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9화
소개 일행이 연수를 찾아온 지 며칠이 지났다.
“이제 나는 가 봐야겠군. 자네가 멀쩡한 모습을 내 눈에만 담아 놓을 수가 있어야지. 지금도 좌불안석하고 있을
성주에게 빨리 보고를 해 줘야지.”
연수는 아쉬운 눈으로 강진후를 보았다.
“다른 연락수단은 없는 겁니까?”
강진후는 쓴웃음을 머금으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의 사황성은 그런 사치를 부릴 여유가 없어.”
한숨을 내쉰 연수가 강진후의 손에 들린 술병으로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술 좀 줄이고 계세요. 머지않아 맑은 정신으로 봐야 할 광경이 많을 겁니다.”
“크크크, 기대하고 있지.”
말을 마치기 무섭게 손에 들린 술병을 입에 가져다 대는 강진후에게 잠시 망설이던 소개가 입을 열었다.
“공 매에게는···. 사정을 잘 좀 설명해 주세요.”
“자네도 참 힘들게 사는구만.”
고개를 끄덕인 강진후는 배웅하는 일행을 뒤로하고 혈개문의 장원을 떠났다.
강진후가 떠나고 칠 일이 지났다.
명상을 끝내기 무섭게 들이닥친 호설과 놀아주고 있던 연수는 안채로 들어서는 도평의 기척을 느끼고는 고개를 저었다.
“칠 일이라···. 오래 버텼네.”
“응? 뭐가 오래 버텨?”
“아니야. 이제 호설이는 밖에 친구들이랑 놀아야겠다.”
“왜? 나는 아저씨랑 노는 게 더 재밌는데.”
“그래도, 친구들이랑도 놀아 줘야지. 호설이가 아저씨랑만 놀면 친구들이 서운하지.”
“걔들 이상해. 자꾸 호설이한테 거지라고 한단 말이야. 오빠들이 나는 거지 아니라고 했는데···.”
“그랬어? 이놈들 안 되겠네. 아저씨가 가서 혼내줄까?”
“아니야. 내가 가서 말해볼게.”
“우리 호설이 착하네?”
“히히 그럼 나 놀고 올게.”
밖으로 나가려 문을 열자 호설의 앞에 서 있던 도평이 연수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들어와.”
호설은 굳은 표정으로 들어서는 도평의 등을 잠시 바라보고는 안채의 밖으로 뛰어나갔다.
최근 혈개문 무사들의 가족들이 하나둘 장원으로 들어오며 장원의 아이들이 늘어가자 호설도 장원의 아이들과 어울리며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서서는 연수의 앞으로 앉는 도평.
연수는 짐짓 모르는 척 물었다.
“무슨 일이야?”
도평은 잠시 연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는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송구합니다. 무공을 가르치는 일은 제법 해 본 저이지만 저들을 가르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왜?”
“아시지 않습니까? 저들은 무공을 배워서는 안 될 사람들입니다.”
“무를 익히는 데 자격이 필요했던가?”
“저들은 자질을 떠나 이미 근골이 굳을 대로 굳었습니다. 그나마 화련파 출신의 옥화를 빼면 나머지 들은 도무지 제 능력으로는 가르칠 자신이 없습니다.”
“어떻게 좀 안 되겠냐?”
“예.”
단호한 경도평의 말에 연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조금 기다리면 적영대의 애들이 몇 올 텐데···. 걔들한테 맡겨봐.”
“...”
“어떻게 이류까지만 이라도···.”
“...”
“그래도 혈개문의 무사들인데. 사람 구실은 하게 해 놔야지.”
“다른 무공을 가르쳐도 된다면 어떻게 방법이 있을 것도 같긴 합니다만···.”
“권법 하나 제대로 못 익히는 놈들인데 무공을 바꾼다고 뭐가 나아질까?”
“비도문의 무공이라면 어찌 밥값은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 그게 있었구나. 그럼 가르쳐 봐.”
“괜찮을까요? 그 무공은···.”
“비도문 지운지가 언젠데. 쓸만한 게 있으면 따지지 말고 다 가르쳐.”
“예.”
말을 마친 도평은 잠시 연수를 바라보고는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밖으로 나갔다.
‘미안하다.’
연수는 고개를 저으며 잠시 도평이 나간 문을 바라보고는 눈을 감았다.
그렇게 칠 일이 더 지났다.
점차 자리를 잡아가는 혈개문은 사천의 여섯 개의 현에서 열다섯 개의 흑도를 더 받아들였고, 점차 사천을 잠식해 나가기 시작했다.
비록 흑도를 산하로 받아들이는 것뿐이지만 이런 일을 사천의 정파들이 모를 일이 없었다.
“대체 언제까지 저 빌어먹을 놈이 하는 짓을 두고 봐야만 하는 것인가?!”
탁자를 내려치며 말하는 건장한 노인은 현 당문의 가주이자 얼마 전 초절정의 경지에 오르며 새로운 초절정 고수가 된 일견만독 당일수 였다.
무림맹에서 나온 군사의 사자는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당일수를 비롯한 아미파의 장문인 진여덕과 청성파의 장문인 우공이 당일수보다 더 사나운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딱히 뭐라 나무라는 말을 하지는 않고 있었지만 사납기로 유명한 사천인들 특유의 기세는 군사의 사자이자 제갈세가의 방계출신인 자신이 감당할 만한 것이 못되었다.
“기세는 좀 거둬 주시지요. 후배들이 숨을 쉬기가 답답합니다. 부디 아량을 좀 베풀어 주십시오.”
멀쩡한 얼굴로 부드럽게 말하는 제갈휘가 아니었다면 정말이지 금방이라도 질식할 것만 같은 제갈수곡이었다.
제갈휘의 말에 그나마 사나운 장내의 기세가 가라앉자 겨우 얼굴에 화색이 도는 제갈수곡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이 사천에 저런 무도한 마교의 주구가 대놓고 터를 잡았어요. 그런데 대체 무림맹은 무얼 하는 겁니까? 맹주는! 대체 뭐 하고 있느냐 그 말이에요!”
직설적인 진여덕의 말에 제갈휘는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진 사태님의 말씀 무슨 말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맹주님 역시 사천을 예의주시하고 있으니 너무 심려치 마시지요.”
제갈휘의 말에 우공의 눈매가 좁아졌다. 평소 그 성정이 유하기로 유명했던 그였다.
“맹주는 우리 사천을 한대하는 게 분명하군요. 다른 이도 아니고 패신살성이라는 입신경의 고수요. 맹주가 직접 마교의 주구라 낙인찍은 그가 버젓이 사천 땅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았는데 말입니다. 예의주시라니? 지금 맹주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게 맞습니까?”
제갈휘의 표정이 조금씩 굳어갔다.
사실 자신부터가 이해가 안 되는 맹주의 행동이었거늘 그런 자신이 이들을 설득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그가! 사천이 아니라 호북에 자리를 잡았어도 그리 태평하게 말할 텐가?”
“무림맹은 현 상황을 모두 제어하고 있습니다. 부디 맹과 맹주님을 믿어 주십시오.”
얼굴이 붉어지다 못해 검어지는 당일수는 눈을 부라리며 제갈휘를 노려 보았다.
“만에 하나 우리가 당하면 사천은 저들의 땅이 될 것이야. 그리된다면 맹에서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인가? 자네라면 잘 알고 있을 텐데?”
제갈휘는 짙은 미소를 띠며 마치 아이를 달래듯 말했다.
“비약이 심하십니다. 무림맹과 사패련의 연합은 그 어느 때의 정사 연합보다 튼튼합니다. 겨우 고수 한 명이 사천에 자리를 잡았을 뿐입니다. 혈개문이라는 웃기지도 않는 문파 하나 세우고 근처 흑도 몇을 데리고 개파식을 했다 하는데, 애들 장난 같은 세력 아닙니까?”
“그 고수가 입신경이야!”
“맹주님 또한 입신경입니다.”
“그런 맹주가···. 지금 어디서 무얼 하는지 얼굴 한번 비취지 않고 자네 같은 애송이를 보내서 장난질을 치고 있으니 하는 말 아닌가!”
그간 유지되어오던 제갈휘의 미소가 싹 사라졌다.
“말씀이 심하십니다. 맹주님은 당 가주님의 부하가 아닙니다. 그분이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시던 당 가주님과 두 장문인에게 그분을 오라 가라 할 권한은 없으실 텐데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세 무인에게서 강력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참지 못한 진여덕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며 열렸다.
“지금 그 말. 절대 잊지 않겠네. 맹의 생각은 자네를 통해 아주 잘 알게 되었어. 제갈세가가 맹주의 옆에서 정말 맹을 잘 이끌고 있군.”
시종일관 존대를 하던 진여덕의 입에서 하대가 나오자 제갈휘는 아차 싶었다.
다시금 입을 열려 했지만, 청성의 문주 우공의 말이 빨랐다.
“우리 청성은 무림맹을 탈퇴하겠소.”
갑작스러운 우공의 말에 제갈휘는 말문이 막혔다. 제갈휘 뿐만 아니라 진여덕과 당일수 역시 말문이 막히기는 매한가지였다.
“우 장문인 제 말이 심했다면 후배 무릎 꿇고 사죄드릴···.”
“우리 아미도 더는 맹에 울타리에 있을 필요가 없겠군.”
“!”
“당문도 더는 맹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군.”
일문백견이라 불리는 제갈휘는 한순간의 말실수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온 것에 대해 이를 악물고 후회했다.
“오늘의 일은 내 잊지 않으마. 일문백견. 네 아비에게는 내 마음을 돌리려 사천을 찾을 필요가 없다 전해라.”
말을 마치기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서서는 밖으로 나가는 세 무인을 제갈휘는 감히 잡을 수가 없었다.
팔 파 일방 중 두 파와 오대 세가 중 제일 세가라는 당가는 그렇게 무림맹에서 이탈했다.
사천의 정파인들이 무림맹을 이탈하는 결정을 하고 있을 때쯤
경도평은 전에 주문해 놓았던 낫이 달린 사슬을 연무장 앞에 쏟아놓고는 앞에 무인들과 씨름을 하고 있었고, 연수는 높고 맑은 하늘을 보며 욕을 하고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 새끼들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사라지는 연수의 신형.
“컥!”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가슴에 혈화가 피어오르며 쓰러지는 흑개파 출신의 어린 무사.
“모두 뭉쳐서 엎드려!!!”
말을 마치기 무섭게 뒤채의 허공 곳곳에서 쏟아져 내리는 인영들.
온통 시커먼 무복과 복면을 뒤집어쓴 살수들은 철저히 연수를 무시한 채 흑개파 출신의 어린 무사들을 노렸다.
-스거걱!
한 장이 훌쩍 넘는 강기가 연수의 단검에서 뽑혀 나오며 허공을 가르는 순간에도 엎드려 있던 두 무사의 등에 살수들의 검이 박혀 들었다.
막 두 무사의 어린 생을 끝낸 살수 둘을 포함한 여섯 명의 살수들이 허리가 반 토막 나며 쓰러졌지만, 여전히 남은 살수들은 한데 모여있는 어린 무사들에게로 달려들고 있었다.
-스스슷.
하지만 더는 연수를 피해 무사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살수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난리에 바닥에 엎드려 벌벌 떨고 있던 어린 무사하나가 주위가 잠잠해지자 고개를 빼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살수들의 피를 뒤집어쓴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동료들과 목 없이 서 있는 시체들이 눈에 들어왔다.
점점 기울며 허물어져 가는 수십 구의 목을 잃은 시체들.
하지만 아무리 고개를 돌려 보아도 연수는 보이지 않았다.
소개와 경도평은 무사들을 학살하며 철저히 자신들을 무시하는 살수들에게 이를 갈며 살수들을 죽이고 있었다.
-퍼석!
소개의 취룡장에 머리가 부서지며 뇌수를 뿌리고 쓰러지는 살수.
소개는 쓰러지는 시체에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다른 살수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도평 역시 막 두 명의 살수 허리를 반으로 잘라 버리며 혀를 찼다.
“젠장!”
욕설이 절로 나왔다.
연수가 맡긴 변변치 않은 부하들이었다. 그들을 가르치길 포기할 정도로 자질과 머리가 나쁜 부하들이었지만 그래도 부하였다.
오른팔만 있었어도 이리 큰 희생을 치르지 않았을 것을 생각하니 더 화가 치밀어 올랐다.
막 도망가던 무사의 목으로 검을 박아넣으려는 살수를 향해 출수하는 도평.
하지만 한 박자 늦은 출수로 살수는 죽일지언정 저 부하를 살리기는 힘들 것 같았다.
이를 악물고 공력을 끌어올려 보지만 너무 늦은 듯했다.
-스걱.
소리가 먼저였다.
그 이후 천천히 옆으로 미끄러지며 떨어지는 살수의 목.
겨우 목숨을 구한 무사는 주변을 향해 빠르게 시선을 돌려 보았지만, 자신의 목숨을 구한 이의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다만 주위에서 자신들을 학살하듯 덤벼오던 무서운 살수들의 움직임이 점차 느려지며 하나둘 쓰러지기 시작했다.
-삐익! 삐익! 삐이이이익!
날카로운 피리 소리가 들려올 때는 연무장에 살아있는 살수는 없었다.
“괜찮으냐?”
도평은 옆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겨우 연수의 신형을 확인할 수 있었다.
원래도 괴물 같던 연수였다.
하지만 언젠가 닿을 수 있을 것 같던 그의 무위는 이제는 영원히 쫓지 못할 만큼 멀어져 있음을 절감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도평.
“죄송합니다.”
“네가 왜? 네가 살야림에 의뢰 넣었냐? 쉰 소리 그만하고 부상자들 수습하고 의원들 데려와서 최대한 살려놔.”
말을 끝내는데 소개가 뛰어오며 입을 열었다.
“연수야!”
“괜찮아?”
“나는 괜찮다만···.”
죽은 무사들을 향해 시선을 옮긴 소개의 뒷말이 흐려졌다.
“일단 수습 좀 부탁하자.”
“아직도 끝나지 않은 거냐?”
“이 미친놈들이 아무 생각도 없이 이런 짓을 할 리가 없어. 뭔가 노리는···.”
말을 하던 연수의 신형이 사라졌다.
소개는 코앞에서 사라져 버리는 연수를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산사람은 부상자들을 살펴라!
놀란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는 소개의 귀로 도평의 외침이 들려오자 겨우 정신을 차린 소개는 수습을 도왔다.
경공을 최대로 발휘하는 연수의 시야에 몰려든 사람들이 들어왔다.
‘제발!’
천천히 멈춰지는 발걸음.
겨우 숨을 들이마시며 진정한 연수가 사람들을 밀치며 안을 확인하는 순간 주위에 몰려있던 사람들이 기겁하며 도망가기 시작했다.
당과를 가슴에 고이 끌어안고 쓰러져 피를 흘리고 있는 계집아이를 보는 순간 연수의 이성이 마비되며 화기가 온몸을 세차게 휘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