 합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럼 이쯤에서 강서는 정리하죠.”
연수의 말을 마지막으로 모두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무인들.
드디어 몇 년 만에 양지로 나와 귀주로 가는 현 사황성주 비영의 눈에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전 사황성이 자리했던 곳이 아닌 정안현에 터를 잡은 사황성.
얼마 지나지 않아 강서의 모든 사패련 출신 사파들을 흡수한 청화패성은 육천의 대군을 끌고 정안현으로 들어섰다.
총 팔천에 육박하는 새로운 사황성의 무인들을 커다란 공터에 모은 성주는 그들을 보며 일장연설을 끝냈다.
-...하여 앞으로는 오욕의 세월을 가슴에 새기고 저 무림맹주의 모가지가 떨어지는 그 날까지 우리는 싸워야 할 것이다!
-와아아아아!
-그리고. 우리 사파를 둘로 찢어놓고 위대한 지도자였던 패천후 성주님을 배신하고 그분을 모욕한 이 패륜의 죄인들은 어찌 하는 게 좋겠는가?
성주의 말이 끝나자 공터의 가운데로 다섯 명의 전 성주의 제자들이 끌려 나왔다.
“죽여라!”
“찢어 죽여!”
“개자식들 살을 저며서 개먹이로 줘야 한다!”
-죽이자! 죽이자! 죽이자!
분노의 광기에 휩싸인 사황성의 무사들.
그런 무인들을 향해 손을 올리며 주목시키는 성주.
-나는! 이들에게는 편안한 죽음은 사치라 생각한다! 그래서 비령곡을 부활시켜 이들을 평생 고통의 늪 속에 처박고자 한다.
“옳습니다!”
“비령곡으로 처박아 버립시다!”
비령곡이라는 말은 사패련 출신의 무인들에게는 등골이 오싹한 이름이었다.
살화패성이 이미 청화련의 무사들로 낙인을 찍어가며 오백 명의 무사들을 학살한 지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았다.
사패련출신의 무사들은 언제 탄압받을지 모른다는 공포가 가슴 한쪽에는 남아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비령곡을 부활시킨다면 상당한 무사들의 반발을 살수밖엔 없는 상황이었다.
성주는 그런 상황에서 패륜의 죄인들을 들이밀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사람을 고문하여 고통 주는 것이 존재 이유인 비령곡을 반대하는 자는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성주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이고 있는 다섯 명의 무인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늙어 죽을 때까지 고통받게 될 거다. 크크크”
조용한 그의 읊조림에 다섯 명의 무인은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연수가 혈개문으로 돌아온 지 열흘이 지났다.
진벽가주는 사황성의 재건을 이유로 귀주로 떠났고, 소개와 적영대원 적영대주 도평만이 연수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툇마루에 앉아 두 눈을 감고 있는 연수의 옆으로 앉는 소개.
“정말 가 보지 않고 이러고 있어도 괜찮은 거냐?”
움찔.
소개의 말은 연수의 정곡을 찔러왔다.
“...”
“내가 네 상황이었다면 모든 일을 다 제쳐두고 공 매에게 달려갔을 텐데···.”
“무림맹이 어찌 나올지 몰라. 이곳이 자리를 잡을 때까지는···.”
“이럴 때는 또 고지식 해서, 네 그림자가 셋이나 있는데 뭐가 걱정이야? 설마하니 입신경의 고수가 있는 혈개문을 누가 함부로 공격한다고.”
“그리 생각했다가···. 호설이를 잃었어. 세상에 미친놈은 많아.”
“...”
호설의 이야기가 나오자 소개는 입을 다물었다.
소개의 시선이 멀리서 미친 듯이 초식을 수련하는 두 무사에게 머물렀다.
호개와 설개는 확실히 자신과 연수를 닮아 있었다.
마음에 한을 품고 어디에 풀어야 할지 몰라 독기 가득한 눈으로 하루 대부분을 몸을 혹사하는 두 무사는 이제는 완연한 청년의 모습이었다.
“저 아이들은 벌써 원한의 고리에 묶여 강호로 끌려 들어왔구나.”
조용한 소개의 한탄에 연수의 시선 또한 두 무사에게 머물렀다.
“무림이 그런 곳 아니겠어?”
“어떨 때는 그날에 선택을 후회하는 날도 많아. 그냥 너와 부대끼며 살다가 객잔에서 같이 일하고 같이 돈을 모아 작은 꿈을 이루려 하루하루 살아갔으면 어땠을까?”
“그날이라···. 그래. 그래도 나쁘지 않은 삶이었을 것을.”
“손에 묻힌 피가. 앞으로 묻혀야 할 피가. 그리고 그 삶을 이어가야 할 내 자식들을 생각하면 너무나 두려워 질 때가 있어.”
“공 누이 임신했어?”
“컥! 누, 누가 인마 임신을 해!”
“아니 갑자기 자식이라고 하니···. 하긴 벌써 그럴 나이가 넘어도 한참은 넘었구나.”
“큼큼! 어쨌든. 너는 어떤데? 후회는 없냐?”
“없어. 내가 선택한 무인의 삶이고. 모르고 뛰어든 것도 아니야. 애초에 무투···. 무공도둑질을 할 때부터 은원을 쌓을 것을 두려워한 적도 없어. 다만 내 사람을 잃는 고통은 좀처럼 익숙해지질 않네.”
“그 고통에 익숙해 질 수 있겠냐? 나 또한 아직도 사부님의 마지막을 떠올리면···. 무당산이 불타는 꼴을 꼭 봐야만 원이 풀릴 것 같은데.”
“불태울 거야. 무림맹주 그놈과 연관된 무엇 하나 남기지 않을 거다.”
“그래···.”
두 사람은 말없이 시선을 멀리 던져 놓은 채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음희살 강연비는 사천의 파당현 작은 마을에서 식은 차를 앞에 두고 금을 타고 있었다.
그녀의 손이 현을 뜯을 때마다 아름다운 선율과 함께 비명이 날아올랐다.
-따안. 땅. 따아안.
“꺄아아아!”
그녀의 연주가 끝이 나자 작은 마을 안에 살아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패련이 망했다? 입신경의 고수라 재미있네.”
말을 마친 그녀가 식은 찻잔을 들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
그런 그녀의 뒤로 서 있던 백 명의 무인들 신형이 사방으로 날아오르며 마을의 시체들을 정리했다.
공숙과 암영대장은 성주 비영과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사천으로 가시겠다고요?”
“응. 낭군도 그곳에 있으니 나도 그곳에 자리를 잡아야지. 진벽가주님이 말하기를 귀주를 중심으로 중경, 사천, 운남까지 모두를 사황성의 영향력 아래에 둘 거라 했어. 혈개문은 사천에서 성을 지키는 최전선이 될 거라고.”
“모두 적영대장의 덕에 사천의 진출이 쉽게 이루어졌죠. 그렇지만 제 곁을 지켜주던 두 분을 잃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아요.”
“성주가 그런 약한 말을 해서는 안 되지. 그리고 이제 시작이야. 앞으로 무림맹과 싸워야 할 텐데.”
“예. 하여 성대히 보내드리려고 합니다만···.”
“역시 이 모지리 때문에 그러지?”
“...”
성주와 공숙의 시선을 받은 천영은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도화가 가는 것은 당연한 거 같은데 너는 왜 나서는 거야?”
“저, 저는 패천화님의...”
“너는 성주의 그림자거든?”
“...”
“천영. 나를 성주로 인정하지 못하겠더냐?”
천영은 그대로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바닥에 처박았다.
“감히! 그런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습니다!”
“그런데 왜 이러는 거야?”
“그, 그분을 꼭 지켜드리고 싶습니다.”
공숙은 답답함에 가슴을 치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도화는 너 말고도 지켜줄 사람이 많다니까? 너는 성주를 지켜야 한다니까?”
“성주님! 부디 허락을!”
성주 비영은 눈앞에 엎드린 천영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아, 그럼 네 맘대로 해. 단! 암영대의 대주자리는 내놓고 가야 할 거야.”
“감사합니다! 성주님. 이 은혜 충심으로 갚겠습니다.”
“충심 같은 소리 하네. 충심이 있는 놈이 이럴 때 성주 곁을 떠나냐?”
공숙의 정곡을 찌를 말에 말문이 막힌 천영은 묵묵히 고개를 처박고 있을 뿐이었다.
“암영대의 아이 중 자원 받아 열 명을 데려가. 너희는 이제 암영이 아니다. 그분의 호위대···. 천화대가 좋겠군. 앞으로 천화대야.”
“충!”
“성주, 이런 애들 안 딸려 보내도 돼. 거치적거리기만 하는데.”
“하하, 너무 구박하지 말고 잘 데려가 주세요. 저 또한 암영출신으로서 말씀드리자면 쓸만한 아이들이에요.”
“그런데 대체 언제까지 그렇게 존대를 할 거야? 이제 사황성은 명실공히 사파의 하늘이야. 그 정점에 있는 네가 자꾸 존대하면 사람들이 널 우습게 볼 텐데.”
“감히 그런 놈이 있다면 비령곡에 잡아넣으면 그만입니다. 제 구차한 목숨 때문에 혈개는 눈을 잃었고, 공 봉은···.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지 않았습니까? 이 은혜는 평생을 두고 갚아도 모자란 데 겨우 존대 따위가 뭐 대수겠습니까?”
“하여튼 그 고집은. 그럼 그렇게 알고 내일 떠날게.”
“예. 적영대장에게 전해주십시오. 살아있어 주어서 너무나 고맙다고. 그대의 은혜 절대 잊지 않겠다고.”
말을 마치며 공숙을 향해 절을 올리는 비영이었다.
불편한 다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연수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담아 절을 올리는 비영을 공숙은 차마 말릴 수가 없었다.
“잘 전해줄게. 그 마음 한치도 놓치지 않고.”
아직 곳곳의 전각이며 담벼락을 세우고 수많은 인부가 활발하게 일하며 활기로 가득 찬 사황성의 정문을 나서는 커다란 마차와 그 마차를 호위하듯 따라붙는 열 필의 말.
사황성을 떠나는 일행의 뒤로 사황성의 모든 무인이 포권을 하고 있었다.
창밖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는 공숙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여튼 고집은. 그렇지 도화야?”
멍한 눈으로 허공을 주시하는 도화는 공숙을 잠시 바라보고는 다시금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