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화
성주의 연설이 끝나고 긴 출전을 마친 지친 무인들은 해산하여 휴식을 취하기 위해 흩어졌다.
자연스럽게 연수 역시 주렴각으로 발길을 돌리려는데 비영이 다가왔다.
“성주님이 부르신다.”
“저를요? 몹시 피곤하고 내상이 심해져서···.”
“안 통해. 무조건 데려오라신다.”
‘하, 그 양반 참 귀찮게 하네.’
뭐라 더 변명해 볼까 비영의 눈치를 살펴보는데 연수와 비영의 주위로 다가오는 일곱 인영.
성주의 제자들이었다.
“오랜만이구나. 귀형가의 가주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암영주제에 벼락출세를 했군.”
일행 중 제일 나이가 많아 보이는 이제 불혹 정도로 되었을 사내는 비웃음을 잔뜩 머금고 비영을 비꼬고 있었다.
이 한마디만으로 비영과 성주의 제자들 관계를 얼추 눈치챈 연수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갑시다. 오라는데 안갈 수는 없지요.”
성주의 제자들을 모르는 척 지나쳐 가는 연수와 비영.
무시당한 무인들의 표정이 험상궂게 구겨지기 시작했다.
그중 제일 어려 보이는 이제 약관을 막 지났을까 싶은 무인의 목소리가 연수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겨우 도둑놈의 제자 주제에 뭐 잘났다고!”
천천히 몸을 돌리는 연수의 팔목을 비영이 붙잡았다.
조용히 고개를 가로젓는 비영.
연수는 씩 웃으며 비영의 손을 뿌리쳤다.
완전히 돌아선 연수를 목을 뻣뻣이 쳐들고 바라보는 일곱 무인.
그런 무인 중 제일 어린놈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연수의 입이 열렸다.
“정사를 막론하고 남의 사문은 함부로 모욕하는 게 아니야. 이번에는 성주님의 체면 때문에 넘어가는 거니까 앞으로는 주둥이 조심해.”
나름 상냥하게 조언을 한 연수는 다시 몸을 돌려 비영과 걸음을 옮겼다.
다시 몇 걸음을 옮기기도 전에 이번에는 첫 번째 제자의 목소리가 연수의 다리를 붙잡았다.
“적영대장이라는 허울뿐인 직위를 믿고 오만방자하기는! 패천화의 눈이 멀어도 한참 멀었구나. 내진즉 그 년을 취해···.”
이 세상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살기가 연수의 몸에서 폭사 되어 나왔다. 비영마저도 뒤로 물러서며 연수와 거리를 벌릴 정도의 지독한 살기였다.
연수의 몸이 천천히 돌아서는데 무인들은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하고 천천히 돌아서는 암수일살이 제발 그냥 가던 길을 가줬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다.
그나마 첫 번째 제자만이 영혼을 죄오는 살기에 저항하며 연수를 노려보았다.
완전히 돌아선 연수의 눈을 마주친 첫 번째 제자의 그나마 저항하려던 전의가 꺾여 버렸다.
시커먼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의 속에 불타오르듯 일렁이는 붉은 빛.
그 빛과 마주하는 순간 마치 심령이 제압되는 듯한 착각이 들며 연수와 대적하는 것을 모든 본능이 거부하는 것 같았다.
“성주님의 체면을 보아 그냥 넘어가는 건 여기까지야. 너희 같은 반푼 이들도 제자랍시고 놔두는 성주님의 애환을 생각해서 봐 주는 거니까 혓바닥 조심히 놀려. 자신 있으면 한 번 더 도발해도 돼. 그때는···.”
씩 웃는 연수의 얼굴을 마주한 일곱 명의 무인들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중 나이가 제일 어린 무인은 기어코 거품을 물며 쓰러져버렸다.
동시에 눈 녹듯 사라져버리는 살기.
연수와 비영이 사라지자 영혼을 사로잡던 본능적인 공포감은 사라지고 수치심이 물밀듯 몰려오는 무인들이었다.
“이 치욕은! 꼭 갚아주마!”
첫 번째 제자의 이를 갈며 뱉는 목소리를 중심으로 암수일살을 성토하는 무인들.
“굳이 저런 놈들을 가만 놔두는 이유가 뭐예요?”
비영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너도 알다시피 나는 성주님의 그림자이자 칼로 키워졌다. 성에서는 나 같은 성주님의 그림자들을 암영이라 부르지. 그중에서도 나는 성주님의 비전을 모두 전수 받은 유일무이한 암영이야. 비록 정식은 아니더라도 성주님은 내게 사부나 다름이 없다.”
“그래서 저 반푼이들에게 사제의 정이라도 느낀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비영.
“나도 사람인데 그럴 리가. 다만 따지고 보면 사형제나 마찬가지이니까. 나 같은 암영이 공식적인 자리에 임명된 적은 사황성이 존재하고 나서 단 한 번도 없었으니. 저들의 경계심 또한 모르는 바는 아니야.”
“암영이니 정식 제자니 다 엿 먹으라고 하쇼. 무인은 무로 자신을 증명하면 그만이지. 우리가 무슨 궁인이라고 핏줄이니 적자니 따지고 있습니까?”
“그래도 그들은 성주님의 제자다.”
“제자고 나발이고 한 번 더 내 사문과 지인을 모욕하면 모가지를 딸 거에요.”
잠시 연수를 바라보던 비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간 보아왔던 암수일살의 행동을 보자면 그러고도 남을 것이다.
비영을 따라 대전으로 들어서자 대전을 채우고 있는 열두 가주와 성주 망노를 비롯한 저번엔 보지 못한 몇몇 인물들이 연수의 시야에 들어왔다.
성주는 비영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놈들은?”
“그, 그게···.”
말을 잇지 못하고 연수를 슬쩍 바라보는 비영.
성주의 전성이 연수의 머릿속에 울렸다.
-내 제자들 때려잡았냐?
-성주님 얼굴 봐서 두 번 참았습니다. 주신 영약이 아니었으면 가만두지는 않았을 거예요.
한숨을 내쉰 성주는 입을 열었다.
“시작하지.”
명이 떨어지자 앞으로 나서서 보고를 시작하는 진벽가주.
이번 출전에서 부상 당한 자들과 사망자들에 대한 보고와 현 전쟁의 정세에 대한 객관적인 판단을 늘어놓았다.
열한 명의 가주 들은 진벽가주의 이야기에 시시각각 표정이 변하며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강한 불신을 드러내기도 했다.
진벽가주의 보고가 끝이 나자 가주 들의 발언이 시작됐다.
“성의 전력이 이토록 건재한데 적을 너무 과대평가 하는 게 아니요?”
“중원에 퍼져있는 사파인들의 힘을 모으지 못한 건 엄연한 사실. 그 여파는 결코 작지 않을 거요.”
“성주님과 성이 건재한 이상 그리 쉽게 밀리진 않소! 사황성의 가신이 성의 전력을 믿지 못해 어찌하잔 거요?”
“과신하여 안일하게 대처했다가 낭패를 보는 것보단 낫지.”
“뭐라?!”
“뭐가?”
기어코 목소리가 커지며 흥분한 가주들의 설전이 계속되자 성주의 입이 열렸다.
“그만. 거기까지만 해. 우리가 열세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야. 그건 성의 충성심과 전혀 별개인 이야기니까 이상하게 몰고 갈 필요 없어.”
성주의 결론에 성의 열세론을 펼치던 가주 몇몇이 목에 힘을 주며 고개를 빳빳이 세웠다.
잠시 숨을 고르던 진벽가주는 새로운 주제를 꺼내 들었다.
“무림맹에서 나온 사자를 어떻게 해야 할지 이야기를 해 보지요.”
“그 이야기는 저도 들었습니다만, 그냥 돌려보내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지금은 전쟁 중입니다. 다른 이들도 아니고 성주님을 찾아왔다는데 성주님이 일개 사자와 독대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맹주가 직접 찾아온 것도 아닌데 이는 우리 사황성을 무시하는 무림맹의 모욕적인 처사 아니겠습니까?”
“그렇기는 하지만 그의 이야기는 들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현 상황에서 적들의 꿍꿍이가 무엇인지 알아야 그에 맞는 대처가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들을 가치도 없는 이야기일 게 분명한데 굳이 만나줘야 할 필요가 있겠소?”
한동안 무림맹의 사자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지 논쟁하던 결과 성주와 몇몇 인물이 동참하여 사자를 만나는 것으로 결론이 모였다.
“그럼 마지막으로 적영대의 재편에 대하여 성주님의 말씀이 있겠습니다.”
진벽가주의 말에 장내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연수에게로 쏠렸다.
멍하니 있던 연수는 갑작스러운 집중에 의아한 표정으로 성주를 바라봤다.
그런 연수를 보며 씩 웃은 성주의 입이 열렸다.
“적영대장은 남궁진환의 목을 치며 이번 출전에서 가장 큰 공을 세웠다. 뿐만 아니라 그 직위에 모자람이 없는 고수지. 그런 적영대장의 수하라고는 단 넷뿐이니 이건 그의 직책과 조직에 옳은 방향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하여 이번 기회에···.”
“필요 없는데요.”
성주의 말을 끊고 들어가며 직설적으로 말하는 연수.
-공식적인 자리다.
-그런 자리에서 이러시면 곤란하죠.
-힘을 준다는데 왜?
-힘에는 책임이 따른다고 아주 유명한 사람이 그러던데요?
“큼큼! 적영대장. 그리 고사할 것 없어.”
-내 체면 상한다.
말과 전성을 동시에 펼치는 신기에 연수의 이마에 두꺼운 핏줄이 잡혔다.
“정 그렇다면 소수 정예로 고수들만 골라···.”
“그렇게 해 주고 싶지만, 고수를 골라낼 만큼 여유가 있지 않아. 각 가문에서 적당히 세 명씩 차출하여 보내도록.”
-이러실겁니까?
-응.
-후회하실 거에요.
연수가 뭐라하든지 싱글벙글한 성주.
성주의 명에 그나마 안도의 한숨을 내쉰 가주 들은 전음을 주고받으며 자신들끼리 상의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만약 고수들을 차출하라 했다면 크게 반발했을 테지만 머릿수만 채우면 그만이라 하자 큰 부담이 없는 그들이었다.
그렇게 대전에서 회의가 끝나가고 있는데 성주의 일곱 제자가 대전으로 들어섰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성주의 곱지 못한 시선에 고개를 숙여 보이며 성주가 앉아 있는 성화전의 옆으로 서는 제자들.
망노가 그런 성주의 제자들에게 슬쩍 다가서며 전음을 날렸다.
연수는 뭐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소리 없이 입을 벙긋거리는 그들을 잠시 지켜보다가 성주의 눈치를 살폈다.
-무슨 생각이세요?
-뭐가?
-저한테 쓸데없는 놈들 붙여놓고 어쩌라고요?
-잘 키워보라고.
-저 크기도 바쁜데요?
-그 정도면 훌륭히 다 컸다.
-아직 멀었는데요?
-아니야. 그쯤이면 됐지.
-진짜 후회하실 거에요.
-크크크 두고 보면 알겠지.
대충 정리가 끝난 듯 보이자 성주의 입이 열렸다.
“적영대장, 귀형가주. 진벽가주. 이상 셋이 내일 나와 무림맹의 사자와 만난다.”
말을 마치고는 벌떡 일어서서는 사라지는 성주.
“하아.”
한숨을 내쉬는 연수의 옆으로 다가오는 비영과 진벽가주.
“왜 한숨이야?”
“몰라서 묻습니까?”
날 선 연수의 반응에 비영은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쓸만한 놈들로 추려 보낼게.”
“퍽이나 그러겠수.”
진벽가주는 연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세가 커지는 것이 싫으십니까?”
“예. 책임져야 할 놈들이 많아져 봤자 하나도 기쁘지 않습니다.”
쓴웃음을 지으며 비영과 같은 말밖에는 할 말이 없는 진벽가주였다.
“똘똘한 아이들을 보내겠습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몸을 돌려 대전을 나서려는데 망노를 뒤에 둔 성주의 제자가 다가왔다.
발걸음을 멈추지 않은 연수는 시큰둥하게 말했다.
“나 지금 기분 안 좋아.”
흠칫하며 뒤를 바라보던 제자는 고개를 끄덕이는 망노를 보며 힘을 얻었는지 입을 열었다.
“사문에서 예절 교육도 제대로 못 받은 모양이구나? 연장자가 할 말이 있어 다가오면 고개를 숙이고 경청할 것이지. 네놈 사부가 이리 가르치더냐?”
“하아.”
한숨을 내쉰 연수는 뒤로 돌아 불혹을 넘기도록 절정의 초입에서 머무는 성주의 첫 번째 제자를 바라봤다.
용케 절정에 오르기는 했지만, 신체훈련을 제대로 하지 않아 미묘하게 굳어 보이는 육체와 무딘 기세를 뿜어내는 반푼이는 뒤에 있는 망노를 믿고 자신을 도발하는 거로밖엔 보이지 않았다.
“옛날에 말이야. 어떤 현명한 양반이 이런 말을 했어. 무식하면 몸이 고생한다고.”
한발 한발 다가서는 연수를 보며 성주의 첫째 제자이자 공식적인 사황성의 후계자 막여욱은 뒤를 흘끔 돌아보고는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시비만 걸어 놓으면 뒤처리를 책임지겠다는 망노의 기색이 심상치가 않았다.
그제야 자신을 향해 한발 한발 다가오는 연수의 시선이 자신의 뒤에 망노에게 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막여욱이었다.
막여욱에게 다가서는 연수의 기세가 심상치 않자 말리려는 진벽가주의 팔을 붙잡는 비영이었다.
진벽가주가 돌아보자 말없이 고개를 젓는 비영.