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1화
어느새 따라온 비영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흘리며 비아냥거렸다.
“매일 한가하게 보내는 주제에 뻔뻔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군.”
“그 한가한 덕분에 비무하는 시간도 낼 수 있는 겁니다.”
“큼큼! 무릇 그 정도 위치에 있으면 그런 여유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네.”
비영의 말에 피식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은 연수.
사흘의 시간은 화살같이 지나가 어느덧 출정식이 되었고, 사황성의 대군은 사천을 향해 출발했다.
안휘를 향해 출전할 때와는 다르게 천천히 여유를 가지고 이동하는 대군.
연수는 대군의 후미에서 귀형가와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오라버니 제가 방해되는 건 아닌가요?”
“아니야. 암영대도 모두 성주님의 곁을 지키는데 괜히 주렴각에 남아 있으면 좋을 거 없어. 게다가 이번 대회는 크게 위험할 일은 없을 거야.”
‘무엇보다 대회가 끝나면 망노와 성주의 제자들을 처리할 텐데 성내에 남겨두었다가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르지.’
뒷말은 입 밖으로 내지 않는 연수였다.
사천까지의 길은 순조로웠다. 전력 대부분은 천막을 치고 노숙을 했지만 큰 불편은 없었다.
미고산에 도착하기 하루 거리가 남은 시점에 성주는 연수를 찾았다.
모닥불 앞에 일행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연수는 갑자기 머릿속에 울리는 전성에 조용히 자리를 빠져나왔다.
한적한 숲속으로 들어서자 성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다.”
“무슨 일이신데 이리 은밀히 찾으세요?”
“뭐 별일은 아니다. 그저 이야기나 할까 하고.”
고개를 가로 기울이는 연수.
평소의 성주와는 다른 모습에 낯설기까지 한 모습이었다.
“고민이라도 있으세요?”
“사황성을 세울 때부터 함께한 성의 가신인 망노를 쳐내고 사제의 정을 나눈 제자들을 쳐내는 데 고민이 없을까?”
직설적으로 말하는 성주. 연수는 할 말이 없었다.
부하를 죽이고 제자를 죽인다. 정사를 떠나 비난받아 마땅한 일임에 틀림은 없었다. 그 사정이야 어떠하든.
“그런 자리에 계시잖아요.”
“그래.”
“후회···. 되십니까?”
“뭐가? 사황성주가 된 것이? 아니면 그런 선택을 한 것이?”
“후자요.”
“딱히. 네 말대로 사황성주니까.”
말을 마치며 성주의 손이 위로 뻗어지자 나무 위에서 술병이 날아와 성주의 손으로 빨려들듯 날아왔다.
“거 얼마 남지 않은 건데···.”
나무 위에서 떨어져 내린 강진후.
연수는 강진후를 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오랜만에 뵙네요.”
“그러네. 근데 진짜 무슨 일인데 이리 불러 모은 겁니까?”
강진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어둠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비영.
“네놈들에게 할 말이 있으니까 불렀겠지.”
술을 입에 털어 넣은 성주는 손등으로 입을 훔치며 말을 마쳤다.
비영은 연수나 강진후와는 다르게 깍듯한 자세로 입을 열었다.
“경청하겠습니다.”
“오냐. 다른 건 아니고, 그저 앞으로 성을 이끌 네놈들과 한 번쯤 이야기해 보고 싶었다.”
“오늘 진짜 이상하시네. 무슨 큰 병이라도 난 사람처럼 불안하게 왜 이러세요?”
연수의 말에 성주는 피식 웃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육십 년 전쯤이었던가? 아직 내가 별 볼 일 없는 무명 소졸이던 시절이었다. 운남에서 며칠은 굶은 것 같은 점쟁이를 만난 적이 있지. 괜한 동정심이 들어 은자를 몇 냥 적선할 겸 점을 본 적이 있어. 그때 점쟁이가 그러더군. 큰 인물이 될 것이고 많은 사람을 거느리고 군림하게 될 것이라고.”
“용하네요.”
처음으로 자신의 옛이야기를 꺼내는 성주에게 맞장구치는 연수의 말에 씩 미소를 지은 성주.
“당시에는 복비를 후하게 낸 점쟁이가 그냥 하는 말이라 생각했지. 그때 점쟁이가 그러더구나. 나 같은 사람 위에 서는 큰 사람들은 운명을 함께할 별을 타고 난다고. 저 위에 빛이 바랜 적성이 내가 타고난 별이라 하더군.”
성주의 말에 세 무인은 하나같이 고개를 위로 올렸다.
숲의 우거진 나무 틈 사이로 빛을 거의 잃은 붉은 별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내가 무림맹에 대항하기 시작하고 내 밑으로 무인들이 모일 때쯤 저 별은 그토록 찬란하게 빛날 수가 없었지. 사황성을 만들고 나서는 전성기라 해도 좋을 만큼 그 빛이 눈부시게 빛났었다.”
빛을 잃어가고 있는 적성을 보며 연수는 투덜거렸다.
“그런 걸 믿으십니까?”
“맹신하는 건 아니다만 신경은 쓰이고 있지.”
“적성의 빛이 약해지니 많이 신경 쓰이세요?”
“글쎄. 그럴지도. 아마도 이번 대회가 끝나면 오래지 않아 마교의 침공이 있을 것이고 정사 대전보다 큰 전쟁이 일어날 거야. 만약 내가 자리를 지키지 못하게 된다면 비영이 내 자리를 물려받게 될 것이다. 혹여 내 자리가 탐이 난다면 지금 말해라. 너희 두 놈은 분명 거절했었지만 사람 마음은 모르는 것이니.”
-관심 없습니다.
동시에 대답하는 연수와 강진후.
“그렇다면 비영이 내 자리를 물려받은 후에 저놈을 잘 좀 도와다오.”
“진짜 왜 이러십니까? 답지 않게.”
“그러게. 정말 평소 같지 않은데? 성주도 나이 먹으니 약해지나 보오.”
강진후의 제법 도발적인 언사에 성주는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내 나이도 적지 않구나. 정말 나이를 먹어서 약해지는지도 모르지. 자꾸 걱정만 많아지고, 큰일을 앞두고 불안하고 불길한 걸 보니···.”
평소와 다르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성주가 끝까지 약한 모습을 보이자 연수도 강진후도 더는 성주를 놀릴 수가 없었다.
“별일이야 있겠습니까? 정파와 연대해서 경계하면 아무리 일월신교라도 쉽게 중원으로 치고 들어오지 못할 거에요.”
“글쎄. 마교 놈들이야 워낙에 예측불허 한 놈들이다 보니.”
뭐라 대꾸할 말이 없는 세 무인이었다.
성주는 잠시 적성을 더 올려다보고는 입을 열었다.
“어쨌든, 이 말이 하고 싶었을 뿐이다. 비영과 사황성을 부탁한다고.”
미간을 구기며 성주를 노려보았다.
중요한 대사를 앞두고 저리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불길하게 다가왔다.
오직 비영만이 무릎을 꿇고 성주를 향해 고개를 조아릴 뿐이었다.
“크크크 성주 당신도, 늙나 보군.”
강진후의 말에 성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보구나. 특히 네놈 걱정이 많아. 한량 끼가 심한 건 알고 있었지만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아서. 넌 네가 어떤 기대를 받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어.”
“흥! 그딴 제멋대로인 기대 따위 받고 싶은 마음 없었소.”
연수는 꼬박꼬박 성주에게 막말을 해대는 사패일성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성내에서 자신보다 더 성주에게 막 나가는 자가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흡성신공이라는 무공은 사파인에게는 꿈같은 이름이야. 긴긴 강호의 역사상 사파인들이 정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살았던 단 한 세대. 그 꿈이 사패일성이라는 별호에 담겨 있음을 잊지 말아라.”
“쳇!”
씩 웃은 성주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는 신형을 감췄다.
“할 말은 다 했으니. 정말 나도 늙었나 보군.”
사라진 성주가 서 있던 허공을 잠시 응시하던 세 무인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누구 하나 표정이 좋은 무인은 없었다.
무거운 침묵을 먼저 깬 것은 비영이었다.
“어떻게들 생각합니까?”
“글쎄, 저 양반의 저런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아서.”
연수 또한 강진후의 말에 동의하고 나섰다.
“그러게요. 설마 저 괴물 같은 양반 입에서 누군가를 잘 부탁한다느니 자신이 없어지면 어쩌고 같은 소리를 들을 줄은···.”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비영의 확신 어린 말에 연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만 해요. 무림 네 축 중 한 축이 무너지면 사파는 말 그대로 암흑기를 맞을 테니까.”
연수의 말에 장내에는 다시 한번 침묵이 찾아 왔다.
무거운 침묵 속에서 강진후가 툴툴거렸다.
“그 양반 거 쓸데없는 소리는 해가지고···.”
그렇게 그 날이 지나고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는 사황성의 대군.
성주는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와 같은 무심한 표정으로 열두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의 위에 화려한 의자 위에 앉아있었다.
시간이 지나며 미고산이 가까워져 올수록 성주와의 그날 밤 이야기가 떠오르는 연수.
“느낌이 좋지 않아.”
“예? 오라버니 무슨 일이세요?”
혼잣말에 가까이 있던 도화가 말을 받았다.
“아니야. 그냥 뭔가 기분이 좋지 않아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연수를 살피는 도화. 그런 도화에게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인 연수는 전성을 보냈다.
-도평.
-예.
갑자기 근처에 있는 자신에게 육성이 아닌 전성으로 말을 걸어오자 전음으로 답하는 도평.
-혹시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거든, 일행을 지키며 비영에게 붙어라.
-그 무슨 말씀이신지···.
-혹여 내가 없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제일 첫 번째로는 도화와 일행의 안전이 먼저다. 그다음 적영대를 끌고 비영에게···. 귀형가주에게 힘을 실어주라고.
-무슨 일이···. 생기는 겁니까?
-그냥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자는 거야. 혹시 모를.
-알겠습니다.
-내가 없다면 네가 적영대장이다.
-충!
썰렁한 늦가을 바람을 맞으며 도평에게 혹시 모를 뒤를 부탁하는 연수의 마음은 썩 좋지 못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미고산에 도착한 사황성의 대군이었다.
미고산 꼭대기 바로 밑 봉우리는 참으로 넓은 공터가 존재하여 만 명이 훌쩍 넘는 대 인원을 수용하고도 군데군데 빈 공터가 남을 정도였다.
미고산에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중소정파와, 그간 삶의 터전을 잃고 정파에 밀려 암약하고 있던 살아남은 중소 사파의 연합이 찾아 왔다.
이천이 훌쩍 넘는 그들을 제일 앞에서 이끌고 있던 사내는 성주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다짜고짜 대 인원을 이끌고 와 무릎을 꿇는 사내의 모습에 정파 인들을 비롯한 무인들은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청화패검 수일지 성주님을 뵙니다.”
성주는 잠시 그를 내려다보더니 마차에서 뛰어 내려오며 그를 일으켜 세웠다.
“오랜만이군. 얼마 전에 보낸 전갈은 잘 받았어. 그런데···. 겨우 이것뿐인 건가? 살아남은 동도들은···.”
뒷말을 흐리는 성주의 표정이 무거웠다.
“더 많은 동도가 살아남았기를 바라마지않고 있습니다. 다만 제가 규합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이들이 전부입니다.”
한숨을 내쉰 성주는 잠시 이천의 사파 인들을 둘러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성의 실책으로 인해 수많은 동도가 죽었구나.”
“성이 버텨주었기에 저희 또한 버틸 수 있었습니다.”
“하아, 이 혈채를 어떻게···.”
뒷말을 흐리는 성주는 무거운 눈빛으로 저 멀리 높은 단상 가마 위 무료하게 앉아있는 무림맹주를 보았다.
서로가 좁쌀만 하게 보일 거리였지만 입신경의 고수들에게는 서로의 눈썹까지 자세히 보일만큼의 거리이기도 했다.
성주의 눈빛을 읽었는지 맹주는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성주는 잠시 그런 맹주를 노려보고는 수일지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수고 많았네. 그간 어디서 암약하고 있던 건가?”
“북쪽의 거처를 잃은 동도들을 규합하여 녕하의 사막까지 건너가 몸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그랬던가. 그 척박한 곳까지···.”
“인원이 인원인지라···.”
“그렇지. 이리 와 주어 큰 힘 되었네. 불가피하게 위에 앉은 자로서 자네들의 원한을 잠시 접어두라 명하는 나를 용서하게.”
“마교가 움직인 이상 저희의 은원은 사사로운 것이지요.”
“미안하네.”
성주의 입에서 기어코 미안하다는 말이 나오자 수일지는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천부당만부당하신······.”
그런 수일지를 일으켜 세운 성주는 그를 꽉 안아주었다.
성이 신경 쓰지 못했던 중원의 사파인들을 규합하고 그들의 희생을 최소화시킨 정사 대전에서 보이지 않은 활약을 했던 영웅을 성주는 소홀히 대접하고 싶지 않았다.
꼭 안아주었던 그를 이끌고 앞으로 나선 성주의 내력이 웅후한 내력이 담긴 말이 미고산을 울리며 퍼져나갔다.
“여기는 이 자는! 전 중원의 핍박받은 동도들을 규합하고 지켜낸 영웅 청화패검 수일지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
어마어마한 함성과 함께 수일지의 몸이 뒤로 밀릴 것 같은 기백이 전해져 나왔다.
“성과 내가 하지 못한 일을 해 주고 동도들의 목숨을 구한 이 영웅의 이름을 우린! 잊어서는 안 된다!”
-청화패검! 청화패검! 청화패성! 청화패성! 청화패성!
어느새 외치던 청화패검이라는 별호가 청화패성으로 바뀌어 버렸다.
현 사파에 모든 이들이 입을 모아 성의 별호를 붙이기를 주저하지 않는 무인은 세 명뿐이었다.
사패일성 강진후. 살귀도성 비영 암수살성 고연수. 세 명의 사파에 떠오르는 별들을 부르는 별호에 한 명의 영웅이 더 추가되는 순간이었다. 청화패성 수일지.
“청화패성이라 좋은 별호야.”
성주의 말에 수일지는 앞으로 나서며 포권을 하여 환호에 화답하고는 입을 열었다.
“이리 반겨주셔서 몸 둘 바를 모르겠소! 북쪽 촌놈에 불과한 나를 환대해 주신 동도들의 이 뜨거운 마음, 잊지 않겠소.”
제법 강맹한 내력을 담아 소리를 퍼트리는 사내를 재미있다는 눈빛으로 보고 있는 강진후와 비영이었다.
공숙은 잠시 수일지를 보며 환호해 주고는 연수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콕 찍었다.
“암수살성이라니 멋지잖아!”
“언제 그런 별호가 붙은 것인지···.”
비영은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성의 무인들의 마음이 담긴 별호다. 암수일살 고연수를 사파의 영웅으로 인정한다는 존경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
“저는 그렇다 치고 도성이라···. 과연 저 양반의 후계자답네요.”
“큼큼! 일단 저 영웅을 좀 가까이서 보고 싶군.”
자신의 별호 이야기가 나오자 화제를 돌리며 몸을 피하는 비영이었다.
환호를 지르며 일견 축제를 벌이는 것 같은 모습에 사파인들의 앞에 모여있던 정파인들의 심기는 당연히 좋지 못했다.
자신들을 코앞에 두고 악적놈을 영웅으로 대접하는데 좋을 리가 없었다.
정파인들의 표정이 굳건 심기가 좋지 않건 그들을 앞에 둔 성주는 맹주에 대한 인사보다도 동도를 지켜낸 영웅의 치하가 먼저였다.
뜨거운 시선을 뒤통수로 느끼던 성주가 힐끗 뒤를 돌아보자 강렬한 맹주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가볍게 무시해 버리는 성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