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3화(수정)
강호가 뒤집혔다. 제갈세가라는 명문 무가의 멸문이 정파 무림에 주는 충격은 너무나 컸다.
정파의 거목이자 무림맹의 새로운 군사로서 자리를 잡아가는 제갈휘는 믿을 수 없는 소식에 두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럴 리가 없다.”
“송구합니다.”
무림맹의 군사에게 본가가 혈겁을 당해 망했다는 소식을 전하는 무사는 더 뭐라 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럴 리가 없어···.”
제갈휘가 호북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무당의 검수들 백여 명이 이미 제갈세가의 장원에 도착하여 뒷수습하고 있었다.
장원의 커다란 연무장에 눕혀놓은 무수히 많은 시체를 바라본 제갈휘는 미친 듯이 달려가 시체를 덮어 놓은 거적을 일일이 들춰보았다.
자신의 할아버지이자 제갈세가의 정신적 지주였던 태상가주 제갈황엽의 잘린 목을 보았을 때 제갈휘는 그 자리에 허물어지듯 주저앉았다.
“할아버님!”
제갈휘는 자리에 주저앉아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
제갈황엽의 시체 옆으로 거적을 비집고 길게 뻗어 나온 윤기 있는 머리카락을 본 제갈휘의 눈이 부릅떠졌다.
떨리는 손으로 거적을 올리자 역시나 목이 잘린 제갈령의 창백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려, 령아···.”
목이 잘리며 눈을 부릅뜬 채 죽은 여동생의 머리를 안아 든 제갈휘는 매이는 목에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막냇동생이자 하나뿐인 여동생이었다. 그만큼 귀하고 소중하게 대했다.
무가의 자식임에도 동생에게만큼은 모질지 못했고, 항상 사랑으로 대했던 제갈휘의 심정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참담했다.
제갈세가가 그간 모아왔던 모든 재물과 보물이 사라진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수많은 이권에 대한 문서가 사라진 것 또한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제는 그 많은 이권을 지켜낼 힘마저 잃었으니.
지금 제갈휘의 머릿속에는 보이지 않는 세가의 희망인 혈족들의 생사로 가득하였다.
보이지 않는 세가의 핏줄들. 그 아이들을 찾아야만 했다.
이레 만에 혈개문으로 돌아온 연수.
혈개문의 정문을 열고 그가 들어서는 순간 연무장에 모여 이를 갈며 독기를 품고 수련 중이던 무사들의 움직임이 멈췄다.
새카맣게 굳은 피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집어쓴 몰골을 한 채 걸어들어오는 연수의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 몸서리가 쳐졌다.
멍하니 연수를 바라보는 무사들을 뚫고 달려오는 돌쇠.
“다녀오셨습니까?”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채로 걸어가는 연수.
그런 연수의 뒤를 조용히 따르는 돌쇠였다.
소개는 뒤채로 들어서는 연수의 모습을 보고는 말없이 달려가 그의 어깨를 두드려줬다.
“혈채는 모두 받아냈어?”
“아직. 사패련이 남았다.”
“..수고했다.”
소개의 뒤로 광기 어린 눈을 번들거리는 두 어린 무사를 보자 연수의 눈에 죄책감이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런 연수의 내심을 짐작했는지 설개와 호개가 다가왔다.
“천애 고아로 평생을 빌어먹고 살 팔자에 있던 어린 계집아이가···. 성대한 상여에 실려 과분한 상을 치렀으니, 덕분에 호사를 누리고 갔습니다.”
“...”
호개는 말이 없는 연수를 잠시 바라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태상문주님의 탓이 아닙니다. 그 아이의 명이 거기까지였습니다.”
“나를 원망해도 된다. 내가 멀쩡히 잘살고 있는 너희들을 끌어들였고, 그로 인해 화를 입었으니. 얼마든지 나를 탓하고 원망해도 내 할 말이 없다.”
“그런 것은 그 녀석도 원치 않을 겁니다.”
설개의 말에 끝내 연수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그랬다. 호설은 그런 아이였다. 어리지만 똑똑하고 착한 아이.
제 주제에 남을 먼저 생각할 줄 아는 아이였다.
“미안하다···. 그 아이의 묘는 어디에 있느냐?”
눈시울이 붉어지며 목이 메오는 두 무사를 대신해 돌쇠가 입을 열었다.
“가까운 도금산에 좋은 자리를 구해 그리로 묘를 잡았습니다.”
“안내해.”
당장 가볼 생각에 몸을 돌리는 연수의 어깨를 붙잡는 소개.
소개는 돌아보는 연수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그 꼴로 가면 그 아이가 슬퍼할 거야.”
그제야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는 연수.
들어 올리는 두 손에는 시커멓게 굳은 피 때가 잔뜩 끼어 있고, 원래의 색을 잃은 옷은 완전한 검붉은 혈색으로 변해 버렸다.
“물을 준비해 놓겠습니다.”
눈치 빠른 돌쇠는 목욕물을 준비하기 위해 서둘러 뛰어갔다.
잠시 눈시울을 붉히는 두 무사를 바라보던 연수는 눈물을 훔치며 돌쇠가 사라진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물을 데울 필요는 없어.”
말을 마친 연수가 찬물을 가득 넣은 목욕통에 옷을 벗고 몸을 담그자 곧 물이 끓어 오르며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목욕물에 머리끝까지 푹 담그는 연수.
깨끗하던 물은 금세 붉은색으로 변해 버렸다.
몸을 꺼내고 새로운 물을 기러 몸을 담그는 연수.
그런 연수의 옆으로 다가온 소개가 창밖에 시선을 두고 입을 열었다.
“괜찮냐?”
“괜찮다면 거짓말이겠지.”
“너무 자책하지 마라.”
“이 경지에 오르고 오만했던 대가를 죄 없는 어린 소녀가 대신 받았어.”
“...오만해도 되는 경지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연수.
“정말 그런 줄 알았다. 세상이 우스워 보였거든. 사패련? 그따위 오합지졸 언제든 박살을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무림맹? 맹주보다 윗줄이라고 확신했어. 그런데 겨우 살수 따위에게 어린아이 하나 지키지 못했다.”
소개는 연수를 보며 뭐라 말을 해 주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연수의 어깨를 두드려 주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돌쇠는 잠시 둘의 대화를 조용히 듣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저, 태상문주님.”
“태상문주는 무슨, 그냥 대장이라고 불러. 적영대장.”
“예. 적영대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해.”
“이번 습격으로 인해 죽은 이들이 제법 많습니다. 그들의 상은 모두 치러 주었고, 그들의 식솔 또한 혈개문에서 생계를 책임져 주기로 약조를 했습니다.”
“잘 했다. 그런 건 이제 소개와 이야기해.”
“예. 그런데 혹여 또 외출하실 계획이 있으십니까?”
“있지. 아직 혈채를 다 못 받았으니.”
연수의 말과 함께 절로 살심이 새어 나오자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뒤로 물러서는 돌쇠였다.
무인이라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인 돌쇠이다 보니 새어 나오는 연수의 살기에 노출되는 것만으로도 큰 부담이었다.
“아, 미안하다.”
“괘, 괜찮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외출을 하실 계획이신지···.”
“왜 그러는데?”
연수의 반문에 소개가 대신 대답했다.
“장원의 가솔들이 불안해한다. 솔직히 나도 불안하고. 네가 없을 때 또 다른 습격이 있으면···.”
“살야림은 지웠어.”
“살야림이 아닌 놈들이 습격하면 저희는 막아 낼 실질적인 힘이 없습니다.”
돌쇠의 말에 연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원한에 눈이 어두워져 생각지 못하고 있었지만, 자신의 적은 한둘이 아니었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는 자들이 아니었다.
하오문을 돌려놓으며 저들의 눈과 귀를 빼앗았다고, 생각했지만 그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곧 대책을 마련할 것이고, 자신의 부재는 혈개문에는 큰 위기가 될 것이었다.
게다가 이곳은 사천이었다.
아미와 청성 당문이 건재한 이곳에서 이리 약한 세로 버티는 것 자체가 부담이었다.
애초의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당문과 아마 청성을 돌며 그들을 봉문시킬 예정이었으나 결과적으로 살야림과 제갈세가를 멸문시켜 버리고 말았다.
잠시 고민 중인 연수의 머릿속에 문뜩 떠오르는 생각.
언젠가 음모론 같은 뉴스를 본 적이 있었다.
21세기의 생에서 본 중동의 어느 독재자의 이야기. 암살과 국내정치를 위해 가짜를 만들어 진짜인 양 행세시킨다는 그 이야기가 떠오르기 무섭게 연수의 눈이 떠졌다.
“적영대 애들 올 때 됐지?”
“아마 며칠 내로 올 거야.”
“걔들 오면 나로 변장 좀 시켜놔야겠다.”
“아! 그런 방법이 있었군요.”
돌쇠는 역시 이해가 빨랐다. 반면 소개는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무슨 생각이야?”
“가짜를 만들어 둘 생각이다. 밖에서는 감히 진위를 파악할 엄두 따위 내지 못하겠지.”
“그, 그런 방법이 통할까? 아니 애초에 너와 똑같이 변장하는 게 가능해?”
“가능하게 하면 되지.”
그날부터 연수는 검은 무복을 입고 등에 큰 붉은 글씨로 살이라 적힌 장포를 입고 다녔다.
그 옷을 입고 하오문을 오갔고, 그 옷을 입고 덕창현 곳곳을 다녔다. 또 그 옷을 입고 호설의 묘를 다녀갔다.
강호에는 이미 제갈세가의 멸문에 대한 소문이 퍼졌으며 강호는 단연 패신살성에 대한 이야기로 뜨거웠다.
정파와 사패련은 그런 연수를 비난하기 바빴지만 많은 흑도 들과 사파인들 중에는 연수를 지지하는 세력 또한 점차 늘어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사흘이 지나자 반가운 얼굴이 혈개문의 정문을 넘었다.
큰 삿갓으로 얼굴을 가린 채 들어서는 네 명의 인영.
연수는 그들이 혈개문의 근처에 도착할 때부터 방에서 나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연수의 얼굴을 확인한 진벽가주는 달려와 연수의 두 손을 마주 잡고 반가움을 표했다.
“정말! 정말 살아있었군요!”
“예. 질긴 명이다 보니.”
“하늘이 사황성을 돕고 있나 봅니다!”
진벽가주의 뒤에서 눈시울을 붉히며 연수를 바라보는 세 명의 무인.
“도산, 도석, 여구. 모두 오랜만이구나.”
제일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눈물을 줄줄 흘리는 모도산을 중심으로 세 무인은 그 자리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적영대장님을 뵙니다!
많은 감정을 담고 있는 그 한마디의 외침에 수련 중이던 혈개문의 무사들은 손발을 멈추며 그들을 힐끔거렸다.
“일어나. 오랜만에 보았는데 뭘 그리 딱딱하게 굴고 그래? 일단 다 안으로 들어가자.”
앞장서며 일행을 방으로 데려가는 연수.
뒤채의 안방에 들어와 자리에 앉자 모도산을 비롯한 무인들이 자신을 향해 절을 한다는 것을 가까스로 말린 연수였다.
“하여튼 쓸데없는 짓들은. 그보다 도산. 제법 실력이 늘었구나.”
일류의 끝자락에서 고민하는 도산을 보니 마음이 뿌듯해지는 연수였다.
모도산은 쑥스러워 뒷머리를 긁으며 고개를 숙였다.
“대장님의 은혜 덕분입니다. 그리 큰 은혜를 받고도 아직 벽을 넘지는 못했습니다.”
“서두르지 마라. 천천히 한발씩. 무에 지름길이란 없다.”
그 누구보다 빠르게 성장한 연수의 입에서 나오기에는 턱없는 말이었지만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그 말에 토를 다는 사람은 없었다.
진벽가주에게 시선을 옮긴 연수의 입이 열렸다.
“그런데 어찌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성주님을 보좌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상황이 상황인지라 가만있을 수가 있어야 말이지요. 앞으로의 일도 논의할 겸 직접 왔습니다.”
“성에 중요한 분이 이리 다니시다 화라도 당하면 어쩌려고요?”
“패신살성을 만나는 것은 그만큼 지금의 성에는 중요한 일입니다.”
그 한마디만으로도 사황성이 처한 처지가 절감되는 연수였다.
“그리 상황이 좋지 않습니까?”
“예. 언제 사패련에 꼬리가 밟혀 망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나날이었습니다. 적영대장에 소문을 듣고도 확인하는 것조차 부담이 될 정도였으니까요.”
“...”
연수는 절로 표정이 어두워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적영대장이 왔으니 이제 반격의 시작이 되겠지요. 삼 년! 삼 년이면 저들의 세를 뛰어넘어···.”
“진벽가주님.”
말을 끊는 연수를 의문 가득한 눈길로 바라보는 진벽가주.
“저는 그리 시간을 끌 생각이 없습니다. 하루빨리 망노 그 늙은이의 모가지를 자를 생각입니다.”
“하, 하지만···.”
“철목가와 화령가가 지원해 준다면 하룻밤이면 충분합니다.”
지금의 사황성에게 철목가와 화령가는 전부라 할 만큼 큰 전력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두 명의 초절정 고수가 이끄는 두 가문의 지지가 아니었다면 애초에 지금의 사황성은 존재할 수조차 없었다.
“그 분들 또한 적영대장이 부른다면 흔쾌히 힘을 빌려주실 겁니다. 더구나 사패련을 치는 일이라면요. 하지만 저희는 그 뒤도 생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림맹이 걱정되십니까?”
“그 속이 시커먼 놈들에게 당해 지금의 이 꼴이 났는데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죠. 제가 모자라 전 성주님이 돌아가셨고, 성이 이 꼴이 났습니다. 이 쓸모없는 목숨을 백번 끊어 사죄한다 해도 모자랄 일입니다. 지금도 이 목숨을 이어가는 것에 대하여 회한이 많습니다.”
“그 무슨 말씀을 그리 하십니까?”
“아직도 그 날의 치욕만 생각하면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제갈신이! 그 개자식과 맹주에게 놀아난 것을 생각하면···. 그로 인해 사파는 둘로 쪼개졌고, 망노 같은 벼락 맞을 늙은이에게 전 성주님의 명예가 짓밟혔으니 이 죗값을 어찌 살아서 다 치르겠습니까?”
“자책이 과하십니다.”
연수의 위로에도 복합적인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진벽가주의 얼굴이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진벽가주가 감정을 추스르며 입을 열었다.
“사패련을 끝장낸다 해도, 무림맹에 뒤통수를 맞게 되면 자칫 사파가 자멸하는 꼴이 됩니다. 성의 부흥을 이끌고 무림맹에 반격하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연수는 잠시 두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은 이번 사건을 겪으며 뼈저리게 절감하고 있었다.
자신의 몸은 하나였고, 지켜야 하는 사람들은 점점 늘어만 나니 무엇하나 마음껏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스스로 얽매이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 연수였다.
생각을 끝내고 뜨여진 연수의 눈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저들에게 긴 시간을 주면 결국 저희만 불리해질 것입니다. 저는 결심한 대로 혈채를 받으러 가겠습니다. 수습과 보조는 진벽가주님이 해 주세요.”
“네?”
진벽가주는 자신의 귀가 의심스러웠다.
자신이 알고 있는 적영대장은 머리가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철벽가주와 혈령가주처럼 천상 무인으로 단순한 사람도 아니었고, 자신보다 더 영악하고 약아 전체를 보고 움직이는 지혜도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지금 억지를 쓰는 아이처럼 굴자 절로 답답해지는 진벽가주였다.
“현재의 정세를 유지해 봤자 세가 큰놈들만 공고해집니다. 하루라도 빨리 빈틈을 찌르고 벌려 적에게 혼란을 주어야죠. 그리고 지금은 상황 또한 나쁘지 않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무슨···? 제갈세가를 지운 것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물론 큰 성과이고 기뻐 미칠것 같은 일이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사천의 당문과 아미, 청성이 무림맹을 이탈했습니다.”
“저, 정말입니까?!”
눈을 부릅뜨며 엉덩이를 들썩이는 진벽가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