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6화
제갈신이는 현재 돌아가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의 불편한 심기는 그의 얼굴에 고스란히 나타났다.
그런 그의 뒤에서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어느 정도 정리가 되는 듯하군.”
무림맹주 옥현인의 말에 제갈신이는 차마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그는 운무검제와 추룡소개를 노려보았지만, 그 두 고수는 그런 제갈신이의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다 자신들의 신념과 협의에 따라 행동 한 것뿐인데 그런 눈으로 보지 마시오.”
옥현인의 점잖은 이야기에 제갈신이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제 판단이 어설퍼서 맹주님께 누를 끼쳤습니다.”
“허허, 사필귀정 아니겠소? 매화검문은 더 나서지 않는 것이 보기 좋을 것 같군요.”
맹주의 말에 제갈신이가 눈치를 주자 한 무사의 신형이 사라졌다.
매화검문의 문주 앞에 나타난 사내는 그의 귀에 대고 맹주의 뜻을 전했고, 문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맹주를 바라보고는 허리를 숙였다.
매화검문의 문주가 수긍하는 듯 보이자 자리에서 일어서는 맹주.
맹주를 따라 일어서는 각파의 수장들.
사황성의 진영에서도 수뇌들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정파의 진영은 대체로 표정이 어두웠지만, 사황성의 표정은 밝았다.
처음 모였던 자리에 다시 모인 정사의 수장들은 서로를 마주하고 섰다.
“이걸로 적게나마 정사의 은원이 씻겨 내려갔기를 바랍니다.”
빙글 웃으며 말하는 진벽가주의 말에 억지웃음을 짓는 제갈신이가 말을 받아서이었다.
“모든 은원이야 씻겨나가지 못했겠지만, 그 물꼬를 텄으니 나머지는 부대끼며 지내면서 더 좋아지길 바라야죠.”
뼈가 있는 그의 말에 사황성주 패천후는 몸을 틀어 한쪽에 서 있는 몇몇 무인들을 향해 포권을 했다.
“정파의 정기와 협의에는 탄복했소. 그대들의 명예에 감복하는 바요.”
고개를 숙이는 사황성주를 향해 마주 포권을 하는 무당의 백발노인과 운무검제, 그리고 추룡소개였다.
제갈신이는 그 모습을 더 불만스럽게 바라보고는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그럼 미리 협약한 대로 저희 측에서 합의문 선언을 하고, 그쪽에서 연합의 발표성명을 내는 것으로···.”
진벽가주는 제갈신이의 말을 끊으며 선을 그었다.
“합의문 선언은 맹주님께서 직접 하시는 것이 확실하겠죠?”
제갈신이는 눈매를 좁히며 잠시 진벽가주를 빤히 바라보고는 입을 열었다.
“뭐, 그렇습니다. 합의문에는 정사 대전의 발발이 저희의 전력대비가 사황성을 자극하며 일어난 것으로···. 괜찮겠습니까?”
진벽가주가 반발하며 뭐라 하려는데 성주가 먼저 대답을 했다.
“그 정도면 충분하지.”
“성주님!”
진벽가주의 부름에도 성주는 고개를 살짝 저어 보이는 정도로 진벽가주를 진정시켰다.
“큼큼! 그럼 그렇게 하기로 하고, 연합성명과 선포는 성주님께서 직접 하시기로 하면 되니 그렇게 하시죠.”
말을 서둘러 마무리 지은 제갈신이는 불편한 자리를 빠르게 정리하며 일행들에게 무언의 독촉을 보냈고 그렇게 황급히 자리는 마무리되었다.
“아직도 운무검제의 생각을 모르겠습니다.”
진벽가주의 말에 성주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걸 모르기에 자네가 사파인인 것이지.”
“성주님은 아십니까?”
“정파인의 협의지. 하지만 나도 이해는 못 해.”
“모든 정파인들이 저런 자들만 있다면···.”
“크크크, 그렇다고 정사의 반목이 끝날 것 같은가?”
“힘들겠죠?”
“어디를 가던 사람이 모인 곳에는 썩는 자리가 나기 마련이지.”
의미심장한 성주의 말에 주변의 무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성주는 잠시 정파의 무인들이 몰려 있는 곳으로 시선을 두다가 말을 이었다.
“무엇보다 저들과 우리는 정체성이 달라. 우리가 추구하는 것과 저들이 추구하는 것의 차이는 절대 좁혀지지 않아. 그보다 자신의 정체성과 신념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놈들이 많은 게 더 문제지.”
저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들의 신념에 대해 떠올려 보는 가주 들이었다.
자리로 돌아오자 맹주는 깊은 내력을 목소리에 담아내며 말했다.
“중원을 지키고자 오늘 이 자리에 모여주신 중원의 동도 분들께 무림맹의 맹주 옥모가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무인들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인 맹주는 다시금 말을 이어갔다.
“오늘 이 뜻깊은 자리에 정사의 연합의 선언문을 낭독해 보고자 합니다. 정사의 합의로 만들어진 선언문으로 정사의 화합과 지난 감정이 씻겨나가기를 바라며 낭독을 시작하겠습니다. 우리 중원의 깊은 역사를 위협하는 새 외의 적들에 의해 중원의 미래가 위협받고 있는 작금의 세태에 더는 정사를 나눠 피로 피를 씻는 이 끝나지 않는 전쟁을 끝내야 할 때가 왔음에 무림맹과 사황성은 이번 전쟁을 종식하는바. 이번 정사 대전은 정파 무인들의 과한 무력정비에 사파의 무인들이 위기감을 느껴 발발된 오해에서 비롯된 전쟁으로 하등 불필요한 전쟁이었다. 하여 정과 사가 이 전쟁을 끝내고 새 외의 마교의 침공에 대비하여 힘을 합칠 것을 선언한다.”
짧은 선언문을 읽어내려간 맹주는 주위를 잠시 둘러보다가 성주에게 시선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이런 뜻깊은 자리에서 성주님의 정사 연합의 성명을 들어보는 게 좋겠군요.”
자연스럽게 성주에게 성명을 요구하는 맹주였다.
성주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웅후한 내력을 담아 목소리를 냈다.
“오늘은 정사가 화합하고 마교에 대적하기 위해 연합을 하는 뜻깊은 날이오! 대의를 위해 여기 모인 중원의 영웅들에게 감복의 포권을 올리오!”
주변 사방에 모여있는 무인들을 향해 여러 차례 포권을 해 보인 성주는 포권을 마치고는 말을 이었다.
“이 자리에서 피맺힌 은원의 고리를 끊고 새로운 시작을 위해 정사 연합을 선포하는바, 중원의 대의를 위해 사사로운 은원은 잊고 중원을 지킵시다!”
-와아아아아!!!
-마교 놈들을 막아내자!
-사황성주님 만세!!!
정사의 무인들의 뜨거운 환호를 받으며 자리에 앉는 사황성주 패천후였다.
연합선포가 끝나자 뜨거운 여운이 지나고 사황성과 무림맹의 수뇌들은 현의 커다란 주루로 모였다.
주루 전체를 빌려 비워 놓고는 핵심 수뇌들만 모여 커다란 원탁에 둘러앉은 정사의 수뇌부들.
앞으로의 연합체제와 지휘권을 두고 치열한 논쟁과 신경전 끝에 적당한 합의점을 찾은 후 자리가 끝나자 사황성의 수뇌들은 진이 빠진 듯 지쳐버렸다.
정파의 수뇌부들은 바쁜 일정이 있다며 먼저 떠났기에 긴장이 풀린 사황성의 인물들은 일단 주루에서 하룻밤 머물기로 했다.
대부분의 가주들이 독주를 시켜 놓고 낮에 있었던 비무에 대해 떠들며 술을 먹고 있을 때 연수는 슬쩍 자리에서 일어나 주루 밖으로 나왔다.
밝은 만월을 올려다 보며 한숨을 내쉬는데 뒤로 비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승리의 주역인 자네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연수가 돌아보니 비영이 얼큰하게 취한 얼굴로 연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냥요. 느낌이 안 좋아요. 뭔가 너무 쉽게 풀린다고 할까요?”
“앞으로 마교와 피 튀는 혈전을 벌여야 하는데 뭐가 그리 쉽게 풀렸다고?”
“정사 대전으로 죽은 무인들이 얼마나 될까요? 그 사무친 원한이 이번 대회 한 번으로 정말 모두 씻겨나갈 것으로 생각하세요?”
“글쎄, 아무래도 힘들겠지.”
“예. 특히 사황성은 큰 피해를 보지 않았지만, 사황성의 영향권 밖에 있던 사파들은 삶의 터전과 가족 같은 사람들을 잃었을 거예요. 반대로 정파는 중소방파들의 피해는 크지 않았지만, 화산과 남궁세가를 잃었어요. 구파 일방 오대세가가 팔파 일방 사대세가가 되었단 말이죠. 이번 정사 대전은 시작부터 끝까지 뭔가 아귀가 맞지 않는 느낌에요.”
비영은 잠시 생각에 잠겨있더니 입을 열었다.
“이번 정사 대전의 시작은 자네와 내가 열었네.”
“그랬죠. 그런데도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이 많아요.”
“무엇이 그리 이해가 안 되는데?”
갑자기 옆에서 들려오는 성주의 목소리에 연수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성주님 체통이 있지 언제까지 그렇게 기척을 죽이고 다니실 겁니까?”
“체통이 뭐 밥 먹여 주냐? 하던 말이나 마저 해봐.”
“정사 대전을 일으킨 건 결국 정파의 의지였어요.”
“말해 뭐해.”
“그런데 이번 정사 대전이 제대로 시작되기도 전에 끝난 것 또한 정파의 의지였어요.”
“...”
성주는 말없이 연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저희 사파는 얼핏 잘 싸운 것 같지만, 전쟁의 실익은 모두 정파가 가져갔습니다. 중원 전역의 사파인들은 터전을 잃었으니 다시 터를 잡으려면 보통 일이 아닐 겁니다.”
“그렇겠지.”
성주는 아픈 곳을 찔러오자 침통하게 대답했다.
연수는 그런 성주를 잠시 보고는 입을 열었다.
“하필 그런 시기에 마교가 움직였고, 정사 대전을 끝낼 명분이 생겼다는 게 이상해요.”
“네 말은 정파 놈들이 마교와 내통이라도 했다는 거냐?”
“모르죠.”
“턱도 없는 소리. 오히려 우리가 마교와 내통을 했어도 해야지. 정파 놈들이 지들 근본을 부정하는 짓을 하려고?”
“그래서 느낌이 좋지 않아요. 분명 알지 못하고 있는 일이 벌어지는 것 같은데 그게 뭔지 저만 모르고 있는 더러운 기분이에요.”
“음···.”
성주는 차마 말하지 않았지만, 자신과 비슷한 기분을 느끼고 있는 연수를 가만히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마교의 예측 못 한 움직임은 우연이 아닐까?”비영의 말에 연수는 만월을 올려다보았다.
“우연이라···. 저도 우연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평소 성주의 입버릇을 빌려 말하는 연수. 성주 역시 잠시 시간을 드려 고민해 보았지만 딱 떨어지는 해답이 나오지는 않자 내력을 돌려 술기운을 태워버렸다.
그의 붉던 볼이 제빛을 찾으며 주위로 강한 술 냄새가 흩어지며 사라졌다.
“젠장.”
하늘을 바라본 성주는 며칠 사이 더 빛을 잃은 적성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빛이 바랜 적성을 바라보던 성주는 비영과 연수를 바라보더니 품에서 두 개의 물건을 꺼내 둘에게 내밀었다.
“뭐에요?”
“전극공합.”
연수는 대답하지 못하고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성주를 바라봤다.
“받아라.”
연수를 향해 전극공합을 던지는 성주. 허공을 날아오는 목합을 받아들고는 성주를 바라봤지만, 성주는 별말 없이 비영에게 비급 한 권을 내어주었다.
“남은 비전과 내 깨달음을 담은 무리를 정리해 놓은 거다.”
“감사합니다! 성주님!”
한쪽 무릎을 꿇으며 두 손으로 비급을 받아든 비영은 조심히 품에 비급을 갈무리했다.
“이거 아직 정파에 돌려주지 않은 겁니까?”
“왠지는 모르겠다만 전극공합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더구나.”
인상을 찌푸린 채 머리를 굴려보는 연수.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저희 빨리 성으로 돌아가는 게 어떻습니까?”
“그러고 싶다만, 맹주가 사흘 후 독대를 요청해왔어.”
“독대요?”
“미고산에서 둘이 보자더군.”
“단둘 만요?”
“자신은 부하 둘만 데려온다고 하더군.”
연수는 자신도 모르게 밤하늘 위에 적성을 올려다봤다.
“안 가시는 게 좋겠는데요?”
“네 말을 듣기 전까지는 고작 해봐야 전극공합의 이야기를 하려고 날 부른다고 생각했을 텐데···. 나 역시 느낌이 안 좋아.”
“그러니까 안 가면 되죠.”
“글쎄.”
“아무래도 냄새가 나요. 구린내가 나는 곳은 들여다보지 않아도 똥밖엔 없습니다.”
“네 생각도 그렇지?”
“예.”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대답하는 연수.
“생각을 좀 해봐야겠다.”
“생각할 게 뭐 있습니까? 함정이면요? 지금 같을 때 성주님이 없으면 사파는 암흑기를 맞아야 합니다.”
“설마 정파의 수장이라는 맹주가 그런 짓을 할까? 무엇보다 성주의 독대를 거절하면 자존심이 상하잖아. 겁먹었다 생각할 텐데.”
“자존심이 밥 먹여 준답니까? 가시려거든 미고산에 성의 고수들을 전부 끌고 가세요.”
“그건 더 자존심 상하지.”
“이건 무인의 자존심을 운운할 문제가 아니에요.”
“며칠만 생각 좀 해보자.”
“다른 가주 들은 내일 전부 돌아간다면서요?”
“그래. 나는 이곳에서 이틀만 더 생각해 보고 결정을 해야겠다.”
성주는 평생의 호적수였던 맹주의 첫 독대 신청을 거부한다는 것에 그를 피하는 듯한 인상을 줄까 싶어 거부할 수가 없었다,
이성적으로는 연수의 말이 옳다고 판단되었지만, 무인으로서의 호승심은 다른 누구도 아닌 옥현인에게만큼은 지고 싶지 않다고 악을 쓰고 있었다.
“하아.”
깊은 한숨을 내쉰 연수는 잠시 성주를 바라보고는 입을 열었다.
“옆을 지킬게요.”
“저 또한 옆을 지키겠습니다.”
“너희 둘은 할 일이 있을 텐데.”
“망노 따위 언제든 쳐낼 수 있어요.”
“성주님이 신경 쓰실 일 없도록 처리할 테니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성주는 잠시 둘을 바라보고 있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날이 되자 연수는 일행에게 며칠의 시간을 두고 따라간다며 잠시 이별을 고했다.
도화는 큰 눈에 물기가 고이며 연수의 손을 꼭 잡고 입을 열었다.
“정말 빨리 오셔야 해요.”
“걱정 마. 금방 따라갈게.”
공숙과 소개 또한 연수에게 당부를 잊지 않았다.
“빨리 와야 된다.”
“조심해. 아무래도 기분이 찜찜하다.”
“네 빨리 갈게요. 소개 너도 조심하고. 몸이 회복될 때까지는 무리하게 수련하지 말고 회복에만 신경 써.”
팔에 부목을 대고 어깨와 팔에 삼각대를 걸고 있던 소개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연수에게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사황성에서 나왔던 대군이 떠나자 주루에는 하나둘 손님들이 들기 시작하며 활기를 찾아갔고, 연수와 성주 비영은 셋만 남아 자리를 지키며 말없이 각자 생각에 잠겨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