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화
“무,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그럼 다른 무인의 무공을 훔치는 게 잘한 짓이라는 말인가?”
“우리 사파의 무는 애초에 소림에게 사사한 당신들의 무를 훔치고 발전시키며 여기까지 이어져 왔소. 내가 사도를 걷는 건 당신에게 별 시답잖은 소리나 듣고자 걷는 게 아니오.”
구현단은 이제는 눈을 부릅뜨다 못해 경악으로 가득차 눈앞에 젊은 놈을 바라봤다.
세상 뻔뻔해도 저리 뻔뻔한 자가 있을 수 있냐는 생각이 들었다.
하다못해 사파인들 중에서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얼굴을 붉히는 무인이 있을 정도였는데, 이 암수일살이라는 신진고수는 한치의 부끄럼마저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좋다. 그럼 난 정도로 네놈을 판단하겠다! 너는 우리 무당을 포함한 모든 정파인의 존재를 부정했으니 어디 얼마나 잘났는지 보자. 우리 무당은 네놈이 훔쳐간 구면장으로 네놈에게 비무를 신청한다. 만약 무당이 패배한다면 네 사부와 네게 앞으로는 일체 구면장을 가지고 은원을 따지지 않겠다!”
노기가 잔뜩 서린 표정으로 연수 바라보는 무당 장문 구현단.
그의 뒤로 천천히 걸어오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평안한 표정으로 연수를 슬쩍 바라봤다.
감정을 읽을 수 없는 없는 편안한 표정의 노인과 잠시 시선을 교환한 연수는 무당이 이번에 생각보다 칼을 날카롭게 갈고 왔음을 느낄 수 있었다.
잠시 백발의 노인에게 시선을 두었다가 구현단에게로 옮기며 입을 여는 연수.
“내가 졌을 때는?”
“그야 당연히 정도에 따라야지. 네놈이 훔쳐 배운 구면장을 가져가겠다.”
“내 근맥을 자르겠다?”
단호하게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이는 구현단.
-준비해.
성주의 전성이 여러 가주들의 머릿속에 울렸다.
화령가주는 내력을 모으며 크게 소리를 질러 반발하고 나설 준비를 했고, 진벽가주는 치밀한 논리로 초절정고수의 무위와 구면장의 기여를 어찌 따져야 할지 머리를 굴렸다.
막 화령가주의 우렁찬 사자후가 터져 나오려는 순간.
“좋소. 구면장은 훌륭한 기초를 쌓을 수 있게 해 주었고, 유능제강의 무리를 가르쳐 주었으니. 내가 진다면 내 근맥을 두말하지 않고, 내어주겠소.”
그 한마디에 정사 모든 무인의 눈이 커졌다.
특히 구현단과 사황성의 수뇌들은 순간적으로 아무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놀랐다.
-지, 지금 저놈이 좋다고 했냐? 지 근맥을 주겠다고?
-그런 것 같습니다.
진벽가주의 대답에 성주는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말을 쳐 듣는 새끼들이 하나도 없어!”
성주의 노기가 가득 찬 말을 내뱉자 누구 하나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구현단은 구현단대로 뭐라 답해야 할지 순간 잊어버렸다.
분명 반발하고 나올 것으로 예상하고 반발에 대비한 논리정연한 답들을 준비해 놓았는데, 그냥 받아들일 줄은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구현단이었다.
진벽가주는 뒤늦게 내력을 끓어 올리며 크게 외쳤다.
-역시 암수살성! 결자해지! 영웅답다!
성주는 갑자기 내력까지 담아 크게 소리치는 진벽가주를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하지만 곧 그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암수살성이라는 별호와 영웅답다라는 소리가 들려오자 사파측 진영에서는 우레와 같은 환호와 함성이 쏟아져 나왔다.
-우와아아아아! 암수살성!
-진정한 사파인이다!
-사파의 영웅 암수살성!
하늘을 찌를 뜻 오른 사기를 그대로 연수에게로 쏟아내는 사파 측의 하는 양을 보고는 제갈신이는 입술을 씰룩였다.
“흥! 기세는 좋다만 그것만으로 벗어날 수는 없을 거다.”
등이 후끈할 정도의 환호를 받으며 연수는 입을 열었다.
“시작하죠.”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은 백발의 노인이 연수의 앞으로 마주 서자 구현단은 찝찝한 표정으로 뒤로 물러섰다.
서로 동시에 기수식을 펼치는 두 무인.
같은 기수식을 펼치는 순간 처음으로 노인의 얼굴에 하나의 감정이 퍼져나갔다.
살짝 커지는 눈과 호선을 그리는 입, 그리고 살짝 붉어지는 안색.
같은 자세로 대치한 상태에서 노인의 입이 열렸다.
“훌륭하구나! 구면장을 얼마나 익힌 게냐? 익힌 지는 얼마나 되었지?”
“대성하진 못했소. 대략 십삼 년은 안 넘은 것 같소.”
“지금도 구면장을 수련하는 건가? 십삼 년 동안?”
호기심이 가득한 노인의 표정을 보며 연수는 입매를 비틀었다.
노인만이 겨우 들을 정도로 낮게 말하는 연수.
“이깟 구면장이 뭔 대단한 무공이라고 십삼 년을 수련한단 말이오? 한 일 년 기초나 쌓고 말았지.”
호기심으로 가득했던 노인의 얼굴에 다시 한번 감정의 파문이 퍼져나갔다.
누가 보아도 알 수 있을 하나의 감정. 분노였다.
“사십 년을 익혀도 새로운 구면장이다. 근데 네깟 놈이 겨우 일 년을 익히고···.”
“노인장도 참 안됐소. 사십 년을 익히고도 구면장이 새로울 정도면 무재가 없는 것 아니겠소?”
“놈!”
부드럽게 구부린 무릎을 중심으로 앞으로 뻗어 나오며 오른팔을 둥글게 휘두르는 노인.
연수는 허리를 숙이며 왼발을 축으로 빙글 돌며 일수를 피해냄과 동시에 노인의 가슴을 향해 일장을 뻗었다.
너무나 완벽하게 연수의 일장이 노인의 가슴으로 들어가는 것 같이 보였다.
하지만 가슴 앞으로 겨우 끼어 들어온 노인의 왼손.
손목을 빙글 돌리며 연수의 일장이 가슴에 닿기 직전 손등으로 연수의 손목을 밀어내는 노인이었다.
그때부터였다. 둘의 손과 손이 붙은 듯 서로 떨어지지 않고 돌기 시작한 것은.
마치 큰 항아리를 둘이 감싸 안고 기울이기라도 하듯 두 팔을 붙인 채 크게 회전시키는 두 사람의 신형은 놀랍게도 빠르게 장내를 이동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천천히 움직이는 두 사람의 팔과 비례하여 점점 빨라지는 이동속도.
예측을 불허하는 방향으로 꼭 붙은 채 움직이는 두 사람의 신기에 구현단은 경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구면장을 사십 년간 수련한 노인은 지금도 하루 한 시진 이상을 구면장에 매달리고 있었다.
그런 노인의 구면장에 대한 이해와 깨달음은 함부로 판단할 수 없을 만큼 높았다.
그런 노인과 대등하게 구면장으로 상대를 하는 저 도둑놈은 뭘 하는 놈이란 말인가?
기어코 두 사람의 신형이 주위에 잔상을 남기기 시작했다. 흐릿한 그림자에서 시작한 잔상은 잠시 후 또렷한 잔상으로 변했고, 주위에는 수많은 두 사람의 잔상만이 남으며 두 사람의 신형이 사라지다시피 했다.
정사를 막론하고 주위에 두 사람의 비무를 보는 무인들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지는 것은 당연했다.
보통의 고수들이 아니고서는 저런 비무를 평생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이들도 상당수였기에 이리 수준 높은 비무를 보는 것만으로도 행운이었다.
주변의 시선이 어떻든 비무가 계속 진행될 수록 노인의 구면장에 놀라는 연수.
‘정말 이상적인 구면장이군.’
구면장의 정석을 보여주는 듯한 반듯하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노인의 구면장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질 것 같은 생각 또한 들지 않았다.
지금은 평수를 이루고 있지만, 노인의 구면장에서 연수는 아주 작은 틈을 느낄 수 있었다.
바늘구멍보다도 작은 틈이었지만 왠지 너무나도 또렷하게 보이는 그 틈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크게 보였다.
‘너무나 반듯하고 딱 부러지는 구면장이기에 자유가 없구나.’
순간 눈을 감는 연수.
코앞에 붙어서는 동수를 이루며 구면장을 겨루던 상대가 느닷없이 눈을 감아 버리자 노인의 입매에 호선이 그려졌다.
노인은 지금껏 살면서 이처럼 즐거운 날이 없었다.
무당에서는 입문공으로 잠시간 배우고 지나치는 무공으로 취급되는 구면장.
하지만 이 구면장은 그리 취급을 받을 무공이 아니었다. 구면장의 안에는 무당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유가 있었다.
부드러움으로 시작하여 무동으로 끝난다는 무당의 무공정수 시작이 결국 구면장인 것이다.
최근 들어서는 구면장으로는 자신에게 삼 초식 이상 버티는 자를 찾기가 힘들었다. 아직도 부족하고 더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있었지만 십일 성의 벽은 높았고, 대성을 향한 노인의 갈망은 커져만 갔다.
그런데 이런 젊은 사파 놈이 자신의 구면장과 동수를 이루며 자신의 구면장을 받아내고 있었다.
수련하며 실전에서 거의 써 볼 일이 없었던 구면장이었다.
그간 쌓인 모든 무리와 깨달음을 풀어내고 있음에 마치 아이처럼 신이 나는 노인이었다.
이미 젊은 사파 인에 대한 노기 따위 잊은 지 오래였고, 머릿속 가득 자신이 쌓아놓은 모든 것을 풀어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마치 아이가 막 배운 공부를 자랑하듯 쏟아져 나오는 노인의 무리와 깨달음을 묵묵히 받아내는 연수.
그렇게 두 사람이 비무를 시작한 지 이백 초가 훌쩍 넘어가자 문득 노인은 정신이 들었다.
신이 나서 모든 깨달음을 녹여 풀어내었다.
하지만 상대는 묵묵히 자신의 모든 초식을 받아냈다.
마치 고수가 하수의 무를 받아주며 지도하듯 자신의 사십 년 정수를 홀로 받아내었다.
덜컥 눈앞에 젊은 무인이 너무나 커 보였다.
한번 상대가 커 보이고 이성이 점차 돌아오자 이제는 상대가 너무나 높은 벽처럼 느껴지기 시작하는 노인이었다.
연수는 흔들리는 노인의 심기를 고스란히 느낄 수가 있었다.
그동안 반 치도 흔들리지 않고 숨 막힐 정도로 딱 떨어지던 노인의 구면장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제는 조금씩 느껴지던 노인의 틈이 점차 벌어지며 언제든 그 틈을 찌를 수 있을 정도까지 벌어져 버렸다.
그 순간 연수의 입이 열렸다.
“사십 년의 공부. 잘 보았소.”
노인은 자신의 가슴으로 날아오는 한 없이 자유롭고 느릿느릿한 일장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마치 허공을 자유롭게 나는 나비 같은 그 일장을 보고 있자 황홀한 기분마저 느껴지는 노인이었다.
-펑!
주변의 많은 잔상이 사라지며 노인이 허공으로 날아갔다.
허공에 피 분수를 뿜어내며 뒤로 날아가는 노인의 신형이 아주 느릿느릿하게 보였다.
너무나 빠르게 움직여 잔상을 남기던 노인의 신형이 평범하게 뒤로 날아가니 자연히 느리게 보였다.
하지만 그런 느린 노인의 신형을 보는 구현단의 심정은 참담했다.
무당에서는 구면장으로는 따를 자가 없다는 노인이었다.
그런 노인이 이립도 못된 도둑놈에게 구면장으로 패 할 줄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구면장의 비무라는 제안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어려운 단계라고 생각했지, 설마하니 비무에 패배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었다.
구현단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노인이 땅을 구르며 힘겹게 몸을 일으키자 노인의 귀로 구현단의 전음이 날아들었다.
-암수에 당했다고 하십시오! 제가 책임지고 저놈을 몰아가서 무효로······.
전음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손을 들어 구현단의 말을 막는 노인.
떨리는 손으로 입가에 피를 닦아낸 노인.
“즐겁고, 놀랍고, 감탄했다. 내가 졌다.”
-노야!!
기겁한 구현단의 전음이 시끄럽게 노인의 귓가에 날아와 박혔다.
하지만 노인은 무신경하게 말을 이었다.
“젊은 나이에 대단하군. 구면장을 확실히 익혔네.”
연수는 잠시 부들부들 떨며 이를 악다문 구현단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노인에게로 옮기며 입을 열었다.
“노인장의 구면장에는 빈틈이 있었소. 아주 작은 틈이었지만 그 틈을 보고 있자니 질 것 같은 생각이 들지 않더군요.”
노인의 얼굴에 세 번째 감정의 파장이 떠올랐다.
일장을 맞고 피를 뿜으며 패배하는 순간에도 평온했던 그의 감정이 폭풍을 만난 것처럼 휘둘렸다.
지금의 상황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지만, 노인은 침을 꿀꺽 삼키며 자존심마저 버리고 입을 열었다.
“그, 그게 무엇인가? 나의 틈은 뭐였던가?”
“노야!!”
끝내 노성을 터트리는 구현단이었다. 무당의 무공으로 패배를 한 것만도 무당의 명예를 실추시킨 일이거늘 도둑놈에게 가르침을 청하는 것은 무당의 명예뿐 아니라 근간을 뒤흔들 추태였다.
잠시 구현단을 바라보며 입을 다물고 있는 연수.
막 노인이 입을 열려는데 노인의 머릿속으로 연수의 전성이 울렸다.
-한없이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두고 어찌 길을 가두어 유수로 만족을 하십니까? 강물이 자유롭다 하여 바다만 하겠습니까?
노인은 마치 벼락을 맞은 것처럼 표정을 굳혔다.
연수의 전성에 마치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던 노인은 한참을 그러고 서 있더니 본래의 평온한 얼굴로 돌아갔다.
그러고는 연수를 향해 포권을 하는 노인.
그 순간 무림맹주를 포함한 정파의 수뇌부들은 모두 눈을 부릅뜨고는 경악에 찬 표정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무당의 백모가 큰 가르침을 받았네.”
한참을 포권한 채 깊게 머리를 숙였던 노인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노인이 정파의 진영으로 돌아가고도 한참 동안 장내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이겼다···.
누군가의 한 마디가 시초가 되어 귀가 먹먹할 정도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우와와아아아아!!!
-암수살성!!!
-암수살성이 이겼다!!!!
-무당을 꺾었다!!!
끊이지 않는 함성 속에서 넋이 나간 것 같은 구현단은 멍하니 연수를 바라보다가는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진영으로 돌아갔다.
맹주에게 힘없이 고개를 저은 구현단.
옥현인은 그런 무당파 장문인을 안타까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지금은 사사로운 정을 끊고 대의를 위하여 맹주의 옥좌에 앉아 있지만 자신 또한 무당의 일인이었다.
하여 누구보다 노야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올해 세수만 백팔 세를 넘긴 고수로 나이 칠십을 코앞에 두고 문득 구면장에 매달려 세월을 보낸 무인이었다.
그런 노야께서 구면장으로 패한 것도 모자라 적에게 고개를 숙이고 가르침을 청했다는 것은 정파에게 있어 충격 그 자체였다.
이 수치스러운 치욕은 분명 평생을 아니 다음 대에 이어서도 끝없이 무당의 앞길에 방해가 될 것이 분명했다.
자리로 돌아가 앉는 구현단의 머릿속으로 노야의 마지막 전음이 떠오르며 그를 괴롭혔다.
-자네의 전음은 못 들은 셈 치겠네. 무엇이 자네를 그리 만들었는지 모르겠네만, 기억하게 무림의 태산북두라는 말은 정으로 쌓아 올린 협의 가득한 명예일세.
암수살성에게 암수의 누명을 씌우려는 자신의 양심을 찌르는 노야의 마지막 전음은 가뜩이나 힘든 구현단을 더 괴롭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