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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놈에서 고수까지-132화 (132/202)

# 132화

“같잖은 도발을 하는군요. 저런 심리전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불편한 표정의 맹주 옆에서 조언하는 제갈신이. 제갈세가의 가주이자 무림맹의 총 군사를 맞고 있는 자였다.

이번 정사 대전에서 빠르게 전선을 구축하고 사황성을 구석에 몰아넣어 중원의 사파인들을 몰아낸 전략을 세우고 실현한 주역이었다.

사기가 한참 오른 뜨거운 분위기 속에서 중원 사파인들의 합류가 끝나자 성주는 마차 위에 화려하게 올려져 있는 의자로 몸을 날렸다.

성주가 의자에 앉자 육천으로 늘어난 대군은 정파인들과 대치하며 그들의 앞으로 이동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 목숨을 걸고 싸우던 정사 무인들의 기세로 미고산이 후끈 달아올랐다.

정사의 무인들이 차지한 중간의 공터로 걸어 나오는 사황성주와 무림맹주.

성주의 옆에는 열두 가주와 연수가 있었고, 맹주의 옆으로는 구파일방의 장문들과 방장, 방주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서로 한 장의 거리를 두고 대치하고 서자 만 명이 훌쩍 넘게 있는 미고산 정상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오랜만이외다.”

무림맹주 옥현인의 무심한 인사에 성주 역시 무표정하게 받았다.

“그렇군요.”

잠시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그저 시선을 교환하는 것뿐이지만 마치 주변으로 경기가 몰아치는 듯한 싸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연수는 입신경의 고수들의 신경전을 보며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강호에 넷뿐인 고수라더니 살벌하구만.’

제갈신이는 두 사람의 가운데로 나서며 포권을 해 보였다.

“제갈세가의 가주 제갈신이라 합니다.”

빙글 웃으며 나선 그 순간이 참으로 절묘하여 주변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로 모였다.

“이야기는 귀가 닳게 들었습니다. 과연 직접 뵈니 그 풍모가 제갈세가의 지력이 보이는 듯하군요. 저는 진벽가의 가주 부곡방이라 합니다.”

제갈신이는 그를 보며 더욱 진한 미소를 지었다.

이번 정사 대전의 전략 양상을 보면 저기에 있는 진벽가주라는 놈은 자신에게 완패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 제갈신이의 자신감을 읽어낸 진벽가주는 내심 상대의 낯짝을 도려내 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일단 이렇게 초청에 응해주셔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중원의 안위를 위해 이리 큰 결심을 하여, 협조해 주시니 이 제갈모는 탄복했습니다.”

눈썹을 꿈틀거린 진벽가주는 억지로 웃으며 그 말을 받았다.

“하하, 저야말로 전쟁 중에 도움의 손길을 뻗으신 그 판단에 탄복했습니다.”

이번에는 제갈신이의 입술이 씰룩였다.

성주는 눈매를 좁히며 맹주를 바라보고는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했다.

“시답잖은 인사치레는 적당히 하는 게 어떻소?”

차가운 미소를 지은 맹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이상 신경전이나 할 필요는 없지요.”

말을 마치며 제갈신이를 바라보는 맹주.

맹주의 시선을 받은 제갈신이는 잠시 목을 가다듬으며 좌중을 둘러보고는 입을 열었다.

“그럼 대회의 중요한 일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일단 대회 선포를 알리며 대회를 시작하게 되면 정사의 은원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질 것입니다. 미리 말씀드리자면 저희 측에서는 무당과, 종남, 개방, 그리고 화산의 속가인 매화검문이 나설 것 입니다.”

제갈신이의 말에 어느 정도 예상을 했던 진벽가주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저희 측에서는 그 지목을 받아들이는 정도로 은원을 정리하기로 정했습니다.”

잠시 눈동자를 돌리며 생각에 잠긴 제갈신이.

“큼큼 그러시군요. 그 외에도 몇몇 돌발적인 이들이 은원을 쌓은 자를 지목하고 나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뭐 그렇게 하시죠. 이번에 보니 단합이 잘 안 되는 것 같던데, 이런 자리에서 정파의 단합을 도모하는 것도 앞으로의 대사를 위해서 나쁘지는 않죠.”

다시 한번 속을 긁는 진벽가주의 말에 제갈신이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하하, 그렇죠. 이런 대회를 여는 이유가 다 중원의 단합을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은원의 정리가 끝이 나면 양측의 합의문을 발표하고 정사의 연합을 선언할 것입니다. 그리고 전쟁의 책임을···. 지난번 합의했던 대로 하는 게 어떠십니까?”

“좋습니다. 하면 합의문 발표와 연합선언은 어느 쪽에서···.”

진벽가주가 진중하게 물어오자 눈을 빛내는 제갈신이.

“합의문 발표는 전쟁발발의 사유가 있는 측에서. 연합선포는 반대 측에서···.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잠시 성주를 바라보는 진벽가주.

성주가 고개를 끄덕이자 진벽가주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대회의 세세한 합의를 마친 두 수뇌부는 자신들의 진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연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입을 열었다.

“지독하군요. 패자는 전쟁의 원죄가 자신들에게 있다며 직접 합의문을 발표해야 하고 연합선포는 승자 측에서 하다니. 지면 그야말로 패배 선언을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어요. 이게 과연 정사의 단합을 위한 대회인지 그 저의가 의심스럽습니다.”

“원래 그런 게 아니냐? 무림이란 결국 힘이 지배하는 곳이니까.”

성주의 답에 뒤를 슬쩍 돌아보는 연수.

자신들의 진영으로 돌아가는 구파일방의 수뇌들의 등을 보니 절로 고개가 저어졌다.

“그래도 정파 인들이란 자들이···.”

“저들의 위선이 하루 이틀이더냐? 되었다. 이기면 되지.”

“아무래도 쉽지가 않을 것 같아서 그래요.”

“왜? 자신 없어?”

씩 웃으며 묻는 성주.

“글쎄요.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종남이 걸려요.”

“운무검제라···.”

“지금의 제가 그를 넘을 수 있을 거라 보세요?”

“글쎄, 운무검제가 나온다면 비무로는 끝나지 않을 텐데 어떨는지.”

“아시겠지만 저들은 분명 제 무공을 폐하려고 할 겁니다.”

“그렇겠지.”

“후우.”

한숨을 내쉬는 연수의 옆으로 철목가주가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천하의 암수일살, 아니. 암수살성이 겁나는 것도 있던가?”

“저도 사람인데 겁나는 게 없겠습니까?”

그 말에 화령가주마저 거들고 나섰다.

“허허 그날의 패기는 어디 갔는가?”

“저들의 조건을 듣지 않았습니까? 자신이 없었다면 절대 내걸 수 없는 조건입니다.”

진벽가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연수의 말에 동의했다.

“저들은 아마도 노골적으로 적영대장을 물고 늘어질 생각인 것 같습니다.”

“그에 대한 대비로 지명에 한계를 둔다 하지 않았던가?”

“그게 의미가 없습니다. 두어봤자 세 번인데 저들 중 무당은 모르겠지만 종남에 운무검제가 나와버리면···.”

“흠···. 뭔가 수가 없나?”

성주의 시선을 받은 진벽가주는 미간을 좁히며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방법은 있습니다만···. 쉽지가 않습니다.”

“뭔데?”

성주의 말에 진벽가주는 화령가주와 철목가주를 잠시 보고는 입을 열었다.

“우리 쪽에서 먼저 운무검제를 지명해서 치명상을 입히는 겁니다.”

“...”

성주를 비롯한 장내의 모든 사람은 입을 닫았다.

한참의 침묵 끝에 화령가주의 입이 열렸다.

“제가, 운무검제와 붙겠습니다.”

“음···.”

“아닙니다. 제가 나서보겠습니다.”

“흠···.”

성주는 딱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세간의 평으로 보자면 철목가주와 화령가주는 운무검제에게 승산이 희박했다.

“성주님 절 보내주십시오. 목숨 걸고 운무검제를 주저앉히겠습니다.”

“성주님 제가 화령가주보다는 튼튼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나서서 확실히 운무검제의 뼈를 빼앗겠습니다.”

잠시 침묵하던 성주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봐도 손해야. 너희의 목숨을 빼앗길 공산이 크다. 그리되면 운무검제에게 중상을 입힌들 얻는 게 없어. 게다가 이 대회의 명분과도 크게 엇나가게 돼. 함부로 살수를 썼다가는 큰 비난을 받을 게 분명해.”

“저희는 사파인입니다.”

철목가주의 말에 성주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 대회는 마교를 막기 위함이야.”

“그렇지만 저놈들의 의도대로 끌려가기만 해서는···.”

연수는 철목가주의 말을 끊고는 단호하게 말했다.

“이리된 이상 어차피 방법은 없습니다. 어떻게든 막아봐야겠죠.”

화령가주는 뒤를 돌아 운무검제를 찾았다.

무림맹주의 옆으로 앉아 있는 운무검제의 기운을 가늠하기라도 하려는 듯 그 주위를 노려보던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절대 무리하지 말게. 무엇보다 저들의 조건을 함부로 들어주지 말게. 무공을 폐한다? 흥! 감히 누굴! 우리가 눈을 부릅뜨고 있는 한 절대 좌시하지 않을 것이야. 그러니 받아들이지 말게. 아무리 촘촘한 그물이라도 걸리지 않으면 무용지물이지.”

진벽가주를 돌아본 연수가 물었다.

“그게 가능할 것 같습니까?”

“자네의 입심이야 사황성에서도 알아주지 않나? 자네의 설공으로 어찌 되지 않겠나?”

연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시선을 운무검제에게 고정하는 연수.

자리로 돌아오자 제갈신이는 앞으로 나서며 내력을 실어 외쳤다.

“이 자리에 모여주신 중원의 앞날을 걱정하는 많은 영웅 동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리오! 이 제갈모 중원의 영웅들을 잊지 않겠소.”

-제갈세가다!

-일설사멸 제갈신이다!

-와와아아아!

정파인들은 제갈신이를 보며 환호의 소리를 질렀다.

환호 소리가 잦아들기까지 기다린 제갈신이는 말을 이었다.

“우리 중원의 동도들이 혼란한 틈을 타 새외의 마교가 준동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두 아시겠지만 사악한 마공으로 공력을 쌓은 그 사악한 무리는 중원침략의 야욕을 드러내며 항상 혈란을 일으켜 왔습니다. 하지만 우리 중원의 영웅들은 힘을 합쳐 그들을 물리쳐 왔습니다. 그리고 오늘! 다시금 중원 영웅들이 화합하여 사악한 마교무리를 대비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마교 놈들을 막아내자!

-중원을 지켜야 하오!

-옳은 말이오! 우리끼리 싸울 때가 아니오!

“하여 오늘 이 자리에서 그간의 은원을 씻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화합의 대회를 열고자 합니다! 우리의 작은 원한을 정리하고 대의를 위하여 오늘을 기하여 원한을 씻어 주시기 바랍니다. 먼저 사황성에 은원의 고리가 있으신 분이 있다면 앞으로 나서주시죠.”

이미 다 짜인 절차를 뻔뻔하게 연기하는 제갈신이를 보며 연수는 내기를 돌리며 몸을 풀었다.

분명 첫 지명은 자신이 될 것이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무당의 장문 구현단이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우리 무당파는 대의 앞에 사사로운 원한을 꺼내길 망설였지만, 무당의 근간을 위협하는 행위에 대한 원한을 잊을 순 없어, 염치불구하고 이 자리에 섰소.”

과연 미고산 정산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가는 웅후한 내력에 장내의 무인들은 앞으로 나선 무당 장문에게 집중했다.

무당의 근간을 뒤흔들 은원을 쌓은 사파인이 누구일지 무당 장문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무인들.

“무당과 무인들의 근간인 무공을 도둑질하고 그 무공을 바탕으로 공력을 쌓는다는 건 정사를 막론하고 비난받아야 마땅한 무인의 뿌리와 그 근간을 뒤흔드는 악업이라 생각하오. 하여 우리 무당은 장수무투의 제자이자 무당의 무공을 익혔으리라 생각되는 암수일살! 그에게 은원의 빚을 받고자 하오!”

무당 장문 구현단의 말에 장내의 모든 무인의 시선이 사황성주의 옆에 서 있는 젊은 무인에게로 쏠렸다.

수많은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서서 여유 있는 표정으로 무당 장문 구현단을 바라보는 암수일살.

연수는 무당장문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그를 바라봤다.

다가오는 연수를 향해 무당 장문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암수일살! 장수무투가 사부가 확실한가?”

연수는 내력을 담아 당당하게 말했다.

“맞소. 장수무투 주두보가 내 사부요.”

주변으로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장내의 무인들은 눈을 부릅떴다. 암수일살에 대한 악명은 귀가 따갑게 들었지만, 그의 무위를 직접 보니 놀랍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립도 안된 젊은 무인이 당당하게 무당 장문인의 앞으로 다가서는 모습은 정파인들에게는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배분과 예를 중요시하는 정파인들 이기에 더 그럴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 당당한 연수의 대답에 살짝 당황한 구현단은 잠시 연수를 노려보고는 물었다.

“그럼 그가 훔쳐간 구면장을 배웠겠군?”

“배웠소.”

조용히 대답한 연수의 목소리는 내력이 담겨 미고산 구석구석 또렷이 퍼졌다.

“흥! 당당하군!”

연수는 주변을 잠시 돌아보고는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

“중원의 모든 무는 소림에서 나왔는데 내 당당하지 못할 게 무엇이오? 근간? 뿌리? 웃기는 소리! 무당의 무공이 어디 온전히 무당에서 나왔소? 역근과 세수가 없이 중원의 내가 공부가 존재 할 수 있었소? 정사를 막론하고 이미 그 뿌리가 소림에 있거늘 어찌 무당이 구면장 따위로 나를 얽맨단 말이오?”

연수의 직설적인 궤변에 대부분의 무인은 입을 떡 벌리고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구현단 역시 평생을 살며 이런 기상천외한 말을 면전에서 들어본 적은 결코 없었기에 무어라 대꾸를 해야 할지 떠오르는 바가 없었다.

오직 사황성의 성주 근처에서만 웃음을 참는 무인들의 소리가 작게 들려올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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