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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놈에서 고수까지-143화 (143/202)

# 143화

아직 흥분이 채 가라앉지 않았는지 현 사황성주 비영은 자리에 앉지 못하고 씩씩대며 숨을 몰아쉬었다.

“성주, 흥분을 좀 가라앉혀. 저 녀석 말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니잖아. 게다가 나 역시···. 이번에는 저 녀석의 편이야.”

“황룡 대주! 당신마저···.”

황룡 대주라 불리는 사패일성 강진후는 어색하게 웃으며 손에 들고 있는 술병을 입에 가져다 대었다.

“크하! 배신의 그 날 자네 덕에 이리 사황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건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인정하는 바야. 하지만 이리 숨어만 있다가는 훗날을 도모할 수가 없어. 어차피 언젠가 우리는 꼬리를 잡힐 테고, 그날이 오면 우리에게 승산은 없어. 잘 알고 있잖아? 이럴 때 그 녀석이 정말 입신경의 고수가 되어 나타난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이 이상하지도 않소? 딱 필요한 이때 그가 꿈같이 나타나는 현실이 의심스럽지도 않소?”

“공교로운 일이지. 하지만 우리는 확인해야만 해.”

“크으! 분명 함정이오! 함정이란 말이오. 그는···. 그는 성주님과 함께 명예롭게 죽었소. 이제 와 그의 명예를 짓밟는 저들의 함정에 동료를 사지로 내몰 수는 없소!”

가만히 듣고 있던 커다란 덩치에 근육이 우락부락한 노인의 입이 열렸다.

“성주님···. 하지만 만에 하나 십만에 하나 그가 진정 적영대장이라면···. 그는 저희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철목가주···.”

그때 앞으로 나서며 무릎을 꿇는 한 사내.

“성주님! 저를 보내주십시오. 잘못된다 한들 절대 입을 여는 일은 없을 겁니다. 저는! 저는 확인해야 합니다. 그분의 생사를 확인해야 할 의무가 제게는 있습니다.”

“적영대주···.”

사라진 연수의 뒤를 이어 적영대를 책임지게 된 경도평이었다.

그는 시신을 수습하기 전까지 대장의 자리를 맡을 수 없다며 적영대주라는 직책을 자처하여 적영대를 이끌고 있었는데, 사라진 그의 오른팔을 보는 사황성주 비영의 동공은 크게 흔들렸다.

신검합일의 경지에 오르고 언젠가 초절정의 경지에 올라 사황성을 떠받칠 고수였다. 그런 그가 목숨 같은 오른팔을 희생하며 지켜낸 목숨이 바로 자신의 목숨이었다. 그런 그가 가겠다고 자처하고 나서자 비영은 차마 그를 말릴 수가 없었다.

“대체···. 대체 왜···. 적영대주. 자네는 사황성에 없어서는 안될 사람이네. 아니! 자네뿐만이 아니야! 이 자리에 있는 고수들은 하나하나가 지금의 사황성을 떠받들고 있는 중요한 사람들! 그런데 어찌···.”

묵묵히 지켜보던 화령가주마저 성주의 앞으로 나섰다.

“성주님. 저희는 그에게 너무도 큰 빚을 졌습니다. 그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사황성은 존재하지 못했을 겁니다. 목숨으로 저희에게 시간을 벌어준 그에게 이렇게나마 빚을 갚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의 생사를 확인하고···. 만약 그의 명예로운 이름으로 장난질을 하고 있다면 그 죄를 무겁게 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아···. 화령가주.”

결국, 자리에 털썩 앉은 비영은 한숨과 함께 낮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앞으로 연수의 마지막 모습이 선하게 떠올랐다.

웃으며 자신을 보내던 연수.

자신에게 구차한 삶을 강요하며 명예로운 죽음을 선택한 무인.

“좋습니다. 혈개와 적영대주 그리고 황룡대주. 세 사람이 가주시오. 절대! 절대 죽지 마시오! 꼭 살아 돌아와야 한단 말입니다!”

소개와 강진후 경도평은 씩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충!

“그리고···. 명예로운 그 이름에 먹칠을 한 자는 절대 살려 놓아서는 안 됩니다.”

-충!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이는 세 무인.

비영은 그런 그들을 잠시 바라보다가 시선을 공숙에게 돌리며 입을 열었다.

“그분은···. 좀 어떠십니까?”

성주의 질문에 공숙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연수의 죽음 이후 말을 잃었던 도화였다. 그래도 최근 많이 좋아졌는지 예전처럼 발작을 일으키거나 환각을 보며 난리를 치는 경우가 줄었는데, 최근 암수살성의 소문이 돌며 증상이 악화하고 있었다.

최근에는 그 정도가 심해져 밖으로는 한 걸음도 나오지 못하는 도화였다.

“좋지 않아요···.”

“천괴의는 뭐라 합니까?”

“육체의 병이 아니기에 할 수 있는 도리가 없다 하였어요. 차라리 뇌가 병들었다면 손쓸 도리가 있겠지만 정신적인 문제인지라···.”

“하아.”

천장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뱉는 비영의 심경은 좋지 못했다.

다른 이도 아니고 그의 정인이었다.

그의 마지막 부탁은 저 여인을 망노에게서 지켜달라는 것이었다. 망노와 성주의 첫째 제자인 막여욱으로 부터 도화를 지키는 과정에서 자신의 목숨이 위태롭게 되었고, 경도평은 팔을 잃고 소개는 눈을 잃어야 했다. 그렇게 지켜낸 여인이 정신병에 걸리고 말았다.

“내가 저승에 가서 자네 볼 낯이 없네.”

조용히 읊조리는 비영.

그의 목소리를 듣는 장내의 무인들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연수는 자신이 머무는 안채 앞마당에 잔뜩 긴장하고 서 있는 사람들을 둘러 보았다.

여인 하나에 덩치가 산만 한 중년인 하나 그리고 아직 약관이 안되어 보이는 소년 둘.

“그러니까 이 여인이 화련파의 두목이고, 저 덩치가 백웅파. 이 애들이 흑개파 두목들이라고?”

황당한 표정으로 묻는 연수에게 깍듯이 대답하는 돌쇠.

“예. 맞습니다.”

“여인은···. 뭐 그렇다 치고, 애들이···. 두목이야?”

“이리 큰 아이가 어디 있소? 어리다고 얕보다가···.”

“죄, 죄송합니다. 이놈이 아직 뭘 몰라서.”

당당하게 연수에게 맞서던 아이를 말리며 고개를 조아리는 어린 거지.

“크크크 배짱 좋네. 하긴 네 말이 맞다. 아이라고 하기엔 다 컸지. 나도 너희 같은 거지 출신이다. 그런데 어쩌다가 흑도에 투신한 거야? 보통 무인의 꿈을 품으면 개방 아닌가?”

어린 거지들에게 다가가 묻는 연수를 잠시 올려다보던 어린 거지가 입을 열었다.

“정파에 들어 머릿수나 채워주는 꼬래비가 될 바에는 흑도 바닥에서 구르더라도 대가리가 되자고 생각했소.”

“하하, 이 친구가 말을 제대로 배우지 못해 존대법을 잘 모릅니다. 부디 이해를···.”

“괜찮아. 그 정도 패기도 없이 흑도에 투신하진 않았겠지. 그런데 너희한테 개방의 냄새가 나는 건 왜일까?”

연수의 말에 굽실대던 어린 거지의 눈매가 좁아졌다.

“어찌 아셨습니까?”

“친구 놈이 개방 승개 출신이야.”

“하아, 가진 재주 없이 어찌 흑도에서 살아남을까 싶어 제가 개방에 입방하여 무공을 몇 자락 배우고 도망 나왔습니다.”

“호오. 그래서 발재간은 제법 배웠구나.”

“예. 취구보를 배웠습니다.”

“그랬구만. 개방에서 알면 무사하지 못할 텐데?”

“안 들키면 그만입니다.”

눈을 빛내며 당당히 말하는 어린 거지는 언제 굽실거렸냐 싶을 정도로 당당한 눈으로 연수를 바라봤다.

“하하하, 맞아. 맞아. 안 들키면 그만이지. 킥킥킥”

어린 거지의 말에 폭소를 터트린 연수는 한참을 웃어댔다. 눈물이 흐를 정도로 배를 잡고 웃던 연수는 어린 거지 둘을 잠시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여인에게 시선을 옮기는 연수.

“음 당신은 제법이네? 흑도에서 살기에는 아까운 실력인데?”

연수의 말에 여인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여러 사정이 있어 이리되었습니다.”

“뭐 그럼 됐고, 여기 이 양반은 덩치가 대단하네.”

“타고난 신력 하나는 자신 있습니다.”

“응 그래 보여.”

그렇게 쭉 말을 섞어본 연수는 자리에 앉아 돌쇠를 불렀다.

“돌쇠야.”

“예.”

“근데 네 두목은 왜 안 오냐?”

“아, 불러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응. 불러와.”

“예.”

돌쇠가 두목을 데리고 헐레벌떡 뛰어오자 연수는 마루에 걸터앉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너희를 보자고 한 이유는 너희를 하나로 모아서 밑에 둘까 생각해서야.”

연수의 말에 흑우방의 두목은 벼락을 맞은 것처럼 떨면서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제가 멍청하여 잘 못 알아들었습니다.”

순간 높아진 자신의 언성에 스스로 놀라 뒷말을 공손히 마무리하는 사내를 보며 피식 웃는 연수.

“말했잖아. 너희를 하나로 합쳐 내 밑에 둘까 한다고.”

흑우방의 두목은 억울할 수밖에 없었다. 덕창현에 자리 잡고 삼 년. 무던히도 피를 보며 저들과 경쟁을 해 왔다.

이제는 네 조직 중에 단연 제일 크다고 자부할 만큼 키워놓았는데 조직을 통으로 빼앗기게 생겼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감히 암수살성을 앞에 두고 발작을 할 수는 없으니 답답한 마음에 얼굴만 붉어져 올 뿐이었다.

그때 어린 거지 중 객기가 뛰어난 거지가 입을 열었다.

“싫소. 지난 이 년 목숨 걸고 자리 잡았소. 왜 인제 와서 조직을 남에게 빼앗겨야 한단 말이오?”

“음···. 그야 원래 강자가 독식하는 게 이 바닥이니까?”

연수의 말에 어린 거지의 눈매가 좁아지며 자세가 낮아졌다.

“그냥 빼앗기지 않을 거요.”

어린 거지의 말이 끝나는 순간 연수에게서 특유의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숨을 탁 막아오는 무서운 살기에 장내에 있던 사람들은 숨을 못 쉬고 호흡이 막힌 채 괴로움에 부들부들 떨었다.

“그냥 뺏길 거야. 그런 바닥이니까.”

말을 마침과 동시에 사라지는 살기.

화련파와 백웅파의 두목은 고개를 처박고 들지 않으며 불만을 표시하지 않았고, 흑우방의 두목은 아예 억지웃음을 지으며 긍정의 표현을 적극적으로 해 왔다.

오직 어린 두 거지만이 끝까지 투기 어린 눈빛을 지우지 않고 연수를 노려보았다.

‘하! 이거 물건들일세.’

-나쁘게 하진 않을 테니 내 밑으로 들어와. 진짜 무인의 길을 열어주마.

머릿속에 울리는 전성을 처음 겪어보는 두 거지는 너무 놀라 눈을 부릅뜨며 서로의 눈을 바라봤다.

잠시 후 고개를 끄덕인 두 거지를 확인한 연수는 흑우방의 두목을 바라봤다.

“그럼 내일까지 이 장원으로 다 불러 모아. 음···. 뭐가 좋을까?”

연수의 살기를 느낀 돌쇠는 더 깍듯한 자세로 조심히 물었다.

“무, 무엇이 말씀입니까?”

“뭐긴. 당연히 이름이지. 음···.”

고민하던 연수의 눈에 아직 경계가 가득한 표정으로 연수를 살피는 두 어린 거지가 들어왔다.

호선을 그리는 연수의 입매.

“혈개문이 좋겠네.”

“혀, 혈개문이요? 저기···. 자칫 사황성의 혈개와 관련이 있다고 의심을 사지 않을까요?”

“아, 몰랐구나. 너희들은 내 밑으로 들어오는 순간 사황성에 편입되는 거야.”

흑우방의 두목은 무릎을 꿇은 채 기어오며 입을 열었다.

“그, 그건 안됩니다. 한 번만 제발 살려주십시오.”

“왜? 누가 죽인데?”

“지금 중원에 있는 흑도 중 사패련에 상납하지 않는 흑도는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사황성을 지지하는 흑도는 단연코 단 한 곳도 없을 겁니다.”

“아아, 걱정 마. 사패련 조만간에 망할 거야.”

“예?”

“너희들은 그런 거 걱정할 필요 없다고. 그 망할 놈들은 조만간 다 죽을 테니까. 미리 사황성과 연을 댈 수 있는걸 영광으로 알아. 아주 크게 개파식을 하도록 하지. 있는 돈 없는 돈 다 끌어다가 최대한 요란하게. 그간 너희가 빨아먹은 만큼 주변 민초들에게 베풀 거 베풀면서 아주 크고 성대하게.”

흑우방의 두목은 자신이 그간 쌓아온 부가 허물어지는 잔상을 보며 발작을 했다.

“절대 그럴 수는 없습니다. 차라리 저를 죽···.”

-툭.

떨어지는 흑우방 두목의 목.

“거참 잔말은. 돌쇠야.”

“예!”

잔뜩 긴장하며 무릎을 꿇고 대답하는 돌쇠였다.

“앞으로 네가 이놈 대신이다. 아까 말한 대로 처리해. 개파선언은···. 어디 보자···. 이틀 후가 좋겠네.”

“옛!”

“아아, 다들 긴장할 거 없어. 이놈은 원체 도리를 모르는 놈이라 조만간에 내보내려 했었어. 내가 말이 많다고 사람 죽이고 그런 사람은 아니야. 다만 경고를 어겼길래 겸사겸사 처리한 거야.”

“그럼 바쁠 텐데 다들 돌아가서 일 봐. 너희 두 놈 빼고.”

지목을 받은 두 거지를 빼고는 꽁지가 빠지게 안채에서 사라졌다.

“저, 저희는 왜?”

“이름이 뭐냐?”

“... 저희는 이름이 없습니다.”

“그래도 너희끼리 부르는 이름은 있을 거 아냐?”

“그저 저는 호 저놈은 설이라 부릅니다.”

“오호, 머리 굴리는 놈은 혓바닥이고 패기 넘치는 너는 호랑이다?”

“...”

얼굴을 붉히며 입을 다무는 거지를 보며 연수의 미소가 진해졌다.

“좋아. 앞으로는 호개, 설개라고 부르마.”

“저···. 정말로 저희를 무인으로 만들어 주실 겁니까?”

“그럼. 좋은 스승을 찾아주마.”

설개는 잠시 연수의 눈치를 살피고는 입을 열었다.

“직접 가르쳐 주시는 게 아닙니까?”

“응. 아니야. 아주 적임자가 있지.”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눈짓을 주고받더니 연수의 앞으로 무릎을 꿇었다.

“제자로 받아주십시오.”

“안돼.”

“받아주십시오.”

“안된다니까. 내 제자가 되면 너희 오래 못 살아.”

“어째서···.”

“내가 적이 많아. 지금도 나 죽이고 싶어서 미치기 일보 직전인 늙은이가 살벌한 검을 갈고 있을걸? 걱정하지 마라. 두 놈 다 훌륭한 사파인으로 키워줄 적임자에게 데려다줄 테니.”

“예···.”

힘없이 대답하는 둘.

“알았으면 너희들도 빨리 가서 식구들 데려와. 거둬 먹일 입이 많을 거 아냐?”

“예.”

말을 마친 두 거지는 안채를 빠져나가며 아쉬운 눈으로 연수를 돌아보았다.

두 거지를 보니 마치 어린 날의 자신과 소개를 보는 듯해서 마음이 더 쓰이는 연수였다.

어린 나이에 흑도에 투신하는 어린 거지의 마음이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자신과 소개 역시 비슷한 시기에 새로 살길을 찾았으니.

잠시 빈 허공을 바라보며 옛 생각을 하던 연수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여기서 판을 벌릴 테니 얼른얼른 찾아와라. 나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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