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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놈에서 고수까지-147화 (147/202)

# 147화

덕창현에 들어선 소개의 일행은 정신이 없었다.

덕창현에 들어서기 무섭게 현의 한 가운데에서 살겁이 일어났다.

수십 명 살수의 떼죽음.

그것도 벌건 대낮에 마을의 대로에서 살수들이 죽어 나자빠지고 음습한 골목에서 수십 구의 조각난 시체가 나온 이번 살겁으로 인해 덕창현의 분위기는 매우 어수선했다.

-망조가 든겨. 얼마 전 연성루에서도 똑같은 일이 있었는데···.

-말도 말어. 내가 그때 현장에 있었는데 세상에 그리 많은 피는 본 적이 없어.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네요.”

소개의 말에 강진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확실한 것 같군.”

경도평은 시선을 돌리며 주변을 둘러보고는 입을 열었다.

“제가 듣기로는 그분께서 혈개문이라는 문파를 세우고는 하오문도 들을 찾았다고 합니다.”

“혈개문? 이거 너무 노골적이라서 의심이 안 가려야 안 갈 수가 없군.”

사패일성 강진후의 말에 소개의 인상이 굳었다.

“정말···. 그 녀석이 아닌 걸까요?”

역시나 굳은 표정의 경도평이 말을 받았다.

“글쎄요. 그분이라면 충분히 이런 일을 벌이고도 남으실 분인지라···. 다만, 이곳이 사천이라는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이러나저러나 별수 없군. 가 보는 수밖에.”

“직접 가는 것은···. 일단 제가 먼저 가 보고···.”

“만약 함정이라면 혼자서 빠져 나올 수 없을 거요.”

“맞아. 그리고, 성주의 명령은 분명했어. 적영대장의 이름을 더럽힌 자, 살려두지 말라 했으니.”

잠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본 세 무인의 얼굴에는 단호한 각오가 깃들었다.

아침 해가 뜨기 전 가장 어두운 새벽 혈개문의 장원을 넘는 수많은 인영.

그 기척을 느끼기 무섭게 잠들었던 연수의 눈이 떠지며 신형이 사라졌다.

‘스물아홉···. 아니 서른.’

-콰직. 스걱.

살벌한 소리와 함께 벽과 나무에 은신해 있던 두 인영의 머리가 뭉개지고 허리가 반으로 잘렸다.

비명 한번 지르지 못하고 죽은 무인들 앞에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연수의 신형.

그 둘이 죽기 무섭게 빈 허공에서 불꽃이 튀었다.

-까까깡!

“재미있네.”

씩 웃으며 말하는 연수의 뒤로 두 명의 복면인이 목을 잃고 허물어졌다.

그와 동시에 연수의 앞으로 나타나는 스물여섯 명의 복면인.

잠시 서로를 바라보며 대치하던 중에 제일 앞에 서 있는 복면인이 소지만을 펴며 손을 들어 보이자 사방으로 산개하며 흩어지는 복면인들.

“도망갈 수 있을까?”

그때부터 빈 허공에서 온몸이 잘리며 단명하는 시체들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혈개문의 장원 곳곳에서 나타나는 시체들의 양상은 너무나 다양했다. 깔끔하게 목이 떨어져 시체부터 대여섯 조각 토막 난 시체들까지.

복면인들 중 마지막으로 살아남아 장원의 담을 넘어가려던 복면인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뒤로 끌려가며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다가왔는지 자신의 목덜미를 잡고 끌어내리는 패신살성을 보고서야 그의 기척이 느껴졌다.

땅으로 처박히자마자 온몸이 마비되는 감각에 복면인은 눈을 부릅떴다.

“이제 아혈을 풀 거야. 저승으로 도망갈 생각은 하지 마. 내 허락이 없이는 불가능할 테니까.”

말이 끝남과 동시에 한 줄기 바람이 느껴진다 싶은 순간 입이 움직이자 망설임 없이 독단을 터트리는 복면인.

하지만 복면인의 희망과는 다르게 입 밖으로 뽑혀 나오는 독액.

“쯧쯧 안된다니까.”

-우득!

허벅지 위로 발을 올리고는 사뿐히 밟아 허벅지의 뼈를부터 트리는 연수였다.

하지만 연수의 표정은 심히 좋지 않았다.

대퇴골은 인간의 뼈 중 가장 두꺼운 뼈의 하나다. 그런 뼈가 부러지게 되면 인간은 참기 힘든 고통에 휩싸이는 게 당연한 일.

하지만 복면인은 신음하나 흘리지 않고 무심한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 살수 놈들이란. 하여간 인간 같지 않아.”

반대쪽 다리뼈를 똑같이 부러트렸지만 역시나 눈동자 한번 흔들리지 않는 복면인이였다.

“고문은 통하지 않는군. 이름이 뭐지?”

“...”

“귀머거리는 아닌 것 같은데?”

“...”

“내 말을 가서 전하겠다면 살려 주겠다. 한 명쯤은 살려놔야 너희 조직에 경고가 될 터이니.”

말없이 고개를 젓는 복면인.

“그럼 별수 없지.”

연수의 손이 흔들린다 싶은 순간 바닥을 구르는 복면인의 목.

“젠장. 기분 더럽네.”

서른 명의 목을 베었다. 하지만 그들은 죽는 순간까지도 그 어떤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살수라···. 재수 없는 놈들일세.’

잠시 목이 떨어진 시체를 바라보던 연수의 고개가 가로 기울여졌다.

“또 기어들어 와?”

그와 동시에 사라지는 연수의 신형.

소개의 일행은 혈개문 장원의 담을 넘자마자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담을 넘기 무섭게 곳곳에 보이는 야행복 차림의 시체들.

그 시체들로부터 새어 나온 피로 물든 붉은 땅들은 하루 중 가장 어두운 지금도 너무나 선명하게 보여왔다.

고수의 눈에 보이는 그 검붉은 핏물과 혈향은 사람의 본능적인 불쾌감을 한껏 자극했다.

-아무래도 상황이 심상치가···.

말을 채 끝마치지 못하고 뒤로 물러서며 긴 태도를 뽑는 경도평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경도평이 검을 뽑는 순간 강진후의 손에는 청망사가 씌워졌고, 소개의 손에도 흐릿한 기사가 감겼다.

“호, 혹시···. 소개냐?”

익숙한 기운. 그리고 익숙한 체격. 복면사이로 보이는 오른쪽 눈매는 너무나 그리운 눈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복면을 내리는 소개의 오른쪽 눈에 뜨거운 눈물이 맺혔다.

“여, 연수 맞냐? 정말 내 친구 연수 맞아?”

와락. 소개를 안는 연수.

서로의 등을 두드리며 눈물짓는 두 무인을 바라보는 강진후와 경도평의 감정 역시 두 무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잠시 어떤 말도 없이 소개를 안고 있던 연수가 소개를 떼어내며 그의 왼쪽 얼굴로 손을 가져갔다.

움푹 파인 검상.

그와 함께 영원히 닫혀버린 그의 왼쪽 눈.

“누구냐···. 어떤 놈이야?”

너무나 차가운 그 목소리에 소개는 멋쩍게 웃었다.

“망노의 검이 만만치 않더라. 여기 있는 적영대주와 강형이 아니었으면 저승 구경 갈뻔했다.”

그제야 경도평을 돌아보는데 그의 오른쪽 소매가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너···. 너···.”

우수로 긴 태도를 다루는 것이 일품인 경도평이었다. 그런 무인이 우수를 잃었다.

대뜸 무릎을 꿇으며 이마를 땅에 처박는 경도평.

“이제야 찾아와 죄송합니다. 대장님.”

“망노냐?”

“송구합니다.”

가슴으로 솟구치는 강력한 살심.

가슴속을 가득 채우는 살심에 반응하는 화기가 연수의 몸을 빠르게 휘돌자 자연히 그의 몸에서 뜨거운 열기가 발산되었다.

강진후는 그런 연수를 보며 입을 열었다.

“망노가 괜히 귀형신살이 아니더라. 도화 아가씨를 지키려고 성주는 왼쪽 다리를 잃었고, 혈개 이 친구는 눈을 그리고 저 친구는 팔을 잃었어. 민망스럽게도 나만 멀쩡했다.”

“도화는···. 무사합니까?”

“그런 희생을 치르고도 무사하지 못하면 억울하지. 그런데 문제가 조금 있다.”

“...”

문제라는 말에 선뜻 묻기 두려운 연수는 잠시 소개와 도평의 눈치를 살폈다.

그들의 표정이 심상치 않자 마음이 무거워지는 연수.

“얼마나 안 좋은 겁니까?”

“네가 죽었다는 소식에 처음에는 말을 잃었다. 그다음부터는 섬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 광증을···. 보인다는 말입니까?”

놀라고 당황하여 묻는 연수의 말에 강진후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행들이 무사하기만을 바랐고, 그들이 무사히 있다는 소문에 설마하니 별일이야 있을까 싶었던 연수였다.

그랬는데, 연인은 자신 때문에 광증이 생겼고, 친구는 눈을 잃었다. 부하는 검수의 목숨인 팔을 잃었고, 동료는 다리 병신이 되었다.

“망노! 그 새끼 모가지를 따로 가야겠습니다.”

이제는 연수와 하나가 되어 내기의 일부가 된 화기이자 살기가 휘돌며 전신 세맥으로 퍼져나가자 마치 불타오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연수의 신형이었다.

“경거망동해서는 안 된다. 지금의 사패련은 누가 뭐라 하건 대세다. 약세인 우리로서는 조금 더 기회를 봐야 해.”

“사황성의 상황은 아주 좋지 못한 겁니까?”

“여덟 가문의 힘은 온전하다만 그게 다다. 전 사파인이 돌아섰어.”

“그깟 놈들 어차피 힘을 보여주면 다시 돌아서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묻는 말이다만. 정말 입신경의 경지에 올라선 것이야?”

연수의 눈에 붉은 기운과 함께 주변으로 강기의 바람이 불어치자 강진후는 눈을 부릅뜨며 그 광경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삼 장안에서는 같은 입신경이 아니라면 누구든 찢어 죽일 수 있습니다.”

소개는 강기의 회오리가 사라지자 생각이 났다는 듯 품에서 천에 돌돌 말아놓은 물건을 꺼내 연수에게 건넸다.

“이게 뭐냐?”

“공 매가 꼭 가져가서 정말 네가 살아있거든 전해주라고 하더라.”

받아든 물건의 천을 풀어보는 연수.

“이걸 잊고 있었구나. 잘됐네. 맹주의 모가지는 꼭 이걸로 따면 되겠구나.”

소령도를 녹여 야장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초승달 모양의 단검 두 자루를 살피는 연수.

칠흑 같은 색과 얇은 검신. 가볍고도 균형을 잘 맞춰 놓아 쥐는 것만으로도 무인으로서 든든해지는 기분이었다.

연수의 앞에 있던 세 무인은 연수의 손에 익숙한 무기가 쥐어지는 것만으로도 일변하는 그의 무거운 기세를 느끼며 숨을 죽여 연수를 살폈다.

“후우, 대단하군.”

딱히 기세를 뿜어내지도 않았다. 그저 애병을 쥐고 조금 흥분했을 뿐인데도 적수공권일 때와는 전혀 다른 압박감이 느껴진다.

“맹주의 애병을 녹여 만든 무기로 그 모가지를 잘라 놓을 생각에 제가 조금 흥분했나 봅니다.”

말을 마침과 동시에 연수의 두 손에 쥐어졌던 단검이 사려졌다.

예전에는 손목을 빙글 돌리는 동작이 확연히 보였지만 이제는 그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워 언제 단검이 사라지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그 단검을 만들어 준 야장이 곡월이라 이름을 지었다고 전해달라 했어.”

“곡월? 곡월이라···. 좋네. 일단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들어가죠.”

연수를 따라 안채로 걸음을 옮기는 일행.

“그런데 무슨 난리인 거냐? 이 사체들은 다 뭐고?”

“살야림이라는 곳에서 제 목을 가져오라는 의뢰를 받아들였다네요.”

“살야림? 골치 아픈 놈들한테 걸렸군?”

“잘 아십니까?”

“예전 성주님이 말 한 적이 있지. 살야림과는 어떤 식으로든 연관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성주님이요? 그 양반이 누구한테 지고 들어갈 성격이 아닌데?”

“한번 엮이면 살야림이 망하든 목표가 죽든 해야 끝이 난다고 하더라.”

“이미 죽인 살수만 어제오늘 육십이에요. 계속 죽이다 보면 아무리 살수가 남아돈들 끝이 나겠죠.”

“살야림의 살수들은 독하기로 유명해.”

“알아요. 고문이 통하지 않는 놈은 처음 봤어요. 마치 감정도 통증도 없는 놈들 같더라고요.”

말을 마친 연수가 안채로 들어서자 안절부절못하며 안채의 앞마당을 서성이던 돌쇠가 뛰어왔다.

“문주님!”

“깼구나? 잘 되었다. 가서 시체들 좀 치워라. 날 밝기 전에.”

“예? 대체 무슨 일인지? 이분들은?”

“인사는 나중에 시켜 주마. 일단 시체부터 치워. 다해서 삼십 구다.”

“예.”

안채의 안방으로 들어와 자리에 앉은 소개는 연수를 보며 물었다.

“대체 무슨 장난이야? 혈개문이라니? 게다가 문도의 대부분이 흑도라며?”

“이렇게라도 해야 날 찾아올 것 같아서. 좋은 계획이었지? 이렇게 만났으니.”

“그런데 왜 하필 사천에 자리를 잡은 것이야?”

강진후의 말에 연수의 눈이 번들거리며 입매가 비틀렸다.

“사천을 빼앗을 겁니다.”

“뭐?!”

세 무인은 입을 떡 벌리며 연수를 바라봤다.

사천은커녕 중원에 발붙일 곳이 없어 지하로 숨어든 현 사황성이었다.

“사천은커녕 귀주에도 발붙일 곳이 없는 게 지금 우리의 처지다.”

자조적인 강진후의 말에 연수는 빙글 웃었다.

“사패련 따위 망노의 모가지만 비틀면 끝나는 일이죠.”

“돌아선 사파인들을 다 죽이겠다고?”

“정치적인 명분은 저희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사파인이야. 우리가 언제부터 명분에 움직였다고.”

“모든 사파인들이 돌아선 이유 또한 그 명분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성주님이 마교와 결탁했다는 되지도 않는 누명 때문에.”

“그럼?”

“사패련을 치고 공표하면 그만입니다. 망노와 맹주의 농간이라고.”

“누가 믿겠나?”

“믿건 말건 상관있습니까? 해명하면 끝입니다. 그래도 헛소리하며 적대하는 놈들이 있다면 다 죽여버리면 그만이죠.”

“...”

“저희는 사파인입니다. 언제부터 저희가 논쟁하고 상대를 설득했습니까? 힘으로 굴복시키면 그만입니다.”

“...”

강진후의 말을 그대로 받아 인용하는 연수.

강진후를 비롯한 일행은 연수의 말에 할 말을 잃고 그저 연수를 바라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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