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8화
한참을 입이 떡 벌어져 있던 강진후의 입이 겨우 움직였다.
“..자네, 지금 대체 얼마나 많은 목숨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줄 알고 있나? 현 사패련의 인원만 만 명이 넘어가고 있어.”
“여기서 확실히 말하겠습니다. 성주님의 무덤 앞에 세상을 두 쪽 내더라도 그 혈채를 모조리 받아내겠다 맹세했습니다. 맹주의 모가지와 망노의 모가지. 그리고 성주님 제자들의 모가지 모조리 잘라 놓을 겁니다. 그 과정에서 저와 성에 검을 들이대는 자들이 있다면 모조리 그 숨통 끊어 놓을 겁니다. 만 명이든 십만 명이든 조금도 신경 쓰지 않습니다.”
“허···. 강호에 피바람이 불 텐데.”
“강호의 은원이란 게 그런 걸 신경 썼던가요? 애초에 정사대전도 휴전도 연합도 모두 정파의 주도 아래 벌어진 일. 그 책임을 묻는 것에 다른 걸 신경 쓸 생각은 먼지만큼도 없습니다.”
“저는 대장님의 생각을 전적으로 지지합니다.”
허전한 어깨를 만지며 말하는 도평의 얼굴에는 싸늘한 그의 감정이 그대로 나타나 있었다.
“나 또한 지지한다. 애초에 이 은원의 고리를 만든 건 정파야. 그 원한을 갚는데 다른 이유를 들어 주저할 필요는 없지.”
“하하, 나만 착한 놈인가? 그래. 이런 이야기라면 아마 성주도 쌍수를 들고 환영하겠지. 피바람 한번 일으켜 보지.”
씩 웃으며 세 무인을 바라보는 연수.
연수와 눈을 맞추는 세 무인 역시 같은 표정이었다.
날이 밝자 일찍부터 안채를 찾은 돌쇠는 안채의 기색을 살피며 앞마당을 서성였다.
“왔으면 들어오지 뭐해?”
안방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돌쇠는 어색하게 웃으며 안방으로 들어섰다.
“일어나셨습니까?”
“아침 댓바람부터 무슨 일이야? 새벽부터 시체들 치운다고 피곤했을 텐데?”
“시체는 모두 치워 놓았습니다. 뒷산에서 흙을 퍼다가 피로 물든 땅도 모두 덮어 놓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그거 보고하자고 게으른 네놈이 이리 일찍 찾아오진 않았을 테고. 뭔데?”
“그분들 말입니다. 혹 사황성에서 나오신 분들인가 궁금해서요.”
솔직하게 물어오는 돌쇠를 보며 피식 웃은 연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역시! 그렇다면 혹 저희 혈개문이 본격적으로 사황성으로 편입되는 겁니까?”
“아직은. 너는 계획대로 전 사천의 흑도를 통합할 생각만 해. 사패련을 무너트리는 날, 혈개문을 사황성의 새로운 가신 가문으로 만들 생각이니.”
“예. 근데 그분들은?”
“건넌방에 쉬고 있다.”
“어떤 분들입니까?”
“앞으로 네가 나 대신 문주로 모셔야 할 혈개, 사패일성 그리고 경도평이라고 적영대의 대주.”
“혈개! 게다가 사패일성이라면···. 흡성신공의 고수가 아닙니까?”
“잘 아네.”
“저, 정말 사천을···.”
“그래.”
“저희가 정말 당문과 아미 청성을 쫓아낼 수 있을까요?”
“쫓아내지 못하더라도 봉문시킬 수는 있겠지. 한 이십 년 봉문시켜 놓으면 지들이 어쩌려고?”
“무림맹과 정파가 가만 안 있을 텐데요?”
“부지런히 준비하고 있어. 강호에 피바람이 불 테니.”
입신경의 고수이자 사파 제일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의 무게가 느껴지자 돌쇠는 절로 허리가 굽어졌다.
침을 꿀꺽 삼키며 대답하는 돌쇠.
“예.”
“뭐가 그리 진지해?”
“제가 눈치 하나로 살아온 인생입니다. 상황 파악은 빠릅니다.”
“그런 놈이 왜 그렇게 빈둥거리질 못해 안달인 건데?”
“흑도 생활을 끝내고 나니 뭔가 허전해서요. 그간 뭘 그리 잘 살겠다고 아득바득 살았나 돌아보니 허무하기도 하고요.”
“무림인의 생활도 그리 녹록하진 않을 텐데?”
“글쎄요. 아직 잘 실감도 나질 않고, 주위 사람들은 모두 무공에 눈이 멀어 종일 수련하고 있는데 그것도 별로 내키질 않으니 그저 하루하루 시간 보내는 게 낙입니다.”
“천성이 한량인 놈이···. 쯧쯧. 정오쯤 장원의 무사들 전부 집합시켜놔. 앞으로 문주가 될 놈이 왔는데 인사는 시켜둬야지.”
“예.”
돌쇠가 돌아가자 조용히 눈을 감고는 명상에 잠기는 연수.
최근의 수련 대부분을 명상으로 하는 연수였다.
그간 거의 쉰 적이 없던 신체 훈련마저 최소한으로 줄이고 명상에 애를 쓰는 중이었다.
‘아직 상당한 기운이 몸 안에 쌓여 있는데···. 도무지 움직이지를 않는구나.’
중단전에 자리를 잡은 기운은 도무지 요지부동. 한치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처음에는 화·수·목 세 기운을 이용해 어떻게든 중단전의 기운을 끌어내려 보려 애를 썼지만 어떤 짓을 해도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하여 전극공합이 자신의 기운이 되던 순간들을 떠올려 보니 각 기운의 단초가 존재했다는 데에 생각이 닿았다.
급박하고 무아지경에서 벌어졌던 일이라 조금은 흐렸지만 그때를 떠올리려 노력해 보니 점차 기억 속 진한 안개가 걷히며 그때의 흐름이 떠올랐다.
백회에 뭉쳐있던 천살성의 살기에 반응하여 화기가 된 기운과 그에 반응하며 소림에서 얻었던 스무 글자의 법공이 수기가 되며 조화를 이루었고, 환골탈태하며 몸 안에 충만했던 생기에 반응하며 목의 기운 된 내기가 두 기운 사이의 균형을 이루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땅의 토기와 쇠의 금기.
그 이후로는 명상할 때마다 땅의 기운과 쇠의 기운을 느끼기 위해 애를 쓰며 기운의 조화와 오행신공의 원리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는 연수였다.
“하아. 어렵네.”
오묘한 오행신공은 확실히 보통의 내가 공부와는 전혀 다른 궤를 따르고 있어 더 어려웠다.
수·화·목·금·토 다섯 가지의 기의 성질들을 하나하나 몸 안에 쌓아 서로 다른 기운을 몸에 지니는 것은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이치였다.
내가 공부의 기본은 조화였고, 조화로운 기운이란 무릇 다섯 가지의 오행과 음양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정심 정도로 보았다.
그런데 하나하나의 성질을 가진 기운을 따로 몸 안에 쌓아 그 기운들을 새로이 사용한다는 생각은 오행신공이라는 전설의 신공이 아니라면 하기 어려운 발상이었다.
“목생화 수생목 수극화라 하더니···. 상생과 상극이라.”
명상을 마치며 그간의 오행신공에 대해 깨달은 것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 연수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해가 중천에 자리하자 슬슬 일어나 밖으로 나오는 소개 일행을 보며 입을 여는 연수.
“일단 문 내에 무사들에게 인사나 하시죠.”
강진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사람 많은 곳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
“장차 성주의 가신이 될 놈들이에요.”
전 성주가 살아있을 때도 공식적인 곳에는 얼굴을 비치지 않던 강진후였다.
“내가 맡을 놈들도 아닌데. 문주가 될 사람이나 얼굴을 비치면 되지.”
“거참. 도평. 너는 가야지.”
“예.”
역시나 두말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는 도평이었다.
두 사람을 데리고 수련장으로 쓰고 있는 장원의 정문 쪽 커다란 앞마당으로 가자 미리 모여서 정렬해 있는 혈개문의 무사들.
얼마 전까지 흑도였다고 믿기 힘들 정도로 잔뜩 군기가 들어 흐트러짐 없이 줄을 맞추고 미동도 하지 않고 있는 그들을 본 소개는 슬쩍 연수에게 전음을 보냈다.
-대체 얼마나 굴렸길래 단기간에 저리 군기를 잡을 수 있는 거야?
-글쎄, 딱히 군기를 잡고 한 것은 없는데?
전성을 마치며 시선을 돌려보자 뿌듯한 표정으로 연수를 바라보는 돌쇠.
돌쇠는 무사들의 맨 앞에 서서는 연수를 향해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아무래도 돌쇠가 무사들에게 잔뜩 험한 말을 해 두었던 것 같았다. 그렇지 않으면 초식하나도 가르친 대로 익히지 않는 이놈들이 절대 이렇게 군기가 바짝 들어 있기는 힘들었다.
무사들의 앞으로 선 연수의 입이 열렸다.
-알고 있는 자들도 있겠지만, 정식으로 대면하게 된 이 옆에 있는 사람은 소개라고 한다. 전 개방 출신이고, 현재 사황성의 핵심 고수로 혈개라는 별호는 한 번쯤 다들 들어보았을 것이다.
말을 마치자 전 흑개파의 아직은 소년티를 다 벗지 못한 무사들은 눈을 반짝이며 소개를 바라봤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슬쩍 시선을 돌리는 소개.
-앞으로 너희의 문주로 혈개문을 이끌 사람이고, 나와는 막역한 형제 같은 벗이니 잘 따라주길 바란다.
이미 돌쇠를 통해 전달을 받았던 무사들은 전혀 동요 없이 소개를 바라보고 있었다.
연수가 슬쩍 뒤로 물러서자 목을 다듬은 소개가 내기를 실어 목소리를 냈다.
-갑작스럽겠지만 앞으로 너희들의 문주로 혈개문을 이끌게 된 소개라고 한다. 무리를 이끌어 본 적은 없다. 또한, 이곳에는 나보다 나이가 많은 자도 적지 않은 걸 잘 안다. 하지만 맡게 된 이상 최선을 다해 혈개문과 사황성의 부흥을 위해 힘쓸 생각이다. 부족한 것이 많겠지만 모쪼록 나를 믿고 따라주길 바란다.
-충!
어디서 배운 것인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우렁차게 대답하는 무사들이었다.
연수는 그런 혈개문의 무사들을 보며 씩 미소를 짓고는 입을 열었다.
-자 그러면 평소와 같이 본연의 수련 일과를 시작하고, 너희들은 뒤채로 따라와.
“도평. 너는 저놈들 수련하는걸···. 보고 있어 앞으로 네게 지도를 맡길 생각이다.”
“예.”
고개를 숙이는 도평을 미안한 눈으로 잠시 바라본 연수는 이내 걸음을 옮겼다.흑개파 출신의 무사들을 이끌고 뒤채로 향하는 연수.
잠시 뒤채의 앞마당에 무사들을 대기 시켜 놓은 연수는 뒤채의 안방으로 들어와 소개와 마주 앉았다.
어느새 따라온 돌쇠는 싸구려 차를 내오고는 소개의 뒤로 앉았다.
“아, 저놈은···. 총관. 무공은···. 형편없지만, 눈치가 빠르고 일 처리가 좋아. 옆에 두고 쓰면 편할 거야.”
“반갑다. 앞으로 잘 부탁하지.”
“저야말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돌···. 석철이라 합니다.”
“석 총관. 앞으로 할 일이 많을 것 같은데 잘 해보지.”
“예.”
둘의 간단한 인사가 끝나자 연수의 입이 열렸다.
“일단 네가 맡아 줘야 할 아이들이 밖에 있는 애들이야. 이제나저제나 네가 오길 목 빠지게 기다리던 아이들이다.”
“나를?”
“그래. 다들 거지 출신으로 앞에 있던 두 놈을 중심으로 뭉친 신흥 흑도 출신의 아이들인데, 대장을 맡은 두 놈이 제법 똘똘해. 패기도 있고, 마치 우리 어린 시절을 보는 것 같더라. 개방에서 취구보를 훔쳐 배웠던데 아마 가르치는 맛이 쏠쏠할 거다.”
“내가 누구를 가르칠 경지나 되고? 네가 가르치는 게···.”
“제자를 둘 생각은 없어서 말이야. 차근히 가르쳐 두면 장차 혈개문을 떠받칠 기둥이 될 놈들이야.”
“글쎄···.”
“잘 좀 부탁하자. 앞으로 네 가문이 될 곳인데 네 손을 타는 게 맞아.”
“애초에 묻지도 않고 이러는 법이 어디 있어? 갑작스럽게 이런 조직을 만들어 놓고 맡으라니?”
“사천을 차지하기 위해 꼭 필요했어. 그리고 즉흥적인 생각이기는 했지만, 너도 공 누이와 정착할 필요가 있지 않겠어? 언제까지 성에서 뚜렷한 직급도 없이 그러고 있으려고?”
“하아. 공 매와 상의도 없이 덜컥 이래도 될지 모르겠다.”
“크큭, 팔불출 같은 놈.”
소개는 잠시 연수를 따라 웃다가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우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언제 찾아가 보려고? 하루라도 빨리 네 얼굴을 봐야 그녀의 병세도 좋아지지 않겠어?”
갑작스러운 도화의 이야기에 연수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지금 당장은 자리를 비울 수가 없어. 살야림 놈들도 걸리고, 지금 당장은 이놈들도 제 앞가림을 제대로 못 하니까. 일단 너와 도평이 이곳을 맡아주면 사천을 빼앗고, 사황성을 사천에 자리 잡게 할 예정이야.”
“미쳤어? 무림맹과 사패련에 앞뒤로 공격을 받게 될 거야!”
“걱정 마라. 사패련은 그 전에 망할 테니까.”
“어제도 이야기했지만 사패련은 만만치 않아.”
“글쎄, 대가리가 잘리고도 버틸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데 말이지.”
“혼자서 망노의 목을 벨 수 있을 거로 생각해? 아무리 입신경의 고수라도···.”
“알아. 하지만 나는 혼자가 아니지.”
“현재의 사황성 전력으로는···.”
“상관없어. 중요한 건 망노를 죽이는 것. 그놈 모가지만 잘라 놓으면 사패련의 오합지졸 따위 팔 가의 힘으로 짓누를 수 있어. 화령가주와 철목가주 그리고 내가 나서면 숫자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니야.”
입신경의 고수와 초절정 고수 두 명이 섞여 있는 무력대라면 확실히 상대의 수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소개는 선뜻 연수를 지지할 수 없었다.
“그보다는 좀 더 안전하게 시간을 들이더라도 명분 싸움을 하는 것이···.”
“명분 싸움은 망노의 모가지를 떨구고 난 다음이야. 어차피 그놈이 살아있는 한 그들의 결속을 흔들기는 쉽지 않을 거야. 하지만 그놈이 죽은 뒤에는 이야기가 다르겠지. 망노의 목을 치기 무섭게 사천에 사황성의 터를 잡고 당가와 청성 아미를 봉문 시킬 거야.”
“뭐?!”
소개는 눈을 부릅뜨며 입을 떡 벌렸다.
“말 그대로야.”
“듣기로는 아미 청성 당문은 이미 연합전선을 구축하고 있다던데···.”
“그래 봤자 본문이 털리면 끝이지. 우리와 달리 정파 놈들은 본진을 버리지 못해.”
“왜 이렇게 서두르는 거냐?”
연수는 인상을 굳히며 고개를 저었다.
“무림맹. 심상치가 않아. 감이지만 뭔가 시간을 끄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 내가 사천에 자리 잡았다고 하면 못해도 상당한 고수를 보내든 아니면 맹주 본인이 달려올 거로 생각했는데, 이 능구렁이 영감탱이가 도무지 움직이질 않아. 하지만 그럴 이유가 조금도 없단 말이지. 이건 아마 움직이질 않는 것이 아니라 움직일 수 없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는 말이지. 무슨 사정인지 모르겠다만 이건 기회야.”
“글쎄···. 만약 그러다 한발이라도 삐끗하면 사황성···. 망한다.”
“걱정 마. 게다가 사황성에는 청화패성도 있어.”
“그는! 그는 지금 정상이 아니야.”
“그 이야기도 들었다. 이끌던 무리에게 버림받고 충격이 컸다고?”
“그는 성주님과는 단 한 번밖에 만난 적이 없음에도 성주님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 자였어. 하지만 그의 주변인들은···.”
“가족이 몰살을 당했다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는 소개.
불과 몇 년 전 정사 대전이 한창일 때만 해도 사황성을 제외한 중원의 사파 인들에게 청화패성 수일지의 이름은 영웅 그 자체였다.
사황성의 대응이 늦어 고립되며 학살되다시피 몰리던 전 지역의 사파인들을 규합하고 힘을 모아 그들을 지켰던 자.
그런 그가 성주의 죽음 이후 성주를 지지하다가 일가족이 몰살을 당하고 축출되었다.
지하로 숨어든 이후 호인이자 사파의 영웅이었던 수일지는 많이 변했다. 특히나 자신을 축출하고 돌아선 청화련의 무사들이라면 그 시체조차 찢어발길 정도로 패도 적인 행동을 자주 보였는데, 그 성향이 점차 심해저 사황성 내에서도 그를 가까이하는 자들이 별로 없을 정도였다.
미소를 짓던 연수가 하얀 이를 훤히 드러내며 웃었다.
“좋잖아. 그를 앞세워 사패련을 와해시키겠어. 망노가 죽는 순간 성주를 부정하던 자들의 처리는 그에게 맡기는 것이 좋겠어.”
“진심이야?”
“어제 말했잖아. 세상이 두 쪽 나도 상관없다고. 소개야. 이번에는 어떤 일이 벌어지던 무당을 지울 거야.”
순간 소개의 눈에 살심이 휘몰아쳤다.
그간 마음속 깊은 곳에 묻어놓았던 원한이 연수의 한 마디에 고개를 들며 소개의 가슴속에 가득 채워졌다.
그런 소개를 보며 웃음을 지운 연수가 말했다.
“얼마나 죽던지 무슨 일이 벌어지든지 돌아보지 않을 거다. 뒤처지지 말고 부지런히 따라와.”
숙였던 고개를 드는 소개의 얼굴에 차가운 미소가 그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