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4화
이틀 후. 사천이 뒤집혔다.
혈개문이라는 사파의 개파선언은 실상 별 시답잖은 흑도 들의 장난 같은 일이나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 문주가 다름 아닌 최근 강호를 긴장시키는 패신살성이라는 고수라면 보통 일이 아니었다.
“패신살성?”
연수의 물음에 돌쇠는 뿌듯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예!”
“별 시답지 않은···.”
바뀐 자신의 별호에 별 감흥이 없는 연수였다.
한때는 암수일살이라 불렸고, 그 후에는 암수살성이라 부르더니 이번에는 다시 뒤에 두 글자를 바꿔 패신살성이라 부르니 애들 장난 같다고 생각하는 연수였다.
하지만 그 네 글자가 주는 압박감은 그리 시답지만은 않았다.
당장 당문과 아미파 청성파가 회동하며 연합전선을 꾸렸고, 무림맹의 세 개의 무력대가 덕창과 가까운 서창에 주둔했다.
하지만 함부로 덕창으로 들어오지는 못했다.
성대한 개파식 속에서 흑우방의 곳간을 탈탈 털어 돈을 뿌리다시피 한 혈개문은 주변 민초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길 수 있었다.
지난 삼 년간 얼마나 해 먹었는지 일개 흑도의 재산이라고는 믿기 힘든 재산을 거의 탕진하다시피 한 개파식이 끝나자 연수는 지루한 표정으로 안채에 앉아 하품하고 있었다.
‘이상하다. 지금쯤이면 찔러볼 만도 한데 이상하게 조용하네. 맹주가 가만있을 늙은이가 아닌데···.’
사실 사천에서 이만큼 떠들썩하게 난리를 피우면 당장에 당문을 비롯한 정파와 무림맹에서 바로 들어올 거라 예상했던 연수였다. 하지만 웬일인지 무림맹도 사천의 정파들도 잔뜩 긴장하고 웅크릴 뿐이었다.
조금만 다른 시각을 가지고 보면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자그마치 입신경의 고수가 나타났는데 함부로 덤벼들 만큼 간이 큰 문파는 없었다. 결국, 패신살성을 잡으려면 맹주가 나서야 했다. 하지만 맹주는 조용했다.
하니 정파에서 조용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신강의 모처.
“크크크. 그래서?”
“좀 도와주시오.”
“어떻게? 내가 나서서 그놈을 죽여 달라고?”
“가능합니까?”
“하하하, 뭐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괜찮겠어? 그랬다가는 세상이 자네와 우리의 관계를 알게 될 텐데?”
“큭···.”
“이제 벽을 허문 애송이야. 뭘 그리 겁을 내나? 패천후도 죽인 자네인데? 그런 애송이 하나 죽이는 게 뭐 그리 힘든 일이라고.”
“암주. 알다시피 내 경지는 그리 높지 않소. 오행신공으로 오른 경지 이것만···. 오행신공으로 막혀 전혀 진일보하지 못하고 있소.”
“그래? 그럼 어떻게 한다? 폐관이라도 시켜 줄까?”
“무슨 말이오?”
“우리 신교에는 교주님과 나만 사용할 수 있는 천령관이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에서 폐관하면 반드시 경지가 높아진다고 단언할 수 있네. 다만···.”
“다만 뭐요?”
“아무리 자네라도 외인을 함부로 들일 수는 없는지라···. 이걸 복용하겠다면 교주님께 부탁드려 보지.”
품에서 암주가 꺼낸 손가락 한 마디 만한 검은 물체는 암주의 손에서 천천히 꿈틀거렸다.
“고독!”
“아아, 놀라지 마. 그저 자네와 우리의 사이를 더 견고히 해줄 촉매 같은 거니까.”
고독. 일월신교에 전해지는 독충.
복용하게 되면 한 달에 한 번 해약을 복용하지 않으면 인간이 버티기 힘든 고통 속에 죽어간다는 악랄한 독이었다.
한때는 일월신교 내의 교주의 지위를 공고히 하는 데 쓰였다고 하는데 지금에 와서는 외부의 무인들을 조종하고 싶을 때 일월신교에서 이용하는 방법 중 제일 효율이 좋은 게 바로 고독이었다.
망설이는 맹주를 보며 암주 강효각은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아 걱정하지 말라니까. 우리 사이가 벌써 십 년이 다 돼가는데. 그간의 신뢰가 있지 않은가? 정 못 미덥다면 이렇게 하지 삼 년 치의 해독약을 미리 줌세. 그 후에는 오 년 치. 그 후에는 십 년 치. 어떤가?”
삼 년.
삼 년이면 당장 고독으로 인해 암주에게 끌려다닐 일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맹주의 머리를 스쳤다.
평소 같았으면 일언지하 거절할 이야기였다.
하지만 새로운 그것도 사파에서 등장한 입신경의 고수는 맹주를 다급하게 만들었다.
나타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맹이 뒤집혔고, 벌써 맹주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자신이 나서주기를 바라는 기대감이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없었다. 패천후와의 싸움에서 확신할 수 있었다. 자신은 입신경의 초입. 그것도 몇십 년의 세월 동안 조금도 발전하지 못했다.
그것이 마음을 다급하게 만들었다.
전 강호에서 한 손에 꼽을 만큼의 고수가 되었지만, 자신의 위치는 늘 불안했다. 항상 쫓기는 듯한 기분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남들은 자신을 절대자라며 우러러보았지만 언제 적들에게 이 위치를 빼앗길까 전전긍긍하며 살아왔던 지난 세월이었다.
하여 전극공합을 빼앗기고도 되찾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아도 정파의 초절정 고수들이 언제 벽을 깨고 자신의 자리를 노려오지 않을까 불안한 나날들이었다.
자신의 등에는 무당과 정파의 안위가 매어져 있었기에 절대 현 지위를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그런 평생을 안고 있던 짐은 결국 맹주에게 잘못된 판단을 강요했다.
암주의 손에서 고독을 받아 입으로 가져가는 맹주.
그런 맹주를 바라보는 암주의 미소가 짙어졌다.
개파선언을 하고는 혈개문을 만든 지, 칠 일이 지났다.
거의 매일 사파가 되었든 정파가 되었든 찾아오기를 바라며 기다렸지만 혈개문을 찾는 무인은 아무도 없었다.
“하아. 정말이지 세상사 생각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네.”
말을 마치며 일어서는 연수.
돌쇠는 깜짝 놀라며 걸음을 옮기는 연수를 따라왔다.
“어디 가십니까?”
“응. 하오문에 볼일이 있어.”
“따라가겠습니다.”
“됐다. 귀찮아. 그보다 너는 수련 안 하냐? 기껏 상승무공을 풀었더니.”
“저, 전 문주님을 지켜야···.”
“네 몸이나 지켜라.”
말을 마치며 사라져버리는 연수.
연성루의 앞에 갑자기 나타나는 연수의 신형.
연성루의 근처는 평소와 다르게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져 있었다.
주루의 앞으로 검붉은 흙들은 어디서 흙을 퍼다 메꿨는지 원래대로 돌아왔지만, 대낮임에도 장사하는 주루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조용했다.
그런 연성루를 올려다보고는 안으로 걸음을 옮기는 연수.
안으로 들어서자 수많은 무인의 기세가 일렁거리며 연수에게 쏘아졌다.
주루 안을 가득 채운 빼곡한 무인들. 층층이 가득 한 무인들의 숫자는 얼추 세어 보아도 삼백 명은 넘어 보였다.
잠시 연성루를 꽉 채운 무인들을 살펴보던 연수의 시선에 목희가 들어왔다.
“여어.”
손을 흔들며 미소지은 채 다가가는 연수.
목희는 너무나 편안하게 행동하는 연수를 보며 이를 악물고는 연수에게 고개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문주는? 그가 이 안에 있는 게 좋을 거야. 이 많은 무인 다 죽이고 싶지 않으면.”
“과연. 입신경의 고수다운 패기요.”
한 무리의 무인들이 좌우로 갈라지니 이제 겨우 이립 정도로 보이는 남자가 걸어 나오며 말했다.
“당신이 하오문의 문주?”
“그렇소.”
“오 반갑군. 잘 와 주었어.”
연수의 말에 사내의 눈썹이 씰룩였다.
“미, 믿는 거요?”
“그럼. 믿고말고. 사실 가짜여도 상관없어. 중요한 건 나와 하오문 문주의 소통이 중요한 거니까. 가짜여도 전권을 위임받아 왔을 테니.”
“하하하. 당신 정말 대단하군요. 전 강호를 상대로 호통을 칠만 하오.”
“일단 앉지?”
일 층의 가운데에 놓인 탁자에 앉는 연수.
연수와 같이 앉으며 문주는 투덜거렸다.
“이거 원, 누가 객이고 누가 주인인지···.”
“이야기가 잘 풀리면 다 한 식구가 될 텐데 무슨 상관일까.”
의미심장한 연수의 말에 문주의 인상에 잠시 굳었다.
노련하게도 금세 표정을 푼 문주가 연수의 말을 받았다.
“중원의 동도들은 큰 의미로 다 한 식구가 아니겠소?”
자신의 말을 슬쩍 받아넘기는 문주를 보며 빙글 미소짓는 연수.
문주가 자리에 앉기 무섭게 본론으로 들어갔다.
“문주에게 다시 묻지. 하오문은 어느 쪽이지?”
이미 목희에게 한 차례 언질을 받은 문주는 잠시 연수의 두 눈을 마주 보고는 입을 열었다.
“하오문은 사패련을 지원하고 있소.”
“그렇단 말이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사패련에 소속된 것이 아니라면 사황성에 붙어. 그렇다면 지난날 하오문과 사황성 간에 어떤 일이 있었건 모두 잊겠어.”
십만 하오문 문도의 주인인 도패건의 눈썹이 씰룩거렸다.
“당신에게 그럴 권한이 있소? 사황성과 그간 쌓은 은원이 적지 않소.”
“있다면? 붙겠어?”
“그 전에 사실대로 말해 줬으면 하는 것이 있소.”
“뭔데?”
“당신은 정말 마교와 상관이 없소?”
“마교는 커녕 신강 근처도 가본 적이 없어. 내 사부는 장수무투 주두보 뿐.”
도패건은 당당한 연수의 두 눈을 뚫어지게 주시했다.
연수는 그런 도패건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 주시하며 빙글 미소지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성주는 마교와 결탁한 것이 아니겠군요?”
“성주가 마교와 결탁했다면 과연 맹주 따위에게 당했을까? 성주가 마교와 결탁했다면 어째서 전쟁을 끝내고 정사 대회에 참가했을까?”
“...”
“그래도 정세와 정보를 다루는 니들이라면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텐데.”
“앞뒤가 모두 맞는 건 아니었지만, 세상사 모든 일이 딱 맞아 떨어지는 것은 없소. 하여 우리는 확인된 것만 믿소. 그리고 성주 제자들의 증언은 그 어떤 정보보다 믿을 수 있는 증거였소.”
“그 개자식들은 패륜의 죗값을 치르게 될 거야.”
“...귀형신살은 만만한 자가 아니오.”
“자네 어려 보이는데 이름이 뭐지?”
“도패건이라 하오. 그리고 내 동안이기는 하지만 서른여덟이나 먹었소.”
“그래? 많이 자셨네. 어이 도패건이. 잘 기억해둬. 사패련은 망한다. 귀형신살? 망노 따위 언제든 모가지를 비틀 수 있어. 지금의 내게 정사를 통틀어 대항할 수 있는 고수는 없다고 단언하지.”
“오만이오! 맹주가 입신경에 들어선 세월이 얼마라고 생각하는 거요!”
“맹주 따위 이미 지난 세대의 잔재일 뿐. 만약 그날 성주가 암습에만 당하지 않았다면 맹주가 과연 살아있을 수 있었을까? 이 경지에 올라서니 보이는 게 아주 많아.”
입신경에 오른 고수의 말이다. 허튼소리는 아닐 것이라는 생각에 도패건은 함부로 뭐라 단정할 수가 없었다.
“그 맹주가 암수를 썼다는 것 자체가···.”
“믿든 믿지 않든 상관없다. 나는 본 대로 말할 뿐이니.”
“하면 어째서 당장 사패련으로 가지 않는 거요? 어째서 나를 찾은 거고?”
“내가 이 경지에 올랐다고 해서 앞뒤 분간 못 하는 바보가 된 건 아니지. 사패련 따위 언제든 무너트릴 자신은 있다만 그 전에 사황성과 만나야 해. 맹주의 암수는 한번 겪었어. 당한 수에 또다시 당해줄 생각은 없어.”
한기를 내뿜으며 말하는 연수의 말에 도패건은 침을 꿀꺽 삼켰다.
분명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십만의 하오문 정점에서 살아온 세월이 적지 않은 도패건이었다.
사람의 거짓말은 생각보다 치밀하고 믿지 않고는 배길 수 없도록 하는 이들이 많았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었다. 신뢰할 수 있는가? 없는가?
도패건의 시선에 비친 패신살성 고연수라는 무인은 그런 점에서는 대단히 신뢰도가 높은 무인이었다.
한번 뱉은 말은 무슨 수를 쓰든 지키는 자.
재미있게도 그런 자가 무공도둑이었다.
‘무공도둑놈이 입신경의 고수라. 이거 참 어렵구만.’
그래서 더 믿음이 갔다. 마교의 주구라고 하기에는 그는 너무도 강했고, 사파에서의 활동이 너무도 뚜렷했다.
암수일살이라는 별호로 처음 알려진 것이 남궁세가의 소가주 남궁진수를 죽였을 때였고, 자신이 알기로도 그 당시 저 무인은 어렵게 위기를 넘겼다. 그 이후 그의 행적을 살펴보면 착실히 사파행을 통해 그 경지를 올려왔다.
다만 그 속도가 너무 빠른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마교의 주구라고 하기에는 그 세월이 짧지도 않았다.
과연 진실이 무엇일지 가만히 두 눈을 감고 고민하는 도패건을 연수는 방해하지 않았다.
사실 하오문이 어떤 선택을 하던 그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물론 자신의 편으로 선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하오문을 지우면 그만이었다.
패천후의 묘 앞에서 그 혈채를 모조리 받겠다 맹세했다.
세상을 두 쪽 내는 한이 있더라도 모든 원한을 갚을 각오를 세웠다.
그 각오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연수의 마음에 바로 서 있었다.
굳건한 연수의 각오 앞에서 십만의 하오문은 그리 큰 장애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