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둑놈에서 고수까지-155화 (155/202)

# 155화

당일수는 잠시 진여덕과 우공의 눈치를 보고는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자네 또한 우리의 우환을 줄여주는 것이 어떤가?”

눈매를 좁히며 묻는 연수.

“뭐죠?”

“애초에 우리가 이리 전선을 세우고 세력을 이끌고 감락까지 온 이유가 뭐라 생각하는가?”

“...”

“뭐 따로 이야기하지 않아도 잘 알겠지. 그럼 자네가 직접 이 자리에서 약조해 주게. 우리가 진상을 파악하고 결심을 하기 전까지 자네를 비롯한 사황성은 일체 우리에게 칼을 들이밀지 않겠다고.”

“뭐 좋습니다. 그럼 얼마나 시간을 주면 되는 겁니까?”

“한 달이면 되지 않겠나? 그 기간에 우리는 소림을 비롯한 각 명문정파와 이 이야기를 해 보지.”

“한가지 당부는 드려야겠네요. 저는 배신당하는 걸 싫어해요.”

한기를 내뿜으며 말하는 연수를 보고는 우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결론이 나오든 결과는 이야기해 주겠소. 그 전에 우리가 혈개문에 칼을 들이미는 일 또한 없을 것이라 장담하오.”

“문서를 작성하지 않았어도 이 협약은 서로가 어기지 않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연수의 말에 세 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감락을 벗어나는 연수는 혈개문으로 돌아오자마자 진벽가주를 찾아 사천의 정파 무인들을 만나서 한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그리되었다니 잘 되었군요.”

“뭐 얼마나 믿을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그리되었습니다. 이제 사황성으로 인편을 보내주십시오. 보름 후 강서에서 사패련을 공격할 것입니다.”

“성급하지 않습니까?”

“아니요. 망노와 배신자들이 너무 오래 살고 있어요. 이미 많이 늦었습니다.”

이야기하는 연수를 바라보는 진벽가주는 불안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여구 그 친구를 보내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예. 그리 해 주세요. 저는 사흘 후에 떠나겠습니다.”

진벽가주는 급조한 연수의 인피면구를 쓰고 연수의 행세를 하던 가여구를 불러 사황성으로 보냈다.

가여구가 덕창을 빠져나갈 무렵 신강의 대산에서는 암주와 교주의 신경전이 시작되고 있었다.

이제 이립을 갓 지난 것처럼 젊은 외모로 보이는 교주는 평범한 무복에 붉은 장포를 하나 걸치고 암주의 앞에 서 있었다.

반면 암주는 고급 비단으로 만든 화려한 금장 옷을 입고는 교주를 마주하고 있었다.

“요즘 이것저것 바쁘게 지내는 것 같더군?”

교주의 무심한 물음에 암주는 고개를 쳐들고 대답했다.

“교주님께서 무심하신 듯하니 저라도 바삐 움직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암주의 도발에도 교주는 무심한 눈길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천령관을 외인에게 개방한 것 또한 내가 무심하여 자네 마음대로 결정한 사항인가?”

천령관의 이야기가 나오자 암주의 눈썹이 씰룩였다.

“다 중원을 저희의 발밑에 두기 위한···.”

암주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교주의 기세가 일변했다.

교주에게만 전해진다는 천일공의 무서운 기세에 암주는 이를 악다물고는 월야공으로 맞섰다.

교주는 암주에게 한발 한발 다가서며 말했다.

“명교의 최후를 벌써 잊었는가?”

“큭! 그래서 제가 그런 일 따위 일어나지 않게···.”

-쩌적! 쩍!

교주의 기세가 강렬해지자 주변의 탁자와 벽기둥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교주가 암주의 앞에 섰을 때는 암주는 의지와 상관없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대는 그대의 지위를 착각하는 것 같군. 암주는 그런 일을 하는 자리가 아니야.”

“...”

온몸을 짓눌러 꿇어앉히는 교주의 기세에 입을 열 힘조차 낼 수 없는 암주였다.

“사람들이 같은 극마의 경지라며 손에 꼽아주니 그대의 생각에 오류가 생긴 것 같은데. 암주의 역할에 대해 잘 생각해 봐야 할 거야.”

말이 끝남과 동시에 교주의 기세가 씻은 듯 사라지자 암주는 숨을 몰아쉬며 멀어지는 교주의 등에 대고 외쳤다.

“사파를 발밑에 두는 무림맹을 우리의 발밑에 두려는 것이 뭐가 그리 잘못됐단 말입니까?”

멈칫 한 교주는 암주를 돌아보며 말했다.

“황궁을 우습게 보지 않는 게 좋아. 그따위 눈가림으로 그들을 속일 수 있었다면 명교는 망하지도 않았겠지.”

말을 마치고는 뒷짐을 지고 다시 걸음을 옮기는 교주.

그런 교주의 등을 바라보는 암주의 주먹에 힘이 들어가며 일어서려는데 허공에서 떨어지는 다섯 명의 인영.

“일어서지 않는 게 좋겠소.”

다섯 명 중 제일 앞선 자의 말에 암주의 표정이 굳었다.

“호법원? 미친것이냐? 나는···.”

“그대가 누구든 교주님께 불경한 짓을 하면 죽소.”

“감히 그림자 주제에···.”

-우드득! 쾅!

기세를 뿌리며 출수하려던 암주의 이마가 바닥에 처박혔다.

그의 양팔을 붙든 두 명의 인영과 그의 머리를 바닥에 처박아 넣은 한 명의 인영.

“암주. 그대야말로 신교의 그림자. 그대의 일은 양지에 없소. 내 당신을 위해 경고하지. 양지로 나오지 마시오. 그것은 오로지 교주님의 권한. 그 권위에 도전하지 마시오. 극마에 올라 몸이 근질근질하다면 언제든 우리 호법원에서 상대해 주겠소. 이 위대한 신교에 오직 당신만이 그 경지에 발을 들이고 있다는 어리석은 생각은 마시오. 모든 것은 교주님의 뜻. 그 높고 넓은 아량을 잊고 자신의 능력이라 착각하다가는···.”

말끝을 흐리는 인영의 말을 다 듣지 않아도 암주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당장에 자신의 팔과 머리를 누르고 있는 초절정의 고수들은 제외 하더라도 눈앞에서 자신을 움직일 수 없게 압박하고 있는 고수는 절대 자신의 밑이 아니었다.

‘호법원에 이런 고수가 있었다는 말인가?!’

말을 마친 호법원의 인영들이 사라지자 겨우 고개를 들고 주저앉은 암주 강효각이었다.

“암공!”

강효각의 부름에 허공에서 나타나는 인영.

“예.”

“너는 음희살을 움직이거라.”

“으, 음희살을 말입니까? 목표는···.”

걱정스럽게 목표를 묻는 인영에게 표독스러운 표정을 짓는 강효각은 이를 갈며 말했다.

“패신살성의 멱을 따오라 전해. 누가 뭐라 하던 중원 무림을 신교의 발아래에 놓고 말 테니.”

“예!”

일월신교 내에서 음희살이라 불리는 음공의 고수이자 여성고수인 강연비.

음살대 백 명의 대주인 그녀와 음살대가 나서면 설령 입신경의 고수라도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이 일월신교 내에서의 판단이었다.

물론 그런 음살대를 교주의 허락 없이 움직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암주 강효각은 그쯤은 무마시킬 수 있는 자리에 있었다.

불과 방금 전 치욕스러운 경고를 받았지만, 이 정도로 멈출 생각이었다면 애초에 시작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십 년 가까운 세월을 투자하여 겨우 무림맹의 맹주를 발아래에 두었다. 이제 조금만 더 간다면 자신의 오랜 계획이 완성될 것인데 겨우 말 몇 마디의 경고에 두려워 접을 수는 없었다.

‘그 녀석만 죽여버리면 중원 무림은 분명 무림맹의 차지가 되겠지.’

그런 무림맹을 제 뜻대로 할 수 있다면 신교의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중원을 제패하는 것과 똑같은 결과라고 생각하는 강효각 이었다.

강서의 태화현에 들어온 연수는 허름한 객잔에서 두 눈을 감고 태화현을 향해 기감을 펼치고 있었다.

‘올 때가 되었는데.’

태화현은 사패련이 자리를 잡은 곳으로 어마어마한 규모의 장원이 들어선 곳이었다.

사패련의 장원에 기거하는 무인들만 어림잡아 칠천이 넘는다 하니 그 규모가 이미 전 사황성을 뛰어넘었다고 할 수 있었다.

게다가 태화현 곳곳에는 사패련에 속한 많은 문파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 태화현으로 익숙한 기운 들이 들어오자 감고 있던 연수의 두 눈이 번쩍 띄어졌다.

현으로 들어서면서부터 눈길을 잡아끄는 천 명의 무인들.

그 맨 앞에 서 있는 나이 많은 두 무인은 결연한 눈으로 태화현을 거침없이 통과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앞으로 연수의 신형이 나타났다.

“적영대장!”

“진정 적영대장 맞나?!”

철목가주 철가군과 화령가주 주염철의 물기 어린 목소리에 연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리 다시 만나는 날이 올 줄이야···.”

“다시 보자마자 피를 봐야 하는군.”

“그간 힘든 시간을 보냈다 들었습니다. 이제는 빼앗긴 명예와 자존심을 다시 찾을 때입니다.”

투기를 뿜어내며 고개를 끄덕이는 두 무인.

연수는 내력을 담아 외쳤다.

“오늘의 이 싸움은 돌아가신 패천후 성주님의 혈채를 받아내는 싸움이다. 가자! 그분을 부정하는 자들은 단 한 놈도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우와아아아아!

일천 명의 무인들이 투기를 끌어올리며 소리를 질러대자 주변의 백성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가 문을 걸어 잠갔다.

한 차례 소리를 지른 무인들이 사패련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미 천명의 무인들이 강서로 들어서면서부터 난리가 난 사패련이었다.

“적의 규모가 얼마라고?”

“천여명 이라 합니다.”

“진정 철목가와 화령가가 확실한가?”

“그렇다고 합니다!”

“겨우 제까짓 것들이! 모든 무사를 준비···.”

-콰콰쾅!!!

어마어마한 굉음에 명령을 내리던 사패련주의 미간이 좁혀졌다.

“가자!”

그의 명에 대전에서 회의 중이던 사패련의 수뇌들이 뒤따랐다.

사패련은 경종이 울리며 전각 여기저기에서 불길이 솟아 오르고 있었다.

철가군과 주염철은 철저히 부하들과 힘을 합치며 채 준비하지 못하고 있던 사패련의 무사들을 죽이고 있었다.

주염철의 극양의 기운이 담긴 검이 휘둘리자 사패련의 사방으로 비명이 울려 퍼졌고, 여러 전각에 불이 옮겨붙었다.

철가군의 주먹이 지나간 자리에는 기둥이 날아가며 무너지는 전각만이 철가군의 뒤로 남아 있었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뒤로 밀리는 사패련의 무사들이 결집을 할 때쯤 사패련의 무사들을 이끄는 수장들의 목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결집해 있는 사패련의 무사들의 사이에는 허무한 외침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사, 살수다! 지휘관들을 죽여대는 살수가 있다!

하지만 알고 있다 하여 입신경 고수의 암습을 피할 수 있는 방법 따위는 없었다.

결집해 있던 무사들은 지휘자를 모조리 잃고 나자 난리가 났다.

어떻게 해야 할지 분분한 의견이 쏟아졌고, 효율적으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심지어는 여러 갈래로 쪼개지는 집단마저 나타났다.

그리고 그들을 덮쳐오는 철목가와 화령가.

사패련주 귀형신살이 수뇌들을 이끌고 난리의 한복판에 모습을 드러내자 살육의 장을 벌이고 있던 철가군과 주염철이 그를 보며 이를 갈았다.

“망노!”

“오늘이 네 제삿날이다!”

“쯧쯧. 대세를 읽지 못하고 멍청한 선택을 하더니, 오늘 또한 미친 짓을 벌이는구나. 겨우 네놈들 따위로 이 사패련을 무너트릴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냐? 예나 지금이나 그 멍청한 머리는 도무지 구제해 줄 수가 없구나.”

“그러는 네 머리도 그리 좋지 않은 것 같은데.”

오싹!

익숙한 목소리였다.

또 익숙한 방식이었다.

이리 뒤에서 갑작스레 놀래키는 방식은 패천후가 살아생전 자주 써먹던 방법이었다.

또한, 이 목소리는 절대 다시 만나고 싶지 않던, 괴물의 목소리였다.

천천히 돌아가는 망노의 목.

그의 시야에 연수가 들어왔다. 그의 주위 삼 장 안에 있는 고수들의 목이 떨어지는 광경 또한 같이 들어왔다.

“너, 너···.”

“나 뭐?”

“네놈이 있기에 저놈들이!”

“그럼 정말 저 양반들이 머리에 화살 맞아서 사패련을 쳤을까?”

“이곳에는 자그마치 칠천의···.”

“오합지졸들이 있지. 너희 배신자들의 모가지를 다 따도 저들이 과연 사패련을 위해 목숨을 버릴지 지켜보자고.”

순간 사라지는 연수와 귀형신살의 신형.

그와 동시에 들이닥치는 철목가와 혈령가.

피를 뒤집어쓴 채 미소짓고 있는 철가군과 주염철의 얼굴을 본 사패련의 수뇌부들은 뒤로 슬금슬금 물러서며 외쳤다.

“저, 저들을 막아라!”

“비상신호를 보내! 모든 련의 무사들을 결집시켜야 한다!”

아수라장 같은 장내에서는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향연이 이어졌다.

특히나 그간 수모를 참으며 오욕의 세월을 보냈던 철가군과 주염철은 초절정 고수의 무위를 확실히 보여주며 주변을 휩쓸었다.

사패련의 최고수라고 해봤자 초절정의 귀형신살을 뺀다면 두 무인을 막을 자들은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한데 련주마저 목숨을 걸고 입신경의 고수와 싸우고 있으니 도무지 미친듯한 무위를 보이며 사패련의 무사들을 태워죽이고 찢어 죽이는 두 고수를 막을 수가 없었다.

-쩌억!

도무지 사람의 신체에서는 날 것 같지가 않은 소름 끼치는 소리에 사패련의 수뇌부들은 간담이 쪼그라드는 기분이었다.

달려드는 무인의 머리를 그 큰손으로 들어 올려 반대 손으로는 다리를 잡고 반으로 찢어버리는 철가군에 의해 들려오는 사람 찢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사패련 무사들의 움직임은 눈에 띄게 소극적으로 변해 갔다.

-쩌억!

“누, 누가 저 괴물을 막아야 하지 않겠소?”

어렵게 나온 이야기에 팔쇄가주 재반걸은 고개를 저었다.

“일단은 더 많은 무사를 결집시켜 저들을 지치게 만드는 게 더 상수요. 괜히 여기서 더 많은 간부가 죽었다가는 정말 사패련의 미래가···.”

“재반걸!!!”

멀리서 무사의 머리통을 한 손으로 으깨며 소리를 지르는 철가군의 모습에 팔쇄가주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분노로 가득한 철가군의 피를 뒤집어쓴 거대한 모습은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하여 이 자리를 피하고 싶다는 생각밖엔 들지 않는 팔쇄가주였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사패련의 부흥에 가장 큰 역할을 하던 자신이었다.

팔쇄가의 무인들이 모두 이 사패련에 속해 있는데, 혼자만 몸을 피할 수는 없었다.

“막아라! 저놈을 막아!”

악을 쓰는 재반걸의 앞으로 사패련의 무사들이 채워지며 철가군을 막아섰다.

그런 무사들을 하나하나 죽이며 팔쇄가주를 향해 한발 한발 다가오는 철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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